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은 체코의 작곡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작품활동을 하면서 미국인들의 환대에 보답하는 의미와 더불어 '신세계로부터' 라는 교향곡 9번을 작곡하게 된다. 'From the New World'라는 교향곡을 완성한 해가 1893년 있으니  미국을 신세계라고 생각할만 했음직하다.

 

우리들에게도 낮설지 않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이 가장 각광받고 있는 곳은 사실 호주이다. 호주땅에는 본디 '아보리진'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세계의 땅이란 땅은 모두 개척 혹은 탐험 혹은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인들의 발아래 무릅을 끓어야 했다. 그러한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여년 전 호주는 영국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1770년 영국의 쿡 선장의 배가 호주로 떠밀려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략 200여년 전 이 호주에 영국인 죄수 700명을 포함한 영국인 1300여명이 시드니에 도착하게되면서 호주의 역사는 급변하게된다. 애초에 호주는 영국의 악질 범죄자들의 수용소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영국의 역사가 워낙 혼잡하고 자신들 스스로의 조상들은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족들의 집합체이다. 특히 색슨족들은 매우 거친 민족으로 유명하다. 영국은 자신들의 기질이 매우 거칠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정화 작업에 나선다. 그리하여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되는 죄수들을 호주라는 먼 섬에 강제 압송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회 정화의 의지가 얼마나 컷던지 강제 압송된 죄수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린이가 그 어떤 강력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아일랜드 정치범, 살인자, 강도, 사기꾼등 범죄자들을 이렇게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목적은  사회를 정화하는 차원이었다. 하여 간혹 영국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호주로 갈래 아니면 죽을래?' 하는 식의 질문을 주고 받는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덕분에 영국은 사회 질서의 안정을 찾았고 엄격한 교육(도둑질하는 어린이의 손을 자르는 등의)을 병행한 결과 현재 우리들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라고 알려지기 까지는 영국의 엄청난 자정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이후 80여년 동안 영국은 16만명에 해당하는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쓰레기'들인 범죄자들을 호주에다 내다 버리는 일을 추진한다.

 

 

 

 

그러던 1851년 어느 날...호주에서 금광맥이 발견되는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만다. 금맥의 발견은 호주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바꾸어 놓은 대형 사건이었다. 단순한 유배지가 아니라 골드러쉬가 시작된 것이다. 급기야 호주에는 600만명에 달하는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황금 전쟁이 시작된다.

 

호주는 이제 영국인들의 차지가 된것이다. 호주의 아보리진은 당시 약 500여 부족의 대략 50만명 (어떤 이는 100만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원주민의 인구가 무려 4만명이라는 수치로 격감하게된다. 만약 100만이라는 수치가 사살이라면 도대체....영국인들은 호주 원주민들에게 무슨 짖을 한 것이란 말인가...거의 90%이상, 아니 95%이상의 호주 원주민들이 영국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날벼력을 맞은 원주민들은 그 얼마나 억울했을까...

 호주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 때에는 원주민들과의 '화의'라는 기치하에 아보리진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기도 했다. 봉화 봉송주자들을 대거 원주민들로 구성해 넣었다. 그러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종 차별은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없다고들 한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소외계층으로 남아있고 들러리 비주류이다. 200여년 전 땅의 주인이 바뀐 후 원주민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억울했던 원주민들의 역사는 차치하고, 이 곳 호주로 이주해온 영국인들의 가슴에는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배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아프리카의 고향을 강제로 떠나 아메리카로 잡혀간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음악으로 달래듯이 호주로 이주한 영국인들은 이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으로 마음을 달래는 듯 싶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웬수와 같은 영국인들이겠지만 그들도 고단한 나날을들 보냈노라고 말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의 조상들은 고향인 영국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 향수는 대를 이었을 것이고 현대에 와서는 가장 애호하는 교향곡을 드보르작 9번 신세계로부터를 꼽고있다. 노래는 고향곡의 2악장에 노랫말을 붙야 세계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Go'in home, go'in home/  I'll be go'in home

Quiet light, some still day/  I'm just go'in home

 

It's not far, just close by/  Through an open door

Work all done, care laid by/ Go'in to fear no more


Mother's there xpect'in me/ Father's wait'in, too

Lots of folk gathered there/ All the friends I know

all the friends I knew


Nothing's lost, all's gain/ No more fret nor pain

No more stumbl'in on the way/ No more long'in for the day

Go'in to roam no more

 

 

Morning star lights the way / Restless dreams all done

Shadows gone break of day / Real life just begun


There's no break, there's no end/ just'a liv'in on

Wide awake with a smile / go'in on and on

Go'in home, go'in home / I'll be go'in home

It's not far, just close by/ Through an open door

 

I'm just go'in home / Go'in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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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3-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음악이 아침부터 멋지게 울리네요...
소년 합창단의 목소리는 종소리같아요.

세계의 역사에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세가 넘어서입니다.
정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유시민씨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아직도
고히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그렇기도 하구요... 사람 사는 사회란, 참으로 복잡하고
그리고 한 덩어리로 치부해버리기엔, 개인의 역사 또한 참 길다는 생각이 들어요.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3-05 11:58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신대로 역사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바른 역사를 알리려는 사람들보다는 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도 재고할 필요성이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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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들이 꼭 읽어야 하는 작가, 조셉 캠벨


필독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제는 필독가라는 말도 때론 성립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바로 조셉 캠벨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신화와 인생을 번역한 이윤기선생이 이 책을 번역하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조셉 캠벨은 참으로 멋진 생각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 어떤 현상도 조셉 캠벨의 사고 영역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그것이 종교이든 철학이든 간에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것들은 잘 버무려지고 융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격게 된다. 그야말로 ‘化’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무시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양성을 고스란히 보존시켜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맛을 주는 사고의 소유자인 것이다. 조셉 캠벨을 우리들의 20대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열린 사고


 젊은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의 열린 사고이다. 저자는 큰 줄기의 종교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신화들을 연구해온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기독교, 불교, 유학, 도학등은 물론 일반인들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아메리카 부족을 비롯 아프리카의 원주민에 이르는 그들의 신화를 연구해왔다. 어쩌면 전 세계의 신화란 신화는 죄다 섭렵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자신 스스로 기독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원론적인 기독교적 이론들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때로 조셉 캠벨을 지극히 동양적 사상에 물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절대자와 인간의 간극인 넘볼 수 없는 종교적 금기사항을 저자는 무참히도 무너뜨린다. 이원론적 사고 혹은 사상은 기필코 대척점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구도로 이해하는 그에게 이윈론이 자리 잡을 여지는 결단코 없다. 캠벨에게는 정신적 작용력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정말 멋진 독서법


이토록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저자가 젊은 독자들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함은 독서의 좋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캠벨이 조이스와 토마스 만 그리고 슈펭글러를 읽다보니 니체를 언급한 장면이 나오고 그렇게 니체를 읽는다. 니체를 읽으려면 쇼페펜하우어를 읽어야하고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킨트를 읽어야 한다.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매우 힘들다. 그리하여 괴테로 돌아간다. 조이스가 쇼펜하우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이스의 시스템에서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슈펭글러의 사고 시스템과 조이스의 것이 매우 밀접하다는 점을 칼 융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버무리는 작업을 해내는 것이 캠벨의 독서방법인 것이다.


사실 동양의 고전을 읽을 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중용을 읽다보면 대학, 논어, 주역 혹은 맹자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독서의 역량이 늘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방식이 아니던가... 젊은 20대들에게 캠벨은 결혼 혹은 인생의 의미 뿐 아니라 진정한 독서의 방식과 그 가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왕성한 독서력을 발휘할 수 있는 20대들에게 이 책은 매우 귀중한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캠벨, 중용과 만나다...


  동양의 사상을 약간을 신비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인 아쉬움으로 남지만 ‘인간은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동양의 고전인 중용의 장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에는 ‘지성여신’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이다.’라는 말이다. ‘지성여신’이라는 문구 앞에는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직 천하의 지성이라야만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둘을 합치면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자신의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고 그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조셉 캠벨의 이야기와 흡사한 말이던가...인간은 신성으로 가득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조셉 캠벨의 말은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인 중용의 한 장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아파치족의 이야기는 지극히 물권을 인정하고 있다. ‘모든 사물들은 살아있고, 그 사물들은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사물을 인간이라는 방향에서 출발하여 사고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주체로하여 사고한 말이다. 중용에서도 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인권이 중요하듯이 물권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능진기성 위능물지성’이 그것이다. 천지인의 조화로움과 일원론을 주장하는 동양사상에서 물권의 중요성을 제기한다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의 사상으로는 설파하기 매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캠벨은 우리의 젊은 독자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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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글러선생은 2007년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한국의 서점가에 출간했도, 한 해 뒤 '탐욕의 시대'를 출간했다.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하 왜)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도 필독서로 추천을 할정도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반면 많이 읽히고는 있지만 '탐욕의 시대'는 '왜-'만큼은 아닌 듯 하다. 두 책을 모두 읽던 당시  '왜-'보다는 '탐욕의 시대'가 훨씬 더 의도를 전달하는데 성실하고 더 집중해서 쓴 책이 아닌가 생각했다. 같은 저자의 유사한 책으로 정보 전달력에서나 글쓴이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탐욕의 시대'가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상대적으로 약한 '왜-'보다 인지도면에서 뒤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8년                                2007년

 

 

두 책의 비교

 

                                           세일즈포인트   표시가      할인율    알라딘판매가     쪽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96,583         9,800원   30%      6,860원       201 쪽

탐욕의 시대                        :   11,138         15,000원  50%     7,500원       362 쪽

 

단순히 표면적인 비교로보아 '왜-'의 인지도가 '탐욕의 시대'보다 훨씬 압도적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는 지표이다. 물론 알라딘 세일즈포인트로 본다면 출간 년도로도아 '왜'가 1년이라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부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2007년에 출간된 책(왜-)의 할인율이 30%이고 2008년에 출간된 책(탐-)의 할인율은 50%라는 할인율로 볼때 현재 판매 지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책은 즉, 인지도면에서 '왜-'가 앞세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탐욕의 시대'가 그 목적을 전달하는데 훨씬 더 좋은 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현실과 직면하게된다...왜 이런 기묘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고민거리가 없으니 별걸 다 고민한다 싶겠지만 사실은 '탐욕의 시대'가 '왜-'보다 훨씬 더 좋은 도서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름대로 생각해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책의 이름이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린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는데 매우 충실한 표지어는 누가뭐래도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다. '탐욕의 시대'는 '왜-'와 내용에서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이라는 용어가 매우 광의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 용어라는 점이다. '탐욕의 시대'는 경제적으로 강력한 부를 일군 초강대국들이 아직 개발 중에 있거나 개발을 시작하고 싶어하는 국가들의 양털을 어떻게 깍아내는지 매우 잘 전달해주고 있고, 그 작용력의 원리를 훨씬 더 세부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는 '왜-'와 그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다. 

 

 한마디로 '탐욕의 시대'는 세계의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아이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고개를 왜면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이 경제적으로 나아질 수 없는 환경속으로 자꾸만 밀어넣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훨씬 잘 표현되어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렇다 치더라도 '탐욕의 시대'는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조차도 비교적 덜 알려진 느낌이다. 이는 가독성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있다. 가독성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추천 대상서적으로서 중요한 참고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독성을 따진다면 단연 '왜-'보다는 '탐욕의 시대'를 권하고 싶을 정도이다.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왜-'를 압축한 형태로 저술했다. 반대로 탐'욕의 시대' 안에는 좀더 많은 정보를 담아두어 독자들이 읽어나가는데 훨씬 유리하도록 했다. 왜 초강국들이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들을 그토록 못살게 구는가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인터넷 주문이다. 인터넷으로 읽을 책을 구매하다보면, 받아보고나서... 이게 아닌데...라는 경험을 한 번 쯤 하게 마련이다. 독자들의 리뷰가 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같은 책에대한 평가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신간이라면 리뷰를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읽는데는 시간이 소요되고 읽는 독자 중 리뷰를 쓰는 경우는 그 비율이 많지 않아보인다. 하여 때로는 땡스투를 누를 기회도 없이 책을 사야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책방에가서 직접 책을 골라 선택하는 경우라면 분명 '탐욕의 시대'와 '왜-'의 상대적 우위는 아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생각하는 이유이다.  

 

모든 면에서 보아 단연 알라딘 세일즈포인트에서나 할인율에서 단연 우위를 점해야 하는 '탐욕의 시대'를 50% 할인한 가격으로 내놓는 모습을 보니 이름도 잘지어야 겠구나 싶다. 또한 좋은 책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에 뜻하지 않은 페이퍼를 쓰게되었다...

 

물론 제대로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책이 어디 이 책 뿐이랴...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들 중 그 자격이 없는 책이 베스트셀러 행세를 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책의 가치 평가는 개개인이 하는것이지 객관적인 잣대로 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 혹은 고전이라는 대접을 받는 책들은 많이 팔린다고해서 그 자격을 얻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만한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인정받는데 어려움이 있는 책들이 여전히 많다. 독자들이 득서를 하는 이유와 그 목적이 서로 다른 것이 이유일까...여하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더 좋은 책이 밀려나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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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베스트셀러라고 다 좋은 책은 아니라니까요.
서점의 논리는 시장의 논리와 같아 기본적으로 잘 나가는 책을 밀어주지
좋은 책을 밀어주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좋은 책은 일케 독자에 의해 입소문을 타야한다는 거죠.ㅋ

차트랑 2012-03-02 00:00   좋아요 0 | URL
시장의 논리가 서점가에도 적용이 되다니...
좀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시장의 논리가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게 하는 이유인데...말이지요ㅠ.ㅠ
 

 

대학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잘 아시다시피 근대까지 거의 필독 항목이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학문과 지혜의 근간을 이루는 필독서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에 있는 8조목은 대학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차도 널리 알려진 자기 발전의 단계로 유명한 문구이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치고 대학을 읽지 않는 선조들은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대학의 소중한 가르침은 그 어느 현대의 학문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늘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주자라는 인물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그 어떤 인물의 주석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했고 조선의 학문은 결국 공자의 학문이라기보다는 주자의 학문으로 통했다. 특히 조선 중 후기로 오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뚜렷해진다. 

 

 

 

 조선의 성리학을 읽으면서 빠트릴 수 없는 항목은 양명학이 아닌가 한다. 깉은 뿌리를 가진 학문이면서도 기존 유학에게 철저하게 배타당하고 짖밟힌 학문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학지행합일을 강조하면서 실천의 중요성을 설파한 명나라의 왕수인은 국가의 재정이 흔들리자 불안해진 정권에 국가와 백성이 모두 함께 공생하는 실천적 제도를 주창한다. 그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었으면서도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위정자들이라면 기꺼이 박수를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기득권의 유학자들이자 정부의 관료들에 의하여 그의 구제책들은 철저히 묵살되고 그를 반대하는 기득권세력에 의하여 작위와 세습봉록마저 박탈당했지만 사후 신원되어 공자의 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안았다.


 조선에서처럼 유학을 지배의 철저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던 중국에서조차 그런 홀대를 받았던 양명학은 조선에서는 여지없이 사문난적으로 간주된다. 정치세력과 지배세력은 물론  왕권마저도 위협하는 신권을 획득한 조선의 선비들은 왕수인을 철저히 배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왕수인의 양명학이 전파된다면 조선의 지배 근본이념에 혼란을 가져올 곳것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던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백성을 위한 정치란 백성의 굶주림을 해소시키는 등,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자면 복지정책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노비를 가지고 막대한 토지를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이루고 있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백성의 복지정책이란 곧 자신들의 손해를 뜻했다. 백성들이 글자를 알고 지식을 획득한다면 자신들의 부조리를 파헤칠 것이고 이는 백성들의 반란, 즉 선비양반들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뜻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담시키고 있다는 부조리에 대한 반발은 절대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조선의 노비는 대략 30%였다고 한다. 보수를 줄 필요가 없는 노비들의 노동력이야말로 노동을 하지 않던 조선 선비들에게는 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군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노비와 천민등도 물론 군역의 의무는 없었다. 국가가 노비와 천민등은 국가의 보호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노비에게 군역을 지울 경우 자신들의 노비를 군역으로 내보내야 했는데 이 또한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재산의 손실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양민이라고 부르는 농민들만이 등골이 휘어지곤 했는데 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가곤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러한 정치적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설파하는 학문이 바로 양명학이었으니... 과연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 양명학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루어주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을 수밖에... 까딱 잘못하다가는 조선의 신분 질서는 물론이고 사회의 대 혼란을 예고할 수도 있는 학문이 아니던가... 이는 조선에 사문난적이라는 용어가 왜 탄생하게 되었으며 조선의 선비들이 그 사문난적을 사사하여 죽음에 이르르게 하면서 까지 그들 유일한 가치로서의 골수유학을 고집했는지의 이유가 된다. 이러한 이유들은 百家의 학문에 능했던 조선의 학자 정제두선생이 교과서나 교양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정제두선생께서 지은 논어해, 맹자설, 대학설, 중용해들을 연구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제두선생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으며 알라딘에서 검색되는 도서는 두어 종 뿐이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막시즘의 마르크스와 같은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한 종교 일파의 교주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조선의 신비들 대부분은 주자에 죽고 주자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문난적의 출현이다. 주자의 해석과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기타의 모든 이론들은 사문난적이 되어 처결해야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퇴계 이황과 경대승의 관계 그리고 송시열과 윤휴의 학문적 대립각이다. 


송시열은 주자 맹신자라고 해도 과언아 아니었다. 윤휴는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라고 설파했다고 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치부했고 결국 서인들은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단초가 되고 만다.

 주자이론의 교조적 현상이 왜 위험한 것이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다르다하여 생각이 다른 타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대적 비극은 주자라는 인물에 대한 교조적 맹신에서 오는 편협함이다. 


학문의 절정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아 아닌 조선의 신비들이 생각이 다른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야만 자신들의 강건한 사상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사상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들어내는 역사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현대의 정치적 형태로 본다면 일당 독재의 공산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주자의 사상이 지배계급이 하위계급을 통제하고 다스리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 조선 중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전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회적 현상이 지속된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기득권을 더욱 튼튼히 하기위한 결정적인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그 학문은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의 방향을 어떻게 지향하느냐는 사회적 비극이 될 수 도 있고 복지가 될 수도 있다. 대학을 읽으며 주의할 점은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 생각한다. 대학의 문구인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바꾸어가면서 사상적 바탕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정자와 주자의 학문은 동기 자체가 매우 불순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상은 사상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며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왕부지의 대학이 주자의 주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그러나 기타의 견해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견해란 사회의 활력이다.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에 입각한 학문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희가 전력을 기울여 경서들을 연구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할 수 있다. 

 특이 한 점은 기존의 유학적 관점과는 달리 그는 기(氣)를 구체적인 사물이라고 보고, 이(理)를 기(氣)에 종속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즉, 구체적인 사물인 氣를 벗어난 理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는 김용옥선생의 기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기와 이를 하나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왕부지는 중국 유물론의 정점을 차지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중국의 ‘氣思想’은 1600여년에 걸쳐 중국의 유물주의 철학사를 완성하게 된다고 하는데 왕윤에서 출발하여 왕안석 그리고 왕부지를 거치면서 그 절정에 다다른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氣論이 왕윤에서 싹이 터 왕부지에서 완성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의 사상은 모택동에게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왕부지의 중화사상은 중국 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러한 왕부지의 중화사상을 이용,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중국의 속국 혹은 변방국으로 강제 편입시키거나 소수민족을 중국으로 강제 편입시키는 등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이 역시 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쾌한 일임에 분명하다. 과연 학문은 정치의 시녀노릇을 언제까지 계속해야하는 것인가 라는 회의감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사정은 이러하지만 대학을 순수한 학문을 위해 일독하려하시는 독자들께는 왕부지의 해석이 주자의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으나 독자들에게 대학의 또 다른 이해를 돕는데 일조하리라 믿는다. 공산당 선언도 그 순수한 의미에서 공부한다면 그 공산당 선언이 과연 어떻게 정치적로 이용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권력자들에게 부적절하게 이용당하는 사상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 순수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사상의 순수성은 존재하지만 그 사상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 엘리트들에게 그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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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야는 거의 지식이 없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2-28 08:19   좋아요 0 | URL
저도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기 철학분야는 이제 막 관심을 가진 정도에 불과하구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뇨고양이님

마립간 2012-02-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철학 연구'가 마음에 드는데, 목차를 보니 내용이 방대하군요. (아니면 소개 정도로 끝나려나.)

2012-02-28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2-2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하신대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우 만족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의철학, 이의철학을 역사적으로 발생과정을 밝힌 책으로는
장입문의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철학이라는 것이...
한번 시작을 하면 대책이 없을 정도로 확산되는 성질을^^

낭만인생 2012-02-2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기철학을 잘은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이 아닌 듯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 좀더 많은 기철학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차트랑 2012-02-29 00:37   좋아요 0 | URL
어구 낭만인생님
저도 기철학에대해서 관심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 잘 아는 바가 없답니다.
그러나 좀더 공부하게되면 페이페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낭만인생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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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이 책을 모두 7개의 파트로 구분하여 제목을 붙였다. 첫 번째 글은 저자의 기철학에 대한 시론을, 두 번째 글부터 5번째 글은 저자의 논고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일본어의 표기법에 관한 글이다. 첫 번째 글의 기철학 시론에서 저자는 동양사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사상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의 기철학은 모든 것의 유기적인 관계의 통합, 즉 몸이라는 것의 일원화이다. 세계 질서와 문화의 다원화를 인정하는 시대적 흐름으로 본다면 다원화 속에서의 일원화라는 개념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라는 명제로 이해한다면 소통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사고를 저변에 깔고 진화해온 서양철학과 대조되는 사상이며 새로운 개념으로서 김용옥의 기철학이다.

 

2번째 글부터는 자신의 논고를 수록한 글들이다. 하버드대학교의 박사과정에서 발표한 논문 뿐 아니라 각 대학에서의 연구과 언론사의 학술지에 게재한 글들이다. 이 글들은 일관된 방향성과 목적성을 분명하게 밝힌 글들로서 제목이 주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의 성과물들이다.


결과적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의 내용과 전문성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면 첫 번 째 글은 기철학에 대한 시론을 소개한 글이라 볼 수 있고 2번 째 글(저자의 첫째 글)부터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고들이라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깊지 않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읽어나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장을 만나게 된다. 그 장은 바로 논고의 세 번 째 글인 ‘中央學界에 있어서의 中國哲學史記述의 轉換’이다.


氣哲學 試論을 이끈 장에서는 기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 章이라고한다면 나머지의 논고들은 동서양의 철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광범위하면서도 뿌리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저술된 논고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225쪽에서 262쪽에 이르는 ‘中央學界에 있어서의 中國哲學史記述의 轉換’은 우선 한자를 상당히 사용한 글이며 그 내용도 중국 철학과 서양철학의 유물론과 관계하는 부분이면서도 상당한 이해도를 요구하는 장이기에 일반 독자인 나에게는 읽어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의 장들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본다. 저자는 글을 읽는 순서를 약간 재조정해주고 있다. 이점을 참고한다면 이해를 돕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 같다. 논고들의 목적은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후학들에게 주는 일종의 조언이라 할 수 있다. 후학들이 고전을 어떠한 자세로 번역에 임해야하고 연구해야 할지를 자신의 주장을 실은 글들이다.


철학과 사상의 중요성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양의 고전은 4書 5經을 일컬으며 그 고전들은 철학사상을 담고 있다. 철학 사상을 어떻게 하느냐는 저자에게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면서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요체이다. 사상은 시대를 거쳐가면서 세계의 역사에 그 흔적들을 남긴다. 저자는 한국의 철학 연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동시에 서양의 칸트, 헤겔, 니체 그리고 괴테에게 히틀러의 죄악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철학사상은 주변 사회에 영향을 끼칠 뿐만아니라 전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는 무기와 다름이 없다. 나아가 철학적 사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로 저자가 밝혀두고 있는 점은 ‘새로운 혁명적 인간학’을  향한 방향점이다. ‘무엇을 하느냐’는 사실 중요한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즉 누구를 위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의 방법론에 대한 올바른 방향설정이 없는 연구가 그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지가 담긴 매우 귀중한 책이라 하겠다. 고전에 대한 이해의 방법론, 인용의 방법론 즉 연구의 전반적인 방법론을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해가는 이 책은 비단 철학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양철학이 가지는 함의의 포괄성은 저자가 강력하게 지적하는 부분인데 포괄적이고 입체적이며 다각적인 고전의 함의를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본질적으로 학계에만 국한되는 한계성을 넘어선다. 연구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지만 그 연구를 일반 대중들에게 적절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합목적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위한, 인류를 위해 학계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주는 논고들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인식이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잘못된 인식이 전파되어 사회로 흡수될 때 뒤따라오는 현상들은 해당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부정적 결과물을 내놓게 마련이다. 편견과 오류는 개인을 파괴하고 심지어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무기와 같다. 그러므로 사회와 문화가 발전할수록 철학과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동서양 철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수 전제이다.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바른 연구의 지향점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싶다.



독자들에게 이 책이 주는 의미

동양의 고전에서 드러나는 철학은 서양의 그것 과는 매우 다르다. 인간이 존재하는 우주관이 특히 그것이다. 동양 사상의 우주관은 실체와 현상을 이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현상을 초월한 실체에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체의 초월성을 바탕으로하는 이데아론적 기하학적 사유나 절대적인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는다. 서양의 찰학적 사조가  헤겔 그리고 막스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본체와 현상의 이원론적 구조가 서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적 도그마가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의 철학은 기하학적 사유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동양은 공간조차도 시간적으로 파악하는 특이성을 가진 철학이기에 그러하다. 공간적 개념의 절대성을 맹신하지 않는 탓이다. 이러한 동서양의 철학적 구조를 일반 독자들에게 파악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저자는 매우 깊고 폭넓은 동서양 철학을 끌어와 논고안으로 개입시키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한자들은 한자와 자주 접하지 않는 젊은 독자에게 독서의 어려움을 줄 수고 서양 철학적 배경을 상당히 요구하는 문제도 이 책의 단점으로 작용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동서양의 철학적 배경 지식의 유무를 떠나 매우 유익한 책이 되리라 생각한다. 배경지식이 밝은 독자들이라면 가독성이 높다는 이점이 있고,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독서 방향을 이끌어가는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 고 있듯이 눈에 띄는 고전들과 서양철학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책을 읽어가면서 포착한 고전과 철학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책을 읽는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신의 시각과 통찰력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독서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기철학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 논고들이 후학들에게 유익하고도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듯이, 이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독서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줄 수 있는 매우 유익한 도서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저자의 후학들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에 매우 깊은 경지에 이른 저자의 견해를 상당부문 수용한다 한다면 올바르게 고전을 연구하고 발전시켜가는데 도움이 크리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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