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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평점 :
10여년전 친구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 참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서점에서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을 보았다.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주제로 발제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샀다. 그러나 당시 동양고전에 대한 배경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동양고전들의 핵심을 강의한 이책이 읽기 힘들었다. 결국 '강의'는 책장속에서 10여년을 잠들었다. 그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신영복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걸음 다가갔다. 팟캐스트에서 낭독해주는 신영복 선생의 책들은 나를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결국 다시 한번 '강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강의'를 10여년 동안 나도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거울로 삼아보겠다.
1. 감옥에서 시작된 깊은 사색의 결과
신영복 선생의 글을 속독하기에는 부적합한 책이다. 깊이 있는 사색의 결과로 한글자 한글자 씌여진 책을, 한번에 휙 읽기에는 책에 담긴 생각의 깊이가 너무도 깊다. 낭독 팟캐스트를 통해서 신영복 선생의 글을 듣고, 같은 부분을 눈으로 읽으며 다시 한번 사색하며 읽었다. 그래서 보통의 책들보다 읽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사색하며 읽을 수록 책의 맛은 더욱 깊어졌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 갖혀 20여년을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형을 언도 받고 나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주역' 계사전의 이말이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即變 變即通 通即久),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라는 이 말은 곧 사형수 신영복의 궁한 것이 변하여 결국은 통하고 오래간다는 희망을 가게하지 않았을까? 대응! 변화! 응전! 의 과정을 통해서 가장 나락으로 떨어진 삶도 다시 변하여 새로운 희망의 싹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역은 말하고 있다. 가장 좋은 지천태괘에서도 하락의 시작이 잉태되어 있고,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도 희망의 싹을 암시하고 있다.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행운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요행히 얻은 복권당첨이라는 행운이 재앙이 되어, 당첨금을 탕진하고 비참한 종말을 고하는 예를 풍문으로 자주 듣는다. 주역에서는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보다는 행운을 추구하며 오늘을 허비하고 있다.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건위천괘의 상구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가 담긴 효사이다. 행운이 불행이 되기도하며, 불행한 곳에서 희망이 싹튼다는 주역의 교훈은 우리의 정치현실에도 적용된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기고만장했는가! 자신의 정권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 처럼 엄청난 적폐를 저질렀다. 하늘 끝까지 권력을 손에 쥐고 날아오른 그들이 자신의 힘을 남용한 결과 커다란 후회를 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지천태괴에서 이미 불행을 싹틔우고 있었다. 반면에 폐족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노무현의 사람들은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 희망을 싹틔우며 재기했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권력을 가진자들은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효사를 반드시 가슴에 새겨두어야할 것이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신영복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20여년 동안의 길고 긴 감옥생활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야하지 않았을까? 법가를 대표하는 고전이 '한비자'이다. 신영복은 한비자를 강독하며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우리의 범죄관은 범죄 행위와 불법 행위로 양분하여 범죄를 바라본다. 범죄행위에는 절도와 강도 등의 범죄가 속하고, 불법 행위에는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이 이에 속한다. 이중에서 범죄행위는 가혹하게도 인간 전체를 범죄행위로 매도하며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한다. 반면에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다. 사람과 행위를 분리하고 행위의 불법성만을 인정한다. 수많은 불법행위자가 있고 그중에서는 전과 14범인 정치인도 있다. 불법행위자들 중에는 대통령까지 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다. 우리 현실에 녹아있는 범죄관을 신영복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을 한다. 감옥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분석한 신영복이기에 볼 수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신영복은 귀족도 예외없이 엄형에 처했던 법가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강한 우리의 법집행을 법가들이 바라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신영복은 감옥에서 만나는 선배들로 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지혜를 얻는다. 굴원의 시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씩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라는 말이 있다. 생각은 좌경으로 하고, 행동은 우경으로 한다는 말이다. 생각은 비타협적 원칙주의로 하고, 행동은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지키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살아라'라고 풀이했다.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다보면 비관적 현실에 좌절할 수 있다. 암울한 이명박근혜 시기를 살면서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늘어나는 노인인구! 줄어드는 젊은 인구! 그 속에서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기는 요원해보였다. 그럴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희망이다. '비관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자!' 좌와우 양극단을 경계하고 비관적인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때만이 희망이라는 불빛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촛불혁명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2. 고전 전문가보다 탁월한 고전 해설
신영복은 그가 말하듯이, 고전 전공자가 아니다. 단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고전을 배웠고, 20여년의 길고긴 세월을 고전을 읽으며 살았다. 그리고 사색하며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터득했다. 이러한 고전 독법을 읽으며 무릎을 탁치는 때가 많았다.
신영복! 그가 가장 중시했던 고전의 글귀는 무엇일까? 나는 석과불식 (碩果不食)이 신영복이 가장 사랑하는 글귀일 것으로 생각한다. 큰 과실은 먹지않고 남겨둔다는 이 말을 읽으며, 농촌에서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는 푸근한 인심이 생각나다. 큰 과실을 까치밥으로 남겨두어 자연과 그 과실을 나누고, 그 까치밥이 까치를 통해서 새로운 곳에 싹을 틔워 새로운 감나무를 자라게하는 재생산의 자연의 질서가 느껴지는 글귀이다. 한때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침범하며 자영업자의 생존을 위협했을 때가 있었다. 승자독식의 냉혹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석과불식의 삶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승자독식의 시대에서 석과불식의 사회로 전환되어야 우리 세상이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신영복의 깊고 깊은 사색의 결과로 잉태된 주옥같은 해설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에 대한 해설을 꼽겠다. 아는자는 좋아하는자만 못하고, 좋아하는자는 즐기는자만 못하다라는 '논어'의 글귀를, 어느 동양철학자는 좋아한다는 '호'와 즐긴다는 '락'은 별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때는 좀처럼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확히 '호'와 '락'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반면 신영복은 '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며,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이고, '락'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같은 춤을 추더라도 단순히 춤을 추는자와 춤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무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분명히 차원이다르다. 신영복의 독법을 통해서 '논어'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즉,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복하지 못한다.라는 이 글귀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신영복은 이를 화목과 부화뇌동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를 바라보는데 적용한다. 즉,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했다. 더 나아가 '화동'의 논리로 다양성을 인정하며 지배하려하지 않았던(간접지배하려했던) 중국이 중화패권주의에 휩싸여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영복의 해설은 나로하여금, 하나의 미물을 통해서 우주를 조망하는 경지라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신영복이 깊은 사색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탁월한 경지에 올랐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영복만의 고전 독법은 무엇일까? ‘득어망전(得魚忘筌)’, 즉, 물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말이있다. 신영복은 이 말을 비틀어, 망어득망(忘魚得網)'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고기(현상)는 잊어도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물(거대한 관계망)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고기(현상)을 잊어버린다하여도 거대한 그물 즉 거대한 관계망으로 새로운 물고기를 얻을 수 있으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물'인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기 보다는 고전을 현대에 맞도록, 나에게 맞도로 새롭게 독법하는 자신만의 눈을 가질 것을 신영복은 강조하고 있다. 그 새로운 눈(그물)을 갖는 것이 고전 독법의 핵심일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신영복은 정나라의 차치리라는 사람 이야기를 한다. 차치리는 신발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발을 본뜬 탁을 만들었으나, 신발가게에 와서는 탁을 놓고 온 것을 알고는 다시 집으로가서 탁을 가져온다. 그러나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이 때, 사람들이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소?"라고 말하자 차치리의 답변이 걸작이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신영복은 우리는 차치리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리포트를 쓰기위애해서 책(탁)을 찾는 우리의 모습에서 차치리를 발견한다. 우리의 현실(발)을 보다는 책(탁)을 믿는 우리를 우리는 경계해야한다. 현실과 함께하라 갖가지 통계지표를 통해서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우리 생활에서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과연 경제가 좋아진 것일까? 고전의 좋은 이야기도 우리 현실과 괴리된다면 그것은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고전독법이 공리공담으로 흐르는 것은 신영복은 경계하고 있다.
신영복은 관계론적 사고로 동양고전을 읽는다. '주역'을 읽을 때도 효와 괘를 관계론 적으로 읽는다. 관계를 중시하는 학파라하면, 유학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논어'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논어의 위상을 인정하고, 논어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서 지혜를 얻고자하는 저자의 의도가 읽힌다.
3. 신영복 그가 말하는 고전읽기의 필요성
그렇다면 고전은 왜? 읽어야할까? 신영복은 대학에서 왜? 자신의 전공도 아닌 고전을 강의했던 것일까? 그 답을 얻기 위해서 고전이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자.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든다. 그래서 '서경'이 탄생했다. 이러한 축적의 문화속에서 '마오어록'도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중국적 전통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한 시간적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서 고전이 탄생한다. 반복적 경험 속에서 삶의 지혜를 담는 고전이 탄생하기에 고전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고 읽을만한 이유가 있다.
고전을 읽을때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이 고전이 아닌 경우가 있다. 무슨 말인가? '시경'에는 저항시와 노동요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속에는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시경에도 음풍영월하는 내용이 많으리라는 착각은 지배층의 편향적 여과장치 때문에 생긴 정신세계의 왜곡이다. 꼰대들이 고전을 읽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뽑아서 현실을 왜곡하고, 젊은이들을 억누른다. 이는 '논어'를 읽었을 때에도 느낀일이다. 논어 헌문편에(14-46) 原壤夷俟 子曰 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以杖叩其脛이라는 말이 있다. 원양이 걸터앉아 있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커서는 기억될 만한 을을 하지도 않았으며,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자네야말로 도둑일세.라며 지팡이로 정강이를 치셨다.라는 내용의 글을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꼰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국부론'에 독점자본가에 대한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독점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손'만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더 많은 자유를 달라고 한다. 현명해져라, 실시구시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착취의 지식에 세뇌당할 수 있다!!
묵자에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군자불경어수, 이경어인)'이라는 있다.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는 말이있다. 굴뚝 청소한 쌍둥이가 물에 자신을 비추기 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는 단지 숫검뎅이가 묻었는가를 살피기위함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안색을 살피고 길흉을 살피기 위함이 아닐까? 묵자의 감동적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내 주변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아야겠다. 내 이웃의 얼굴을 살필 눈을 틔우기 위해서 고전을 읽어야하는지도 모른다.
4. 고전에서 발견하는 놀라움.
마가복음6장에는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이 '묵자'에 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묵자가 저지했다. 묵자가 돌아가던 중에 비를 만나서 송나라 사람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려했으나, 송나라 사람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요란하게 공명을 휘날리며 다투는 자를 더 알아주고 있다. 이러한 일은 왕의 병을 미리알고 고칠 것을 간언했으나, 왕이 병이 없는 자신을 속인다고 편작을 멀리했다가, 왕이 죽은 이야기부터, 자신의 공을 빼앗길 뻔한 롬멜이 선전전에 중요성을 깨닫고 수많은 기록을 남긴 이야기, 황우석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추락한 이야기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몸 같이 하라 라는 말은 누구의 말인가? 놀랍게도 묵자의 말이다. 애인약애기신(愛人若愛其身)은 '묵자' 겸애편에 나와 있는 말이다. 물론 마가보금 12장에 나와있는 말이기도 하다. 묵자의 내용 중에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내용이 많다. 그래서 중국에서 동방박사들이 묵가학파일 것이라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했다. 순임금은 어찌해야하는가? 당신이 순임금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질문에 어찌 대답하는가에 따라서 당신의 성향이 법가, 법가에 가까운지, 유가에 가까운지 알 수있다. 맹자는 법에 따라 체포하고 사형에 처해야한다고 말한다. 단, 순임금은 자리를 버리고 부친을 몰래 업고 도망가서 부친을 봉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한다.
그럼, 묵가에서는 법가처럼 원칙을 중시한다. 진혜왕이 묵자의 다음 거자 복돈의 아들이 살인을 하자, 사면을 해준다. 그러나 복돈은 사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만약 당신이라면 묵가나 법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유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이라는 말을 아는가? 물론 알 것이다. 그럼 그다음 구절,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은 아는가? 그래 알것이다. 도를 도라할 수있으면 항상 그러한 도가아니요, 가히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신영복은 개미를 들어 설명한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는 자기 이름이 아니다. 개념이란 그릇은 작은 것이다.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안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해설인가? 우리가 개미를 개미라 부르지만, 어느 누구도 개미가 자신을 개미라고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을 관계론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고전독법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을 줄은 몰랐다.
경제학 전공자인 신영복은 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묵자'를 읽으며 거리를 가득채운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식을 해야하는가를 걱정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질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모습에서 신영복은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인문학자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실이란 조각그림이라고 말한다. 사실의 조합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1+1은 시너지를 발휘하여 2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진실을 보려면 한조각의 사실 그이상을 보아야한다. 한조각 사실로 진실과 진리를 바라보려면 자신만의 고전 독법을 가져야한다. 신영복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강의'는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명저이다. 그의 마지막 강의 '담론'도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