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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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는 브렉시트가 단행되었고, 미국은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세계가 혼돈의 회오리 속에 빨려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현실이 변해야한다. 그러나 불길을 피해 살기 위해서 찾아든 곳은 물이있는 비좁은 화장실이었다. 탈출구를 찾아 헤메지만 좁은 터널을 달리듯이 탈출구는 멀기만할뿐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이라는 만능키를 가지기 위해서 옆을 볼 수 없는 경주마처럼 달리는 우리에게 그것이 착각임을 자각하게한다. 'The Tyranny of Merit', 능력의 폭정이라는 원제목처럼 능력이라는 만능키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능력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탈출구는 존재할까?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탈출구는 혹시 폐쇄된 화장실이아닐까?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행해지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이유를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진단한다.


  "수십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41쪽


 그렇다. 미국사회에서 좌측에서는 버니센더스 열풍이 불었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분노의 물결이 미국을 휩쓸며 신자유주의의 성지인 미국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이 도도하게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우측에서는 트럼프가 노동자의 언어를 사용하며 기존 미디어의 문법을 벗어난 선거를 했다. 인종차별, 여성혐오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좌측의 변화 물결은 민주당 당내 경선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힐러리와 트럼프와의 대결에서 기성 미디어들은 힐러리의 당선을 외쳤지만, 현실은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다. 변화를 수용한 공화당은 승리했고, 혁명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민주당은 패배했다. 

  많은 언론에서 트럼프의 승리를 어리석은 썬밸트의 레드넥(백인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보도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백인 노동자들은 트럼프에 열광하는 것일까? 버클리 캘리포니아 국립대학 사회학과 교수 엘리 러셀 혹실드는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우수은 이야기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들도 이방이었다. 인디언이라 불리는 미국의 토착민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갖혀서 레디메이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고 자신의 땅에 내쫓겨서 폐인처럼 살도록 한자가 누구였던가? 지금, 수많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서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백인 노동자를 '자기 땅의 이방인'으로 내몰고 있다. 

  백인 노동자들은 어쩌다가 자기 땅의 이방인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의 폭정 때문이라 주장한다.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기 위해서 엘리트 가정은 지옥같은 교육을 시킨다. 우리와 다른점이 있다면, 미국은 엘리트층이 입시지옥을 겪는다면, 우리는 거의 모든 가정이 입시지옥을 겪고 있다는 차이만이 존재한다. 

  기부금입학, 운동 특기생 전형, 동문 특혜 등등의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엘리트들은 자녀들의 명문대 입학을 이룬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 엘리트 사회의 부를 세습한다. 엘리트 카르텔은 너무도 견고했다. 2008년 대선 유세에서 버락 오바마는 경영자나 기술관료의 언어에서 벗어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써브프라임 금융위기 속에서 그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엘리트들의 제안을 수용했다. 월가에서는 정부로부터 받은 구제금으로 금융엘리트들에게 보너스를 주어 공분을 사기도했다. 

  어떤이는 말한다. 엘리트들이기 때문에 현대와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그러나, 엘리트들에게 가장 현명한 결정은 사회적 약자에게 이로운 결정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적 부와 명예를 세습할 수 있는 결정이다. 그러한 예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하게 보이지 않는가! 

  능력에 따라 지위와 부를 분배해야한다는 소위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의 주장에 대해서 100% 공감할 수는 없다. 

  첫째, 모든 재능은 평등한 가치를 가지는가? 노력에 비례해서 같은 대우를 받아야하는가?  마이클 샌델은 모든 재능은 같은 가치를 가지며, 노력에 비례해서 같은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버린 사람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 52쪽


  재능 중에서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재능이 있고, 필요치 않은 재능이 있다. 물론, 농구 재능처럼 고대 사회에서는 별로 필요치 않은 재능이었으나, 현대에는 유용한 재능이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모든 재능에 사회가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으로 사회에서 요구하지 않는 재능에게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재능과 같은 대우를 해준다는 것은 무리한 이상일 뿐이다.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은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을 자신의 여가 생활에 사용하면서 만족하면 될뿐이다. 

  노력을 했다고 해서 그에 비례해서 대우를 해줘야할까?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라는 말을 많이한다. 열심히 책상 위에 앉아서 서류를 만지작 거리지만, 실제로 만들어내는 보고서는 형편없는 사람과 단시간내에 탁월한 보고서를 완성하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보이는 사람중에서 누가 좋은 대우를 받아야할까? 노력은 아름답지만 댓가는 노력에 비래하지 않는다. 

 둘째, 대학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뽑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인가? 마이클 샌델은 명문대 학위가 사회적 경제적 지위 상승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뽑자고 제안한다.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1차로 선정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제비를 뽑자는 제안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학 학격자는 오만에서 벗어나 겸손해질 것이며, 불합격한자는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운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그럴까?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영혼까지 끌어 모아 스펙을 채우고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경험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을까? "능력주의적 오만"에 바람을 뺄 수 있을까? 한국의 현실에 적용시킨다면 장수생들을 배출하는 최악의 입시제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학 간판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해주는 한국 사회에서 제비 뽑기에서 탈락한 학생은 자신이 운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다음해에 다시 도전할 것이 분명하다. 사법고시에 인생을 바치다가 끝내는 폐인이 되는 사례처럼, 명문대 입시 폐인이 늘어만 갈 것이다. 대학 입시 횟수 제한을 둔다면 이 또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사회적 분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서울대를 포함한 모든 국립대를 통폐합하여 하나의 대학으로 만드는 방법이 가장 현실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 그는 철학자일뿐 행정가는 아니다. 그의 제안은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벗어날 방안을 찾아보라는 화두를 던졌다는것에 의미를 두어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저출산의 위기에 봉착했다. 국가 소멸의 위기로 치닫는 이유중에는 자신이 겪었던 입시지옥, 취업지옥을 자녀들에게 대물림 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는 입장도 있다.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소멸의 위기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극우의 물결이 불어닥치는 위기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그 위험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 물결을 헤처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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