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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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벙커1'을 통해서 강신주를 처음 만났다. 그가하는 상담을 들으며 강신주라는 철학자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많아 살아본 할아버지도 아닌데, 상담 심리학을 정공한 사람도 아닌데, 일개 철학자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꿰둟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그후, 강신주의 동영상 강의와 서적들을 살펴보며 그가 말하는 논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긍금했다. 지난번 강신주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위해서 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 이어서 '철학 삶을 만나다.'를 펼쳐들었다. 강신주식 철학의 비밀을 이 책을 통해서 파헤치고 싶다. 


1. 강신주식 철학적 사고의 매력

  강신주가 쓴 철학책들은 쉽다. 대학에서 '철학 개론'을 들으며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지도 않는데 시험을 보기 위해서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이 한 말들을 무조건 암기했던 기억이 남는다. 대학에서 배운 철학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무조건 암기하는 탁월한 암기과목이었다. 이에 반해서 강신주가 말하는 철학은 우리 삶을 철학하게한다. 철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에서는 일상적인 우리 삶에서 어떻게 철학적 사유가 일어나는가를 풍부한 사례와 친절한 설명으로 풀어낸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왜? 이러한 철학 수업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만 쏟아냈는가?, 교수가 학생과 대화하기는 커녕, 교수 혼자 독백을 했가? 라는 질문이 연속으로 쏟아졌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철학적 사유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낯설게 볼 때 철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3단 논법대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우리의 사유는 일어난다. 어찌보면 평범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의 사유에 강신주는 도끼를 휘두른다. "당연하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우리는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우리 딸들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가 내 옆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존재가 아플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낯설게 보면서 소중함을 안다. 강신주가 다상담에서 "'내옆의 아내와 언제던지 헤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3단 논법대로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사유한다. 나의 행동과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3단 논법을 끌어들여합리화한다. 강신주의 날카로운 지적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인간은 3단 논법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뇌 과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역사적 사례를 소환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들을 철학적 사유를 하지 않았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철학적 사유의 위대함은 '우연성의 철학'과 '필연성의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일들이 유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유와 신과같은 존재의 계획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유의 대립이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역사를 발전론적으로 보고, 역사의 필연성을 밝혀내는 것을 역사학에서는 무척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문들을 우수한 논문으로 대우한다. 반면 우연에의해서 발생한 사건들의 나열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역사적 사유를 하지 않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라고 교육받았던 나로서는 세상은 필연적이기 보다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주장이 낯설기는하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담준론에 갖힌 사유가 아니었다. 우리 삶을 철학하게하는 소중한 지혜였다. 


2. 강신주의 철학을 넘어서.

  강신주는 '사랑과 가족',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를 낯설게 만든다.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적 사유를 유발시킨다. 

  우리의 사랑은 남녀가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완성된다는 헤겔식 철학의 고정관념에 가깝다. 반면, 강신주는 바디우의 철학을 끌어들여 '둘'의 사랑을 '둘'로 정의 내린다. 둘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눈부처'를 보면서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 우리는 '둘이 하나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에 갖혀 우리를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에 항상 맞짱구만 칠수는 없다. 나의 전공이 역사이다보니, 강신주가 근거로 제시하는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강신주는 '국가'도 낯설게 본다. 인디언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로 묘사하며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디언 들에게 서구 문명의 총아인 '총'을 주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 재레드 다이야몬든 교수가 말했듯이, 태평양의 부족들에게 총기를 주자 그들은 잔인한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대표적인 왕국이 하와이 왕국이다. 물질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모습을 문명화로보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그들의 물적 토대가 강력한 집권자가 나오기에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원시공산사회가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강신주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국가에 확장시켜 인질=국민, 국가=인질범이라는 도식으로 국가를 낯설게 본다. 강신주식 사고가 무척 신선해보인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개인의 생존은 위태롭다. 시리아 내전을 본다면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곳의 주민들은 생존 자체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시리아를 탈출해서 유럽으로 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독재자가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도, 생명을 위협받는 무질서보다는 안정된 독재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국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국가는 수탈과 자본에 따른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민낯을 보여준다. 강신주의 글이 이해가 가면서도 불현듯 반론을 제기해본다. 국가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국가는 개인을 일방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할까?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보라! 국가라는 시스템이 있기에 개인은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않는가? 강신주의 지적대로 국가가 개인을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역으로 그러한 국가의 속성을 개인이 이용해서 복지의 혜택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있지 않은가! 공기의 매서운 저항을 이용해서 우리가 행글라이드를 보다 재미있게 탈 수 있듯이, 국가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국가를 이용해서 우리 삶을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특정 지배층이 국가를 이끌어가던 시대라면 강신주의 주장은 정확히 들어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하며 국가를 제대로 움직인다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은 시민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철학자가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철학적 사유가 없어지는 것은 걱정이 됩니다.'라는 대답이 기억난다. 그때는 '철학적 사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철학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철학자들의 말들을 외우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난다.'라는 책을 읽으며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철학이 우리 삶과 전혀 관계 없는 학문이기 보다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소중한 학문임을 강신주의 책 '철학 삶을 만난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하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입문서로 읽는다면 삶이 풍성해지리라는 믿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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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하브루타 - 랍비가 직접 말하는
랍비 아론 패리 지음, 김정완 옮김 / 한국경제신문i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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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인의 놀라운 민족성에 감탄했다. '탈무드', '탈무드 도전', '천재를 만드는 탈무드 교육' 이 세권이 그 시절에 읽은 대표적인 유대인 관련 서적이다. 탈무드를 읽으면 유대인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갖을 것이라는 환상을 그 시절에 갖았다. 교사가 되고 나서, 하브루타라는 유대인 학습법을 알았다. 유대인 관련 서적을 읽으며 유대인의 능력을 샘솟게 하는 원천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탈무드 하브루타'를 펼쳐 들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은 '탈무드'는 재미 있는 이야기를 뽑아서 만든 어린이용 탈무드 동화책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탈무드 하브루타'는 랍비 아론 패리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한 입문서, 혹은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의 성격상, 유대인이 되거나, 하브루타를 배우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탈무드의 율법들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지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너무도 많은 율법들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율법을 지키려면 수도승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랍비에 의해서 씌여졌다보니, 자신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합리화하는 부분도 있다. 신화를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팔래세타인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했다. 

  또하나! "동아시아에서 마야인"이라는 글은 너무도 어이없었다. 이부분은 번역자의 실수인지, 랍비의 무지 때문인지 알수는 없지만, 마야인을 동아시아 사람이라고 서술한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내가 유대인에 대한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독교의 원죄론에 강한 의문을 갖았던 나로서는 원죄론을 부정하고, 신이 세상을 불완전하게 창조했고, 이 창조행위는 계속되며, 여기에 인간도 동참한다는 티쿤울람 사상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또한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숙명론에 반기를 들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한 부분은 유대교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힐렐 이라는 랍비는 토라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이것이 토란의 전부다. 나머지는 해설이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논어' 위령공편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한다.”(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한 말과 너무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진리는 하나로 상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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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14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탈무드는 과대평가를 받기 쉬우면서도 오해받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해요.

강나루 2021-01-14 09: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책을 읽으며 탈무드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학습법인 하브루타라는 점이에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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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적인 몸을 주신 아버지와, 영혼을 낳아주신 아버지를 가진자는 행복하다. 강신주는 유체를 주신 아버지를 떠나 보내면서 영혼의 아버지도 떠나보내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했다. 큰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가 없다. 비, 바람을 막아주던 큰나무를 떠나 보내야 작은 나무는 큰나무 처럼 대지에 뿌리 박고 우뚝 하늘로 치솟을 수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떠나보내고 홀로 서려는 철학자 강신주가 김수영에게 바치는 장송곡이다. 무척이나 김수영을 사랑한 강신주는 어떻게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낼까?


1. 강신주 다시 태어나다.

  항상 대중 앞에서 강해보이는 강신주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찌질했다. 가난한 가정에 코를 질질 흘리며, 소매로 흘러내리는 코를 열심히 닦아서 소매가 맨질맨질 윤이날 정도였다. 이러한 강신주는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찌질한 강신주!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글쓰기 실력이다. 책상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좋은 느낌을 풀어쓴 글이 상일 타게 되었다. 이로인해서 강신주를 괴롭히던 선생님과 강신주를 왕따시키던 학생들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신주는 알게 되었다. 글을 통해서 찌질한 강신주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강신주로 다시 태어난다.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 두번째는 김수영과의 만남이다. 강신주는 자신이 평생의 삶의 맨토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강신주는 괴로울 때마다 김수영의 시를 읽었다. 김수영을 통해서 배운 그의 삶의 신념은 강신주의 나침반이 되었다. 

  철학 판매 분야에서 10여년 동안 독보적 1위를 차지하는 강신주는 어린시절 글솜씨와 김수영 철학의 세례를 받으며 거리의 철학자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강신주의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은 강신주에게 어떠한 철학적 세례를 주었을까?


2. 단독성의 발견

 우리는 "모난돌이 정맞는다.", "튀지마라, 잘할 것도 없다. 중간만 가라."라는 말을 자주듣는다. 자신만의 삶을 살기 보다는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며,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기 보다는 타인이 하는 일반적인 말을 하며 안전하게 살도록 우리는 교육받았다. 부모로부터, 군대에서, 학교에서.....

  김수영의 시에서 강신주는 "단독성"을 발견한다. 일반적인 시가 아닌, "단독성"을 가진 시를 김수영을 썼다. 누구나 쓸 수있는 시가 아닌, 유일한 시를 김수영은 쓰고 있다. "단독성=새로움=상상력"이라는 삼위일체가 이뤄지면서 김수영의 시는 단독적인 시로 우리에게 우뚝서게 된다.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는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하며 "내가 어렸을 적 영화공부를 할때 마음 깊이 새긴 말이 있다."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건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다."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세계적 감독 봉준호가 가슴에 새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강신주가 김수영에서 보았던 "단독성"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본다. "단독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며,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싶었던 강신주는 봉준호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에서 보았던 "단독성"을 김수영에게서 보았다. "단독성"은 이렇게 거장들에게는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하지 않을까? 시가 시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하듯이,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한다. 인구 통계상의 숫자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유일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3. 단독적인 시

  강신주가 소개한 김수영의 시는 너무도 "단독적"이다. 참신하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리고 보편적이다. 너무도 단독적인 김수영의 시 두편의 일부를 읽어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70쪽,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단독적이지 않은가?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는 납짝 엎드려 순종하다가, 만만한 선생님 앞에서는 기고만장하게 대드는 학생 처럼, 강대한 거악에는 순종하는 강아지 처럼 꼬리를 흔들다가, 힘없는 약자에게는 군림하려든다. 김수영의 부끄러운 모습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했던 우리의 진면목이다. 독재정권에는 순종하던 언론이,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정권 위에 군림하려고 자본과 기존 기득권세력과 야합하고 있다.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위대해 보이는 것은 김수영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이 가장 창조적이었으며, 보편적이면서도 참신하기 때문이다. 그 어는 상상력 많은 시인의 시보다 많은 상상력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김수영은 자신의 비겁함과 마주한다. 진정 자신의 나약함과 직면할 수 잇는 용기가 김수영에게 있다. 그렇기에 김수영은 위대하다. 나약한 나 자신과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며 강한척, 용감한 척하는 우리와 너무도 대조적이다. 아마도 강신주도 나와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찌질한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지 못하는 강신주가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래서 김수영이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두번째 시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너무도 충격적이다. 


  "'김OO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18쪽, 김수영, <김일성 만세>-


  2021년 지금 읽어도 너무도 충격적이고, 못내 불편함을 느끼게하는 시이다. 이러한 시를 발표하고 군사정권에서 김수영이 살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행히도 김수영은 이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 시를 김수영이 2021년 다시 발표해도 그는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이다. 이 땅의 기레기들이 김수영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시를 인용하면서도 '김OO 만세'라고 적어 놓은 것은, 나 자신도 분단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단의 비극을 넘어서기에는 대한민국의 땅은 너무도 척박하다.

  과거 독재로부터 압살당하던 언론은,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자본권력은 물론이고 적폐세력과 손을 잡고 민주정권을 물어 뜯고 있다. 자신에게 썩은 고기라도 던져주는 기득권들에게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며 충견임을 입증하려 노력하고 있다. 김수영은 분단만 넘어서면 언론의 자유가 이뤄지리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분단을 넘어선다할지라도 기자들이 자본권력과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 언론은 기레기들의 천국일 수 밖에 없다. 김수영이 살았을 때보다 어쩌면, 우리 언론의 현실은 더욱 비참해 보인다. 그럴수록, 김수영의 시가 보여준 단독성은 더욱 빛이 난다. 



  강신주는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을 통해서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치유했다. 그리고 단독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했다. 강신주의 어린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과 너무도 흡사했다. 가난한 가정과 코피를 잘 흘리는 아이, 가난하기에 새옷을 해입고 다니지 못하는 아이였다. 같은 옷을 매일 입고 다녔기에 반아이들은 나를 싫어했다. 강신주가 왕따만을 당했다면, 나는 구타도 당했다. 선생님이 교실에 없는 시간에 여러번 당하는 구타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그때 나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책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나는 행복했다. 강신주가 김수영을 발견했듯이, 나도 강신주를 발견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의 삶이 옳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 방향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강신주가 생각하는 세상은 어떠해야하는 것일까?  갖가지 꽃들이 자신의 단독성을 드러내며 장엄하게 핀세상, 바로 "화엄"의 세상이 아닐까? 치과에 걸려진 TV로 박근혜 탄핵을 보던 아주머니가 '박근혜 불쌍하네'라는 말을 했다. 그때 나는 '박근혜를 동정하기 보다는 박근혜를 뽑은 우리가 반성해야한다.'라고 강변했다. 그 아주머니가 곧이어한 말은 "그럼 누구를 뽑아야해?"라고 노예처럼 물었다. 그녀는 스스로 제대로된 대표를 뽑지 못하는 노예였다. "각 개인들의 철저한 국민의식, 다시 말해 메시아를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메시아가 되고 결단과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주어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타인에 이해서 주입된 신념과 이념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강신주가  "공통된 중심이 없어야 다양한 팽이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돌 수 있는 법"이라 말했듯이, 강요되고 주입된 거짓들에게서 벗어나서, 자신의 단독성을 마음것 발현한다면 "사회는 이런 다양한 소리들로 빚어낸 교향곡"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만이 "화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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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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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 때문에 근대화가 늦어졌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한다. 근대화가 늦어진 책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모두 짊어지게 함으로써, 근대화에 실패한 책임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흥선 대원군이 과감하게 개항을 했다면 우리는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저자 신상목은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잘못된 질문이라 일갈한다. 일본은 16세기에 이미 조선을 넘어섰음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이것이 신상목이 이 책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바이다. 전근대에는 조선이 일본을 앞섰지만,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일본에 뒤쳐졌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무지와 특정인에 대한 마녀사냥은 우리에게 심적 편안함을 선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훈을 안져주지는 못한다. 교훈없는 안일함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게 만든다. 조선은 그 이전부터 일본에 뒤쳐졌으며,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시점도 페리가 일본에 오기 이전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신상목! 그는 에도시대 일본이 조선을 앞섰다는 증거를 얼마나 깊이 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1. 의도하지 않은 정책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다.

 박근혜 정권 시기, 청와대에서 구입한 약품 중에, 비아그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해명은 '고산병 예방 및 치료'라고 했다. 비아그라는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발되다가 의도하지 않게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목적하지는 않았으나, 발기부전과 고산병에 효과를 나타내는 비아그라 처럼, 에도의 탄생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일본에 선사한다. 

  에도는 탄생부터 극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근거지를 슨푸(시즈오카)에서 갈대밭인 에도로 옮길 것을 명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한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도 병력을 착출 당하지 않은 것은 에도로 봉토를 이전 당했기 때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에도 막부가 출범하고 나서는 '천하보청'을 실시한다. '천하보청'이란 막부의 토목공사에 다이묘에게 일종의 요역을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천하보청으로 에도에 인프라가 구축되고, 다이묘를 견제할 수 있는 일거 양득의 효과가 발생한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천하보청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온다. 일본의 다이묘들이 에도에 와서 토목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달한 것이다. 

  에도 막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강성한 다이묘들을 어떻게 약화시키고 천하의 패권을 천대만대 누릴 수 있을까?'가 아니었을까? 에도 막부가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실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킨코타이 제도(참근교대) 덕분이다. 다이묘들이 에도에 본처와 장자를 두고, 영지와 에도를 오고가야했기에 다이묘의 경제적 힘을 빼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산킨코타이 제도는 의도하지 않게 교통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전국을 묵는 정보 네트워크 기능을 했다. 에도에서 유행한 우키요에게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산킨코타이 제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일본인이라는 관념보다는 OOO지역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던 일본인에게 '전국성'을 인식하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력은 에도시대 일본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일본은 근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2. 번영하는 에도!!

에도의 번영은 눈부시다. 인구 100만의 세계적 도시로 성장한 에도는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다. 경제적 번영은 사회 문화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거둔다. 

  에도의 경제적 번영은 지식에 대한 욕구를 증가시켰다. 그래서 주쿠와 데라코야와 같은 민간 교육기관이 등장한다. 주쿠와 데라코야와 같은 민간 교육기관이 신분에 구속되지 않고 능력 있는 전문 지식인을 육성하고 전문지식을 전수하였다. 교육의 확대는근대 사회에서나 등장함직한 '판권' 개념을 등장시켰다. '판권'개념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에도시대 독서가 광범위하게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광고 전단지의 시초인 '히키부다'와 신문의 시초인 '요미우리'가 등장해서 일본사회를 파고들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민간주도로 이뤄진 정보 유통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알려준다. '히키부다', '요미우리'가 등장하고, 판권 개념이 등장한 에도시대에 일본은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관광입국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조선에서는 관광이 쉽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관광입국을 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인 데지마상관에 주제했던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가 '에도참부여일행기'에서 "이 나라의 가도에는 매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있어, 여행객이 몰리는 계절에는 인구가 많은 유럽 도시의 시내와 비슷할 정도로 사람들이 길에 넘쳐난다."라고 묘사할 정도로 일본의 관광은 성황을 이루었다. 

  정보의 유통과 역동적성 면에서 에도시대 일본은 조선을 뛰어 넘고 있었다. 이러한 에도의 역동성은 조선과 같은 정책을 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과 일본에서는 사치를 금지시켰다.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의 사치금지령에 조선 사회는 커다란 저항을 하지 않았다. 화려한 의복을 규제한다고하지만, 흰옷을 즐겨입었던 조선에서는 서민들이 큰 저항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48가지 차색과 백가지 쥐색이라는 뜻의 '사십팔차백서'가 등장하고, 멀리서 보면 단색이지만, 가까이가서 보면 세밀한 문양이 있는 '에도코몬'이 등장한다. 또한 심플함 속에 풍겨나오는 세련됨을 의미하는 '이키'의 미의식이 등장한다. 중국 속담에 "위의 정책이 있으면, 밑에는 대책이 있다."라는 말처럼, 에도 막부의 정책에 대응해서, 일본 서민들은 대책을 마련했다. 

  이렇게 같은 정책에 다른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조선과 일본 사회의 역동성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3, 에도시대, 근대를 준비하다. 

  흑선에 의해서 일본이 개항하기 이전까지, 일본보다 조선이 앞섰다는 이유없는 자부심에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전근대시기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증거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도자기'와 '조선 통신사'이다. 과연 도자기와 조선 통신사는 전근대시기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앞섰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주장은 면밀한 검토를 해보아야한다. 우선, '도자기'부터 살펴보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의 도공을 일본군이 무자비하게 끌고 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제사상에 올릴 제기도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니, 임진왜란이 도자 산업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만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은 아리타자기를 만든다. 일본이 세계의 도자산업에 우뚝 설수 있는 바탕을 조선의 도공이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 만국박람회에 일본의 도자기를 소개하고, 서구의 입맞에 맞는 자기를 생산한다. 끊임 없는 혁신을 통해서 세계 자기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향수에 취해서 혁신을 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을 때, 일본은 끊임 없는 혁신을 하였다. 조선이 검약을 미덕으로 삼고 사치를 죄악시하는 유교사회였기에 조선에서 도자산업이 혁신을 이룰 수 없었다. 원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조를 뛰어 넘는 혁신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자부심을 느끼는 '조선 통신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임진왜란 이후 12회에 걸처서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다. 일본 막부는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조선 통신사를 환영한다. 조선 통신사를 통해서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말고서도 새로운 문화 수입 창구가 있었다. 바로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이다. 

  데지마를 통해서 서구의 앞선 문물이 일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배탈만 일으킨다.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소화하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한다. 1774년 '해체신서'를 번역하고, 1796년 난화사전인 '하루마와게' 발간, 1814년 영일사전인 '안게리아 고린타이'를 출판한다. 일본은 개항이전에 난화사전과 영일 사전을 편찬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대사건이다. 

  일본이 '해체신서'를 출간하고 인체 골격 모형을 제작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 1764년 조선 통신사 수행원인 의사 남두만은 일본인이 설명하는 해부 실험에 대해서,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라는 어리석은 말을 내뱉는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1881년 조사시찰단 송헌빈에게 이어진다. 송헌빈은 일본 병원의 해부 인형을 보고 "정말고 끔찍하기 작이 없다. 이는 인술을 하는 자가 할 짓이 아니다."라고 내뱉는다. 좋은 음식을 보고도 더럽다며 혀를 차는 꼴이다. 

  조선후기! 조선은 송시열과 노론을 중심으로 교조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성리학의 배타성은 극에 달하며, 경전을 달리 해석하는 윤휴와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다. 반면, 일본은 성리학의 교조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성리학 이전의 원시 유학 경전을 직접 연구하였으며, 상인의 재산축적을 합리화하는 심학이 등장하였다. 다양성과 역동성을 띄고 있던 일본의 학문에 비해서, 조선 사회는 획일적이고, 비역동적인 학문 수준을 고수하고 있었다. 유연성을 잃어버린 조선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의 지배층이 조선보다 더 유능했다는 말은 아니다. 에도시대 후기, 막부의 통화정책은 낙제점이다. 잦은 화폐 개혁, 지역화폐의 존재, 3종의 본위화폐제도만 보더라도 일본 지배층이 조선 지배층보다 더 유능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단지, 일본은 낡은 세력을 교체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이 조선과 달랐다. 


  우리는 이유없는 자부심과 국뽕에 심취해 있지 않은가? 조선의 도자기가 일본의 도자산업의 원류였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는, 왜? 원천기술을 가진 우리 도자산업은 세계를 제패하지 못했는지를 반성해야하지 않을까? 1811년 까지 12차례에 걸쳐서 에도막부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문화발전에 기여했다고 국뽕에 취하기 보다는, 왜? 1811년 이후, 일본은 조선 통신사 파견 요청을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하지 않을까? 과거의 찬란함에 취해서 나태와 아닐함에 취한다면,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듯이, 우리에게도 몰락만이 다가올 것이다. 주역에 '항용유회'라는 말이 있다. 높이 나는 용은 항상 후회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한때 우리 문화가 타국보다 우월했다고 자만할 필요가 없으며, 지금 우리가 타국보다 국력이 낮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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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죽인 부처 -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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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그의 책을 처음 읽었을때, 그로부터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탄탄한 근거를 제시하는 박노자의 글에 기가 질렸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박노자의 언변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도덕경'을 쓴, 노자가 살아돌아온 것관 같은 착각을 한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다. 그 흐름 속에서 박노자의 책을 어느덧 7권째 읽었다. 그러면서 박노자의 고정된 틀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선했던 그의 글이 이제는 신선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노자의 전략이 나의 눈에 파악되면서 이제 박노자의 주장에 나만의 반박을 할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자, 박노자의 글과 한벌 놀아보자!


1. 국가는 절대악인가?

  박노자의 사상적 기반은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한 공산주의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사회가 도래한다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구상에 공산혁명을 일으킨 나라에서 국가는 사라지지 않고, 또다른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현실에서 국가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그런데, 박노자는 '국가'라는 존재를 '악'으로 대하고 있다. 


  "모든 폭력성을 대변하는 국가라는 지배계급의 기구는 당분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으로 볼 수 있어도 절대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254쪽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박노자의 견해를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박노자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2천년 동안 국가를 읽고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민족에게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충성심을 바랄 수 없다. 유대인에게 이스라엘을 제외한 국가라는 존재는 그져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오히려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배제되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에게 국가라는 존재는 애증의 존재였다. 조선시대 피지배인에게 국가는 나를 착취하는 기구이기도 했지만, 나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임진왜란 시기, 의병이 일어났던 것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한 것도, 모두가 나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나라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노자와 우리는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박노자에게 국가란 폭력과 착취의 기구였으며, 스쳐지나갈 수 있는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국가는 나를 억압하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없어지면 생존권이 위협받는 애증의 존재였다. 바꾸고 싶어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박노자에게 한마디 더하고 싶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만들어가고 있다.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도전하며 촛불을 들어 어둠을 몰아내는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어찌 대한민국을 폭력적 존재! 억압적 존재라 단정할 수 있겠는가? 국가가 억압적 존재라면 국가를 문명화시키는 것도 나라의 주인인 깨시민들의 의무일 것이다. 


2. 호국불교는 청산의 대상인가?

  폭력에 몸서리를 치는 박노자는 국가 폭력의 도구인 '군대'라는 존재 자체 또한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인 승려들이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하여 목탁을 버리고 칼을 들고 일어서는 행위를 박노자는 반불교적 행위로 규정한다.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는' 도덕적인 상대성 논리다. 언뜻 보면 불교를 왜곡하는 논리로만 보인다. 중생에 대한 살해가 중생 교화로 둔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에 대한 살해가 중생 교화로 둔갑될 수 있기 때문이다."-264쪽


  한국의 호국불교는 박노자의 지적대로 한국불교가 청산해야만하는 대상일까? 폭력은 칼에 비유할 수 있다. 산적의 칼은 힘없는 자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이지만, 어머니의 칼은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아름다운 도구이다. 국가 폭력의 도구인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지배자들이 피지배층을 수탈하기 위한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군대는 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에 외적의 침입에 대응해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면 군대는 우리 생존의 파수꾼으로 존재하게 된다. 도구의 성격은 도구의 쓰임새에 따라 달라진다. 도구의 악한면만에 주목하여 도구를 버린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금찍할 것이다. 

  박노자에게 질문해보자! 박노자 당신이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승려였다면, 왜군이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을 유린하고 코를 베어가고 노예로 끌고가는 현실을 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칼을 들고 불쌍한 중생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것인가? 

  아무리 고고한 인품을 가지고, 고고한 삶을 살고 싶어도 현실의 삶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때가 많다. 내가 평화를 사랑하며 사랑과 자비의 말만을 하고 싶어도, 우리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침략세력이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고고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론은 말그대로 이상일 뿐이다. 

  물론, 호국불교의 성격이 일제 강점기 친일불교로 변질되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대동아 성전'으로 미화하며 반민족적 행위를하는데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호국불교'라는 칼의 칼자루를 일제가 쥐고 한민족을 위협하는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친일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성하고 뉘우치면서 해결해야갈 문제이다. 


3. 모든 계율은 반드시 지켜야할까?

 불교의 계율을 모든 불자들은 반드시 지켜야할까? 아니, 지킬 수 있을까? 살생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명도 귀하게 여긴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한다. 동물과 식물을 희생시키지 않고 인공적으로 합성한 영양제만 먹고 사는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살생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노자는 모든 불자에게 계율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과 '나와 남에게 진정한 이익은 무엇인가'에 대한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계율을 실천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아니겠는가. 아마도 계율과 함께 사회를 비판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시각을 내면화한다면, 우리 사회의 그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계율을 어기는 현실들이 결코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138쪽


  박노자는 계율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원리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이 달성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의열투쟁에 참여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상대가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우리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어찌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있겠는가? 계율은 해탈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의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두스님이 개울을 건너는데 한 여성이 불어난 물을 건너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이든 스님이 그 처자를 업어 개울을 건네주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스님이 이를 탓하자, 나이든 스님이 "나는 그 처자를 게울에 건네주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처자를 떠나 보내지 아니하였구나!"라고 말했다한다. 여성을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것이 불교의 계율이다. 그러나 이 계율은 승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개울을 건너지 못해서 어쩔줄 모르는 처자를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선을 행하는 일이다.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단계 이론을 통해서도 박노자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콜버그는 도덕성 발달단계를 6단계로 나누었다. 그중 4단계는 법과 질서 중시, 5단계는 사회계약 중시, 6단계는 보편적 윤리를 중시하는 단계이다. 박노자는 4단계 법과 질서를 중시여기는 수준에 고착되어있다. 불교의 계율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한글자 한토시도 고칠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법과 질서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며, 이러한 법과 질서가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5단계로 이행될 수 있다. 한시가 급한 응급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신호를 지켜야하기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데도 붉은신호 앞에 멈춰선다면, 생명을 살리는 더욱 커다란 가치를 잃어버린다. 박노자여! 이제는 사고의 폭을 넓힐때가 되지 않았는가?


4. 괴력난신을 어찌하오리까?

  박노자의 눈에는 대입기도를 드리는 부모의 모습도 아힘사(비폭력)의 원칙에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내 자녀가 합격하면 누군가의 자녀는 떨어진다는 논리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불상과 불화를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도 문제시한다. 철두철미하게 부처님이 말씀하신데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박노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국가와 폭력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 

  박노자의 말대로라면, 대학에 합격하는 행위자체가 불자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된다. 불자들은 모두 속세를 떠나서 살라는 말인가? 글쎄, 박노자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불상과 불화를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는 있다. 부처의 말씀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불상과 불화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만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노자의 말대로 모든 불상과 불화를 사찰에서 없애버려야할까?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인들이 우상이라고하면서 불상을 회손한일과 무엇이다를까? 불상과 불화를 예배의 대상으로 보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가 아닐까? 훌륭한 불교 예술 작품으로, 후세에 전해주어야할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예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생들의 마음이 잘못된 것이지, 불상과 불화, 그 자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의 마음에 쌓인 헛된 바람이 불상과 불화를 보고 미혹되는 것이지, 불상과 불화가 중생을 미혹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통력 있는 스님이 인정받는 현실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박노자의 말대로 신통력 있는 스님을 찾는다면, 불교가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불교는 고차원적인 철학적 종교이다. 

  불상과 불화에 대해서는 관대한 생각을 가진 내가, 신통력을 가진 스님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박노자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다수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의 보유 그리고 다수의 상식을 초월하는 '기적'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은 결국 다수에 대한 권위주의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쉽게 연결된다는 사실이다."-106쪽


  부처님의 제자가 신통력을 앞세워 부처를 부정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박노자의 경고는 깊이 있게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중에서 여성이 여성의 몸으로 성불할 수 없기에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서 성불한다는 '변성성불론' 비판, 초기 불교의 정신이 깃든 '산중공의'의 현대적 부활을 외친 부분에 깊은 공감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큰 문제점은 참여불교가 너무도 미약하다는 점이다. 참여불교로 나아가지 못한 대표적 예가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정부의 수배를 피해서 조계사로 들어갔지만, 한상균 위원장을 품어주기는 커녕, 조사계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김수한 추기경이 명동성당으로 온, 민주 시민들을 품어주었던 사실과는 너무도 대조를 이루는 사건이었다. 현실과 유리되어 기득권 세력과 손을 놓지 못한다면, 한국불교는 민중속에 뿌리 내릴 수 없다.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아 불교의 외형을 번성시키는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날 때이다. 그래서 박노자는 "이제는 짐이될 뿐인 전통들을 폐기해야 살아 숨쉬는 불교로 거듭날 수 있다."(287쪽)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박노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나 또한 박노자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해본 것이다. 박노자의 새로운 책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도 박노자와 깊은 대화를 할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을 그날을 고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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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루님 서재방에 2021년 연하장 놓고 가여 ㅋㅋ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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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강나루 2021-01-01 06: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cott님도 새해복많이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