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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 - 읽고만 있어도 좋은
정숙영 지음 / 부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외국 여행기’는 곧 해외여행을 갈 사람이 사전 지식을 얻기 위해, 이미 다녀온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다시 한 번 곱씹고자, 못가본 사람은 대리만족을 위해 읽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외국 음식 알레르기’라는 치명적 질병 탓에 과거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외국에 갈 생각이 없는데다 마음 속에 외국에 대한 동경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 외국 여행의 경험담을 담은 책이 내 호기심을 자극할 리가 만무했다. 가끔 술을 마시는 지인한테서 선물받은 <노플랜 사차원 유럽여행>이 일년이 넘도록 책상 위에 쳐박힌 채 먼지를 맞아야 했던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제목은 또 얼마나 유치한가. 난 실수투성이의 저자가 웃기지도 않는 실수담을 잔뜩 늘어놓은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처음 그 자리에서 계속 나만을 바라보는 그 책을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을 무렵 불행하게도 난 이 책에 중독되어 버렸고, 절반쯤 읽고 난 뒤에는 추가로 두권을 주문해 내가 어여삐 여기는 조교선생과 요즘 내가 집적대는 미녀분한테 선물을 했다. 그 둘은 나보다 더 빨리 책을 다 읽고는 “정말 재미있는 책을 선물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이 책을 결국 다 읽고 만 내가 장담하건데 그네들의 말은 선물에 대한 의례적인 답례는 결코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의 뛰어난 유머인데, 4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을 4일도 안되서 다 읽을 수 있었던 건 다 그 덕분이다. 게다가 여행을 하는 느낌을 어찌나 생생하게 전해주는지 나처럼 외국에 대한 로망이 전혀 없는 사람마저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했으니 저자에게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나를 웃게 만든 대목을 몇 군데만 살펴본다.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그의 그것에는 시커먼 손때가 더덕더덕 묻어 있었다...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그것을 만지고 싶은 마음만은 정직하게 하나라는 것을. 그래, 그랬던 거다. 위 아 더 월드(40-41P)]
[어느 정원에선가 본 남자 나체 브론즈 조각. 원래는 검은색인데 거기만 노리끼리하게 닳아 있었다. ‘그것이 있으면 만진다’는 세계 공통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50P)]
[..바닥에 누워계신 소는 분명 수컷이었을 거라고 짐작되지만...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려댔는지 그 부분이 원추형으로 움푹 패어 있었다. 소야, 미안해. 성전환 수술은 결코 네 뜻이 아니었을 텐데 (62P)]
이런 식의 유머만 좋아한다고, 넌 수준이 어째 그 모양이냐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런 유머를 구사할 줄 안다면 그보다 더 쉬운 초식은 누워서 껌 뱉기, 책을 덮는 순간까지 내내 즐거울 수 있음을 감히 장담해 본다. 세번째로 장담하건대, 이 책의 독자층엔 나처럼 외국갈 생각이 없는 사람도 포함되어야 한다. 오랜 기간 가졌던, 외국 안간다는 신념이 와르르 무너질 계기를 제공해 주니까. 혹시 외국에서 날 만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시라. 난 이제 옛날의 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