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 - 맥락이 보이는 한국사 60장면
남경태 지음 / 산천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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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식 역사 읽기의 이해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고

 

남경태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종횡무진 세계사』와 『종횡무진 동양사』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세계사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 세계사 대중 서적들을 뒤적이다 발견한 이책들은 나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물론, 역사전공자가 아니기에 일정한 한계는 있었으나, 상당한 내공의 역사서적을 집필했다는 것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남경태의 또 다른 책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게 되었다 .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에 다시 한번 빠져보았다.

 

1. 냉철한 비판과 다른 시선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의 한가지 특징은, 너무도 냉철한 비판적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한국의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서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친일 독재의 시선으로 한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은 예외이다.)

남경태의 이러한 냉혹한 시선은 ‘진경시대’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혹독하다.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조선이 택할 길은 말뿐인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이었다. 한때, ‘북벌론’은 마치 자주적인 운동인양 배워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소중화 의식’이 있었기에 우리 산천에 대해서 재발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진경시대’가 출현하였다. 이 시대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남경태는 이를 ‘우물안의 개구리’로 표현한다. 비록 진경산수화로 대표되는 위대한 문화 유산이 탄생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지만, 냉혹하게 본다면 ‘진경시대’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자신을 기형적으로 자각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남경태는 ‘권지국사’라는 표현도 냉혹하게 지적한다. 중국이라는 강국에 인접했기에 외교상에 중국의 책봉을 받아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고려와 조선의 초기 지배층들의 모습을 냉혹하게 ‘자주’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어찌보면, 자주적인 국가로서 너무도 치욕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러한 남경태의 냉혹한 시선은 때로는 독자를 불편하게도 한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사랑으로만 보아서 일까.....

 

2. 남경태식의 한국사 맥락

이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남경태 식의 한국사를 바라보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대’, ‘중화사상’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할 수 있다.

남경태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삼국통일을 ‘굴욕적인 삼국통일’로 평가한다. 단순히 ‘불완전한 삼국 통일’을 넘어 ‘굴욕적인 삼국통일’이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신라가 중국의 한 지방과 같은 입장이었고, 스스로도 그런 관계를 원했다는 점, 나아가 당시 동양의 국제 질서가 그랬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중국과 독립적이고 상당 부분 자주적인 것으로 보는 ‘현대적’관점은 과거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오히려 감추고 있는 것이다. (중략)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1천 300년간 한반도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게 아니라 중국이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중국 중심의 고대적 국제질서를 확립한 사건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삼국통일에 대한 남경태식의 새로운 관점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점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역사학계의 견해와는 달리, 사대주의 역사관으로 평가하며, ‘조선’과 ‘화령’이라는 국명중에서 ‘조선’이 근세 조선의 국명으로 낙점된 것을 지적하며, 조선왕조의 국호 조차도 사대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서양인이 조선에 오지 않은 이유가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굳이 조선에 까지 올 필요가 없었고, 조선도 스스로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굳이 별도로 서양인과 접촉할 통로를 열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다. 일본을 ‘왜’로 낮춰부른 것도 중국을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사대주의를 떨쳐 버리고 일어선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이다.

이러한 한국사를 보는 남경태식의 관점이 한편으로는 새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에 대한 지나친 비약적 폄하로 읽혀지기도 한다. 내치에서는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군사와 외교는 중국에 맡겼다는 남경태의 비약적인 지적은 동의할 수 없다. 분명, 고려는 ‘내제외왕체체’라 하여, 안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밖으로 중국과 외교를 할 때만 왕을 칭하였다. 그래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황상’, ‘황도’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고려의 왕의 곤룡포 색깔이 황제의 색인 ‘황색’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또한, 조선도 대외 평화를 위한 목적으로 명에 사대를 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면 실력으로 맞서려고 까지 했다. 단지 조선 후기에 와서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을 부모의 나라로 받드는 모습들이 나왔을 뿐이다.

 

3. 옥의 티

남경태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출신의 저술가가 아니다. 더욱이 이책은 저술된지 꽤 오래된 책이다. 그러기에 한국사 교과서와 다른 서술, 혹은 최근의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류를 범한 흔적이 있다.

첫째, ‘중국의 영향을 일직 받은 고조선은 곧 청동기 문화로 접어들었’다는 표현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표현으로 읽혀진다. 특히 최근의 중국 고고학계에서 요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과는 다른 별개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를 고조선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식 동검과 한국의 세형동검이 제작방식이 다르고 별개의 청동기 문화라는 것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분명이 적혀있다.

둘째, 대한제국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제국이라고 지적한 것은 어이가 없다. 대한제국은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셋째, 선덕여왕이 처녀의 몸이었으니 아들은 커녕 딸도 있을리 없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 - 선덕여왕 기사에 “이름은 덕만이다. ……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선덕여왕은 결혼을 하였다.

넷째, 발해가 당이나 일본과는 교류하였는데, 건국한 뒤 100년 동안이나 통일신라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국사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를 무시한 서술이다. 교류의 증거가 많은데, 그중에서 ‘신라도’라는 길이 있을 정도로 신라와 발해는 교류하였다. 이는 한국사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 고려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서술도 학계와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다섯째, 고구려와 백제를 제거하고 200여 년 동안 한반도의 단독 정권을 통일신라가 유지했다는 서술도 오류이다. 통일신라 북쪽 즉, 대동강 북쪽에는 엄연히 발해가 있었다.

여섯째, 이승만 정권에서 추진한, 농지개혁의 결과 ‘지주-소작 관계가 그대로 온존’ 되었다는 서술도 한국사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농지개혁이 되었고, 그래서 농민들이 북한에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며, 농지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을 지주가 6.25 전쟁 중에 헐값에 팔아버렸고, 이 때문에 지주가 산업자본화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사 전공자에게는 상식이다.

이책이 보다 더 좋은 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오류는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더욱이 한국의 독자가 읽어야 하니까....

 

역사에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고, 이러한 관점들을 통해서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한다. 이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대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교과서에서만 제시되던 한가지 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불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면, 한번쯤은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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