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홍빛 하늘 아래
마크 설리번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의철학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 남긴다. 승자가 쓸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최대 승자는 미국이고,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고 영화라는 막강한 미디어까지 장악했기에 이전의 승자보다 역사를 쓸 권한을 더 크게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린 2차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전쟁의 향방을 좌우하고 크게 승리한 것을 미국이라 생각하지만 2차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시기는 짧고, 전사자는 생각보다 적다. 최대 전사자는 소련이 기록했고 그 수는 미국의 무려 50배에 달한다.
같은 승자도 이럴진데 패자는 어떨까. 물론 그들은 침략을 당한 패자도 아닌, 침략을 감행한 패자였기에 더욱 역사를 쓸 권리를 박탈당했다. 패자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다. 그래도 독일과 일본은 강력했던 패자들이기에 승자에 의해 많이 가해자로 다뤄지기도 하며 자신들도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렇다할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언급되지도,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2차대전 하면 무솔리니와 너무 무기력해서 히틀러를 짜증나게 했던 나약한 이탈리아군대만이 생각날 뿐이다.
그런 2차대전에서의 이탈리아의 모습을 소설 '진홍빛 하늘 아래'에서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패전국 이탈리아 사람들은 2차대전에서 나치에 적극 협력하는 파시스트들,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려가며 협조해야했던 대다수의 대중들, 그리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게릴라들로 나뉘어졌다. 전쟁은 독일이 일으킨 만큼 이탈리아의 대중들은 전쟁에 상당히 소극적이고 반감을 갖는 모습도 많이 그려졌는데 이것이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다수의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전황이 불리하게 바뀌어가고 고통이 가중됨에 따라 긍정적 태도에서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바뀌어나가지 않았을까?
소설의 주인공은 피노렐라다. 때는 1943년으로 사실상 전쟁막바지의 시점으로 전황이 뒤집히는 시점이었다. 공세였던 독일은 동서 양방향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프라카전선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는 물러났는데 이탈리아는 독일의 남부지역 방어선으로서 그리고 인력과 병참기지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 유명한 피아트가 이때도 있어서 독일에게 전투기와 탱크등을 제조해 공급하고 있었다.
피노렐라가 사는 지역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로 아름다운 코모호수가 있는 곳이다. 피아트 공장도 있고, 패션도 유명했다. 피노의 부모님은 밀라노에서 가죽 공예품을 가는 가게를 운영한다. 1943년 피노렐라는 키도 185에 달할 정도로 컸지만 불과 18세로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였다. 피노는 친구들 그리고 동생 미모와 밀라노 시내에 나갔다가 안나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접근해 저녁 영화를 같이 보기로 한다. 신이 난 피노는 저녁에 동생 미모와 함께 안나를 보러 나가지만 결국 바람맞았고 하필 그날 최초로 밀라노에 연합군의 폭격이 시작된다. 극장도 폭격을 당했고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의 가게도 폭격을 당했다.
가게가 무너져 모든 걸 잃은 피노의 부모는 절망하나 곧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스위스 국경 인근 알프스의 카사 알피나로 보낸다. 카사 알피나에서 피노는 레 신부를 만났고, 카사 알피나로 가는 길에 장래 레이서가 꿈인 알베르토 아스카리도 만난다. 카사 알피나에서 레 신부는 이상하게도 피노에게 매일 산행을 시킨다. 산을 타는 요령도 이상하다.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이며, 체력과 자신감이 찰 때만 특별하고 위험한 코스를 등산시켰다. 수개월후 피노가 알프스의 카사 알피나에서 알프스로 넘어가는 여러 코스를 숙달한 후 레 신부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는다. 레 신부는 그간 밀라노의 슈스터추기경과 결탁하여 유대인들을 피신시키고 있었고 카사알피노로 온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대피시키고 있었다.
피노는 이 위험한 일을 수락한다. 그리고 수 개월간 피노는 수십에서 수백의 유대인들과 함께 산을 넘는다. 다들 피노처럼 산행에 익숙치 않았고 노인에 임산부, 아이들까지 있어 매우 위험했지만 단 한번의 실패도 없었다. 이 일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곧 유대인들이 몰리게 되었고 이에 레신부는 다른 아이들까지 훈련을 시켜 피노의 일에 동참시켰다. 한편 피노는 산행과 더불어 쉬는 날이거나 휴일 혹은 돌아오는 길에 알베르토 아스카리에에게 운전을 배웠다. 그는 운전 실력이 매우 뛰어났고,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았다.
수개월이 흘러 피노의 부모가 피노는 밀라노로 불러낸다. 피노는 자신의 일을 더이상 하지 못하는게 아쉬웠지만 부모의 편지 내용이 너무나도 단호해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밀라노에서 부모를 만난 피노는 더이상 철부지 소년이 아니었다. 수개월간 피노는 체력이 매우 강해졌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으며,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린 사람이었다. 부모가 피노를 부른 이유는 피노가 나이가차 곧 징집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심끝에 피노의 부모와 외삼촌은 그를 독일군에 입대시키기로 한다. 단 손을 써서 밀라노에 주둔하는 비전투부대에 배치시키기로 한다. 전방으로의 입대는 당시 전황으로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피노는 자신이 하던 일과 정반대의, 적의 일을 하게 되어 탐탁치 않았지만 부모의 단호한 설득에 어쩔수가 없었다. 특히나 게릴라 활동을 하는 외삼촌마저 그리 주장하니 딱히 답이 없었다. 피노는 밀라노의 기차역에 주둔하다 폭격을 당한다. 운이 좋게 살아남았지만 손가락 두개가 거의 절단당할 뻔한 위기였다. 그러다 곧 독일군 장군 레이어스의 눈에 들게된다. 피노의 뛰어난 운전실력과 자동차정비능력,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인근 지역의 지리를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어스 장군은 이탈리아 지역의 군수담당이었는데 이탈리아의 고딕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원하며 독일전방으로 군수지원을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때문에 피노는 그와 같이 돌아다니며 독일군의 대비태세와 주요 병참계획, 방어지역, 이동계획등을 자연히 사전에 알게된다. 그리고 이는 피노의 외삼촌을 통해 게릴라와 연합군으로 넘어가게 된다. 피노는 겉으론 나치였지만 어느새 연합군 첩자노릇을 하게 된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피노는 꿈에 그리던 안나를 만나게 된다. 아직도 어리지만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피노를 안나는 처음에 알아보지 못한다. 안나는 레이어서장군의 정부의 가정부였다. 둘은 서로 친해지고 안나는 피노가 첩자 노릇까지 하는 것을 알게되며 그를 좋아하게 된다.
한편 피노는 레이어스를 따라다니며 온갖 악행을 보게 된다. 놀랍게도 무솔리니를 만나기도 했고, 게릴라 이탈리아인과 유대인들을 온갖 토목공사에서 노예처럼 부리는 광경도 보게 된다. 나치는 그들에게 이렇다할 물과 음식도 제공하지 않으며 일을 시켰다. 나치가 구축한 방어선과 온갖 기지는 모두 이들이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잡힌 유대인들을 집단처형시키고, 유개화차에 아이들과 부모들을 싫어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장면도 목도한다. 레이어스는 보통 기계처럼 잔혹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철저했지만 간혹 끔찍한 장면을 보기 힘들어하기도 하고, 한번은 이상하게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아이들중 몇몇을 구해 손수 스위스 국경에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구해준 것이 자신임을 몇번이고 강조하며 아이들의 뇌리에 새기는걸 잊지 않기도 했다. 아마도 패전을 직감한 레이어스가 보험을 들어둔 것이리라.
마침내 1945년이 다가왔고, 로마에 이어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도 연합군에 점령된다. 피노는 게릴라들의 요청으로 레이어스를 손수 체포하여 넘겼는데 이로 인해 제시간에 스위스 인스부르크로 대피하지 못한 레이어스의 정부와 안나가 성난 대중들에 붙잡히기 만다. 나치의 치하에서 벗어난 밀라노는 격노에 휩싸였는데 파시스트와 그 부역자들의 숙청되었다. 나치와 놀아났던 여자들은 모두 속옷차림에 머리를 밀어버리고 우스꽝스럽게 립스틱을 바르고 이마에 창녀라는 글자를 새겨넣은후 조롱하다 처형시켰다. 그 와중에 안나도 휩쓸려 희생된다. 피노는 그 과정을 목도하고 아무런 저항도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피노 자신의 목숨도 위험했다. 연합군 주요인사나 게릴라 주요인사들은 피노가 첩자란걸 알지만 일반 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약간의 의심만으로도 사람들은 특정인을 파시스트나 부역자로 몰았고 쉽게 희생되었다.
도망다니던 피노는 미군으로부터 특별임무를 부여받는다. 놀랍게도 레이어스장군을 스위스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와의 인접지역엔 아직 잔존세력의 저항에 계속되고 있어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히틀러이전에도, 히틀러시대에도, 히틀러 이후에도 자신은 잘 살아남을거라던 레이어스는 아마도 패전을 직감하고 연합군에 일종의 보험을 넣어둔 것이 분명했다. 연합군에 레이어스 장군은 영웅취급을 받고 있었고 그의 신병은 중요했다. 심지어 레이어스는 피노의 암호명인 관찰자라는 칭호마저 알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피노는 레이어스 호송 임무에 착수한다.
이 소설은 무려 650페이지에 달한다. 많이 두껍지만 가독성이 높았다. 향후 영화로도 제작된다니 재미는 보장된 책이다. 저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책을 썼는데 그래서 마지막 십여페이지에 걸쳐 소설의 주요인물들이 전쟁 종료 후 어떻게 인생을 살아갔는지가 서술된다. 마치 밴드오브 브라더스나 실제 전쟁영화 마지막 무렵 주인공들의 이후 삶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책을 보면서 2차 대전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고,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패자, 특히, 전쟁을 일으킨 패자의 입장에서 전쟁을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혹은 저항을 하지 못해서 일어난 전쟁에 휩쓸려 피해를 보게된 패전국 다수 일반사람들의 고통을 그들의 시선을 통해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된다. 그래야 전쟁의 참상을 계혹 기억하고 전쟁에 반대할수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