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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학기한글역주 - 동방고전한글역주대전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9년 12월
평점 :
도올 김용옥을 대학시절 TV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그후, 그는 동양철학에 대한 심도있는 강의를 우리를 일깨워주었다. 한국의 대표적 석학으로 우리사회에 날카로운 독설을 설파하는 그를 나즐공(http://www.hooz.com/)과 '대학 학기 한글역주'를 통해서 다시 만났다. 이 책에서도 도올의 날카로움은 빛났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이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다. 도올의 강연은 재미있고 쉽게 하지만, 그의 책은 쉽지 않다. 알기 힘든 외래어와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한예로 '시스테마틱'이라는 용어의 뜻을 알기 위해서 다음 검색을 했으나, 용어의 뜻을 찾을 수 없었다. 간신히 단어 검색을 해보았더니 'systematic'라는 단어였다. '시스테메틱'이라 표기하고, 철자를 괄호안에 적어 주었다면, 이러한 곤란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불친절함이 '대학 학기 한글역주'에서는 더욱 심해졌다. 이 책에는 '머릿글'이 없다. 이 책을 왜? 썼는지 알려주는 '머릿글'이 없음은 황당 그 자체였다. '존사'와 '학기'를 왜? 같이 묶었는지 머릿글에서 서술해주었다면, 이책을 읽는 수고로움이 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장장 6개월 동안 이책을 읽었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를 반복하면서 떠오른 나의 단상들을 적어보겠다.
1. 기존 학계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창공을 날다.
도올 김용옥의 위대성은 기존 학계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자신의 학설을 설파한다는 점이다.
"주희도 송나라의 일개 학인일뿐이며 왕수인도 명나라때의 일개 학자일 뿐이다."
"21세기의 학문을 과거 어느 학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학문을 훨씬 뛰어 넘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하는 것이다."-212쪽
조선의 유학자들은 동양고전 해석을 주자의 방식대로 하려했다. 특히 우리가 대학자로 알고 있는 우암 송시열은 새로운 방법으로 중용을 해석했다하여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였다. 학문의 자유를 말살하는 패악질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자를 뛰어넘는 연구성과가 나올 수 없는 구조를 노론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우리의 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강대국의 아류가 될 뿐이다. 도올은 조선성리학자들의 아둔함을 깨우치기 위해서 주자의 '대학'을 깨고 원본 '대학'의 참의미를 서술했다. 드디어 자유로이 학문의 자유를 얻게되었다. 도올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일본의 진사이는 주희를 비판하면서 '대학을 공맹의 혈맥에서 벗어난 후대작품으로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진사이와 비슷한 시기를 살앗던 우암 송시열은 주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도올은 자괴감을 느낀다.
"우암의 학문은 주희의 해석을 대함에 있어 근원적으로 경학적 방법론이라는 학문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 애초로부터 주자학을 북벌대의와 관련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필요하게 "사문난적"의 논의만을 일으켜 정쟁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우암식 노론의 학문논리는 결코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선사회를 이끌어갔다고 칭송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올이 지적했듯이, 성리학의 유연선이 사라지고, 정적을 죽이는 도구로 학문을 전락시킨 조선 유학자들의 태도는 우리 역사의 불행이다. 도올은 이러한 불행을 이제 끊으려했다. 그리하여 '대학'이라는 책을 편찬하면서, '여씨춘추'의 '존사'편을 함께 집어넣었다. '존사'에는 천자보다 더 막강한 도덕권력으로서 스승의 존재를 말함으로서, 단순히 '주자 집주'속의 대학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고본대학'해석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주자가 '사서집주'를 통해서 사대부의 윤리를 위한 도구로 수신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대학'을 천자의 책에서 사대부의 책으로 변화시켰다. 반면 도올은 주자 이전의 '대학'의 진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씨춘추'의 '존사'편을 집어 넣어 '주자의 대학'이전의 진짜 '대학'의 모습을 밝히려했다. 이것이 도올의 위대성이다.
2. '학기'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1) 학연후 지부족 교연후 지곤(學然後 知不足 敎然後 知困) : 배우고 난 후에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후에야 곤궁함을 안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과 수석과 학년 수석을 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을 암기해서 쓰는 실력이 아니라, 나의 관점에서 나의 주장을 설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역사교사가 되고 나서 나의 부족함을 알았다. 한국사 전분야를 강의하면서 내가 취약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역사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도 나의 부족함이 컸기 대문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완벽한 이해를 전제해야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배운뒤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치면서 자신의 지식의 곤궁함을 알게 된다.
2) 선학자 사일이공배 우종이용지 불학자 사근이공반 우종이원지(師逸而功倍 又從而庸之. 不善學者 師勤而功半 又從而怨之) : 잘배울 줄 아는 우수한 학생은 선생님께 즐거움을 선사하면서도 성적은 보통 학생들의 배가 된다. 그리고 그 공을 모두 선생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런데 잘 배울 줄 모른느 졸렬한 학생은 선생님께 괴로움만 선사하면서도 성적은 보통 학생들의 반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을 탓하지 않고 선생님만 원망한다.
'학기'에 나와 있는 이말은 요즘 현실과 일면 맞기도하고, 맞지 않기도하다. 예의 바른 학생들은 교사의 수업에 귀를 기울이고, 총명하여 가르치는 것이 수월하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한 학생은 가르쳤으나, 생각이 나지 않으면 배우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때로는 예의 없는 학생도 있다. 반면, 공부를 잘하지만 예의 없는 학생도 있다. 학원에서 배웠기에 학교 수업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공부는 못하지만 예의 바른 학생도 있다. 자신이 공부를 못하는 것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학기'의 내용은 일면 타당하지만, 일면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고전에 절대 진리를 담고 있지만은 않다. 시대가 변하면서 현실과 유리된 내용도 있다.
3) 유자청이불문 학불렵등야(幼者聽而弗問 學不躐等也) : 연소한 학생이 경철할 뿐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함부로 엽등(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감)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학기'의 내용중에서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학생이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간다면 이는 교사로서 더욱 즐거운 일이 아닌가? 학문에서 조차 선후배간에 등급을 지켜야한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학문은 경직화되고, 패거리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논문에 존칭을 쓰지 않는 것은 학자들은 대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승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주장이면, 당연히 제자가 이를 지적하고 스승을 뛰어 넘어야한다. 청출어람 청어람하지 못한다면, 어찌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말하고 싶다. '엽등하라! 질문하라!'
4) 고군자지어학야 장언수언 식언유언(故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 息焉游焉) : 그러므로 군자의 학습법이란 문제가 되는 것을 항상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촉발하는 계기가 찾아오면 그것을 열심히 연구한다. 휴식을 취하고 한가롭게 노닐 때도 항상 학문에서 생겨나는 의심과 관심사를 마음에서 지우는 법이 없다.)
상당시 공부에만 매진하라는 꼰데들의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몰입의 즐거움을 생각한다면, 학문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학문에 몰입해야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듯이, 학문에 미치지 않고서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 배움을 쌓고 닦고 또한 쉬면서 즐겨야만 학문을 이룰 수 있다. '학기'는 이를 말하고 있다.
5) 군자지교유야 도이불견 강이불억 개이부달(君子之敎喩也. 道而弗牽, 强而弗抑 開而不達) :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란, 학생이 가야할 대강의 큰 길을 보여주지만 억지로 잡아끌지는 아니 하며, 카리스마를 과시하면서도 학생을 억압하지 아니하며, 문제으 서두를 열어주되 금방 그 문제를 풀게 만드는 것이아니라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개닫기를 기다린다.
강압적이지 않고, 학생들이 스스로 깨우칠수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을 '학기'는 설파하고 있다. 알을 깨고 스스로 진리의 세계로 뒤쳐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을 이미 2천년 전에 설파하고 있다. 현대식 교육 방법이라해도 손색이 없는 이러한 교육방법을 이제 우리가 다시 발견할 때이다.
3. 대학을 통해서 오늘을 바라보다.
1) 호이지기오 오이지기미(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 좋아하는데 그 단점을 알고, 싫어하되 그 장점(아름다움)을 알라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만 알려하기 보다는 그 단점도 함께 알아야하며,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단점 뿐만 아니라 장점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래야 적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의 실수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싫어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미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면,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없다. 진정으로 삶을 살아갈 때 유념해야할 명언이다.
2) 대덕불관 대도불기 대신불약 대시부제(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 대덕은 관직에 얽매이지 아니하며 대도는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 아니하며 대신은 사소한 약정에 구애받지 아니하며 대시는 짧은 시간의 획일적 질서에 얽매이지 아니한다.
높은 관지과세상의 명리에 큰덕은 휘둘리지 아니한다. 큰도는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크다. 즉, 보편적 법칙은 한 기능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큰 믿음은 사소한 약속보다 큰약속을 지킨다. 어머니보다 큰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처럼.... 큰 시간도 짧은 시간의 획일적 질서에 얼매이지 않는다. 우주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을 초월하기에.... 상당히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3) 인자 이재발신 불인자 이신발재(仁者 以財發身 不仁者 以身發財) : 인한자는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인자하지 못한자는 몸으로써 재물을 모은다.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말을 해주고 싶다. 재물은 사람을 위해서 모아야한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00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젊은이가 죽은 사건이 연이어서 발생했다. 그 발전소의 주인은 재물로써 사람을 위하지 않고, 사람으로써 재물을 위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을 읽어 보아야한다. '대학'의 가치는 물질만능주의가 강해질 수록 빛날 것이다.
4) 국불이리위리 이의위리야(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 나라는 이익을 취하는 것만을 이익으로 삼지 아니하고, 의를 구현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는다.
한때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유행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를 사적 이익을 취하는 도구로 삼은 대통령과 특정 무속인에게 의존하며 아바타와 같은 삶을 산 대통령이 있었다. '대학'은 말한다. 국가는 이익을 취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여야한다고.... 독재자와 친일파의 후예들은 권력을 잡자 국가를 사적 이익을 잡는 도구로 사용했다. 우리의 국가가 사적 이익을 취하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대학'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대학'은 '논어' 보다 유명한 고전이 아니다. 분량도 적고 세상에 알려진 명언도 적다. 그러나, '대학'이 국가를 통치해야하는 제왕을 위해서 저술된 책이고, 주자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할 사대부에게 윤리적 기준으로 '수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고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대학'을 왜? 읽어야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주인이어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