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건강실록 - 역사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는
고대원 외 지음 / 트로이목마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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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종합학문이다.'라는 말을 대학 선배에게 들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치학, 경제학을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경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의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깨닫은 책이 있다.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이 바로 그 문제작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더 이상 역사학 만으로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성왕조 건강실록'을 꺼내들었다.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우리에게 역사를 어떻게 달리보는 방법을 제공해줄까?

 

1.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 사건'에 대적하다.

  조선시대 전공 학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책이 있다. 바로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 사건'이라는 두권짜리 책이다. 조선왕조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강연에서 "어떤 학자는 조선의 왕들 모두가 독살된 것처럼 쓴 책이 있다."라고 비꼬곤했다. 마치, 현대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브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발발과 기원'이라는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모습을 이덕일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럼,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과 '조선왕조 건강실록'의 차이점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두책은 대비점이 많다. 이덕일은 '조선왕조 실록'을 근거로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반면,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조선왕조 실록'보다 자세하고, 보다 진실에 한걸음 더 다가간 '승정원 일기'에 근거해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덕일이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다양한 사료들을 근거로 자신만의 논리를 전개했다면, 방성해 원장을 비롯한 9명의 한의학자분들은 한의학이라는 의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보다 정확한 '승정원 일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한의학에 전문가라는 점에서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탁월한 필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역사관을 전개하는 이덕일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 사건'에서 독살당한 인물로 지목한 '소현세자'와 '효종'은 독살당하지 않았다고 황지혜와 박주영 한의사는 주장한다. 특히, 소현세자의 경우, 소현세자의 병명은 학질이 아니라, '혈액순환 장애로 인한 혈관염'이 그의 병이라 주장한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에 의해서 독살된 것이 아니라, '혈액순환 장애로 인한 혈관염'으로 죽은 것이라 한다. 타국에서 고대 인질 생활에서 얻은 고통과 질명이 '혈액순환 쟁애로 인한 혈관염이라는 병을 가져왔고 그를 저 세상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효종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덕일은 효종이 앞으로 10년은 더 살 수 있다고 스스로 말했으며, 관우가 휘두르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른 강건한 왕이 신가귀의 침을 맞고 출혈과다로 쇼크사한 것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주영 한의사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효종은 건강한 왕이 아니었음을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말한다. 당료병을 앓고 있었던 효종은 혈관이 얇아 졌으며, 출혈이 있을 경우, 피가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알지 못하고 신가귀가 침으로 종기를 다스렸고, '당뇨병성 미세혈관병증'으로 인한 출혈과다로 효종은 죽었다. 일종의 의료사고였다.

  이 책에는 한편의 글을 쓰고 그 근거가 되는 다양한 참고문헌이 적혀있다. 이미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조선시대 왕들의 사인을 밝혀보려는 다양한 논문이 있었다는 점에 무척놀라웠다.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야한다. 만약, 이덕일의 책만 보았다면, 조선의 왕들이 모두 독살되었다는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승정원 일기'라는 새로운 자료를 근거로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래서 역사는 종합학문이다.  

 

2. 산자를 위한 '예', 죽은자를 위한 '예'

  만인지상의 지존의 자리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존재, 조선의 왕!! 그러나 그러한 왕들도 한낫 병마와 싸우는 나약한 왕들이었다. 조선후기 왕들중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많은 여인들을 울렸고, 많은 신하들의 목숨을 거두어 들였던 '숙종'도 병마와 싸우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숙종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해수병, 위장병, 통풍 등등 참으로 많은 병들이 숙종을 괴롭혔다. 말년에는 앞이 보이지 않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기 까지 했다. 그의 아버지 현종 또한 병약한 왕으로 집권시기 내내 병마와 싸워야했다. 어디 그뿐이랴! 숙종의 아들 영조는 자신의 대머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돋아난다고 기뻐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들도 병마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왕들이 유독 병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최고의 의료혜택을 받으며, 좋은 음식을 먹은 그들이 이렇게 병약하다는 사실은 너무도 아이러니하다. 나는 그 이유를 성리학에서 찾고 싶다. 성리학국가인 조선은 조선의 왕들에게 무예보다는 학문을 공부하고 토론하도록 강요했다. 조선전기 세종이 강조하던 '강무'를 조선후기에는 실시하지 않았다. '강무'는 일종의 군사훈련이다.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신하들은 '강무'를 행하는 조선의 왕들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강무'로 인해서 백성이 괴롭고, 왕이 공부는 하지 않고 사냥이나 한다고 매도했다. 그결과, 조선의 왕들은 운동부족에 시달렸다. 이러한 운동부족은 인조 이전, 평균 자셔의 수가 12명에서 인조이후, 6명으로 추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이 책의 저자 하동림은 조선의 출산율 저하원인을 운동부족하나만을 꼽지 않는다. 왕비의 출산력 저하, 유교적 종법질서가 굳어지면서 처첩관념이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서 후궁수가 감소, 제례기간이 길어짐으로써, 왕의 금욕기간이 길어짐, 잦은 출산으로 왕비의 건강이 악화되고 이에 따라 자녀의 건강이 나빠져 유아사망률이 높어졌다. 등등.... 다양한 원인을 조선 후기 출산율 저하원인으로 꼽는다. 그중에서 유교적 종법질서가 굳어지면서 처첩관념이 심화되어 후궁수가 감소한 것과, 제례 기간에 왕의 금욕 기간이 길어진 것은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나타난 조선후기만의 모습이다. 또한, 조선의 왕들 중에서 문종과 인종의 경우, 부모의 상례를 극진히 치르다가 병이 악화되었다. 공자도 즐겁데 음란하지 말며, 슬퍼하지만,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樂而不淫 哀而不傷)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을 위한 예절이 오히려 산사람을 죽게 만드는 모습이 조선 후기에 많이 보인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예는 죽은자를 위한 예가 되어서 조선 왕실을 몰락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3. 인조와 영조,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다.

  무능한 인물 혹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물이 지존의 자리에 있다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는 그러한 일을 이미 겪었다. 503호에 계신 그분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들중에서도 무능하거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임금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휘두른 칼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겨주었다.

  조선의 왕들을 통털어 가장 용렬한 왕을 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조를 꼽는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는 조선을 이끌 능력도 없었으며,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의 앞길을 밝힐 혜안도 없었다. 저자 김동율 한의사는 인조를 '정신질환자'라고 진단한다. 단순히 인조를 비판하기 위해서 한말이 아니다.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나서, 그는 '심신증'을 앓고 있었다. 피해망상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그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지존의 자리에 앉아 수많은 백성들이 여진족의 말밝굽 아래 신음하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다.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의 가족을 죽여버렸다. 못난 자가, 지존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도 상처를 입어야했다. 더더욱 황당했던 것은 50대의 나이에 10대의 아내를 맞이하고 나서는 첫날밤만 보내고 다시는 '장렬왕후'를 찾지 않았다. '장렬왕후'는 얼마나 큰 고통과 외로움에 시달렸을까?

  능력은 있었지만,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왕 때문에 가족이 상처를 받은 경우도 있다. 바로 '영조'이다. 영조도 자신의 부인을 첫날밤에 소박 놓았다. 영조가 정성왕후에게 "손이 참 곱다."며 칭찬을 했는데, 정성왕후가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유였다. 무술이의 아들이 자신을 비하했다고 영조는 오해한 것이다. 무술이의 딸이라는 컴플랙스에 휩싸여 평생 주변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받았던 영조였다. 결국, 정성왕후는 66세의 나이로 '검은 피를 한 요강이나 토하면서'사망했다. 이를 지켜본 혜경궁 홍씨는 "어려서부터 쌓인 것이 다 나온 것 같다."고 말한다. 한평생 가슴 속 응어리가 피로 쏟아져나온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직접 죽였다. 영조!!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행은 잘못된 자식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했던 이유는 뚱뚱해서였다.!"라고 적혀있다. 글쎄??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뚱뚱해도 예뻐보인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한 이유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자신의 '아바타'가 되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무인 기질이 강한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면서, 문인 기질이 강하지 않은 것에 화를 냈다. 자식의 긍정적인 부분을 긍정적으로 보았더라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들상을 만들고 아들이 그 틀에 맞지 않다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스카이케슬'은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다. 조선의 왕조차도 자신의 아들이 자신이 만든 틀대로 자라지 않자, 이를 못견뎌했다. 참새에게 독수리가 되라고 요구하는 못난 영조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길 바란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인간이 강력한 권력을 갖는다면,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안겨준다. 영조와 인조는 우리에게 권력자가 이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반면교사이다.

 

5. 만약, 그랬다면, 장희빈은 살았을까?

  "이때 나라면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장희빈처럼 다시 옛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무리한 방법을 써서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힘없는 궁녀보다는 훨씬 높은 정1품 희빈의 자리에 만족하면서 남은 인생을 자식과 함께 편안히 살 것인가?"- 160쪽 (방성혜)

 

  한의사이자, 여인으로서 장희빈의 삶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는 글귀가 애절하다. 장희빈이 정1품의 자리에 만족하였더라면, 비참하게 죽지 않고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라는 방성혜 원장의 주장에 과연 동의할 수 있었을까? 한의사로서 탁월한 한의학적 지식으로 역사를 분석했지만, 역사학과 권력의 냉혹함을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어보인다. 권력은 냉혹하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해서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다. 인현왕후의 뒤에는 서인이 있었고, 장희빈 뒤에는 남인이 있었다. 남인이 몰락한 후, 더 이상 그녀를 지켜줄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도 자신의 목숨과 세자라는 지위를 지키기에도 힘이 부족했다. 이때,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서 장희빈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인현왕후를 죽이기 위해서 무녀를 궁궐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하나의 핑게꺼리에 지나지 않았다. 왕비를 저주한 일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던 일이다. 왕비를 저주했다고 목숨까지 거두는 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숙종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이뤄질 수 없었던 일이다. 더욱이 그녀는 세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장희빈의 선택을 묻기 전에, 그녀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역사적 판단을 올바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숙종도 노론세력도 장희빈이 살아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다.

 

  비아그라가 개발되고 나서 한의사들이 힘들어졌다는 말이 있다. 양의학과 중의학이 하나로 융합된 중국에 비해서, 한국에는 한의학과 양의학이 서로 대립하며 평행선을 긋고 있다. 한의학에 대한 신뢰를 갖지 않는 사람도 꾀있다. 특히 양의사들은 한의학을 미신 취급을 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한의학을 무시하는 의대생을 보기도 했다.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자, 동의보감에 있는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소개하며, 동의보감은 무신을 모아놓은 종합 서적인 것처럼 비난히기도 했다. 그러나, 한의학은 양의학이 못하는 일을 해내기도 했다. 개똥에서 말라리아 치료제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한의학 덕분이었다. 독일에서는 21세기 신약을 한의학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너무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아기를 잘낳게 해주는 한약이 있다는 말에 무척 놀랐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달생산, 불수산, 궁귀탕이 바로 그것이다. 궁중에서 왕족들이 효험을 보았던 한약들을 우리는 무지로 인해서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산업 분야들이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면 단 한 분야, 의학은 예외이다. 중국 의학의 기본을 잘 적용하면서도 중국보다 훨씬 우수한 수준에 도달했다. 중국의 북경에서도 꼬레의 의학서적이 인쇄되는데 꼬레에서도 가장 유명한 '동의보감'이다."

 

  1874년 '꼬레의 교회 역사'에 기록한 달레 신분의 지적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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