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들이 뭔가를 착각한 모양입니다. 저에 대해서 잘 몰랐나봐요. 제가 남는 게 시간밖에 없고, 집요하다는 것을요.
1학년 세미나라는 과목은 외부강사가 두 번 강의를 하는 걸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평가를 해야 하겠기에 애들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학기 안에 책이나 영화 하나를 보고 감상문을 써라. 그걸로 평가를 대신하겠다”
이 말도 덧붙였습니다.
“인터넷 같은 데서 베끼지 마세요. 제가 인터넷 검색 할 거예요”
사실 진짜로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봄날은 간다>에 대한 다음 영화평을 보니 검색을 하고 싶었어요. A4 1장만 내도 된다고 했는데 그 학생은 무려 5장이나 되는 묵직한 레포트를 제출했더군요.
[허진호의 영화 봄날은 간다는 사랑에 관한 담론, 그 중에서도 사랑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담론이다...허진호의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사랑이 시간으로, 시간이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에쎈스가 추출될 수 있었던 것, 반 박자의 차이가 사랑의 날카로움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이거, 무슨 영화 전문가 같지 않나요? 구글에서 검색을 했습니다.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오더군요.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분 당선작인 이재현님의 작품이더이다. 겁도 없이 이런 걸 베끼다니, 절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 다음부터 전 구글과 네이버를 수시로 검색하면서 리포트 채점을 했습니다. 걸리는 학생이 의외로 많더군요. 한 학생은 <슈렉>을 선택했어요. “모든 등장인물이 동화나라의 규격화된 틀을 깨지 못해 몸이 근질거린다는 투다”라는 문장에서 ‘규격화된 틀’을 검색했더니 대번에 필름 2.0의 리뷰가 나옵니다. 후반부는 깜찍하게도 시네서울의 김철휘 기자의 리뷰를 그대로 베껴왔더이다. 어떤가요. 이게 앞의 학생에 비해 좀 더 성의가 있다고 인정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더 나쁜 건 아닐까요?
<아이 앰 샘>의 리뷰는 “외출공포증”과 “아빠의 지능을 추월해 버리는” 이걸 넣고 검색한 끝에 2학년 2반 김연지가 쓴 리포트임이 드러났습니다. 고2 아니면 중2 것을 대학생이 베낀 거죠. 단 한글자도 안틀린 그런 리포트를 아직 때묻지 않았을 대학 1학년생이 버젓이 제출한 겁니다.
어떤 학생은 영화 사이트에 난 시놉시스를 그대로 갖다 붙였어요. 또다른 학생도 마찬가지인데요, 이들은 그래도 자기 의견을 집어넣었으니 D+는 줄 예정이어요. 그럼 지금까지 밝혀진 세 학생은? 당연히 F죠. 1학년 세미나 연자로 온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심이다. 실력 차이로 환자가 죽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양심이 나쁜 의사는 환자에게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런 강의를 듣고 겨우 한다는 게 리포트 베끼기일까요. 최신 영화를 안보고 왜 죄다 옛날 영화만 보나 했더니, 최신 건 적발되기가 쉬워서 그런 건가봐요. 인터넷을 오려붙여 리포트를 낼 수 있는 편안한 시대지만, 검색 역시 그만큼 쉽다는 걸 망각한 처사지요.
교학과에 갔습니다. 의대는 학년제라 한 과목에서 F가 나오면 2학년 진급이 안되거든요. 그래도 혹시 예과 2학년 때 1학년 세미나를 들을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안된답니다. 그때부터 갈등이 생겼어요. 그것 때문에 애들한테 1년을 더 다니게 한다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애들이 막무가내로 빌텐데, 학부모까지 동원할텐데 견뎌낼 자신도 없고요. 참고로 전 딱 한번 F를 준 적이 있습니다. 기생충학 기말고사를 안본 학생이 전화를 해서 “왜 안봤냐”고 물으니 “과음했어요”라고 하기에, 두말없이 F를 줬었지요. 의대에서 F 주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은데, 전 이미 전력이 있다는 거예요. 자, 어떻게 할까요. 1년간 1천만원의 등록금과 1년의 허송세월을 감당하게 하는 게 날까요, 아니면 불러서 야단을 치고, 리포트를 다시 내게 한 뒤 학점을 줄까요. 마음이 심난해서 결정을 못하겠네요. 지금 남아있는 리포트 중에는 베낀 애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