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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자신의 얼굴을 보려면, 물에 비춰보고,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려면 옆사람의 얼굴을 보라! 라는 말이 있다. 조선의 모습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이웃나라를 바라보면서 조선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듯 싶다. 저자 박상휘는 제일교포 3세로 학부는 중국어 학과를 나왔으며, 한국에서 '조선 통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중국 중산 대학 국제 번역 학원 특빙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경계인으로서 한중일의 문화를 두루 섭렵한 박상휘가 쓴,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라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일본에 우리를 비춰보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수 많은 조선 선비들의 눈을 통해서, 일본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서 조선 시대 우리의 모습을 바로 비춰볼 수 있다.
1. 임진왜란의 트라우마
신숙주가 죽으면서 왕에게 "일본과 관계를 끊지 말아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신숙주는 일본과 관계를 끊으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적이기에 적의 동태를 알기 위해서라도 한쪽 손은 반드시 잡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조선은 일본과 관계를 끊는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임진왜란 시기에 수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 중에는 조선의 선비, 강항도 있었다. 강항의 눈에 일본은 삶을 가볍게 여기며 가족과 살갑게 지내지 않는 사무라이의 나라로 비춰졌다. 1617년 사형수 중에서 참수를 거부하고 스스로 할복을 선택한 사람에 대해서 이경직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죽음을 당하는 사람도 또한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자결하기를 원한다. 목욕하고 이발한 다음 눈을 감고 염불한다. 스스로 배를 가르고 손으로 오장을 끄집어내어 죽으면, 보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 칭찬하고 그 자손도 또한 세상에 이름이 높아진다."-45쪽
죽음을 미화하는 일본! 죽은 죄인의 시체를 시험삼아 만두처럼 마구 찍으며 자신의 칼을 시험하는 '타메시기리'를 행하며 어린아이들이 와서 보도록 하는 일본의 모습은 너무도 충격적이다. 단오에는 창칼로 사람을 죽인다. 특히 원한을 가진 사람을 죽이며, 이때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조선 선비의 문화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일본의 이러한 사무라이 문화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튜브 "롯본기 김교수"에서 타메시기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폭력이 일상화된 일본의 민낯을 바라보니 소름이 끼쳐온다.
조선의 선비들은 폭력이 살아있는 일본 사회를 보며 임진왜란의 공포와 충격이 소환되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일본이지만, 무력으로 그들을 응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에 원한이 없냐는 일본인의 질문에 조선 선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처단해 원수를 갚아주었기에 원한이 없다고 말했다. 어찌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사람만의 잘못일까? 일본을 응징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며 다시는 임진왜란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일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칼의 문화가 살아있는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다시는 이들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2. 귀머거리 조선의 정신승리
오규우 소라이는 1711년 통신사와 제자들이 주고 받은 수창시를 모아 '문사기상'을 편찬했다. 이 책의 발문에 "우레가 치면 만물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귀머거리는 편안하게 여기니, 문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는 말이 있다. '귀머거리'는 조선 사절을 뜻하며, 우레는 소라이 학파를 뜻한다. 조선에 대한 비하와 소라이 학파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표현이다.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면 시한수를 얻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문사기상'의 이 구절을 우리는 웃어 넘길 수 없다. 도대체 일본에 무슨 일이있었던 것일까?
1636년 김세렴이 통신사로 파견되었을 때, 일본의 문화는 조선에 한참 뒤졌다. 유교 경전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으며, 한시를 짓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너무도 많은 일본인들이 통신사의 시한수를 얻기 위해서 줄을 섰다. 통신사의 글은 값이 꾀나 나갔으며, 부적처럼 사용되었다. 통신사 스스로 생각해도 수준이 떨어지는 시를 급하게 지어서 일본인들에게 주면, 일본인들은 즐거워했다.
그런데, 1748년 통신사로 일본에 간 홍경해는 조선의 조선술이 일본에 뒤떨어졌다고 지적한다. 조선술의 순위가 아란타, 중국, 일본, 조선이라고 서술될 정도로 조선의 기술은 뒤떨어졌다. 심지어 1763년 기록에는 조선배가 일본인에게 비웃음을 받을 지경이라고 적고 있다.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의 세끼부내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계속된 기술개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조선의 조선술은 일본에 역전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술자를 천시여기는 조선이 결국 일본에 기술역전을 당했다.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항이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성리학을 전해준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교조주의에 빠져든다.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조선의 경직된 학문 풍토이다. 그에 반해서, 뒤쳐졌지만,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일본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비판하며 자유롭게 학문의 날개를 펼쳤다. 그들 학자들 중에서 오규 소라이는 단연 돋보인다. 주자학을 비판하며 주체적으로 유교경전을 비판 그는 조선 통신사들의 한시 수준을 단신 빨리 짓는 것만을 추구한다며 비판한다. 그의 제자는 조선을 '귀머거리'에 비유한다. 그랬다. 우리에게는 뼈아픈 사실이다. 조선의 주자성리학은 교조화되었다. 유연성을 잃어버린 조선 성리학은 주자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오규 소라이의 사상은 중화사상의 틀을 벗어나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규 소라이의 영향을 받은 카꾸다이의 말을 들어보자.
"나라에는 각기 나라의 도가 있어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해집니다. 인ㄷ도에는 브라만교가 있어 부처의 도와 함께 나란히 행해집니다. 서양에는 천주교가 있고, 그밖에 이슬람교라든지 라마교 같은 것을 여러 나라들이 혹 모두 갖고 있습니다. 작자칠인은 모두 개국의 군자이고 (중략) 어찌 꼭 중국만이 유독 귀하고 이적의 가르침은 없어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268쪽"장문계갑문사"
일본은 중국중심사상에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중국의 중화사상에 얽매여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오규 소라이 학파의 말을 귀담이 듣고 성리학 교조주의의 알을 깨고 나오기를 기대하기에는 조선 선비는 '귀머거리'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비극은 이미 이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어찌 흥선 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했기에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단정할 수 있으랴?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조선이 빨리 개항한들 근대화에 성공했으리라고 확언하기 힘들다. 역사에서 비약은 있을 수 없다. 조선은 18세기 부터 근대를 준비했어야했다. 그 출발점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조선의 사신을 일본은 '조공사절'로 위장하였다. 이를 통해서 막부의 권위를 전국에 과시했다. 조선은 문화사절로서 야만적인 일본은 문명국으로 만들어 다시는 임진왜란의 전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믿음으로 통한다는 뜻의 통신사는 본래의 뜻을 잃어만 갔다. 조선이 일본에 문화적 우월감에 취해있을 때, 일본은 부단히 조선을 배웠다. 마침내 조선을 뛰어 넘기 시작했다. 1811년 더 이상의 통신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일본은 인공섬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이미 일본은 서구화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고, 우리는 찬란한 중화 문명에 취해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배자도 없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는 승리할 것이요. 현재의 승리에 취해서 안일에 빠진다면 패할 것이다. 일본 막부의 통치방법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하며, 맹자가 말한 마음으로부터 진심어린 복종 즉, '심복'을 얻지 못한 도쿠가와 막부는 흙이 무너지는 것 처럼 무너질 것을 예언한 원중거와 같은 조선의 선비들이, 주자 성리학의 미몽에서 조선을 깨우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다시는 그 미몽에 빠져들이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