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의 도시, 난징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1
신경란 지음 / 보고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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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오랫동안 하나였던 것 같지만 홍콩과 대만의 분리문제에서 드러내는 단일화 콤플렉스처럼 수차례 분열되었고, 열국이었고, 다른 민족에 침략 지배당한 역사가 제법 길다. 그래서 중국엔 무려 200개 도시가, 지금은 중국사에 편입된 여러 나라의 도읍지였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서울, 경주, 평양처럼 주요 국가의 도읍지였던 곳은 지금의 서안, 뤄양, 북경, 남경 4개의 도시를 꼽는다. 예전부터 왜 북경은 북경이고 남경은 남경인지 궁금했는데(서안이나 뤄양의 북과 남이라 그런줄 알았다.) 주원장이 명을 세우며 남경을 응천이라 했지만 넷째 아들 영락제가 북경을 순천이라 명하면서 서로 어느 곳도 중심이 되지 못한채 북경과 남경이 되었다. 비슷한 사례로 송의 조광윤은 개봉을 수도로 하며 그곳을 중경이라 하고 싶었겠지만 뤄양과 서안이 중심이기에 개봉을 동경성이라 명했고, 일본의 에도막부도 에도인 동경을 일본 천황이 있는 교토를 무시할수 없기에 에도가 그 동쪽에 있어 동경이라 칭했다. 그래서 이곳은 오늘날도 도쿄다.

 이 책은 도시 아카이브 시리즈로 지난 번 읽은 베이징의 전편이다.(저자도 같다.) 거꾸로 간 셈인데 이 책 역시 전작처럼 남경이라 불리는 난징의 역사, 문화, 인물, 전쟁, 지리적 요소가 꽉 차 있다. 중국 역사상 강남인 이 곳 난징을 최초로 수도로 삼은 자는 삼국지의 유명인사 오나라의 손권이다. 그 전에 전국시대의 오와 월도 이곳을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최초로 도읍지로까지 삼은 것 손권이 최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전국을 순시하며 금릉이라 불리던 난징을 지나며 왕기가 있다는 소문에 난징의 산맥을 끊고 물길을 내는 등의 행위를 했고 이름도 말릉이라 바꾼다. 이후 버려진 곳이던 이곳을 손권이 위와 매우 인접했음에도 과감하게 도읍으로 정하고 이름도 건업으로 바꾼다. 그럴만했던게 난징은 양자강이 도시의 서쪽과 북쪽을 막아주고 남으로만 뚫려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도 많이 내리고 토양도 좋아 인구부양력도 충분했다.

 손권 이후 송, 제, 양, 진이 남경을 차례로 수도로 삼으며 이곳은 계속 발전한다. 남조왕조들이 위치상 어쩔 수 없기도 하였지만 한족문화권에서 변방인 이곳을 계속 수도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남쪽 지역의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강수량, 질좋은 토양으로 인한 높은 농업 생산력과 동남아 등으로 이어지는 해로를 통한 교역에서 나오는 경제력과 지역 자체의 풍부한 물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나라의 통일전쟁으로 남경이 파괴되며 쇠퇴기에 이른다. 송, 제, 양, 진의 남조 시절 남경엔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이 자주 왕래했다. 고구려 사신의 객관은 현인관, 백제 사신의 객관은 집아관이라 하는데 아무래도 고구려는 북조국가와 인접하니 국방상의 이유로 남조와의 협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는 남조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경쟁하는 백제도 남조를 온전히 고구려에 넘기긴 좀 그랬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문화 수입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남경과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당나라 시절로도 연결된다. 신라 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당에 유학과 외국인 국가고시인 빈공과에 합격한다. 이 수제는 남경으로 발령나 율수구와 고순구의 율수 현위가 된다. 최치원은 이곳에 무려 4년간 재직한 후 신라로 향하며 이후 그의 불행한 행보는 우리가 모두 아는 바이다. 

 이어 원나라때도 우리와의 인연이 이어진다. 이번엔 고려말 명장 최영이 주인공이다. 원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순제 때(기황후 남편이다.)는 승상이 톡토였다. 권력이 막강했던 톡토는 장사성이 농민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자 원 각지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힘이 모자랐는지 속국에도 군대를 요청한다. 당시 고려의 친원파 채하중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혼란한 고려의 상황은 고려치 않고 충분히 군대를 동원할 수 있음을 주장하여 고려는 없는 살림에 최영등의 장수와 수천의 군사를 머나먼 원으로 파견한다. 파병 중 북경 등지에서 군사가 크게 불어 군은 2만 3천의 대군이 되고 웬일인지 원의 진압군 80만의 선봉까지 하게 된다. 진압군은 장사성을 거의 물리치지만 기황후에 의해 톡토가 실각하고, 후임 지휘관의 무능까지 더해져 수차례 창에 찔리는 최영의 분전에도 패퇴하고 만다.

 명대에 이르러 주원장이 금릉을 남경이라 칭하고 수도로 삼는다. 그간 남경은 도성의 주축선이 양자강의 흐름에 맞추어 남서-동북방향으로 기울어져 지어졌는데 주원장은 이를 강의 흐름과 상관없이 남북방향으로 주축선을 수정한다. 거기에 남경을 요새화하는데 궁성, 황성, 도성, 외곽성의 4중구조로 성을 쌓았고, 20년 대공사에 규모도 크다보니 무려 3억 5천만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자금성도 축조한다. 남경의 자금성은 사실 북경 자금성의 원조격인데 훗날 영락제가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경 자금성의 설계를 그대로 본따 북경에 자금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영락제는 아버지보다 궁을 크게 짓기 좀 그랬는지 남경 자금성보다 좀 작게 북경에 자금성을 지었다.

 남경엔 그 유명한 정화의 조선소가 있었다. 남경은 바다와 무려 300km나 떨어져있지만 양자강이 바다로 이어지기에 사실상 항구 역할을 한다. 정화는 1405년에서 1432년까지 일곱차례 인도양을 향했으며 선단의 규모도 유럽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정화는 회족으로 주원장이 운남성을 정복한 후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거세해 환관으로 삼은 아이들 중의 하나다. 본래 이름은 무함마드의 이름을 음차해 마삼보였지만 이후 영락제의 눈에 들고 정초패에서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정씨성을 하사받아 정화가 되었다.

 이후 남경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들어서는 것은 청나라 말 아편전쟁으로 인한 난징조약 때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해 19세기 말 3차례 조약을 강요받는데 1차는 홍콩섬 2차는 구룡반도의 영국으로의 영구 할양 3차는 신계를 99년간 임대하는 것이었다. 사실 중국은 이름 그대로 천하의 중심국가로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머진 모두 동등한 대상이 아닌 속국이자 조공국이었다. 영토도 크고 천하의 중심은 중국은 물산도 풍부하여 교역의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못했다. 그런 중국에게 다른 나라와의 대등한 조약이나 무역은 전혀 없는 개념이었다. 특히, 지금과 다르게 당시 홍콩은 쓸모없는 무인도에 가까웠고, 개항이 요구된 상해 역시 요충지이긴 하나 황무지였다. 영국의 관세문제도 청 자체게 무역으로 인한 조세수입이 거의 의미가 없어 조약의 주요조건으로서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중에 절실하게 느끼게 되며 중국에서는 천하의 중심국가에서 만국공법의 세계 일부로 강제 편입된 이 사건을 중국의 근현대사의 시작으로 파악하다. 우리에게 강화도 조약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후 남경엔 태평천국군이 들어선다. 이들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데 수많은 전란과 혼란으로 청대에 백만에 달하던 남경의 인구는 이시기 15만까지 축소된다. 청은 태평천국군을 북경의 팔기군으로 제압하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수가 적은 만주족은 항상 수가 많은 한족 중심의 지방군을 반란의 위험으로 인해 그 사용을 기피하였는데 어쩔수 없이 태평천국군의 진압을 위해 이 지방군에까지 의존하는 상황에 이른다. 증국번 주도의 호남성 상군은 20여년간의 사투끝에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게 되고 이는 결국 청의 병권이 한족 중심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낳고 만다. 태평천국군은 무려 1-3만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그 지역이 칠레다. 이들은 초석탄광 계약자로 노예처럼 일하다 이후 초석전쟁에서 칠레군으로 참여해 승전한다. 그래서 현재 칠레 북부 이키케 지역엔 이들의 후예가 무려 10만이나 있다.

 청이 망하고 남경은 중화민국의 수도가 된다. 손문과의 약속과 달리 북양군 출신의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며 긴 투쟁이 시작되고, 이후 손문의 후계자인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과 만주국의 세운 일제의 침략군, 그리고 마오쩌둥의 공산군이 뒤섞이며 중국은 혼란의 20세기 초반을 보내게 된다. 망국 이후 임시정부를 세운 김구와 김원봉이 주로 활약한 곳이 바로 남경이다.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으로 있었고 그 시절 졸업생을 우대했는데 김원봉이 바로 그 학교 졸업생이었다. 또한 김구 역시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 공원 의거로 장개석에 인정받고 크게 지원받는다. 김원봉은 조선혁명간부 훈련반을 개교했는데 재밌게도 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가 이 학교 제 1기 졸업생이었다.

 1937년 일제는 남경을 침략하고 함락시킨다. 이는 천인공노할 난징대학살로 이어지는데 희생자는 적어도 3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중국군은 끝까지 싸우도 적절한 퇴각시기를 놓치는데 이로 인해 질서정연한 후퇴에 실패해 상당수의 패잔병이 도시 전역으로 숨어들게 된다. 일본군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시작한다. 상해, 약탈, 강간이 무자비하게 이뤄졌다. 이때 난징판 쉰들러 리스트가 있었는데 바로 욘 라베다. 나치당원인 그는 일제의 남경침략후 자국민 보호를 위한 각국의 소개명령에도 20여명과 남아 남경안전구역 국제위원회를 설립한다. 민간기구였음에도 이 기구는 힘이 있어 약 4만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에 25개 수용소를 만들고 약 30만을 보호한다. 라베는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독일에 귀국해 존 메기가 목숨걸고 촬영한 남경대학살 필름을 독일 각지에서 상영하고 라베일기도 출간한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이 함께 전쟁하던 시기라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져가다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에 의해 재조명된다. 일제는 난징대학살 외에도 1644부대라는 남경판 731부대를 만들어 무려 1천명의 중국인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다.

 이처럼 난징은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로 자리매김하면서도 현대사의 아픔을 갖는 중국의 도시지만 문화측면에서도 매력적인 도시다. 본래 강남은 쌀이 주식이고, 민물고기를 주로 먹었는데 북조의 인사들이 남조로 내려오고 교류가 이뤄지면서 오리고기와 잡곡을 이용한 요리도 시작되었다. 강남의 경제력을 바탕에 남조의 귀족문화가 합쳐져 여러 요리법과 조리도구가 경쟁적으로 발전하여 요리문화가 발전하였다. 여기에 해안으로부터 들어오는 요리에 원나라 때 회족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입맛이 합쳐지며 매우 다양한 요리문화를 갖게 되었다. 남경은 특히 딤섬이 유명한대 본래 딤섬은 배고플 때 요기하는 떡이나 부침개 정도를 의미했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문화가 들어오면서 딤섬은 차를 마실 때 곁들이는 간단한 요리로 변화하고 이게 영국에도 영향을 미쳐 차에 곁들이는 애프터눈 티 과자가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책엔 여기서 정리한 내용 이외에도 남경의 거의 모든 것이라할 만큼 자세한 내용은 잔뜩 실려있다. 난징을 한 번 가고픈 마음이 드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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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grr 2021-01-05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좋은 날이 와서 선생님의 난징 방문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2021-01-05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1-01-05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시 하나를 중심으로 역사를 풀어가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닷슈님 덕분에 좋은 책 하나를 또 얻어갑니다. ^^

닷슈 2021-01-05 08:59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이렇게 도시 하나를 두고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도시아카이브 시리즈1권입니다. 2권 나가사키, 3권 베이징 이렇게 나왔더군요. 저는 난징과 베이징을 읽었습니다. 작가분이 중국에서 오래 공부하셔서 그런지 중국의 도시에 대해서 정말 아는게 많으십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인데도 그 도시의 모든 것이 재밌고 밀도있게 담겨 있습니다.
 
오리진 - 지구는 어떻게 우리를 만들었는가
루이스 다트넬 지음,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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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생존을 위해 진화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항상 다양한 변이가 일어나는데 그 중 일부 변이가 갑작스레 바뀐 환경에 적합해 생존력이 높아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 변이를 가진 개체가 일제히 증가하여 종 자체내에서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기도 하며 때론 그 결과 싹 다 그런 형질을 가진 개체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변이 과정을 다윈은 진화라고 명명했다. 영국의 런던이 산업혁명으로 대기가 뿌옇게 되자 회색 나방이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어 개체수가 늘어났고, 최근 다시 공기가 맑아지자 이전의 흰나방이 다시 많아진 것은 이런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가끔 진화는 선후관계가 있는 것 같고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 같기도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전자는 대체 환경이 어떻게 놓일지 알수 없기에 어쩌면 로또식으로 다양한 형질을 만들어 놓아 제발 일부만이라도 건지길 바라는 것 같다. 물론 후성유전이란 안전장치가 하나 있긴 하다.

 이건 지구에 엄청나게 진화한 다양한 생물학적 승리를 가져왔지만 사실 매우 비효율적 방법이다. 그래서 유전자는 생존을 위한 외부적 신체변이 외에도 내적인 적응 장치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지능이다. 지능은 이미 신체적 변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급진적 환경변화나 다양한 환경변화에 개체가 대응하여 생존력을 높이게하는 장치라 말할 수 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다고 피하지방이 두꺼워지거나 털이많아질 충분한 시간이 없으니 그 자리를 벗어나거나 옷을 해입는 등의 해결책으로 생존을 도모하는게 바로 지능의 방식이다. 처음엔 생존에 적합한 몇 개의 설정된 본능만이 있었을 것 이다. 그리고 그것이 복잡한 형태의 후천적 결정을 하는 정신적 기제로 점차 발달했다. 당연히 지능을 고급화 하기 위해서는 큰 두뇌가 필요했고, 이로 인해 동물들의 뇌는 제법 커졌고, 적어도 인간에 도달해서는 외부적 신체진화는 큰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지능에 생존을 의존하게 되었다. 물론 그 지능을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머리난 아직 더 커질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혹시 알까? 가까운 근미래에 약인공지능이나 강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생물학적 두뇌가 다시 한 번 진화의 과정을 거칠지. 하여튼 책 오리진은 우리 동아프리카에 살던 작은 호미닌의 하나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했고, 어떻게 지금과 같이 높은 지능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다 우리 어머니 행성 지구의 짓이고 그 지구가 딸린 태양과 우주의 놀음이다. 그 거대한 설정환경부터 살펴보자.


1. 우주적 요소

 진화는 절대적으로 환경변화에 반응하는 생물의 적응장치 인만큼 환경이 어떠하느냐는 진화의 방향을 설정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게 어떻게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구가 처한 우주의 환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구는 우선 태양을 공전한다. 이심률이란게 있는데 지구가 태양을 도는 궤도가 완전한 원에서 타원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심률이 클수록 공전궤도가 타원이 되어 태양에서 멀어진다. 지금도 이심률이 큰 편인데 북반구의 여름엔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어져 있을 때다. 이심률의 주기는 대략 10만년이다.


 둘째, 약 4만 천년을 주기로 태양에 대한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가 22.5도에서 24.5도 사이에서 변화한다. 현재 23.5도 인데 이 기울기가 태양 빛의 입사각을 변화시키는 만큼 각도의 변화에 따라 계절의 강도가 세진다. 24도로 갈수록 여름 겨울이 강해질 것이고 22도로 갈수록 좀 밋밋할 것이다.


 셋째, 지구 자전축이 2만 6천년을 주기로 뒤뚱거리며 팽이처럼 원을 그리며 변한다. 이를 세차운동이라 한다. 세차에 따라 계절의 시기가 변한다. 현재 자전축이 각도는 유지하도라도 팽이처럼 돌아서 반대로 된다면 여름과 겨울이 오는 시기가 바뀔 것이다. 


이 세 가지 변화는 태양빛의 총량 자체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다만 특정 지역의 태양 빛 강도 즉 계절의 강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이것만으로 생물에게는 지대한 환경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2. 지구적 요소

 태양 빛 만이 환경 요소가 아니다. 지구는 지각으로 덮혀있는 만큼 땅의 변화도 중요한 환경 변화요소가 된다. 지구는 거대한 맨틀 위를 연약한 지각이 코팅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이 연약한 지각은 맨틀위를 떠다니며 그 힘에 의해 자주 깨어지고 찢어지며 부딪힌다. 우린 이런 거대한 지각 조각들을 판이라고 부른다. 지구의 판은 역사상 꾸준히 움직여았고, 그로 인해 한때는 지각덩어리가 모두 뭉쳤던 판게아를 또는 지금과 같은 5대양 6대주의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판의 이동은 그 지각이 속한 지역의 기후를 바꾸기도 하고, 바닷물의 흐름마져 변형하기에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진화를 초래한다. 우리 인간의 조상 호미닌이 있던 동아프라카의 환경이 급변한 것도 이 판의 운동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니 바로 물이다. 아무리 자전축이 변화하고, 이심률이 변하고, 판이 요동쳐도 물이 없다면 해류도 생기지 않고 기후란 것도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 아니 물이 없다면 생명자체가 있을 수 없다. 때문에 물은 당연히 중요한 요소다. 지구가 생겨났을 당시 지구는 몹시 뜨거웠으므로 지구자체의 가벼운 휘발성 물질들을 모두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도 적지만 매년 지구 바깥으로 소량의 기체가 탈출하고 있고, 역시 마찬가지로 우주공간에서 다른 행성이나 물질들의 기체가 지구 중력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물은 지구가 차갑게 식은 이후 지구에 충돌한 혜성이나 소행성에서 온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구 자체의 화산분출에 의해 뿜어져 나온 내부의 수증기도 소량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지구의 생명체가 온전히 지구의 것인지 정체성에 의문에 생기는 대목이지만 하여튼 물은 생겨났고 생명체를 만들고 그 생명체가 진화하는 환경을 구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3. 동아프리카 호미닌 진화의 시작.

 3천만년 전 북동아프리카 지하에서 뜨거운 맨틀 기둥이 솟아올랐다. 이 힘은 땅을 위로 밀어올려 무려 1km나 지각이 떠올랐는데 풍선처럼 갑자기 부풀어 오른 결과 지각 껍질이 얇아져 가운데가 갈라져 열곡이 형성되었다. 북쪽에서는 이 갈라진 열곡으로 물이 들어와 지금의 홍해와 아덴만이 형성되었고 아프리카 뿔 부분이 떨어져 나가 역시 지금의 아라비아 판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홍해와 걸프만과 만나 Y자 삼중교차점을 형성하고 있으며 지금도 벌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동아프리키 지구대는 지금도 열곡이 벌어지고 있는데 벌어진 양측면이 밀려 올라가 경사면이 생기고 그 사이 블록은 아래로 가라앉아 골짜기 바닥을 형성한다. 그 골짜기 자체도 떠오른 지형이라 해발800m의 높이에 달한다. 하여튼 골짜기 옆 산맥은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서 들어오는 해안 공기를 막아 응결시켜 해안에만 비를 뿌리게 하고 내륙을 건조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단순한 평지에 열대우림이던 아프리카 동쪽은 높은 산맥에 깊은 골짜기와 산악지형으로 복잡하게 변모했고 이에 따라 자연환경도 운무림에서 사바나, 사막 관목으로 매우 다양화한다. 책의 저자는 동아프리카의 이런 지형적 변화는 호미님의 신체적 진화를 그리고 잦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호미닌의 지능진화를 촉발했을 것으로 주장한다.   

 호미닌의 주요 신체적 진화중 하나인 이족 보행은 흔히, 동아프리카가 사바나로 변화하고 생겼을 것이라는게 통념이지만 저자는 이족 보행은 열대우림부터 존재했던 형질이고 사바나가 조성되면서 그 진화를 더욱 강화시켰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족 보행은 긴 풀의 사바나에서 풀너머를 볼수 있고 지구력을 높이고 이동방법을 다양하게 해 지형이 매우 다양해진 이 지역에서 다른 동물들은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지역으로의 이동을 가능케 한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족 보행은 태양빛에 노출되는 신체부위를 최소화시켰고, 남는 양손은 엄지의 방향이 바뀌어 물건을 쥐기 쉬운 형태로 변화한다. 동아프리카의 다양한 지형 변화는 연약한 호미닌이 다른 육싱동물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지형으로 대피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고, 초식동물을 사냥할때는 절벽아래로 몰거나 코너로 모는 형태로 사냥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호미닌은 호모에렉투스에 이르러 몸크기와 뇌용량이 극적으로 증가했는데 골격도 머리뼈 아래 부분에서 장거리 달리기에 적합한 구조가 되었구 투사체를 던지기에 적합한 어깨구조를 갖게 되어 사냥이 더욱 용히해졌다. 에렉투스에 이르러 지금처럼 발달이 느린 긴 유아기를 갖게 되었고, 사회적 행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수렵채집인이자 불을 다루기 시작한 최초의 호미닌이 된다. 에렉투스의 뇌가 커지게 된 이유로 불을 이용한 화식을 꼽는 책도 있을 정도다. 호모에렉투스는 80만년 전에 사라졌지만 무려 200만년간 존속한 성공적인 호미닌이었다. 이후 호모 하이델비르겐시스가 등장했는데 이종은 25만년전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 아시아에선 데니소바인으로 진화한다. 지금의 우리인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30-25만년전이고 역시 동아프리카에서 진화했다. 

 동아프리카의 지형적 변화는 자연히 기후의 변화도 가져왔고, 지형보다 훨씬 단기적으로 변화하는 기후는 호미닌의 지능 진화를 촉발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는 300만년전부터 골짜기 바닥에 여겨 저기 큰 분지가 생성되었다. 비가 많이 오면 이 곳은 커다란 호수를 형성하여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고, 가물면 말라버렸다. 이 호수는 호미닌에게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 호수의 바닥이 양산맥의 가운데에 있어 바닥 기온이 높아 증발이 활발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약간의 요동치는 기후의 변화에 호수 환경은 급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심률에 의해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가 일정치않고 세차운동에 의해 북반구에 햇빛이 더 강하게 들어올때 남반구인 동아프리카 지구대엔 더 많은 비가 왔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는 가물었다. 이 주기적 변동이 이 지역의 식물과 먹이에 큰 변화를 초래했을 것이며 여기에 대한 지능적 대응이 호미닌의 지능발달을 촉발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 큰 뇌와 더 높은 지능으로 말이다.

 실제로 최근의 극심한 기후변동 세 시기는 270-250만년전, 190-170만년전, 110만-90만년전이다. 이 세 시기는 새로운 호미닌이 출현하거나 기존 호미닌이 멸종한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특히, 190-170만년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했다. 호미닌 15종 중 12종이 이 변동시기에 출현했다. 즉, 기후 변화는 호미닌의 뇌의 변화, 즉 지능의 변화를 촉발한 것이다. 


4. 빙기와 농업의 시작

지구 온난화때문에 다소 아이러니하겠지만 지금은 빙기이며 살짝 따뜻한 간빙기의 시기다. 현재의 빙기가 시작된 것은 우선 히말라야 산맥이 융기하며 그 광물이 빗속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바라로 가고 바다생물이 껍질등의 형태로 그 이산화탄소를 탄산칼슘으로 저장해 전체적인 온실가스를 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극 대륙이 고립되고 호주와 남미가 북으로 이동해 남극대륙 주변에는 해자처럼 냉기를 가두는 남극해류가 형성되었다. 남극에 거대한 냉장고가 형성된 이유다. 마지막은 북미와 남미의 충돌로 태평양과 대서양이 차단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따뜻한 적도해류가 방향을 틀어 북미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인근의 기온을 따뜻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강설량을 증가시켜 빙하를 더욱 생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요소로 인해 지구는 빙기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빙기는 변덕이 심했다. 지구의 이심률과 북반구가 자전축 기울기가 심해지는 세차가 겹쳐 갑작스레 따뜻해졌다. 반대로 머어지고 자전축 기울기가 약해지는 밀란코비치 주기에 의해 빙기는 요동쳤다. 거기에 2만에서 1만 5천년전에는 북미에서 빙하가 후퇴하며 바다로 빠지지 못하고 내륙에 남아 흑해 크기의 아가시즈호를 형성한다. 세월이 흘러 계속 물이 흘러들어 아가시즈호는 대규모 홍수를 일으키며 바다로 물을 토해냈는데 이 거대한 민물의 합류로 열염순환이 중단되어 갑작스레 지구에 냉각기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이처럼 빙하기에 기후는 안정적이지 못하고 변덕이 심했다. 때문에 인류는 충분한 기술과 지능, 농업에 대한 가능성에도 좀처럼 농업일 시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약 1만1천년에서 5천년 사이에서 간빙기로 접어들며 기후가 안정화되자 사람들은 농경을 시작했다. 결국 지구의 역사로 보면 매우 짧지만 사람의 역사로보면 매우 긴 간빙기기간의 기후 안정성이 농업의 시작을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문명의 발달로 이어진다. 

 책에서 재밌는 부분은 농경이 발달한 초기 지역들의 위치다. 초기 농업을 기반으로 고대문명이 발달한 곳은 하나같이 판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는 판의 경계에는 충돌로 인해 높은 산맥이 생기고 그 반작용으로 그 무게에 짓눌린 침강하는 저지대 분지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저지대 분지는 산맥에서 내려오는 퇴적물이 쌓이게 되므로 농업에 매우 유리한 토양이 생성된다. 때문에 초기문명중 이집트와 중국문명을 제외한 나머지 문명이 신기조산대에 위치한다. 이는 사막지역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저지대 사막과 살기 힘든 높은 산고원 사이에 판의 충돌이 층상단층을 형성해 여기에서 지하수가 솟아 농업 및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검으로 층산단층과 신기조산대는 언제든 생업을 뒤엎을 화산 및 지진활동이 일어난다. 오늘날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5.초본식물과 동물의 가축화

농경은 야생식물과 동물의 순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농경은 식물중 오로지 속씨 식물인 초본식물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풀이 나무보다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풀은 식물종중 지극히 최근에 등장한 것이다. 초본식물은 약 5500만년전 생겨났다. 신생대 지구가 건조해지고 냉각됨에 따라 초본식물이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는데 2-1천만년전 초본식물이 생태계 곳곳에 퍼진 걸로 추정된다. 초본식물은 속씨식물로 난세포를 겉으로 노출하지 않고 원래 동그랗게 잎을 말린 것이었던 씨방으로 난세포를 보호하고 여기서 난세포가 씨로 발달한다. 씨방은 씨의 확산을 돕기 위해 이후 과육질로 발달하게 되고 인류는 초본 식물의 영양가 높은 씨를 노렸다. 농경할만큼 크고 영양분이 많은 씨를 가진 초본식물은 동남아시아와 지중해지역에 32종 동아시아 6종,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4종, 북미4종 중미4종 남미와 호주 각 2종으로 유라시아 지역에 많이 분포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농경은 유라시아에서 압도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인간이 가축화한 동물은 식물보다도 오히려 더 제한적이다. 약 5550만년전 세계 평균 기온이 갑자기 상승하며 폭발적으로 진화했는데 이시기 우제류, 기제류, 영장류등이 폭발적으로 진화했다. 가축을 위해서는 해당 동물이 영양분이 높은 식품을 제공하고 성격이 유순하며 사람에 대해 선천적 두려움이 적고, 사육장이라는 좁은 곳에서도 잘 번식하며, 무리지어 사는 선천적 습관이 필요하다. 이 조건은 매우 까다롭기에 실제 가축화에 성공한 동물은 유라시아 통틀어 단 13종뿐이다. 북미와 사하라 이남, 호주는 가축화에 실패했고 이로인한 문명의 뒤쳐짐은 훗날 해당지역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가축의 사육은 부산물 혁명을 갖고 왔는데 애초 먹기 위해 기르던 가축이 뜻하지 않은 긍정적 효과르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가축을 키우고 고기를 먹는대신 그 젖을 먹게 되자 얻는 총 열량이 4배나 증가하였다. 또한 양털 같은 털을 이용하게 되었고, 동물의 힘을 운송이나 경인, 농경, 전쟁에 사용하였고 이는 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먹지 못하는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고기와 젖으로 바꿔주는 동물은 인류의 생존력을 더욱 높여주었다. 

 재미난 것은 가축화에 실패한 북미지역이다. 인간이 가축화한 동물중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말과 낙타의 본래고장이 바로 북미이기 때문이다. 말과 낙타는 북미에서 진화했고 빙하기에 베링육교를 통해 유라시아로 진출한다. 하지만 정작 북미지역에서는 전멸했다. 말이 전쟁과 스텝지역에서의 교역과 문명의 전파에 한 역할, 그리고 낙타가 건조지역에서 교역을 이은 역할을 생각한다면 이는 역사의 큰 아이러니다.


6. 지구의 재미난 지역들

판의 운동에 의한 다양한 세계 지형의 형성은 그 지역에 사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일종의 지리적 환원론이라고나 할까. 

 우선 티베트다. 중국은 국공내전후 빠르게 이 지역을 점령했다. 얼핏 넓기만 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이 땅의 가치는 매우 높다. 우선 군사적 가치다. 지역이 높다보니 이 지역을 점령하면 인도나 중국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상대국에 관찰당하기 싫어하는 중국으로선 점령해야만 하는 지역이다. 다음은 급수탑으로서의 역할이다. 티베트는 양극을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얼음이 많은 곳이다. 이 지역에서 출원하는 강만 10개에 달하고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도 여기서 발원한다. 매우 중요할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미션임파서블 시리즈에서 빌런이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티베트에서 핵탄두를 터뜨려 식수를 방사능에 오염시키려 한것도 이런 점을 파악해서였다.

 네덜란드도 재밌다. 네덜란드는 빙하기 시대체 퇴적한 도거랜드에 위치한다. 이 도거랜드는 날이 따뜻해지며 침수되었는데 도거랜드와 연결한 네덜란드 지역은 그래서 저지대가 많다. 네덜란드는 저지대 개척을 위해 풍차를 많이 건설하였고, 많은 비용이 드는 이 사업을 위해 전체 비용을 작은 비용으로 쪼개 위험을 분산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이것은 훗날 항해시대에 적용되었다. 그들은 선물거래도 시작하였고, 중앙은행도 최초로 설립했는데 이는 산업혁명시대 필요한 금융제도의 근간이 된다. 

 지중해는 판의 활동이 매우 잦은 곳이다. 아프리카 판이 북으로 이동하며 유라시아 판밑으로 섭입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북쪽은 산이 많고 해안성이 복잡하고 선이 많아졌다. 반면 남은 해안선이 매우 단순해졌다. 이 지형적 차이는 큰 결과를 불러왔는데 북쪽은 자연히 섬이 많고 산이 많아 기착과 관찰이 편해 항해에 매우 유리했다. 때문에 교역이 많아졌고, 해상활동에 매우 유리했다. 반면 남은 이 모든 것이 없어 항해에 불리하고 교역도 적었다. 거기에 남쪽의 배후지는 사하라 사막으로 이렇다할 경제적 토대로 부족했다. 지중해 북쪽에 그리스 로마라는 거대한 문명이 발달하고 남쪽은 그 피지배리로 전락한 것도 이런 결과와 무관치 않다. 어쩌면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해하게 된 것은 지형적 환경차이 때문은 아닐런지.

 지중해에서도 그리스 지역은 매우 특별하다. 해안선에 작은 수로와 만이 많고 산이 많다. 언급한 것처름 이는 해상교역엔 매우 유리하지만 도시들이 물리적으로 분리된다. 충적평야도 적어 농경에도 불리해 늘 식량부족에 고민하고 교역에 힘써야 했다. 그리스 나라들은 이런 분리로 큰 제국을 형성하지 못하고 반면 민주주의가 생겨났다. 그리고 식량 확보를 위해 농토가 좋은 흑해연안과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한다.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농토가 상대적으로 넓은 내륙국가 스파르타가 승리한 것은 해외에 식량을 의존하는 아테네의 선단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협을 막은 결과였다. 

 미국 동남부는 전통적 공화당 강세지역이다.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지역에 민주당을 지지하는 띠가 있으니 이 띠는 무려 8600-6600백만년전 형성된 지역이다. 이 시기는 백악기로 당시 이 지역들은 침수지역이었다. 애팔래치아 산맥에서의 퇴적물이 오래 바다로 들어서 이 지역에 쌓였고 그결과 이 지역은 농경에 매우 적합한 토양을 갖게 되었다. 훗날 미국이 생기고 이 지역은 목화재배지역이 된다. 노동집약적 성격의 목화는 많은 흑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남북전쟁과 흑인 해방 이후에도 이 지역의 인구구성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즉, 이 지역의 흑인 인구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고 이들이 민주당의 지지층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지형이 만들어낸 정치적 결과물이다. 

 비슷한 사례가 영국에도 있다. 영국엔 산업혁명때 큰 역할을 한 석탄이 풍부하다. 지금은 석탄광이 모두 폐광되었고 이 지역의 노동자들은 좌파를 지지하게 되었다. 때문에 영국의 석탄층 퇴적 지역은 영국 노동당 지지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7. 석탄과 석유다.

책에 정리할게 더 많지만 여기까지다. 오늘날 문명을 탄생시킨 석탄과 석유를 마지막으로 살펴본다. 인류의 역사는 부침은 있었지만 결국 그 생산성을 광합성에 의존했다. 즉, 문명의 생산성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땅에서 식물이 생산한 식량과 연료(나무)를 생산하는 속도에 제약되었다. 때문에 석탄과 석유를 본격하는 산업혁명 이전 세계의 인구와 생산성의 거의 늘지 않았다.

 이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18세기 무렵 찾아내었는데 바로 태양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물론 이는 엄밀히 말하면 틀리다. 석탄과 석유도 결국 과거 태양에너지에 의존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과거 지구가 저장해놓은 태양에너지를 지금쓰는 셈이다.) 석탄 이전 인류는 연료를 나무에 의존했고 이는 저림작업에 달렸다. 저림작업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내고 다시 그 줄기가 새로 자라나는 겉씨식물의 특성에 의존하는 방법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 제약이 많은 방법이었다. 석탄의 사용과 더불어 증기기관도 같이 발명되었다. 증기기관으로 석탄을 더 많이 채굴할 수 있었고 석탄의 사용으로 더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 증기기관, 철, 석탄의 선순환 관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증기기관은 처음으로 인류를 인간과 동물의 근육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렇다면 이 석탄은 어떻게 탄생한 걸까?

 3억 6천만년에서 3억년전의 시기를 석탄기라 한다. 당시에 균류가 없어 나무가 썩지 않아 석탄이 되었다는 설이있지만 당시 균류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규모로 나무가 지하에 매장되어 이탄이 된 이유는 당시 판게아 때문이다. 판게아는 거대한 대귝으로 해류를 막아 열순환을 막았다. 거기에 당시 숲이 무성해져 이산화 탄소가 줄어들었고 지구는 냉각화되게 된다. 냉각기의 특성상 지구는 작은 변화에 기온이 요동쳤고, 해수면이 자주 변하해 많은 숲이 일거에 침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결과 대규모의 이탄층이 형성되어 지금의 석탄층이 된 것이다. 

 다음은 석유다. 1876년 독일에서 내연기관이 발명되며 석유소비가 크게 늘게 되었다. 석유는 석탄보다 장점이 많았는데 추출 및 정제에 드는 에너지가 매우 적었고, 그에 비해 얻는 에너지는 매우 컸다. 또한 석탄에 비해 운송 및 수송이 쉬웠다. 거기에 석유는 연료 이외에도 유기화학 분야의 원료가 되고, 의약품, 플라스틱, 살충제, 무엇보다 비료의 원료가 된다. 석유는 석탄기 이후 2억년이 지나 형성되었다. 석유는 해양플랑크톤에서 생성되었는데 플랑크톤은 죽으면 광물과 섞여 해저라 가라앉게 된다. 지금은 해수순환이 원활하여 해저에도 충분한 산소가 공급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해저에 쌓인 플랑크톤의 사체는 썩지 못하고 진흙과 섞여 계속 쌓여 검은 색으 셰일층을 형성했다. 이 암시이 지구 내부로 깊이 내려가면 열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죽은 해양생물의 복잡한 유기화합물이 석유의 구성성분인 긴 사슬의 탄화수소 화합물 분자로 변화한다. 당시 백악기는 따뜻한 기후와 해저 확장으로 해수면이 지금보다 300미터나 높았고 광범위한 지각활동에로 해저 퇴적물이 많아 플랑크톤이 대규모로 서식했다. 거기에 해저 열염순환을 판게아가 막고 따뜻한 기후로 바다 용존 산소량도 부족해져 해저에서의 사체분해가 없었다. 그래서 대량의 석유가 생겨날 수 있었떤 것이다. 결국 지금의 현대 문명을 만든 석탄이나 석유 모두 지구 환경에 의해 우연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지금 환경에서는 도무지 생겨날 수 없는 것들이다. 인간의 진화와 문명의 발달도 엄청난 지구적 환경변화와 지질학적 변화에 의존한 셈이다. 


이 책은 제목만큼 인간사의 다양한 기원을 매우 과학적이고 지질학적이고 환경적인 측면에서 설명해준다. 교역의 발달에 관한 부분도 제법 많이 다루었는데 이 역시 지금의 지구 대기와 해류순환에 철저히 의존한다. 읽은 것이 만큼 배울 것이 무척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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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2021년 새해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
/~~~~~\ 2021년
| 福마뉘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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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20-12-31 12:52   좋아요 1 | URL
스캇님도. 복많이 받으십시오
 
오래된 미래도시, 베이징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3
신경란 지음 / 보고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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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중국 수도 베이징을 역사상 처음 도읍으로 삼은 왕조는 고려를 침입한 금나라였다. 그들은 베이징의 이름을 중도라 했고 이후 베이징은 금을 멸한 원, 그리고 그 원을 멸한 명, 또 명을 멸한 청, 그 청을 멸한 지금의 중화민국까지 무려 천 년간 중국의 수도로 자리잡아 왔다. 이러면 마치 베이징이 오랫동안 중국의 중심지였던 것 같지만 사실 중국의 중심지 중원은 황하 중상류지역이다. 지금은 고도로 크게 발달하지 못한 뤄양이나 시안이 그곳이다.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에게 베이징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힘이 뻗치지 못하는 변경지역이었다. 베이징은 과거엔 연경이라 불렸는데 이 지역은 오래전엔 지금과는 해안선이 달라 북쪽으로 지역이 열려있어 유목민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연경에는 유목민인 산융문화유적이 지금도 다수 남아있다. 추후 농경민들의 힘이 이 지역까지 도달하며 산융은 밀려나는데 이들으 흉노문화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한족, 즉, 농경문화의 힘이 베이징을 본격 흡수한 것은 주나라 때의 일로 처음으로 베이징에 제후국을 설치한다. 연과 계나라다. 연경이란 이름도 연나라에서 비롯되 것이다. 계가 백여년이 지나 연에 흡수되고 연은 인구가 150만 정도에 달할 정도로 강성해진다. 하지만 진이 통일한 후 끝까지 정항하던 연과 조, 제나라의 수만 가구가 조선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조선과 가장 인접한 연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조선으로 넘어와 훗날 왕위까지 찬탈하는게 위만이다. 

 베이징은 수당대에 이르러서는 유주의 중심지역으로 수와 당군이 고구려를 침략할때 군사집결지로 활약하게 된다. 당 말기엔 베이징을 근거지로 큰 난리를 피운 안록산이 등장한다. 삼국지의 동탁과의 혼동때문인지 난 이전엔 안록산도 동탁처럼 서북면의 군웅으로 착각했었다. 하여튼 안록산의 난으로 큰 고생을 치룬여파인지 훗날 상당기간 연경지역은 배반자의 땅으로 낙인을 찍혀 조정으로부터 불이익을 받게 된다. 

 세월이 흘러 거란이 등장한다. 거란은 세력을 뻗쳐 발해를 멸하고 연경 지역까지 확장한다. 중국 역사에서는 한족의 입장에서 거란에게 송이 연운 16주를 할양한 것을 굴욕으로 여긴다. 연운 16주란 만리장성과 상건하를 따라 동서 600km 남북200km에 달하는 지역으로 한반도의 절반가까이 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베이징이 그런 것처럼 농경문화와 수렵문화의 접점이다. 농경에엔 북방 최후의 보루, 수렵민에겐 물산이 풍부한 남으로 진출하는 지역이다. 저자에 의하면 송의 연운 16주 할양은 사실 이미 2주를 빼앗긴 상태에서 14주를 넘긴 것이고 이미 14주 역시 송이 아닌 다른 세력에 빼앗긴 상태에서 그가 거란과 협력하에 거란의 힘을 통해 차지한 14주를 넘긴 것이기에 할양은 과도한 한족 중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거란은 송과 계속 대치하다 999년 거란의 남하에 송이 반격하여 무려 10년의 대치끝에 절연의 맹이란 강화를 맺고 100년의 평화기간을 맞이한다. 송은 평화를 대가로 거액의 물품을 매년 거란에 상납했고, 거란과의 무역을 통한 이문으로 바친 물품 이상의 혜택을 누리는 양자가 성공하는 거래였다. 평화 후 거란은 발해의 5경제도를 본따 베이징에 남경을 설치한다. 남경이 발전하는데는 여성인 소작의 힘이 컸다. 거란은 황제는 야율씨 그리고 황후는 소씨에서 배출하는 나라였는데 소작은 어려서 남경에서 자라 국제적 감각을 키우고 농경문화를 잘 이해하여 곡물생산량을 늘리고 과거제를 실시한다. 

 여진의 금이 등장하자 평화는 깨진다. 여진의 금은 125년 역사동안 115년을 송과 전쟁한다. 송은 처음에 숙적 거란을 멸하는데 금과 협조하기로 맹약한다. 대가는 오래전 잃은 베이징 지역인 연운 16주의 획득과 평화였고, 금이 얻는 것은 요의 나머지 영토와 매년 대량을 물품상납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지주의 토지겸병과 이에 따란 농민 반란으로 송은 군대 동원에 어려움을 겪는다. 간신히 협력하여 금과 송에 의해 요가 망한다. 금의 완안아골타는 연운 14주를 넘겨주지만 완안아골타의 뒤를 이은 금 태종이 송의 허약함을 목도하고 공격한다. 송은 형편없는 전쟁실력으로 황제 휘종과 그 아들 흠종이 금에 사로잡힌다. 수도 개봉 역시 함락되고 지금의 항주로 수도를 이전하며 새황제가 등장하는데 이름이 남송으로 바뀌는 계기다. 하여튼 연운 14주와 송의 북부를 차지한 금은 베이징을 중도라 개명하고 수도로 삼는다. 

 세월이 다시 지나 1234년 몽골에 의해 금도 멸망한다. 전쟁은 무려 20년간 지속되었는데 송은 원수같은 금을 멸망시키는데 역시 몽골에 협조한다. 하지만 몽골 역시 송의 허약함을 알고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을 차지하기 위해 송과의 45년 전쟁에 돌입한다. 이 전쟁은 처절했는데 최후까지 항전한 송나라 사람이 무려 20만이었고 최후의 황제는 자살한다. 중국전토를 차지한 몽골은 국호를 대원으로 고친다. 원은 중국 역경의 첫 괘이자 하늘을 상징한다. 몽골 민족 역시 텡그리 신앙으로 하늘의 뜻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원이란 글자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모두를 만족시키는 명칭으로 양자에세 손쉽게 채택되었다. 

 원은 베이징을 대도라 명명하고 대대적 수도 건설에 임한다. 금의 중도와는 비교가 안되는 규모였다. 커다란 외성을 사막의 느낌으로 흰색으로 채우며 자금성을 완성한다. 그리고 물이 부족한 베이징 내로 수로를 내기 위해 베이징 동서북의 계곡물을 모두 뒤지고 찾아내고 수로를 연결해 옹산박이란 거대한 호수를 조성하고 여기에 물길을 내어 베이징 시내로 끌어내었다. 이 물길은 방향과 형태가 조금씩 바뀌지만 명청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원은 사막민족의 나라이므로 물이 귀해 궁의 한가운데 호수를 조성한다.

 원이 망하고 명은 대도를 손쉽게 차지한다. 원의 순제가 생각보다 손쉽게 대도방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명은 처음엔 북방왕조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수도로 삼지 않는다. 이민족인 북방왕조의 수도이기도 했고 아직 강성한 몽골세력과 워낙 근접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원장은 아들중 가장 전투력이 막강한 넷째 주체를 연왕으로 삼아 연경에 배치한다. 연경을 세력권으로 둔 주체는 훗날 조선의 이방원과 매우 비슷하게 왕위를 찬탈하며 수도 역시 다시 베이징으로 옮긴다. 물론 원대의 거대한 자금성은 크기가 줄어든다. 자금성의 중심이었던 호수는 바깥으로 밀려나고 좀더 조밀해져 생활 및 활용이 더욱 편리해지게 된다. 자금성의 역사는 사실 화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명 230년동안만 무려 화재가 47번으로 평균 5년에 한번이었다. 자금성 자체가 워낙 거대하고 매 화재마다 명황제들은 중건을 반복하지만 국운의 쇠퇴와 재정난으로 원하는 수준의 중건은 이루지 못한다. 

 또 세월이 지나 마지막 왕조 청이 등장한다. 금이 중도를 건설하고 수백년이 흘러 다시 여진이 베이징을 차지한 것이다. 물론 금을 세운 여진과 만주여진은 매우 다르다는게 저자의 설명이다. 청은 강력한 군사국가인만큼 전 왕조들과는 다르게 베이징을 병영도시 개념으로 세운다. 청의 막강한 군사력은 팔기에서 나왔는데 이 팔기가 베이징에 주둔하도록 도시 전체를 8로 나누어 팔기를 주둔시킨 것이다. 팔기는 1기가 무려 7500명의 병력으로 상비군으로 유사시 무려 5-6만의 친위군 동원이 가능한 셈이었다. 팔기는 황제 직속의 2기와 황족과 귀족이 이끌며 경쟁하는 6기로 서로간의 경쟁으로 전투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신흥귀족인 팔기는 평생 급여가 보장되고 평화가 지속됨에 따라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유명무실화한다. 훗날 외세의 침략에 대포 소리 한번 듣고 가장 먼저 도망간게 팔기들이라고 한다. 청대엔 자금성 내에 원명원이 생겨난다. 원명원은 중국의 원림과 서양식의 다양한 궁전들이 총망라한 대규모의 정원이다. 하지만 아편전쟁때 불타고, 의화단 전쟁때 완전히 망가져 지금까지도 복원이 되고 있지 않다. 

 베이징은 유목과 수렵문화가 만나는 지역이고 국제적 도시여서 매우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 베이징에서 제1의 종교는 불교지만 제3의 종교는 이슬람교다. 이슬람 신자는 카타르인, 위구르 인 이외에도 회족이란 이름으로 중국 각지에 분포하며 베이징에만 무려 20만이 산다. 중국 왕조, 특히 개방적이었던 북방왕조들은 이슬람을 인정해주었는데 지금도 중국 각지에 기와를 얹은 독특한 중국식 모스크가 각지에 존재한다. 원대에 널리 퍼진 무슬림은 고려에도 꽤 많았던 듯 하다. 고려말은 물론 조선 세종때까지만 해도 이슬람의 대표적 송축 의례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9년에야 중지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책은 300쪽 정도로 짧지만 베이징엔 대한 역사, 지리, 인물, 왕조의 흥망이 자세히 수록되었다. 베이징에 대한 정보와 지식으로 꽉 찬 셈이다. 도시 아카이브 세 번째 시리즈인듯 한데 나머지 책도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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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0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닷슈님 베이징에 제1종교가 불교였어요 !유사시에 상비군을 오천 육천명도 아닌 만단위로 ㅋㅋ베이징이라고 하면 자금성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아직도 중국에대해 역사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네요 닷슈님 포스팅 덕분에 새로운 사실들 많이 알게 되네요닷슈님 크리스,메리 메리
ᒄ₍⁽ˆ⁰ˆ⁾₎ᒃ♪♬

닷슈 2020-12-24 16:37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보고 중국과 베이징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가깝고 중요한데 아직 많이 모른단 생각입니다. 스콧님도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이전 호빵글은 참 좋았습니다.

shingrr 2020-12-24 1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쓴 신경란입니다. 책을 읽어 주시고 이렇게 소개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닷슈 2020-12-24 16:38   좋아요 0 | URL
헉, 저자님이 왕림해주시다니. 놀랍습니다. 좋은 책 써주셔서 저야말로 많이 배웠습니다. 차기작 기대해봅니다.

shingrr 2020-12-24 17:5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선생님께 알라딘 편지 보내는 기능을 이용해서 편지를 드렸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같은 시리즈 난징 책도 제가 썼습니다. 한 권 부쳐 드리려고 합니다. shingrr@163.com으로 주소 보내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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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구석 미술관 1권의 대히트로 2권이 나왔다. 몇년 전에 나온 1권은 어쩌다보니 강제로 보게 되었는데 큰 임팩트가 없었다. 서양의 주요 미술가들에 대해(물론 저자의 내공은 깊겠지만) 간단히 대중적으로 다룬 느낌이었고, 어설프게 서양미술책을 몇 권 본 나는 그로 인해 크게 인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그건 작가가 1권에 비해 수준을 높였다기 보다는 전적으로 내가 한국미술, 특히 현대미술에 많이 무지하게 때문이었다. 방구석 미술관 2편은 바로 최근 100년간의 한국 현대미술가들을 다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남북의 분단기를 관통해 살아온 한국의 미술가들 10인을 모셨는데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구, 정욱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이다. 이중  7명은 이름과 작품을 들어봤다. 하지만 유영구와 정욱진은 정말 처음 듣는 분들이었고, 이우환은 어설프게 들어본 분이었다. 

 10인의 작가들은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그에 걸맞는 강렬한 10색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아낸 만큼 공통점이 있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는 일본을 통해 서구문화가 침투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하지만 일본을 통해 서구를 접하다 보니 왜곡된 부분이 많았고 소위 왜색이란게 생겨났으며 아시아적 가치와 문화, 특히 한국의 문화와 전통은 물질적인 후진성으로 인해 함께 경시되고 퇴색되었다. 이들 작가들은 이런 환경에서 전통미술과는 단절되고 먼저 일본, 혹은 한국에서 수련을 거쳤고, 더 나아가서는 유럽이나 미국을 향해 나아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미술의 제대로된 영향을 받았으며, 그 와중에서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한국의 미와 전통성을 현대미술의 경향성과 함께 융합하거나 살려나가는 과정을 거쳤다. 작가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전체적으로 든 느낌이었다. 

 작가 모두가 강렬한 삶을 살고 그것을 예술로 남겼지만 조금 더 내게 인상깊었던 사람들을 정리해본다. 먼저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그 삶이 파란만장하고 여성이기에 그의 행보에는 웬만하면 다 한국최초라는 수식어가 이상하리 만큼 자주 붙는다. 일단 그는 남자관계가 복잡하고 불행했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최승구와 결혼까지 하려했지만 그는 이미 조혼을 한 유부남이었고,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고생을 하던 혜석에게 반해 적극적으로 그를 돕고 변호한 우영 역시 사별하긴 했지만 애가 딸린 남성이었다. 우영의 지극정성에 혜석은 그에게 마음을 열고 우영은 혜석의 매우 현대적인 조건을 받아들여 둘을 결혼한다. 아이 셋을 낳았지만 유럽여행을 나선 혜석은 자유분방함속에서 실수를 저질러 최린과 불륜을 저지른다. 이에 우영에게 버림받고 그의 예술과는 다르게 사회적으로 매우 지탄받아 거의 모든 관계를 잃게 되고, 아이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불행함 속에서도 예술의 끈을 놓지 않고 작품세계를 이어가지만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시대를 너무 빨리 앞서갔고, 여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던 시기에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 비운의 작가였다. 

 다음은 이응노다. 구글이 만든 사이트은 아트앤 컬쳐란 사이트나 앱을 이용하면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그 사람의 생애시기별로 볼수 있는데 아마 이응노를 살펴본다면 이 만큼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사람도 드물거란 생각이다. 이응노는 서당훈장 아버지를 둔 사람은 전통전 환경에서 자라나 미술을 배우기 위해 경성으로 홀로 상경한다. 당대 최고의 전통화가 및에서 전통미술을 배우고 입선하나 근현대 미술을 접하고 일본에서 유학해 서양화를 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서양화기법을 토대로 동양화를 접목시켰고, 이후에는 한국전을 겪으며 강렬한 인상주의적 그림을 보이도 단색조의 추상미술로 접어든다. 그는 추상미술에 한자와 한글을 사용했고, 그것이 그 만의 문자추상으로 자리잡는다. 이응노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수많은 사람이 작품에 등장하는 군상이란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수없이 작품세계가 변한 사람이며 백남준보다 앞서 한국에서 등장흔 월드클래스 아티스트였지만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모진 고초를 당하며 한국에서의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져 백남준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은 박수근이다. 나혜석은 최초라는 점과 여성으로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살았다는 점, 그리고 이응노는 끊임없는 혁신이 인상적이었다면 박수근 가장 한국적이었다는 점이 인상싶었다. 박수근은 여기 나온 다른 모든 미술가들과 달리 철저히 국내파다. 당시 미술은 일본 그리고 서구의 영향이 많았고 당연히 유학파가 득세했다. 국내파는 찬밥신세였는데 그런 국내파들끼리 모여 주호회를 만든다. 주호회는 판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때의 영향으로 박수근의 회화에는 판화적 특지이 많아진다. 박수근은 주호회 멤버들과 함께 경주를 많이 찾았는데 여기서 우리나라 화강암으로 만든 석물문화재의 질감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박수근의 그림이 하나같이 단색조에 돌같은 질감을 갖게 된 것은 이 석물의 질감에 영향을 받은 까닭이다. 이 질감은 물감을 수차례 덧칠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박수근은 회색물감에 다량의 흰색물감을 많이 섞어 사용했다. 또한 박수근의 작품은 매우 평면적인데 저자는 그가 기하학적 추상을 강조하는 피카소의 영향을 다소 받은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박수근의 작품이 인상적인 것인 이런 기법이외에도 주제자체가 일상의 사람들을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그의 작품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는게 저자의 설명이다. 

 책은 대중적인 만큼 매우 재밌고, 이번엔 특히 한국의 현대미술가들을 다뤄 인상깊었다. 제법 두꺼워 400페이지 정도 되었는데 부담스럽지 않게 볼수 있었다. 내용은 재밌었지만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가지고 간 것 같아 안타깝다. 시대가 우울하고 예술가의 삶은 불우한 경우가 많다지만 하나같이 가진 재능에 비해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산점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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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1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구석 팬인데 이번편은 이응노-박수근-나혜석 편이네요 400페이지면 전생애와 작품까지 전부 보여줬을거 같아 기대^기대^^

닷슈 2020-12-21 23:44   좋아요 1 | URL
전 세 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지만 다름 예술가들 삶과 작품세계도 상당했습니다. 작가 하나하나 세세히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한 느낌입니다. 그러다보니 분량도 좀 많아 진 것 같구요.
 
위기의 시대, 돈의 미래 - 세계 3대 투자자 짐 로저스가 말하는 새로운 부의 흐름
짐 로저스 지음, 전경아 옮김 / 리더스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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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는 짐 로저스의 책이다. 트럼프의 재선에 대한 우려와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올해초나 작년 말쯤에 쓴 책이 아닐까 싶다. 로저스는 북한 경제 개방 가능성과 이후 한국과 북한의 통일, 그리고 이어지는 러시아, 중국, 일본을 잇는 경제에 대한 긍정적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반면 일본은 완전 한물 갔다는 혹평가 아베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한국인의 입맛에 아주 걸맞는 주장을 해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책 내용은 조금 실망스럽다. 구체적인 대책과 세계적 동향의 분석보다는 모호하고 총체적이고 당연한 의견을 많이 내놓는다. 뭐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 책을 사보는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그정도의 수준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양적완화버블을 설명하면서 왜 이런 양적완화가 생겼는지 그 한계와 위험성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예측해주기보다는 버블이고 위험하며, 버블의 끝은 어딘지 알수가 없다란게 다다.

 로저스 개인의 삶의 이야기 같이 조금 재미있는 부분도 있긴 하다. 그가 미국의 완전 시골에서 자라나 명문대인 예일대를 가고, 옥스퍼드에 간 일. 그리고 조지 소로스에게 채용되 그와 함께 전설의 수익률을 자랑하는 퀀텀 펀드를 만든 일화등은 볼만했다. 전설의 투자자가 된 그가 사실 월가일 일도 관심이 없었고 역사전공에 철학이나 정치학등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도 의외였다. 월가에 본의 아니게 취업하면서 뒤늦게 세계 경제와 흐름에 관심이 생겼고 이를 분석하는 눈을 갖게 된게 거의 삶의 결정적 터닝 포인트였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을 하나 꼽는다면 중국과 러시아 경제에 대한 밝은 전망이다. 러시아는 국가채무가 다른 주요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건전하고, 드넓고 개발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 국토에 비해 인구는 적어 아직 발전 잠재력이 높고, 독재자인 푸틴 역시 외국 자본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점차 가지고 가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반면 각종 규제와 외국 자본에 대한 비 개방성으로 인도는 개발이 어려울것으로 보고 있으며 과거 재무가 매우 건전했고 경제가 튼튼했던 유럽의 독일, 스위스 등도 재정 건정성이 악화되고 버블 주식에 투자하는등 위험한 상황으로 나간다고 보고 있다.

 미국에 대한 전망도 좋지 않은데 이는 트럼프의 영향이 많아 보인다. 바이든이 당선된 지금은 시각이 좀 달라졌으리라 본다. 반면 중국은 매우 높게 평가한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일당독재에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는 편협한 인권탄압국가라는게 서구 민주사회 국가들의 시선이다. 하지만 실제 중국은 역사상 매우 짧은 시기만 공산주의를 실현했고 역사상 꾸준히 자본주의를 실현해온 국가로고 본다. 거기에 미국을 넘어설 만한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본다. 홍콩의 민주화 시위도 중국에 긍정적으로 본다. 홍콩을 물론 중국 본토로 강한 경제력을 가진 중심도시이지만 민주화 요구로 홍콩이 흔들린다면 오히려 중국의 선전이나 다른 도시로 홍콩이 가진 이점이 이전되어 오히려 중국에게 이득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로저스의 시각에서 사실 한국정부와 한국시민이 배울 시각도 많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사드배치와 중국의 경제적 부흥 이후 한국정부에 대한 무리한 정치 경제적 압박과 중국의 낮은 민주성 수준과 국가사회주의, 그리고 최근 코로나19사태에서의 비투명성은 우리로 하여금 중국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쌓게 만드는데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는 중국이 가진 분명한 부정적 모습과 정체성이지만 이는 서구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 대항마인 중국을 바라보는 모습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그들에게 경제의 30%정도를 의지하고, 지정학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붙어 있어 어떻게든 더불어 살수 밖에 없는 한국정부와 한국민은 이런 비판적 시각이외에도 중국을 이해하려는 시각까지 갖고 있어야 진정한 균형자론을 갖고 있을수 있다는 생각이다.

 홍콩민주화와 관련되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중국의 대응이며 민주주의라는 세계전체가 공통적으로 지향해야할 가치를 훼손한 사건이다. 하지만 중국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온 중국에게 홍콩은 대만과 마찬가지로 100년전 일어난 아픔을 딛고 일어서 하나가 되어야 하나는 존재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분열되면 크게 흔들렸고 망국의 길로 들어섰으며 하나였을때 강하게 힘을 떨쳤다. 중국인에게 하나가 되는 것은 이전의 위대한 중국으로 돌아가는 필수적 과정이며 그런 모든 것이 이뤄져야 일당독재와 민주주의 문제도 해결할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난 중국인이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한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현재 그것이 그들에게 후순위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 로저스가 말하는 것처럼 수많은 경제국가들이 그것이 반드시 필수적이고 윤리적이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나라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당독재를 겪었다. 싱가포르, 대만, 일본,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홍콩에 대한 중국인의 시선을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한국에 대입해보는건 어떨까? 80년정도 전으로 돌아가보자. 2차대전 때 미국 정부는독일을 굴복시킨 후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다. 여기엔 일본의 강한 저항도 있었지만 동아시아로 생각보다 빠르게 진군해나간 소련에 대한 견제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미군이 극렬한 저항을 뚫고 일본 본토를 점령하는데는 몇달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그 결과 소련군이 무기력해진 일본 관동군의 항복을 빠르게 받아내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버렸다. 다행히 미국은 한반도에서 제주도 하나는 건져낸다. 일본본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제주도 장악이 선제조건이었고, 소련군에 비해 미군이 해상을 장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역사는 흐른다. 한반도는 중국처럼 공산화가 되어 하나의 나라가 되었고, 제주도는 일본의 지배후에 미국령이 된다. 하지만 자신들의 턱밑에 적의 전선기지가 있음을 불편히 여긴 중국과 한국정부, 그리고 소련의 강한 압박에 제주도는 미국령이 되지 못하고 협상후 50년의 조차후 2000년에 한국으로 반환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50년의 세월동안 공산주의 한국에서는 사회주의가 민족주의가 만연하지만 사실상 미국령인 제주도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넘쳐나고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공용으로 혼재되며, 심지어 미국식,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 마져 일반화 된다. 하지만 한국본토에서는 제주도는 영원히 잃어버린 아픈 자식이다. 다시 예전의 위대한 하나의 한국으로 되기 위해 반드시 합쳐져야만 하는.

 하여튼 2000년이 되었고,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로 중국과 함께 20년전부터 자본주의로 돌아선 한국은 아시아의 금융허브로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제주도를 차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극렬한 체제의 차이로 인해 향후 20년간 일국양제를 허용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제주도의 부가 모조리 일본으로 날아갈 판이었으니까, 그런데 2020년이 되자 자연스레 하나가 될거란 제주도민들이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인 하나의 한국이라는 민족주의와 국가사명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우리의 적인 미국, 심지어 일본에 까지 붙어 저항했다. 더 기가 막힌건 과거 우리 한국을 침략하고 제주도를 찢어놓은 국제사회란 것들이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차리고 한국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제주도를 다시 분리시키려는데 지지를 보내기 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괘씸한 역사적 상상은 중국을 이해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강제적 이해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경험하듯 국제사회에서 힘이 받쳐주지 못하는 도덕적 윤리적 선택은 생존앞에 무의미하다. 과거 인조반정 정권은 도덕성을 내세워 국제정치를 살피지 못하고 청에 저항하다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강화를 당했고, 수십만의 백성을 노예로 내주고, 수십년간 잔혹한 내정간섭을 당했다. 구한말 역시 국제정치를 살피지 못해 나라가 망국으로 들어서 역사상 최초로 36년간 역사가 사라지는 고통을 당했다. 

 이런 현실정치를 살핀다면 로저스처럼 이익과 생존의 입장에서 우리는 국제정치와 경제흐름을 살피고 가장 고려해야할 중국을 이해하고 살피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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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15 1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중국은 이제 한반도 평화를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한 수 아래의 나라로 보고,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미국보다 더 까다로운 나라
라는 점에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닷슈 2020-12-15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이 한국을 한수 아래로 얕잡아 보는 것은 실제적 관계 보다는 오랜 역사와 편견속에서 굳어진 것이라 봅니다. 최근의 중국굴기로 인한 민족주의 발흥과 나라이름에 걸맞는 오만함도 한몫하죠. 하지만 그게 자기들을 위해서도 좋은게 아니란걸 조금씩 깨닫고 있는다는 느낌도 받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게 미국 정책은 사실 별로 까다롭지 않다고 봅니다. 무조건 친미로 거의 나라안의 여론이 굳어져있기 때문에 정부가 실질적인 주고 받기만 잘 조율한다면 거의 할게 없죠. 트럼프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 혹은 협상을 결렬시켜야한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명에 대한 사대처럼 하나의 도그마입니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크게 왔다갔다 하죠. 나라안 여론과 인식이 이러니 실질적 균형자론이 무척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중국의 입장을 더 이해하고 실질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이미 마치 미국인인양 너무나도 그 입장을 잘 이해하고 대변해주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