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파니샤드, 귓속말로 전하는 지혜 ㅣ 청소년 철학창고 2
이재숙 풀어씀 / 풀빛 / 2005년 3월
평점 :
인도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종교의 나라라는 생각이 오버랩된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나무 그늘이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며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성자들의 나라! 이러한 이미지와는 달리 불교를 제외하고, 인도 철학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불교 이전의 인도인들의 사유 관렴을 알고 싶어 '우파니샤드'라는 책을 빼들었다. 인도철학! 그중에서도 우파니샤드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천하기에 너무 어려운 책을 읽기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파니샤드'를 풀어써 놓은 이재숙씨의 책을 보면서 도전할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철학의 신비를 탐험해보자.
1. 동양의 소피스트철학 우파니샤드
소피스트들이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에게로 전환시켰듯이, 우파니샤드는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 존재에 관심을 갖는다.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인드라를 비롯한 신들은 철학을 위한 엑스트라일 뿐,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인간 존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우파니샤드는, 동양의 논어, 서양 플란톤의 대화편 처럼 대화로 이뤄져 있다. 세계의 철학사의 흐름과도 우파니샤드는 일치하고 있다.
문답법을 통해서 상대방을 깨우치는 교수법을 흔히,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고한다. 산파술은 학습자가 이미 지식을 알고 있고, 그 지식이 발현되도록 교수자는 이를 돕는다는 학습원리이다. 고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교수법을 사용해서 교육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효과는 학습자에 따라서 달리 효과를 거두기도한다. 우파니샤드에 조물주가, '다'를 말하자, 쁘라쟈빠띠는 '자제하라(암미야뜨)로 알아들었으며, 인간은 "베풀라(닷따)"로 알아들었으며, 아수라는 "동정심을 가져라(다야드왐)로 알아들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해답을 그들 각각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질문에 해답이 있었다. 답은 자신의 가슴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2. 해탈하고 싶은가? 나는 원하지 않는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달라이라마를 만났을 때 일화이다. 김용옥 선생이 물었다. "해탈하고 싶은가?"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다"라는 말을 예상할 것이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는 "해탈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아야한다. 그러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이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사는 것이 났지, 해탈하여 더 이상 이승에 있지 못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에는 천상은 하늘이 아니라,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되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는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 천상의 즐거움 보다. 생노병사의 고통속에서 서로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오늘이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해탈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승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이 세상에서 그대가 행한 바대로 육신이 죽은 뒤에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자신이 이룰 일을 스스로 만들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신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알려고 노력하고 행하라는 말이다. 임재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이말을 나는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 맡기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3.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참모습을 보라"라고 말한다. 육신에 대한 집착이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몸뚱이와 연계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완전한 자유 속의 자신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과연 육신은 깨달음에 걸림돌일까? 흔히들 빠져드는 오류가, 육체보다 정신이 더 소중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 이 육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보시를 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이비 종교도 있다. 육신은 정신의 집이다. 집이 없으면, 정신은 머물곳도 쉴곳도 없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어느 것이 덜 소중한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위안이되며, 서로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상생의 관계이다. 자신의 육체를 괴롭힌다고 해서, 깨달음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하는 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없음을 이미 설파하셨다. 공자님도 문질빈빈(文質彬彬) 이라 했다.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미가 서로 잘 어울려야한다는 말이다. 정신과 육체도 서로 잘 어울려야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육체가 괴로운데,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겠는가? 아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3. 이 세상은 환영이니, 멋데로 살아도 될까?
우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을 접했을 때, 혹시 우파니샤드가 허무주의에 흐른 철학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은 환영(마야)이니 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살아라. 단! 집착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파니샤든는 허무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만 빠져 있는 자는 그 보다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우파니샤드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 서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라라고 외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극단에 서지 않고 중용을 강조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우파니샤드의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야할 것이다.
4. 인도의 종교관은 일신관일까? 다신관일까? 범재신관일까?
인도의 종교하면, 브라만교가 인도의 토착종교와 결합해서 새롭게 탄생한, 힌두교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는 다신교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유일한 실재인 근원 존재(브라흐만)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하면, 일신관이고, 아바타로 나타나는 다른 모습의 존재 모두를 신이라 부르기 때문에 다신관이라 할 수도 있으며, 근원 존재가 만물 하나하나에 존재하므로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범재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우주의 순항법칙이기도한 자연의 여러가지 힘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신은 하나일 수도 있으며, 셋일수도 있으며, 300일수도 있고, 3000일수도 있는 것이다. 신은 숫자에 얽매이지 않기에 이름 붙이는 대로 불릴 수 있다. 신은 사람이 이름 붙여 부를때는 사람에게 대상이 되지만, 본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얇팍한 지식으로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없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해야한다. 인도인의 이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개념화하고 규정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데 익숙해져있는 현대인들의 사고관이 인도철학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귀속말로 전하는 지혜'라는 부재가 붙은 '우파니샤드'라는 책은 우파니샤드를 쉽게 풀어 놓았지만,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쏟아 내고 있다. 이들 질문에 답하기가 만만치 않다.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 철학의 신비를 조금은 보았다는 점에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