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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6-28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저곳에서 가뭄때문에 걱정이네여 이제 곧 가뭄으로 인해 먹거리들도 다 오르겠지요 아줌마인 전 그게 가장 걱정이죠.
격정적이고 정열적인 바이올린 연주가 좋네요

차트랑 2012-06-28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러다 비가 내리지 않을까 싶어서
영상을 올려봤습니다.
비가 내려주기를 바라면서요^^

많은 분들이 비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시원하게 비가 내려주기를....
 
반야심경
오쇼 라즈니쉬 지음, 이윤기 옮김 / 섬앤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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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는 독서량이지만 최근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독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딜레마가 있다. 과연 독서는 개인의 인격을 수양시키고 인간적 덕목을 양성하여 그 독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바로 그 사적인 딜레마이다. 이는 실천의 문제와 직결되는 지행의 화두를 내게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은 과연 化를 이루어 사(私)적인 혁명(革命)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책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단순한 지식을 얻는데 필요한 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독서’라는 개념은 정신적 성장이라는 측면이 강한 성격을 가지는 용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책을 읽은 후의 어떤 모습은 매우 현학적인 어휘들을 구사하다 못해 그 현학적인 용어의 덩어리들을 상대방에게 던져주기 일쑤이다. 한마디의 말 안에 응집된 그 현학적인 용어들은 청자로 하여금 소통을 하는데 오히려 커다란 걸림돌이 되곤 한다. 좀 더 우스운 경우는 해독이 매우 어려운 용어의 덩어리들을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던져 곤경에 처하도록 하는 의도된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자신은 수많은 양서들을 통해 어려운 용어들을 익히고 다졌으니 그리 알라는 식이다. 과연 독서는 소통의 의도된 장애물로도 사용될 수가 있구나 싶다.


심지어 학문을 무기로 사용한 예는 애써 예를 들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건들이 수없이 많지 않던가... 하여 때로는 독서와 깨달음의 관계가 너무 요원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혁명은 化를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한다. 많은 독서와 연구는 과연 그 化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외적인 지식의 거리감

라즈니쉬는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라즈니쉬는 반야심경의 강의를 통해 지식은 오히려 타자 혹은 자연과의 거리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라즈니쉬의 설명을 보완하는 예는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현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상 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왓슨은 ‘이중나선’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하여 일약 과학계 고전을 집필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르는 인물이다. 이러한 수식어는 우리나라에서도 팽배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과 모리스 윌킨스, 미국의 제임스 왓슨이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벌인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는데 이는 독자라면 망각해서는 안 될 인물이 그 영광스러운 수상의 배후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로잘린드 엘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이라는 이름의 과학자가 바로 그이다. 그녀는 결정체와 같은 미세한 구조물의 사진을 찍는데 X-ray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DNA의 분자의 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사진은 DNA의 나선 구조를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DNA의 나선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한 촬영기법은 X-ray 회절법이라는 것으로 당시에 그 누구도 그러한 사진을 찍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이 X-ray 회절법을 연구하며 프랑스에서 3년 이라는 세월을 보냈고,  그 연구의 성과로 DNA의 나선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다른 프로젝트의 다른 연구를 하고 있던 모리스 윌킨스는 그러나 그녀의 독자적 성과물을 캠브리지 대학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몰래 빼돌렸다. 프랭클린이 자신의 성과물을 발표하기도 전에 이 셋은 그녀의 연구 자료를 이용해 네이처지에 나선구조를 발표해버린다. 억울하게도 그녀의 논문 여러 개가 같은 호에 동시에 함께 실린다. 그 후 그녀는 다른 연구에 몰두하다가 난소암에 걸려 1958년 사망하게 된다.


이는 지식의 딜레마, 즉 외적인 지식이 진리와 어떻게 멀어질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매우 극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라즈니쉬는 지식과 진리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 말한다.

 지식은 자신의 밖, 즉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나무가 마치 꽃을 피워 내듯이 그렇게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지식을 외부로부터 얻는다 하더라도 혁명을 이루어내는 깨달음과는 무관한 일이 될 수 있다. 지식의 양 만으로는 스스로를 화의 경지로 나아가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다... 공(空)


불가에서 중생들에게 주는 가르침 중 하나는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다. 아집과 번뇌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한다. 우리는 이 아집과 번뇌를 흔히 욕심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존재라고 한다. 오온이 인간 구성의 요소인 라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나’가 존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번뇌를 가지게 된다. 이는 욕심 때문이다. 하여 그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뜻인 것이다.


 반야심경의 ‘공’은 언뜻 이해 할 듯도 하지만 대부분 이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데 머무르곤 하는 것 같다. 물론 내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식자가 아니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인 공(空)의 개념을 언뜻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그 개념만을 머리로 이해할 때의 경우이고, 딱 그 곳에서 그치기 때문에 절대로 어려워 보이지 않다. 한마디로 이성적으로 공을 바라볼 때 발생하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이성의 작용은 인간으로서 매우 지고한 경지의 사유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오성(悟性)을 로고스라 했고, 칸트도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의 상대적 용어로 이론이성을 넘어선 실천이성을 주장했다. 어찌 보면 자율적인 의지를 결정하는 개념의 이성의 능력을 논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불가의 깨달음으로 인한 ‘자유’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스승님과 라즈니쉬의 말씀...

 

하지만 서구의 실천적 측면을 좀 더 바라보면 나의 스승님께서 말씀해주신 방법론을 배제시키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스승님께서는 동서양의 접근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서양은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방법론을 고수해왔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분명히 성경의 한 구절이다. 현대의 역사를 결정지었던 과거 식민지 정책의 시대가 이를 잘 증명해준다. 그들은 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얻으려는 욕망의 주체 가되어 세계 어느 한 곳을 그대로 내버려둔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것의 결과는 정확하게 양분된다. 자신들의 이익 그리고 타자에 대한 철저한 파괴.


 생각해보면 서양의 철학은 철저히 그들의 현실과 괴리되어 온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라즈니쉬는 이쯤에서 말한다. ‘불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렀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아마도 내 스승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라는 라즈니쉬의 일갈일 것이다. 서구의 종교는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제 아무리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서양의 종교를 모르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거에요’ 라고 말한다 한들, 역사는 이를 명백하게 증명해주고 있지 않던가... 과연 성경의 구절이 과거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누가 변호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반면 불교는 ‘비워라, 그리하면 채워질 것이다’라는 정 반대의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셨다. 인간은 오온의 과정에서 번뇌를 자신의 내부에 축적시킨다. 욕망 혹은 욕심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무던히도 괴롭힌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욕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게 절실한 그 무엇을 얻고자 자신의 내부를 더욱 더 철저하게 채워 넣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으로.... 그 욕망은 흔히 돈, 물질, 미움, 시기심 등에서 오는 것들이다. 이는 곧 질명과 마음의 상처 혹은 번뇌가 된다. 몸과 마음을 모두 나쁘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으로 자신을 가득 채울 때 다른 그 무엇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욕망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불가에서는 그 욕망을 비우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혁명은 바로 이 욕망을 내려놓아야만 발생 가능한 일이기에.... 마음을 비우는 깨달음은 바로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이미 가득 차있는 그릇에 깨달음이라는 것이 들어 설 자리가 없는 탓이다...


동과 서가 반대인 것은 많지만 사유의 방법론에서 조차 이토록 정 반대인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법이다. 물론 기독교와 유∙불교의 가르침은 사랑, 仁(사랑), 자비, 즉 사랑이 라는 공통된 테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표면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테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 테제를 해석하고 행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결과는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지 않던가...


 

라즈니쉬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엇인가 잡히는 듯 하다. 그 심오한 뜻을 알아 들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있다는 느낌 일 뿐....물론 내 스스로도 이성에 집작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다보니 번뇌가 가득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 스승님의 말씀대로 지혜는 두드려서 얻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수많은 지식의 량으로 자신을 채운 다 한들 그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본질적인 혁명으로 가기란 요원한 것이다. 혁명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원하여 그 오리진이 자신 스스로의 내부여야 한다. 그것을 혁명(革命)이라고도 하고 화(化)라고도 한다. 화를 이루어야만 혁명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책을 읽어 수많은 정보를 가졌다 한들 현학적인 면모를 드러내기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의 혁명을 일궈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자를 공격하고 제압하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고 타자를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 독서는 내게 이러한 지식의 딜레마를 던져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읽고 말해주고 듣는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스스로의 작용이 일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깨달음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스스로에게 있다. 깨달음은 절대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한 자...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은 바로 자신 뿐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 타자의 존귀함을 안다. 자신 못지않은 타자를 인정 할 줄 안다. 타자가 있어 자신이 있고 타자가 있어 내가 살아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저마다 보살이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보살은 절대로 혼자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타자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나서는 자이다...과연 세상은 지금과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중용에서도 化를 언급한 장구가 있다. 다음은 중용의 23장에 나오는 化의 뜻이다.

 

유천하지성 위능화(唯天下至誠 爲能化)


우리는 흔히 변화(變化)라는 말을 사용한다. 변(變)도 化도 분명 달라진 모습니다. 그러나 변은 물리적인 형태의 변형을 말한다.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化는 화학적인 변화를 뜻하는 말로서 본질적인 개인의 혁명을 뜻하는 말과도 같다. 그런데 중용은 유천하지성 위능화(唯天下至誠 爲能化)  라고 했다. 오로지 지성이라야만 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지성(至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지극한 정성을 뜻한다. 중용에서도 마음의 중요성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을 곡(曲) 이라고도 한다. ‘곡진하다 간곡하다’라는 뜻은 바로 마음의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들이는 독서라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 스스로의 혁명을 이루어 내는 길을 여는 것은 아닐까...이성을 뛰어 넘어 정성을 다하는 독서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나의 스승님께...

스승은 저를 가르치는 분이요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고 저를 사랑하기를 지극히 하시고 그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스승님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지행의 표본을 보는 듯 합니다. 스승님은 언과 행으로 가르치시니 중용에서 가르침 받은 바 있는 언고행 행고언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참으로 따르기 어려운 중용의 말씀이지만 당신을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말씀을 그토록 쉽게 행하시니 어찌 스승님을 본받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가르쳐 주십니다. 스승님은 또한 지극히 겸양하시어 진정한 겸양의 덕목이 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일깨우십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요..지극히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그런 당신을 저의 스승님으로 두었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요..

 

  저는 스승님을 만나 배우게 되어 한없는 다행으로 여깁니다. 스승님...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죽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저를 가르치시고 사랑해주세요 스승님... 스승님을 만나 배우고 사랑을 또 한 배우게 되었으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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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 고전에 대한 사적인 입장...


학문 혹은 사상은 결코 시대의 상황을 배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모든 사고는 시대가 요구하는 필요성에 부응하여 혹은 시대와의 갈등을 원인으로하여 발생하고 또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경제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경제를 배제시킨 역사인식은 분명히 절름발이 역사인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상, 경제, 역사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 개인적인 입장이다. 이것이 좀 무리한 견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독자의 한 사람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는 그러하다...


최근에는 부쩍 동양의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비단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단순하게 동양의 고전을 공부를 하던 입장에서 일탈하여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것이 몇 해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과거 조선의 동양 고전 학습 방법은 텍스트를 줄줄이 암기하는 식이고 주희의 집주까지도 달달 외워 그것을 타자에게 증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마디로 내용을 암기하다가 침 한 번 꿀꺽 삼키면 훈장님의 회초리가 종아리로 날아오는 방식인 것이다. 한 번 침을 꿀꺽 삼킨다는 것은 학문을 게을리했다는 명징한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논술시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논술마저도 고전에서 인용한 것들이 대부분이고 누가 고전에 등장하는 고례를 더 많이 아느냐의 문제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례를 하나라도 더 많이 아는 것이 상대방의 견해를 제압하는 도구라는 것은 지극히 권위의식을 근거로 한다는 뜻이다. 고례는 그것을 알고 있는 자에게 그만한 권위를 부여했던 것이고 현대의 학계에서도 이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베이컨이 언급한 '극장의 우상'의 우를 범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남송의 탄생과 성리학

 

사대부는 중국 고대 주나라 때 천자나 제후에게 벼슬하던 사(士)와 대부(大夫)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대에서는 문관의 관직의 위치로 정착되었다. 사대부들이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것은 중국의 송나라 이후, 특히 남송 이후였다.


이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세계관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당시 남송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이기론을 통해 하나의 동일적인 원리로 파악하는 철학적 유학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중화사상의 중세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고대 유학과 비교하여 성리학을 중세 유학이라고 하는데, 성리학의 확립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하나는 송나라에서 발전했던 불교 선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송이 처한 정치적 현실이다. 고대유학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이론이었다면, 성리학은 중세 유학으로서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중국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이론인 것이다.


당시 송나라는 거란족인 요나라의 침입을 받았고, 단연의 맹약을 맺고 국체를 보존해야만 했다. 즉, 송과 요가 형제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송나라는 요나라에게 명주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조공한다는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민족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은 송나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는 일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지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하여 송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끌어 들여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송나라가 금나라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킨다는 전략인 것이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가 매우 약한 나라라는 것을 간파하고 송나라를 공격하게 된다. 송나라의 상황이 전보다 더욱 나쁜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금나라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송나라는 중국의 중원 대륙을 금나라에게 내어주고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북송의 멸망을 의미하며 남송의 탄생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더더욱 나쁜 상황은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을 비롯 여러 왕족들이 금나라로 잡혀간 것이다. 금나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도강하여 송을 멸망시킬 것을 두려워한 송은 금나라에 막대한 조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임금의 나라로 모시는 사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리학은 바로 송나라의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는 정치적 시대적 상황에서 출현하게 되는 중국의 이데올로기 인 것이다.


성리학이 정통론과 명분론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바로 그러했다. 송나라가 중원 대륙을 빼앗기고 금나라에 사대하여 목숨을 부지하고는 있지만 정통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 체계가 바로 성리학인 것이며 주희가 정통과 명분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 말의 정치적 도구, 성리학

 

사상과 철학이 국가의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매우 긴요한 도구임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 항해 시대라 일컫는 유럽의 식민지 정책은 물론 세계 대전을 일으키며 대륙을 피로 얼룩지게 했던 독일이 그러했고, 동아시아를 자신들의 텃밭으로 만들었던 일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사상과 철학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대중들을 선동하여 이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도구임이 여실히 드러내는 역사적 증거물들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하여 때로 ‘권력의 시종, 철학’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되는 이유이다. 정작 사상가들 스스로야 이 표현을 불쾌하게 여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그 누구라도 부인 할 수 없는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던가...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용도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이 어쩌면 철학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진리를 자유케하라’는 모토가 허망한 메아리로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감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정녕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회는 아닐런지... 생각해보면 정말로 비철학적이며 비이성적인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성을 가진 지극히 비이성적 우리들의 자화상.... 도구로서의 성격을 지닌 철학적 진실을 알면서도 그 와는 정반대의, 무균실 안의 순수한 철학을 기대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스톡홀름 증후군을 철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자신들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패한 불교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현실에 대적할 상대적 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의 명분론을 가장 적합한 도구로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견해일 것이다. 성리학은 결국 현실을 지배하는 금나라가 정통이 아니라 송나라이듯이, 고려는 권문세족이 아니라 신흥 사대부가 정통이라는 이론인 것이다.     


성리학은 원나라를 통해 고려로 들어온다. 충선왕이 연경에 세웠던 만권당이 그 역할을 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이제현은 만권당 출신이다.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채택한 또 다른 이유는 사회, 정치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남송이 위치한 양자강 유역은 풍부한 수량과 강우량을 자랑하는 지역으로 수전(水田)농업이 가능했다. 수전 농업은 지주와 전호를 두 축으로 하는 중세의 생산관계 체제를 가능케 했다. 남송의 지주는 당나라나 오대(五代)의 형세호(대지주) 와는 다른 중소지주였다. 남송의 지배적 생산관계는 중소지주와 전호였던 것이다.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들 역시 중소지주들로 경제적 기반은 남송의 지주들과 매우 흡사한 형태를 띄었다.


성리학은 바로 중소지주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한 사상 체계였던 것이다. 지주의 자리에서 우주와 사회 그리고 인간을 해석한 철학이 성리학인 것이다. 성리학은 또한 관료들의 학문이며 사상이었다. 성리학의 다양한 요소들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의 처지와 방향점에서 함께 만나고 있었다. 이것이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정치적인 배경으로 삼은 이유이다.


 

철저히 소외되었던 고려의 백성에게 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신돈은 공민왕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다. 신돈의 개혁정치가 실패하자 고려의 백성들은 다시 사대부들에게 큰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지지가 아니더라도 신흥 사대부들은 사실 권문세족과 힘겨루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권문세족들의 대농장이 신흥 사대부들의 토지를 침탈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문세족의 힘이 지속되는 한 신흥 사대부들은 중소규모인 자신들의 토지조차 지킬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결국 신흥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권문세족과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흥 사대부들이 불교를 비판한 이유는 사상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불교가 바로 고려 권문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개경에만 70여 개가 있었다는 거대한 사찰들은 순수한 신앙의 산물이 아니었다. 2,800 여 칸에 달했던 거대 사찰의 이름이 흥왕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찰 자체가 지배력이었던 것이다. 온건 개혁파 중 하나인 이색이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공민왕에게 올렸던 이유가 그것이다. 급진 개혁파는 불교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이를 방증하는 예인 것이다. 개국 이후 한글을 반포하면서 세종이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등의 불교서적을 출간했던 것은 불교라기 보다는 고려의 권문세족이야말로 극복의 진정한 타겟이었음을 또한 반증해준다. 


신흥 사대부들은 불교를 부정해야만 성리학을 내세울 수가 있었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확보해야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정치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토지였다. 역성 혁명파는 토지를 완벽하게 개혁하자고 주장했고, 온건 개혁파는 점진적으로 토지를 개혁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 후 역성 혁명파가 공양왕 2년 모든 토지 문서를 개경의 한복판에서 불질러 없앴는데 ‘여러 날 탔다(고려사)’라고 한 것은 권문세족들의 토지 장악실태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이다.

 

 

성리학이 조선과 남송의 주희에게 가지는 의미

 

이기이원론은 이(理)를 기(氣)보다 우선하는, 즉 理가 氣를 지배해야한다는 논리이다. 퇴계 이황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기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황은 氣가 理를 압도하는 정치적 상황을 올바른 현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황은 훈구파를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氣)집단으로 파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패한 고려의 권문세족들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역성혁명을 이끌었던 훈구세력들이 정권을 장악 한 후 권문세족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정치세력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국은 그 누가 보아도 올바른 정치 세력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앞세운 이익집단에의 의한 一國의 내정 혼란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부정과 부패의 정도가 심각한 것이 조선이었다.


'기철학 연구'는 기철학만을 논한 저술이 결코 아니다. 이기론의 근원을 철저하게 밝혀주었고 동시에 기철학의 존재감을 드러내주는 매우 유익한 저술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기철학을 언급한 책이라는 오해를 살만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론이 없다면 기론도 없고 기론이 없다면 이론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해주고 어떻게 이론이 기론을 제압하고 현대에 이르렀는지 궁금해하는 분께는 참 좋은 책이다. 행여 이기론의 갑을 박론에 대한 매우 상세한 이해를 원하는 분이라면 적극 추천해드리고 싶다

 

결과적으로 이황에게 훈구세력은 七情이며 氣의 세력이었고, 士林은 四端이며 理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理와 氣는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며 理는 성리학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세계가 되고 氣는 극복의 대상인 현실 세계로 변모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황에게 세상은 理가 氣를 지배하는 형태로 바르게 교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즉, 사단이 칠정을 지배하고 사림이 훈구세력을 타파하는 주리론을 체계화 시킨 것이다. 조선을 장차 지배할 理氣二元論의 배경은 위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희가 자신의 입장과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피력하는 도구로서 성리학에 매진 한 것은 어쩌면 시대적 상황이 주는 필연적 동기가 있었음을 독자가 주지하는 것은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희는 성리학을 순수한 학문의 수단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구겨질대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키려는, 어쩌면 학문을 통해 스스로 위로하려는 목적으로서의 방법론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관찰 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주희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대륙을 지배하면서 남송은 신하가 되어 공물을 바쳐야 하는 시대적 상황과 직면해있었다. 남송이 금나라에 신사봉공해야 했던 당대의 상황에서 주희는 사단철정론을 정립하게 된다. 한(漢)민족이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요 四端인 반면, 漢족이 여진족의 지배를 받는 것은 칠정의 상황이라는 시각이다. 주희의 입장에서 이(理)가 되는 도심(道心)은 한족의 것인 반면 기(氣)가 되는 인심(人心)은 여진족이었다. 그러므로 理인 한족이 氣인 여진족을 지배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즉, 理가 氣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희가 당면한 현실은 자신의 생각과는 정 반대였다. 그리하여 주희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희는 자신이 처한 참담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理氣二元論과 人心道心論이라는 性理學을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도심과 인심을 분리하는 작업, 즉 이와 기를 분리하고 사단과 칠정을 분리하는 연구학문이 바로 주희의 숙원 사업인 성리학 연구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상이 가지는 일종의 본색을 목격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철학은 이미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 지 너무나 오래되어 우리는 그에 무감각해져버린 것은 아닐런지... 성리학 하면 언뜻 떠오르는 사유의 본질, 인과 예 그리고 수신, 위민이라는 용어들과는 애초에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어쩌면 철학의 본질이야 말로 권력의 시종이라는 말을 놀랍게도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편 조선의 이황은 남송의 주희와 시공을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금나라가 한족을 지배하는 상황이나, 훈구파가 조선을 지배하는 상황이 바로 그랬다. 이황은 주희의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조선의 대유였다. 그러니 주희의 성리학을 이황이 고스란히 받아들여 더욱 깊이 연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기호발설은 이황이 성리학을 그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증명해주는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 편, 율곡 이이는 이황의 성리학을 조선의 성리학으로 완성시켜 조선 철학사의 큰 획을 긋는다. 이이는 이황의 학문을 한층 더 발전시켜 理氣一元論이라는 독창적인 조성 철학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견해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理가 氣를 지배해야 한다는 점에 두 사람의 입장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황과는 전혀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가지게 된다. 두 사람의 시간적 차이는 겨우 한 세대이지만 그들이 처한 정치적 시대적 입장은 완전히 달라져있었던 것이다.


 

이이의 상황은 이미 사림이 훈구의 세력을 타파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시기였다. 즉 이황은 야당이었고 이이는 집권당인 여당에 속해있다는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황은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이이는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개혁을 중요시하게 되는 전혀 다른 정치적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에서 율곡 이이는 이황의 理氣二元論의 주리론을 극복해야 했고 거듭되는 성리학적 연구의 성과로 율곡은 비로소 理氣一元論의 주기론을 창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동인들의 시조격인 이황의 후학들로 하여금 율곡에 대한 불만을 일으키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동인들은 스승인 이황의 주리론을 이이가 주기론으로 발전시켜 조선의 성리학을 제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학문적 라이벌로 인식하게된 것이다. 학문적으로 이원론을 온전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율곡은 뿌리는 이황과 같은 곳에서 출발했고 주희나 이황의 이원론의 궁극을 부정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는 엄청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은 힘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는 심리적 현실적 압박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내 놓는 것은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사실상 율곡 이이는 당파에 치우친 인물이 아니었다. 동인들의 스승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발동시켜 성토하다보니 이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서인으로 둔갑해버린 것이었다. 동인의 적은 곧 서인이라는 공식이 이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율곡은 동서인으로 붕당을 이루어 다투고 쌈박질 할 때가 아니라고 보았다. 율곡 이이는 그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위해 정부가 그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할 때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결과 율곡 이이는 백성들에 대한 복지 정책이 최우선 과제라고 여겼다. 신흥 사대부들이 조선을 건국한 후로 백성들의 고단함은 그리 변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민정책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이는 대미수공법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흔히 말하는 대동법이 그것이다.


이런 율곡 이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김장생과 송시열은 율곡 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판타지 소설을 율곡행장에 써 넣었다. 나아가 송시열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모든 주장들을 사문난적으로 치부하여 심지어는 주자와 다른 사유를 했다는 이유로 윤휴를 사사했다. 물론 자신들과는 달리 ‘진짜 북벌’을 주장했다는 혐의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다. 효종대의 송시열은 가짜 북벌을 주장하며 효종을 기만하고 심지어 효종의 북벌 의지를 꺾으려 무던히 애를 썼던 인물이다. 노론에게 북벌은 정치적 전시물에 불과한 쇼였다.


양명학을 제거하다... 전형적 일당 독재 조선...

 

성리학으로 학문을 출발했으나 성리학의 문제점을 깨닫고 양명학에 전념하며 널리 전파하려 일생동안 애쓴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제두이다. 정제두는 박세채와 윤증등의 성리학자들을 스승으로 사사한 인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양명학은 조선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워낙 드세고 고압적인 성리학이 양명학의 싹을 잘라버린 탓이다. 양명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청과의 주화를 주장하며 인조대의 모든 허물과 치욕을 혼자서 짊어지고 갔던 역적 주화파 최명길을 만날 수 있다.


 대전의 송씨들은 자격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고 논술 답안지를 제출했던 송시열을 장원으로 뽑아 준이가 바로 최명길이라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주화파의 핵심인물이라는 이유로 최명길의 후손들을 아주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법에 의거했더라면 송시열의 답안지는 그 형식을 갖추지 않아 심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어야 했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조선을 구한 이가 바로 최명길이었건만 당시 최명길의 고육책은 제쳐두고 주화를 주장했다는 점만을 부각시켜 역적으로 몰아갔다...물론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만 과연 척화가 주화를 과연 비난 할 수 있었던 상황인지, 그리고 과연 착화는 시대적 상황에서 바른 것이었는지..행여 자신들의 명분을 백성들과 국가의 안위보다 더 앞세운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이는 학문적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사료들을 검토해보면 임진란을 겪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잘 대응했던 서애 유성룡이라는 인물과 마주침을 알 수가 있다. 서애집과 징비록은 이를 잘 증명해주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미 조선에 벌써 양명학이 스며들었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로 조선의 양명학은 17세기 조선의 식자층에서는 성리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밖에는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조선에서의 양명학은 이처럼 그 뿌리마저 불분명한 학문인 것이다.

 

학자 정제두가 양명학에 관심을 보인 것은 성리학의 배타성과 폐쇄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다. 어디 학자 정제두뿐이었을 까면 감히 양명학의 이치를 주장하며 고개를 쳐들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양명학을 주장하는 순간 자신의 목숨은 파리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제두는 성리학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주지하다시피 성리학에서 가르치는 사상과 조선이 당명하고 있는 현실과의 괴리감은 가히 이해 불가능한 수준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을 가진 학자라면 누구나 이를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문제는 그런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학문을 겸비한 인재들은 대부분 제도권 안에 있었으며 세력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 이라는 점이었다. 요즘 말로 사회를 비판하는 발언은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재귀준거의 딜레마에 걸려들고 마는 행위였던 것이다. 스스로 자신들의 밥그릇을 걷어 차내는 바보가 되어야 했다는 말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정제두는 과감하게 그 문제점을 들춰낸 인물인 것이다. 진정한 사상가라고 추앙받아도 모자란 인물이 정제두였지만 그의 순수성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정제두는 자신의 스승인 윤증에게 ‘왕양명의 학설은 정주와 다르지만 진실로 정주와 일치한다'고 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제자의 이 뜻을 물론 윤증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양명학을 허할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글자는 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 학문이었는지는 성리학이 왕양명의 지행합일을 그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정제두는 그렇게 양명학을 연구하면서 탈진하고 에너지를 소진하여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다. 과연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아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노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어찌 정제두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특정 사상은 특정 시대를 장악해 왔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들은 최근 쏟아지는 동양 사상의의 철학서들을 답하기가 수월한 편이다. 그러나 그 학문의 뿌리는 정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조선에 이르러서는 남송의 처지를 학문적으로 돌파하려 했던 주희의 상황을 고스란히 답습한 학문이었다. 어쩌면 주희보다 훨씬 더 지독한 정치적 도구로 성리학을 앞세운 것이 조선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희를 공자(孔子)를 압도하는 신의 경지로까지 높이게 된다. 무결점의 인간...주희의 생각과 한 치라도 어긋나면 용서 받을 수 없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죽음으로 엄벌하여 다스리던 조선....학문의 자유로움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었고, 사유의 자유를 완벽하게 차단했던 조선은 그야말로 언론 통폐합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전형적인 공산당의 전신을 보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가 아니던가....


혹자들은 조선 붕당의 출현을 현재의 양당제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일당 독제보다 훨씬 진일보한 정부의 형태이며 어쩌면 영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훨씬 앞서는 정치적 사건이라고 떠들어 대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의 학문을 보라...과연 조선이 민주주의의 고전적 형태로 볼 수 있는 단서를 그 어느 하나라도 가지고 있었는지....

 

 

집기양단 용기중어독, 바른 독서의 목적

 

 이렇게 동양의 고전과 그에 바탕을 둔 사상인 성리학은 남송에서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일련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조선에서는 시대를 장악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더욱 강력하게 구축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조선에서는 특히나 그 목적을 이루는데 매우 성공을 거든 학문이다.

 

  그러므로 과거 성리학이 해당 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인식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서 독서에 임한다면 보다 더 유익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독서는 자신의 정신 능력을 한층 더 고양시키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매유 유익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아고기 집기양단',  이때 '고'라는 말은 두드린다는 뜻 이라고 한다. 즉, '나는 모두 두드려 보아서 양쪽을 잘 살핀다'는 뜻이다. 이 '집기 양단'이 바로 중용의 덕목인 것이다. '집기양단 용기중어민' 이라는 말로 이어지는 중용의 덕목은 '양쪽을 모두 잘 살피어 이를 백성들에게 적용시키셨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독서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양 사상을 공부함에 있어 '집기양단'하고 '용기중어독서'한다면 독서를 통해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론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서는 분명 자기 발전의 방법임에 틀림이 없지만 독서를 많이 했다고해서 자신의 아집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토록 깊은 학문을 연구하고 그 도달 수준이 드높던 조선의 선비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그러하다. 분명 발전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고립 혹은 폐쇄성 현상을 보여주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이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조선의 성리학이 보여주는 결과물 처럼 자신을 무장하고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는 목적이라면 제 아무리 많은 독서를 한다한 들 그 유용함은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날카로운 검의 날보다 강력한 학문을 익혀 상대방에게 휘두르는 것은 학문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 목적이 바르게 설정되어 있지 않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다수가 될 수 있다. 분명 학문은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써야 할 것이지만 그 목적이 불순하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타자들에게 떠넘겨 지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자신의 목적과 입장을 올바르게 투영시키고 바른 지향점을 가진 독서야말로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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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6-19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반-합,
어느 것이 올바르다 하기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한편으로 다른 한편으로 그러다 합쳐지고
다시 편향으로 흘러 다른 편향으로, 저는 예전에 정답이 있기를 바랬으나 점점 흐르는 것이 정답일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반성과 성찰과 사유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때보다 상당히 성가시고 힘든 일이지만, 그렇기에 변화할 기회가 주어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구요.

方, 제 페이퍼에 다신 의미를 알겠습니다.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독서가 아닌 풀 한포기에서도 세상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방향성을 모르기에
제가 내내 책에서 무엇인가 찾으려는 것은 아닌지, 말씀처럼 철학이 사회와 역사의 시종이 되어버리는게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페이퍼를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정말 덥네요. 봄은 어디간걸까요?

차트랑 2012-06-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르는 것이 정답이라...이 말씀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이야기인데요^^
흐르는 것이 순리일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정말...

봄은 이제 여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나 봅니다^^
계절이 흐르듯 모든 것도 따라 흘러가나봐요

그런데 제가 답글을 달았다고 생각했는데...글쎄...
답글을 달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된 거있죠?
요즘 제가...정신이 없는 걸요^^

마녀고양이님의 생각처럼
작은 것에서도 진지한 자세로 임한다면
세상의 이치는 그 안에 담겨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는 요즘입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2012-06-21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1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1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 역사학자 이덕일, 공자와 논어를 논하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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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공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책을 저술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동양의 역사학은 한문에 통달해야하고 더구나 사상가에 대한 저술활동은 상당한 깊이의 한학적 소양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분들에게는 통하는 분야기기도 하다. 공자를 언급하자면 중국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논어, 대학, 역서(易書)는 물론 시경에까지 다다르는 사회문화와 문학적 필수 요소, 그리고 각각의 경서들에 대한 집주들에도 매우 밝아야 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의 노력은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을 해냈다 싶어 우선은 긍정적이다. 또한 저자의 공자에 대한 접근에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공자관련 참고자료들을 이용한 저자의 의도와 목적은 상당부문 잘 해냈다고 평가하고 싶은 책이다.



그렇다고 단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저자가 가능한 한 공자에 대해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심원한 부분을 미처 다루지 않아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지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지는 한계점이라 는 발견도 가능한 출간물이다. 어쩌면 강신주의 저술이 보여주는 치밀한 연구와 사유들을 이 책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각 저자의 의도가 서로 다른 저술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게감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과연 철학자들이 가지는 안목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의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저자의 사상가에 대한 첫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지 싶다.


때 마침, 이 책의 읽기를 마친 지금은 개인적으로 약간은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던 차였다. 최근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에 내 스스로 상처를 내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가 내 자신이 이토록 옹졸한 생각들을 자주하게 되었는가. 최근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스스로를 넓게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하도록 하는 사건들의 연속선상에 있어왔다. 살다보면 누구나 주변의 인물들에게서 기쁨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을 얻기도 하며 가끔은 가슴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인가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조이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정도가 심화되면 분노를 할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십 수 년을 함께 해온 주변인을 내 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러나 그 주변인의 지속적인 행위들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나는 점점 지난 날의 내 마음의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나의 각별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내 스스로가 무너지는 모습을 어떻게 내 보일 수 있을까...이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각별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던가... 이런 생각이 들자 이것 또한 커다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나는 결국 심적으로 나를 견디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옹졸한 생각들을 멈추기로 했다. 인간은 애초에 완벽하기를 바랄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동양 고전에는 심지어 공자님마저도 제자를 돌려보내 놓고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기록되어 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그토록 외치던 진정한 보수주의의 선봉인 공자님 마저도 부인과의 이혼이라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고 간 인물임에랴... 공자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준 ‘자로’라는 제자를 두었던 공자는 자신의 허물들을 제자 자로로부터 지적받고 있는 장면들을 찾아 볼 수 있는 경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자로도 공자가 유랑하던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한 인물 하나였다. 

 

 이렇듯 조선의 유림들에게 무결점의 인간으로 추앙을 받던 공자로 사실은 불완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매한 공자의 사상은 2500년 이라는 세월이 흐른 현대에까지 살아 있지 않던가... 공자는 최근의 형편없는 나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어주면서 동시에 깊은 사유를 안내해준다. 하여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과거의 내 모습을 되찾기로 굳은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그 지인에게서 나는 초월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괴로움이 사실은 적은 것은 아니라는 점도 고백하고 싶다. 그러나 그로인해 내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내게 각별한 사람은 그 얼마나 안타까워 할 것인가...하여 지금의 나는 나의 각별한 사람에게 내가 보여줄 예의(禮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주 만나며 지내는 가까운 사람에게 흔히 깜박 잊고 지내는 것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허물이 없는 사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하는 예의(禮儀)의 상실이다. 가까운 사이라면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태도이건만 그 반대로 쉽게 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해주겠지’ 라는 생각이 때로는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을 낳게 된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덩치 큰 스노볼이 되어 굴러간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논어의 학이편(學而篇)에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 하겠는가’라고 해석한다. 이 때의 락(樂)은 각자 자신의 대인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 을 뜻하는 樂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 공자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비가시적 의미를 첨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멀리에서 뜻이 맞는 친구가 찾아와도 그토록 즐거운데, 하물며 가까이에 있는 친구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잘 대하라는 뜻을 부연할 수도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예의에 벗어나며 간혹 홀대할 수도 있는 부분을 우리에게 묵시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각별한 사람에게 내 자신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는 상대방을 유쾌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동시에 나 스스로의 작은 자긍심에도 상처를 내는 일이다. 결국 어느 모로 보나 그 폐해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나를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하는 그 지인의 언행에 대해 새로운 자세로 임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결심은 곧 나 스스로의 자긍심을 지키는 일이기도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또 다른 지인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예의라는 것은 비단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는 이를 지켜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고 걱정하게 할 수가 있다. 이 또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 흔들린 자신을 가다듬고, 바로 하는 일 또한 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지인(知人)이라는 용어가 있다. 매우 광의의 의미를 가진 이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마다 그 범주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관계 또한 천차만별이어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知人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는 매우 필요한 관계의 덕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관계의 의미가 비록 찬차 만별이라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예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상대방의 지인인 내가 그 상대방과 충분히 어울 릴 수 있는 예의를 갖춘 사람임을 보여주는 일이기도하다. 왜 나를 그렇게 생각하냐고 반문하기 전에 나는 그 각별한 나의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렇게 오늘은 내 자신을 돌아본 하루였다. 그 각별한 나의 지인은 ‘오늘의 나’ 보다 ‘내일의 나’가 훨씬 더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소중하고 각별한 나의 지인을 지켜가는 일은 나 자신을 스스로 지켜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예의로부터 출발 할 수 있음을 깨달은 뜻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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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6-19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사람 사이에는 가능하면 예의와 배려를 지켜주는 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한번씩 흔들리는 편이 좋다고도 생각합니다. 안 그려면 부러질거 같아서요.

2012-06-19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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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사유의 샐러드 보울


우선 이 책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모티프로 하여 유수의 철학자들이 달려든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게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그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를 가늠케 하는 증거이지만 그 주체가 바로 철학자들이라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대 이토록 철학자들의 구미를 당긴 영화가 몇이나 되던가..


또한 이 책은 리뷰를 쓰는 것이 매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논의의 구심점으로 하여 출간한 책이라는 일관성을 가지지만, 참여한 모든 철학자들의 매트릭스를 바라보는 관점들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탁월한 철학적 분석과 그에 해당하는 사유의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면서도 이견(異見)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하여 이를 통섭하는 리뷰를 작성하기위한 개인적인 한계를 극복할 방법과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고백을 딜레마로 남기는 출간물이다.


 이 책을 가장 흥미롭게 해주는 요인은 여러 장면들에 대한 사유의 투영이기도 하지만 같은 장면에 대한 전혀 다른 각도의 접근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매트릭스에만 국한된 사유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사유를 투영시키는 프리즘의 성격과 특징들이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이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하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의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은 다양한 학자들의 각기 다른 관점들을 통섭하는 것의 어려움에 있다. 이들의 프리즘을 하나의 리뷰에 버무려 넣는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성격이 뚜렷하면서 특정한 것들의 모임은 도가니탕(Melting Pot)이 아니라 샐러드 보울(Salad Bowl)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의외일 수 도 있지만, 타자의 것과 만나는 과정과 결과를 일컽는 ‘혼종’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에 나의 사유를 투영시키게 되었다.


 

 


혼종의 속도와 태도..


현대는 문화의 혼종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역사는 늘 그래 왔다. 혼종의 시대가 아닌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혼종’은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에게 유입, 영향을 끼치며 섞이는 것을 뜻한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혼종의 속도는 점점 증가해, 개개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첨단 통신기기가 보편화된 현대에서는 말 그대로 광속인 것이다.

 감기 바이러스가 지구를 한 바퀴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교통의 발전 속도와 같았다고 한다. 감기 바이러스는 인간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인간이 도보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20여일, 즉 1년하고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린다. 물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전혀 없는 평지여야 하고 잠도 안자고 걸어야 하는 수치이다. 반면 시속 8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로는 약 50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감기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를 문화의 혼종 속도로 대신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과거나 현대의 혼종은 그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마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전혀 색다른 해석과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는 것 처럼, ‘혼종’ 이라는 각기 다른 것들의 만남을 대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은 그러한 혼종의 장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타자의 견해를 수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흔히 ‘문화 충격’이라 일컽는 갈등의 과정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서구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더욱이 현대는 ‘글로벌’이라는 용어가 언론과 매체를 장악한지 오래되지 않던가... 구한말에도 전혀 새로운 문물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고, 여전히 그 물결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는 ‘다문화가정’이라는 용어가 생길만큼 외래의 물결은 거침이 없다. 국내의 상황과 국외의 조건들이 만나 결합하는 혼종의 결과물이므로 이를 피해갈 방법이 없다. 이러한 혼종의 상황을 그 어떤 나라이든지, 그 어떤 개인이든지 격을 수밖에는 없다. 독자적으로 홀로 살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말이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많은 장면들을 다각도의 프리즘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양성의 여지를 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대적 공식이라는 것은 몇몇 자연적인 현상을 발견하는 ‘론, 혹는 법칙’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에너지 보존의 법칙 또는 만유인력의 법칙’ 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렇게 절대적이라는 것들도 때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발견에 의하여 무너지곤 하는 경우들을 종종 목도해온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다양함을 함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언제가 개방시켜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문화적 혼종이라는 것은 결코 피해갈 수 있는 현상들이 아니다. 문제는 그 문화적 혼성을 어떠한 자세로 수용하느냐인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융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융해는 무사고적 수용이라는 말과 상대적인 용어일 것이다.

 

 사실 타문화 혹은 타자의 이론(異論)들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융해라는 긍정적 과정을 거치게하여 새로운 우리의 것으로 창출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정적 반응은 필연적으로 흡수될 문화 혹은 이론(異論) 들과 부정적 결과물을 낳는 싸움을 하게 한다. 사람들의 모임은 언제나 이론이 제기되기 마련이듯 말이다. 이론은 타자를 곧잘 불쾌하게 만든다. 이는 타자와의 논쟁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논쟁은 매우 유익한 발전의 과정이다. 단, 사유가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조선의 경우...


 덕흥대원군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역대 그 어느 임금보다도 신속하고 강력하게 바로잡은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국외의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강력한 힘을 앞세워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서구의 세력의 유입에 대응하는데 서툴렀다. 결과적으로 이를 적절하게 수용한 일본에 의해 강점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차라리 나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가정법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조선에 총기가 들어 왔던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폴투갈의 상선은 조총을 일본에 가져가 이를 은과 바꾸었다. 그것이 1543년의 일이다. 일본은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조선에 이 조총을 예물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조총의 위력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이를 무기고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서는 조총으로 무장한 다이묘들이 칼을 든 다이묘의 사무라이들을 싹 쓸어버리고 나라를 평정하면서 일본 열도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뎃뽀(철포-조총을 뜻함)도 없는 놈이 덤빈다는 말로 '무뎃뽀'라는 말의 유래가 된 것이다. 제 아무리 사무라이들이 검을 잘 쓴다 한 들 뎃뽀(조총)로 무장한 다이묘들을 어떻게 감당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때 일본의 무뎃뽀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철포의 위력 앞에서 죽어갔다.  

 

 

무뎃뽀의 대가를 톡톡하게 치룬 조선과 한국

 

철포의 위력을 알게 된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병력을 투입한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임란을 맞은 조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조총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병사들이 쓰러져 갔던 것이다. 혼종에 대한 바르지 못한 판단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어쩌면 폴투갈의 상선들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과 먼저 거래를 텄을 사건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바로 순도 높은 은(銀)의 추출 기술이다. 당시 명나라는 은(銀) 본위제 화폐를 시행하고 있었고, 명나라 대부분의 거상들은 은을 상거래의 수단으로 했다. 당시 서구인들에게 명나라의 문물들을 가져다가 서양에 판매 할 경우 그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5개의 선박 중 하나만 돌아와도 이익’이라는 말은 바로 이때 생긴 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상인들은 명나라의 결재수단인 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순도 높은 은의 추출 기술에 있었다. 명나라에서 원하는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추출기술을 자체 개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명종 때의 쌍놈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하는 능력을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기술과 인력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쌍놈이 개발한 기술이라고 천대했던 것이다. 마치 조총을 무기고에 가져다 썩히듯이 말이다. 이를 눈치 챈 일본은 이들을 일본으로 정중히 모셔갔다. 그리하여 일본의 은 추출능력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일본의 은은 서구인들을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폴투갈의 상선들은 양질의 은을 생산해내는 나라, 일본으로 그 뎃뽀를 가져간 것이다.


이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침공 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어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사건은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의 중요한 교훈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랄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자 바로 한국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휴전이 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엄청난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어왔다. 문화의 대 혼종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에 또 한 번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또 한 번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땅은 100여년 동안 서구의 물질, 사상, 학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가 되었다. 그 중 서구의 경쟁 시스템과 사고는 대한민국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 중의 하나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이에 자본주의가 함께 맞물려 갔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용어의 배후에는 사실은 강자의 피도 눈물도 없는 논리가 서려있다.


우리의 교과서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적자생존의 논리를 아무런 거침이 없이 가르쳤다. 이미 너무나도 친숙해져버려 이제는 의심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 이 논리는 한국 사회를 100여년간 지배해온 것이다. 특히 학교에서의 경쟁 일변도 교육시스템은 은 대한민국의 주도세력일 수 밖에 없는 인력들의 핵심 동력이로 작용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혼종의 물결을 저항 하기란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혼종에 대한 당사자들의 태도가 향후 엄청남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물론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 알맞은 적절한 판단과 준비의 신중한 작업을 요망하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매트릭스를 소재로 서술해간 철학자들에게서 배우는 혼종에 대한 태도 역시 이와 일맥상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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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6-03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에게 다 잘 해줄 수 없고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될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내가 얼만큼인지는, 평탄할 때 보다는 위기에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내가 얼만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고난을 만들어낼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매트릭스를 여러 번 봤지만 여전히 철학하기 보다는 SF 오락물로 즐기는 수준 밖에 못됩니다. 물론 요즘 케이블에서 계속 나오는 주성치의 소림축구가 훨씬 웃을거리도 많고 여운도 많이 남는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만!!! ^^(모바일 댓글이라 엔터를 못찾겠네요ㅠㅠ)

차트랑 2012-06-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리포핀스님 안녕하세요?
매리포핀스님의 말씀 적극 공감합니다.

그리고 주성치의 소림축구는 매트릭스를 뛰어넘는 철학이 담겨 있는
영화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얼마전 페이퍼에서 물의 이치와 스타워즈 에피소드 1에 등장하는
건간족의 방어막의 작동원리를 간단하게 쓴 적이 있는데요.

소림축구도 그와 같다고 보았답니다.
제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부드러움의 힘에 제압 당하고 말죠.

건간족의 망어막도 그러하답니다.
제 아무리 강력한 힙으로 공격한다 한들
그들의 방머막는 꿈쩍도 하지 않죠

그러나 부드럽게 다가가는 발 하나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가 담글 수 있게하는 것이
물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소림축구도 부드러운 힘으로 제압하잖아요.
이만한 철학을 매트릭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

왜 매리포핀스님의 견해에 공감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저의 서재를 찾아주시고
글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매리포핀스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아셨죠?^^



책읽는나무 2012-06-0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이 학당에서 공부하시는분인줄 잘 몰랐습니다.
전 옆에 페이퍼를 보고서 첨엔 고등학생인줄 알았어요.ㅋㅋ
그러다 까먹고 있다 다시 보니 고등학생일 것이라 착각했었던 바로 그분이 맞았네요.

수양공부를 따로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음~
범상치 않군요.
저도 수양공부를 좀 해야하는데 말입니다.참 쉽지가 않습니다.ㅠ

2012-06-03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3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6-1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좋은 페이퍼입니다.
차트랑공님,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의 말씀,
'적절한 판단과 준비의 신중한 작업'에 대해여 너무 생각이 없던 것이 아닐까
반성합니다. 저는 적절한 판단이라고 읽었는데, 원래 쓰신 절절한 판단이 맞을까요?
어쩐지 절절한 판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진정성의 문제니까요.. ^^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6-12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녀고양이님,
이렇게 찾아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알라디너분들이 많지 않은데
생각을 많이 하게하는 일들이 있어
그만 기력을 잃고 뜸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녀고양이님께서 돌아와주시니
반가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저의 기쁨을
모두 느끼실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 저의 것 뿐이겠습니까
많은 분들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다시 와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마음 편히 하시기를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추신: 위의 제 글은 마녀고양이님께서 읽으신대로 '적절한' 이 맞습니다.
제가 저런 황당한 오타를 내버렸군요^^

차트랑 2012-06-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수정~
'절절한 판단'을 '적절한 판단'으로^^

북극곰 2012-06-1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은 제가 이해도 못할 어린? 시절에 사 가지고서는
역시나 읽다가 던져버리고 아직도 책장에 꽃혀만 있는 책이랍니다.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읽어보고 싶네요. ;)

차트랑 2012-06-19 13:28   좋아요 0 | URL
북-킄-콤님 께서 와주셨네요?
와~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저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재도전 한 책이 이었답니다.
고등학교 때 도전했던 '달과 6펜스'가 그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대학에 가서 재도전 했다가 또 실패했더랍니다 ㅠ.ㅠ

이거 자존심 무지 상했습지요 ㅠ.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는...
세번째 도전을 하게되었답니다^^
세번째 되어서야 달과 6펜스를 좀 이해하게 되었던거에요.

이런 고백은 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북-킄-콤-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제가 어찌 솔직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북큭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