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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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 때문에 근대화가 늦어졌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한다. 근대화가 늦어진 책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모두 짊어지게 함으로써, 근대화에 실패한 책임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흥선 대원군이 과감하게 개항을 했다면 우리는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저자 신상목은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잘못된 질문이라 일갈한다. 일본은 16세기에 이미 조선을 넘어섰음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이것이 신상목이 이 책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바이다. 전근대에는 조선이 일본을 앞섰지만,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일본에 뒤쳐졌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무지와 특정인에 대한 마녀사냥은 우리에게 심적 편안함을 선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훈을 안져주지는 못한다. 교훈없는 안일함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게 만든다. 조선은 그 이전부터 일본에 뒤쳐졌으며,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시점도 페리가 일본에 오기 이전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신상목! 그는 에도시대 일본이 조선을 앞섰다는 증거를 얼마나 깊이 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1. 의도하지 않은 정책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다.

 박근혜 정권 시기, 청와대에서 구입한 약품 중에, 비아그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해명은 '고산병 예방 및 치료'라고 했다. 비아그라는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발되다가 의도하지 않게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목적하지는 않았으나, 발기부전과 고산병에 효과를 나타내는 비아그라 처럼, 에도의 탄생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일본에 선사한다. 

  에도는 탄생부터 극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근거지를 슨푸(시즈오카)에서 갈대밭인 에도로 옮길 것을 명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한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도 병력을 착출 당하지 않은 것은 에도로 봉토를 이전 당했기 때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에도 막부가 출범하고 나서는 '천하보청'을 실시한다. '천하보청'이란 막부의 토목공사에 다이묘에게 일종의 요역을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천하보청으로 에도에 인프라가 구축되고, 다이묘를 견제할 수 있는 일거 양득의 효과가 발생한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천하보청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온다. 일본의 다이묘들이 에도에 와서 토목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달한 것이다. 

  에도 막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강성한 다이묘들을 어떻게 약화시키고 천하의 패권을 천대만대 누릴 수 있을까?'가 아니었을까? 에도 막부가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실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킨코타이 제도(참근교대) 덕분이다. 다이묘들이 에도에 본처와 장자를 두고, 영지와 에도를 오고가야했기에 다이묘의 경제적 힘을 빼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산킨코타이 제도는 의도하지 않게 교통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전국을 묵는 정보 네트워크 기능을 했다. 에도에서 유행한 우키요에게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산킨코타이 제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일본인이라는 관념보다는 OOO지역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던 일본인에게 '전국성'을 인식하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력은 에도시대 일본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일본은 근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2. 번영하는 에도!!

에도의 번영은 눈부시다. 인구 100만의 세계적 도시로 성장한 에도는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다. 경제적 번영은 사회 문화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거둔다. 

  에도의 경제적 번영은 지식에 대한 욕구를 증가시켰다. 그래서 주쿠와 데라코야와 같은 민간 교육기관이 등장한다. 주쿠와 데라코야와 같은 민간 교육기관이 신분에 구속되지 않고 능력 있는 전문 지식인을 육성하고 전문지식을 전수하였다. 교육의 확대는근대 사회에서나 등장함직한 '판권' 개념을 등장시켰다. '판권'개념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에도시대 독서가 광범위하게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광고 전단지의 시초인 '히키부다'와 신문의 시초인 '요미우리'가 등장해서 일본사회를 파고들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민간주도로 이뤄진 정보 유통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알려준다. '히키부다', '요미우리'가 등장하고, 판권 개념이 등장한 에도시대에 일본은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관광입국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조선에서는 관광이 쉽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관광입국을 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인 데지마상관에 주제했던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가 '에도참부여일행기'에서 "이 나라의 가도에는 매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있어, 여행객이 몰리는 계절에는 인구가 많은 유럽 도시의 시내와 비슷할 정도로 사람들이 길에 넘쳐난다."라고 묘사할 정도로 일본의 관광은 성황을 이루었다. 

  정보의 유통과 역동적성 면에서 에도시대 일본은 조선을 뛰어 넘고 있었다. 이러한 에도의 역동성은 조선과 같은 정책을 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과 일본에서는 사치를 금지시켰다.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의 사치금지령에 조선 사회는 커다란 저항을 하지 않았다. 화려한 의복을 규제한다고하지만, 흰옷을 즐겨입었던 조선에서는 서민들이 큰 저항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48가지 차색과 백가지 쥐색이라는 뜻의 '사십팔차백서'가 등장하고, 멀리서 보면 단색이지만, 가까이가서 보면 세밀한 문양이 있는 '에도코몬'이 등장한다. 또한 심플함 속에 풍겨나오는 세련됨을 의미하는 '이키'의 미의식이 등장한다. 중국 속담에 "위의 정책이 있으면, 밑에는 대책이 있다."라는 말처럼, 에도 막부의 정책에 대응해서, 일본 서민들은 대책을 마련했다. 

  이렇게 같은 정책에 다른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조선과 일본 사회의 역동성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3, 에도시대, 근대를 준비하다. 

  흑선에 의해서 일본이 개항하기 이전까지, 일본보다 조선이 앞섰다는 이유없는 자부심에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전근대시기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증거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도자기'와 '조선 통신사'이다. 과연 도자기와 조선 통신사는 전근대시기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앞섰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주장은 면밀한 검토를 해보아야한다. 우선, '도자기'부터 살펴보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의 도공을 일본군이 무자비하게 끌고 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제사상에 올릴 제기도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니, 임진왜란이 도자 산업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만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은 아리타자기를 만든다. 일본이 세계의 도자산업에 우뚝 설수 있는 바탕을 조선의 도공이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 만국박람회에 일본의 도자기를 소개하고, 서구의 입맞에 맞는 자기를 생산한다. 끊임 없는 혁신을 통해서 세계 자기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향수에 취해서 혁신을 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을 때, 일본은 끊임 없는 혁신을 하였다. 조선이 검약을 미덕으로 삼고 사치를 죄악시하는 유교사회였기에 조선에서 도자산업이 혁신을 이룰 수 없었다. 원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조를 뛰어 넘는 혁신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자부심을 느끼는 '조선 통신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임진왜란 이후 12회에 걸처서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다. 일본 막부는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조선 통신사를 환영한다. 조선 통신사를 통해서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말고서도 새로운 문화 수입 창구가 있었다. 바로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이다. 

  데지마를 통해서 서구의 앞선 문물이 일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배탈만 일으킨다.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소화하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한다. 1774년 '해체신서'를 번역하고, 1796년 난화사전인 '하루마와게' 발간, 1814년 영일사전인 '안게리아 고린타이'를 출판한다. 일본은 개항이전에 난화사전과 영일 사전을 편찬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대사건이다. 

  일본이 '해체신서'를 출간하고 인체 골격 모형을 제작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 1764년 조선 통신사 수행원인 의사 남두만은 일본인이 설명하는 해부 실험에 대해서,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라는 어리석은 말을 내뱉는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1881년 조사시찰단 송헌빈에게 이어진다. 송헌빈은 일본 병원의 해부 인형을 보고 "정말고 끔찍하기 작이 없다. 이는 인술을 하는 자가 할 짓이 아니다."라고 내뱉는다. 좋은 음식을 보고도 더럽다며 혀를 차는 꼴이다. 

  조선후기! 조선은 송시열과 노론을 중심으로 교조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성리학의 배타성은 극에 달하며, 경전을 달리 해석하는 윤휴와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다. 반면, 일본은 성리학의 교조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성리학 이전의 원시 유학 경전을 직접 연구하였으며, 상인의 재산축적을 합리화하는 심학이 등장하였다. 다양성과 역동성을 띄고 있던 일본의 학문에 비해서, 조선 사회는 획일적이고, 비역동적인 학문 수준을 고수하고 있었다. 유연성을 잃어버린 조선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의 지배층이 조선보다 더 유능했다는 말은 아니다. 에도시대 후기, 막부의 통화정책은 낙제점이다. 잦은 화폐 개혁, 지역화폐의 존재, 3종의 본위화폐제도만 보더라도 일본 지배층이 조선 지배층보다 더 유능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단지, 일본은 낡은 세력을 교체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이 조선과 달랐다. 


  우리는 이유없는 자부심과 국뽕에 심취해 있지 않은가? 조선의 도자기가 일본의 도자산업의 원류였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는, 왜? 원천기술을 가진 우리 도자산업은 세계를 제패하지 못했는지를 반성해야하지 않을까? 1811년 까지 12차례에 걸쳐서 에도막부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문화발전에 기여했다고 국뽕에 취하기 보다는, 왜? 1811년 이후, 일본은 조선 통신사 파견 요청을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하지 않을까? 과거의 찬란함에 취해서 나태와 아닐함에 취한다면,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듯이, 우리에게도 몰락만이 다가올 것이다. 주역에 '항용유회'라는 말이 있다. 높이 나는 용은 항상 후회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한때 우리 문화가 타국보다 우월했다고 자만할 필요가 없으며, 지금 우리가 타국보다 국력이 낮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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