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잘 아시다시피 근대까지 거의 필독 항목이었다. 과거 시험이라는 점은 제쳐두고라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학문과 지혜의 근간을 이루는 필독서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에 있는 8조목은 대학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차도 널리 알려진 자기 발전의 단계로 유명한 문구이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치고 대학을 읽지 않는 선조들은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대학의 소중한 가르침은 그 어느 현대의 학문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늘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주자라는 인물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주자의 해설은 그 어떤 인물의 주석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했고 조선의 학문은 결국 공자의 학문이라기보다는 주자의 학문으로 통했다. 특히 조선 중 후기로 오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뚜렷해진다.
조선의 성리학을 읽으면서 빠트릴 수 없는 항목은 양명학이 아닌가 한다. 깉은 뿌리를 가진 학문이면서도 기존 유학에게 철저하게 배타당하고 짖밟힌 학문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학지행합일을 강조하면서 실천의 중요성을 설파한 명나라의 왕수인은 국가의 재정이 흔들리자 불안해진 정권에 국가와 백성이 모두 함께 공생하는 실천적 제도를 주창한다. 그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었으면서도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위정자들이라면 기꺼이 박수를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기득권의 유학자들이자 정부의 관료들에 의하여 그의 구제책들은 철저히 묵살되고 그를 반대하는 기득권세력에 의하여 작위와 세습봉록마저 박탈당했지만 사후 신원되어 공자의 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안았다.
조선에서처럼 유학을 지배의 철저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던 중국에서조차 그런 홀대를 받았던 양명학은 조선에서는 여지없이 사문난적으로 간주된다. 정치세력과 지배세력은 물론 왕권마저도 위협하는 신권을 획득한 조선의 선비들은 왕수인을 철저히 배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왕수인의 양명학이 전파된다면 조선의 지배 근본이념에 혼란을 가져올 곳것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것이 그토록 두려웠던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백성을 위한 정치란 백성의 굶주림을 해소시키는 등, 현대적인 용어로 풀이하자면 복지정책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노비를 가지고 막대한 토지를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이루고 있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백성의 복지정책이란 곧 자신들의 손해를 뜻했다. 백성들이 글자를 알고 지식을 획득한다면 자신들의 부조리를 파헤칠 것이고 이는 백성들의 반란, 즉 선비양반들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뜻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담시키고 있다는 부조리에 대한 반발은 절대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조선의 노비는 대략 30%였다고 한다. 보수를 줄 필요가 없는 노비들의 노동력이야말로 노동을 하지 않던 조선 선비들에게는 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군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반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았다. 노비와 천민등도 물론 군역의 의무는 없었다. 국가가 노비와 천민등은 국가의 보호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노비에게 군역을 지울 경우 자신들의 노비를 군역으로 내보내야 했는데 이 또한 선비들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재산의 손실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양민이라고 부르는 농민들만이 등골이 휘어지곤 했는데 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가곤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러한 정치적 부조리를 개선하고자 설파하는 학문이 바로 양명학이었으니... 과연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 양명학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루어주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을 수밖에... 까딱 잘못하다가는 조선의 신분 질서는 물론이고 사회의 대 혼란을 예고할 수도 있는 학문이 아니던가... 이는 조선에 사문난적이라는 용어가 왜 탄생하게 되었으며 조선의 선비들이 그 사문난적을 사사하여 죽음에 이르르게 하면서 까지 그들 유일한 가치로서의 골수유학을 고집했는지의 이유가 된다. 이러한 이유들은 百家의 학문에 능했던 조선의 학자 정제두선생이 교과서나 교양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정제두선생께서 지은 논어해, 맹자설, 대학설, 중용해들을 연구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제두선생에 관한 연구는 활발하지 않으며 알라딘에서 검색되는 도서는 두어 종 뿐이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막시즘의 마르크스와 같은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는 마치 한 종교 일파의 교주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조선의 신비들 대부분은 주자에 죽고 주자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상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문난적의 출현이다. 주자의 해석과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기타의 모든 이론들은 사문난적이 되어 처결해야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퇴계 이황과 경대승의 관계 그리고 송시열과 윤휴의 학문적 대립각이다.
송시열은 주자 맹신자라고 해도 과언아 아니었다. 윤휴는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라고 설파했다고 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치부했고 결국 서인들은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단초가 되고 만다.
주자이론의 교조적 현상이 왜 위험한 것이었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다르다하여 생각이 다른 타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대적 비극은 주자라는 인물에 대한 교조적 맹신에서 오는 편협함이다.
학문의 절정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아 아닌 조선의 신비들이 생각이 다른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야만 자신들의 강건한 사상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은 그 사상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들어내는 역사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현대의 정치적 형태로 본다면 일당 독재의 공산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주자의 사상이 지배계급이 하위계급을 통제하고 다스리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 조선 중 후기로 접어들면서 중국에서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여전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회적 현상이 지속된다. 이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기득권을 더욱 튼튼히 하기위한 결정적인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그 학문은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의 방향을 어떻게 지향하느냐는 사회적 비극이 될 수 도 있고 복지가 될 수도 있다. 대학을 읽으며 주의할 점은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 생각한다. 대학의 문구인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바꾸어가면서 사상적 바탕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정자와 주자의 학문은 동기 자체가 매우 불순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상은 사상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며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왕부지의 대학이 주자의 주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그러나 기타의 견해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견해란 사회의 활력이다. 그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의식에 입각한 학문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희가 전력을 기울여 경서들을 연구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할 수 있다.
특이 한 점은 기존의 유학적 관점과는 달리 그는 기(氣)를 구체적인 사물이라고 보고, 이(理)를 기(氣)에 종속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즉, 구체적인 사물인 氣를 벗어난 理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는 김용옥선생의 기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기와 이를 하나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왕부지는 중국 유물론의 정점을 차지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중국의 ‘氣思想’은 1600여년에 걸쳐 중국의 유물주의 철학사를 완성하게 된다고 하는데 왕윤에서 출발하여 왕안석 그리고 왕부지를 거치면서 그 절정에 다다른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氣論이 왕윤에서 싹이 터 왕부지에서 완성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의 사상은 모택동에게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왕부지의 중화사상은 중국 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러한 왕부지의 중화사상을 이용,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중국의 속국 혹은 변방국으로 강제 편입시키거나 소수민족을 중국으로 강제 편입시키는 등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이 역시 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쾌한 일임에 분명하다. 과연 학문은 정치의 시녀노릇을 언제까지 계속해야하는 것인가 라는 회의감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사정은 이러하지만 대학을 순수한 학문을 위해 일독하려하시는 독자들께는 왕부지의 해석이 주자의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으나 독자들에게 대학의 또 다른 이해를 돕는데 일조하리라 믿는다. 공산당 선언도 그 순수한 의미에서 공부한다면 그 공산당 선언이 과연 어떻게 정치적로 이용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권력자들에게 부적절하게 이용당하는 사상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 순수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사상의 순수성은 존재하지만 그 사상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 엘리트들에게 그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