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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7
이순신 지음, 송찬섭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9월
평점 :
2014년 4월 16일!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많은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갔지만, 단 한명의 학생도 살려내지 못했다. 전라도 진도섬에서 서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생명들이 사라져갔다. 그런데 422여년전, 그 곳에서는 13척의 조선수군이 130여척(혹은 330여척이라고도 한다.)의 왜선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 비슷한 곳에서, 단한명도 구하지 못하고 온 국민을 공황상태로 빠져들게 만든 사건과 모두가 패할 거라고 생각한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한 사건이 420여년의 사간차를 두고 일어났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밝혀 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책한 권을 집어들었다. 『난중일기』라는 책이었다.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라는 부재처럼, 420여년의 새벽을 직접보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난중일기』의 첫장은 이순신 장군의 아우 우신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장군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자식이었으며, 5남 3녀의 아버지였고, 한여자의 남편이었다. 강인한 성웅이기 이전에, 한사람의 인간 이순신이었다. 『난중일기』 곳곳에는 이러한 인간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가 곳곳에 묻어있다. 항시 어머니의 건강에 대한 걱정과 그림움을 표현하고 있었던 인간 이순신은 억울하게 의금부 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으로 괴로웠을 몸을 이끌고 겨우 풀려난 1597년 4월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열한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다.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게 보였다. 인간 이순신의 고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면이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다. 그는 꿈속에서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아들면이 엎드려 그를 안듯하더니 깨었다. 그날 저녁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난중일기』에는 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감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오디로 갔느냐!
임진왜란 7년 전쟁 속에는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수많은 인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참아내며, 이 국토를 지켜야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 이순신이 있었다. 혈육에 대한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뒤로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고통을 참으며, 전쟁준비를 해야했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며, 그 슬픔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었고 그래서 전쟁터로 향해야했던 사람! 그가 바로 이순신이었다.
태구련이 만든 장검에는 일휘소탕(一揮掃蕩) 혈염산하(血染山河)라고 씌여있다.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는 글귀처럼, 그는 수많은 왜적을 쓸어버리고 그들의 피로 이 국토를 씻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항상 승리해야한다는 무거운 짐이 그를 괴롭혀서였을까? 『난중일기』 곳곳에 그는 아프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그러나 그러한 몸을 이끌고서 전쟁터로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에게 고문을 받아 몸이 아프고, 사랑하는 아들과 어머니를 잃어 가슴이 미어졌지만, 자신이 주저앉으면 조국이 무너지기에 그는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 13척의 배로 왜적과 맞선다. 130여척의 왜선을 보고서 당당히 앞장서서 적과 맞선다. 부하장수들이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있자, 그들을 다독이며 적과 맞서도록 한다. 그리고 무서워서 뒤에서 구경만하고 있는 부하장수들에게 호통을 친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서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하였다.
얼마나 고독했을까? 얼마나 분노했을까? 그러나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 부하장수들은 목숨을 걸고 왜적에 맞서 싸운다. 이순신은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라고 일기에 적고 있지만, 하늘이 그를 도운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전쟁에 나서 모범을 보이는 리더의 모습을 보면, 많은 장수들이 감동을 받았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명량대첩에서 승리를 거두는 주요 요인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1598년 11월 19일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그는 적의 유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한다. 그는 순국했지만, 그는 아직도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속에 살아 남아있다.
책을 덮고 다시 2015년 오늘로 돌아왔다. 아직도 저 바다속에는 세월호 희생자의 시신이 누워있다. 승객들을 무참히 버리고 자신이 먼저 살겠다고 도망친 이준석 선장과 너무도 어이 없게도 단한명도 살려내지 못한 우리의 무능함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다. 그러면 그럴수록 충무공 이순신! 그가 그리워진다. 그도 아버지였고, 아들이었으며, 남편이었다. 그에게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더 소중한 조국이 있었기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지만, 13척의 배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는 앞장서서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전투에서 승리하여 수많은 조선 백성을 살려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리더십은 아직도 살아있다. 인간적이면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조국을 먼저 생각하는 그의 리더십이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꿈틀거릴 때, 대한민국호는 절망 늪에서 벗어나,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들여다보며 그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우리가 장군과 같은 리더가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