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도경 - 중국 송나라 사신의 눈에 비친 고려
서긍 지음, 조동원.김대식.이경록.이상국.홍기표 옮김 / 황소자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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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 '고려'! 고려 인종 시기, 송나라 사신 서긍은 정해현 심가문을 출발해 고려로 향한다. 바닷길을 이용해서 고려를 다녀오는 사실길은 목숨을 건 긴 행해였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려의 힘이 필요했던 송나라로서는 고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서긍은 탁월한 눈썰미를 발휘했다. 고려에 머문기간이 1달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려도경의 내용은 자세했다. 고려의 민낯을 보고 싶었던 나는 고려도경을 펼쳐들었다. 중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고려는 어떤 모습일까?

 

1.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을 요나라의 장수 소손령도 인정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져있다. 또한 쿠빌라이가 원종을 만났을 때, "고려는 만리나되는 나라이다. 당태종도 몸소 쳐들아가 이기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쿠빌라이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 한가지 사례를 더해야한다. 서긍도 고려가 고구렬르 계승한 국가임을 인정하고 있다.

 

  "후위에서 당에 이르는 동안은 모두 평양에서 살았다. 이적이 그 땅을 평정하여 도호부를 세우자 도망하여 동쪽으로 조금씩 옮겨가 살았는데,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당말에 국가를 수복하였을 때 도읍지를 개주라하였으며 현재도 여전히 개성부를 두고 있다."(75쪽)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왕씨가 세운 고려는 고씨가 세운 고구려와 전혀 별개의 나라이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인의 조상인,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 곳곳에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며, 고구려인이 나라를 수복하여 고려를 세웠다고 일관되게 적고 있다.

 

2, 공자는 '동이'에 살고 싶어했을까?

  '논어' 자한편에 "공자가 구이에 살고자하였다. 어떤이가 물었다. "누추하지 않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사는데 어찌 누추하겠는가?(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공자가 동이족이라고 주장한다. 황당하기 그지 없는 주장이라 일축했으나, 놀랍게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서긍은 어떠게 생각했을까?

 

  "예법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다른 오랑캐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볼만하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동방에) 거처하고자 하면서 누추하다고 여기지 않은 까닭이다."-(146쪽)

 

  서긍은 공자가 동이족출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논어'에 나오는 '구이'를 우리민족을 뜻하는 '동이'로 해석했다. 과연 '구이'는 '동이족'을 뜻하는 것일까? 역사를 공부하면서 주의해야할 것이있다. 단어나 지명은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단어도 시대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다. 세종시대에는 '어린'이 '어리석다'라는 뜻이었다면, 지금은 '어리다'라는 뜻으로 변화한 것은 다들아는 사실이다. '동이'라는 말 자체도 중국의 입장에서 동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용어일뿐이다. '동이'에는 우리 '한민족' 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쪽에 있는 '일본'도 포함되는 용어이다. 선진시기에는 황하문명을 중심으로한 지역 밖의 '산동지방'도 동이의 범주에 들어있었다. 중국이 팽창하면서 동이의 범위는 중국대륙 밖으로 밀려났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읽는다면 커다란 오류에 빠지게 된다. "얕은 지식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포프)"라는 말이 있다. 얕은 지식이 모래성 처럼 쌓여 엄청난 오류를 범한다. 공자가 가고 싶었던 곳은 동쪽 바다건너 '조선'이라기 보다는 산동성 지역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3. 중화사상의 그늘

  "고려인의 경우에 중국 밖에서 나고 자라므로 움직이러면 큰 물결을 건너게 되니, 본래 배를 앞세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제 그제도를 살펴보니 간략하고 그리 정교하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물을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인가? 아니면 누추한대로 간략함을 추구하면서 졸렬해도 고치지 않기 때문인가?"-(393쪽)

 

  서긍의 눈에 비친 고려의 문물은 중국의 것을 따른 것은 기특해보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졸렬'해보인다. 거란족에 의해서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일 수록 송나라 사람들의 중화사상은 더욱 강해진다. 일종의 '정신승리'이다. 각지역은 그 지역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 그러하기에 중국의 것을 따른다고 우수하고 따르지 않는다고 졸렬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배에 관해서도 고려가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하여 졸렬하다는 표현은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특히 우리는 중국과 치른 해전에서 대부분 승리했다. 임진왜란 시기에도 일본과의 전투에서 육지에서는 패배했으나, 바다에서는 대부분 승리했다. 그만큰 우리의 배가 주변국의 배보다 우리 지형에 알맞은 배였기 때문이다.

  주변 '오랑캐'의 유연하고 탁월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수록 송나라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은 '진'나라는 유목민족의 기마술과 말타기에 적당한 그들의 의복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외부의 강력한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장점을 받아들여 우리것화할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고려도경'이 완성된지 2년 후, 1126년 송나라는 '정강의 변'을 겪게 된다. 송나라의 황제 2명이 금나라에게 끌려가는 치욕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용력을 잃은 자가 겪어야하는 치욕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흥미로운 기사들이 넘쳐난다. "고려의 과일중에 밤은 크기가 복숭아만하며 맛이 달고 좋다."고 한다. 이당시에 밤이 과연 복숭아만했는지, 아니면, 복숭아가 밤만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이밖에도 고려의 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고려에 머문 기간이 1달여밖에 되지 않으며, 사신이 머무는 숙소 주변을 위병이 지키고 있었고, 객관 밖을 나간 것이 대여섯번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의 탁월한 관찰력 세밀한 묘사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고려에 관한 글에 더하여 자신이 직접 그림까지 그려 완성한 40권의 '고려도경'은 고려와 송이 손을 잡고 거란을 공격하는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송나라는 수도 개봉을 여진족에게 내어주고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야했으며, 고려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그뒤를 이어 1170년 무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고려도경'의 그림도 사라졌고, 서긍은 사라진 그림을 다시 그릴 열정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고려도경'은 우리가 고려와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안내서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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