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벽암록
윤용진 지음 / 애니빅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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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문관'을 강신주 방식으로 풀어낸,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 선문답에 대한 책들을 더 읽어 보고 싶었다. 사실 강신주가 '벽암록'을 비롯한 선문답 관련 서적들에 관한 책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문답책들이 쉽게 풀어 놓았다고 말들하지만,  강신주 처럼 쉬우면서도 깊이있는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깊으면서도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왠만한 고수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대려도 강신주는 새로운 선문답 관련 책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그를 기다리느니, 다른 책들을 읽으며 갈증을 해소해 보기로 결심했다. 푸른 바위위에 무엇을 기록했는지, 책제목이 '벽암록'이다. 5권으로 풀어 놓은 벽암록이 있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마추어가 쉽게 풀이한 '세상 벽암록'을 선택해다. 과연 이책은 선문답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을까?


1.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조린다.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으니, 몇개의 화두는 풀 수가 있었고, 몇개는 저자 윤용진의 풀이를 읽고서 이해를 했다. 그런데, 나의 풀이와 저자 윤용진의 풀이가 다른 부분이 있다. 
  제2칙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에 대한 풀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만을 꺼리면 된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그러니 도는 명백함도 없다. 라는 조주화상의 말에 수행승이, '명백함이 없다면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나는 모른다.'라고 답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윤용진은 '명확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크다고 할 수 있는가?', '도 또한 그러하지 않는가?'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가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행승의 입장에서는 윤용진의 풀이가 오히려 궁금증을 더해주지 않을까?

  도는 간택을 꺼린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간택하지 않으니 도는 명백함도 있을 수 없다. 노자가 말했지 않은가? 도를 도라하면 도라할 수 없다고.... 인간의 개념으로 도를 명백히 규정한다면 도는 하나의 도그마로 떨어진다. 인간의 도그마에 의해서 규정된 도를 과연 도라할 수 있겠는가? 한예를 들어보자. 조선 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노론세력에 의해서 절대화되고 교조적으로 변한 조선의 성리학을 유학의 정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은 주자와 송시열의 사상만을 정통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지 않는가? 그들을 학자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고 동의하지 않았다고 칼을 들이 대는 행동은 파시스트들이나 하는 야만적인 행동이다. 절대화된 도는 도가 아닌 것이다.

  제3칙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에 대한 풀이도 동의할 수 없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스님이 '법체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마조화상이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 이네.'라고 답한다. 일면불의 수명은 단 하루요. 월면불의 수명은 8천 1백세이다. 윤용진은 이를 '수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풀이한다. 그럴까? 마조화상의 말씀을 너무 낮은 수준에서 풀이한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승에서의 삶은 하루 같이 짧지만(일면불(日面佛)), 저승에서의 삶 혹은 윤회의 삶은 억겁의 시간이다.(월면 (月面佛))라고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마조화상은 지금 이순간의 삶보다는 우주적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조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원주스님의 말에 답하고 있다. 불교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제20칙 거기엔 뜻이 없다.의 풀이는 너무 의아스럽다. 용아납자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취미화상이 선판을 가져오라 한다. 용아납자에게 선판을 받아 들고는 즉시 내려쳤다. 이를 윤용진은 "분명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했다."라고 풀이한다. 선판과 포단을 내리친 것이 어찌,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되는가? 선판과 포단은 참선을 할 때 필요한 것들이다. 나에게 묻지 말고, 네 스스로 좌선하여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용아납자'를 깨우치는 스승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제29칙 온 세상이 파멸할 때라는 주제는 불교를 순응적인 종교로 오해하기 쉽도록 풀이를 해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행자가 '온 세앙이 파멸할 때' 그것을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대수화상이 '따라가라!'라고 말한다. 이를 윤용진은 '그날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풀이했다. 얼마나 순응적인 풀이인가! 나는 풀이를 달리한다. 불교의 생각의 넓이와 폭은 헤아릴 수가 없다. 미륵보살도 56억 8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오신다 하지 않았는가? 그러하기에 온 세상이 파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의 우주가 사라지고, 새로운 우주가 생성되는 새로운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의 시점이다. 그러하기에 대우주적 순환 속에서 온 세상의 파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것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대수화상은 '따라가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63칙 남전의 일도양단에 대한 풀이도 저자와 나의 생각이 다르다.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서로 다투자.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절단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선승들이 말이 없자, 남전화상은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버렸다. 이를 윤용진은 '한번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한번 죽은 고양이도 다시 살아올 수 없다.'라고 풀이한다. 남전화상이 분열된 선승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양이의 생명을 거두었다는 풀이로는 남전화상의 의도를 다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선승들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서 선승들의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 집착을 없애려 고양이를 죽였다고 풀이해야 보다 근본적인 풀이가 되지 않을까?

 

2. 불친절한 용진씨

  이 책은 대중을 위해서 씌여졌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서 보다 친절한 풀이를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제43칙 산놀이를 설명하면서 '오노봉'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또한 제69칙 남전의 일원상 또한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전화상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라 풀이한다. 그렇다면, 남전화상이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설명해주어야한다. 그러나, 저자 윤용진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62칙 우주 가운데 보물은 원문과 저자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책에는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혜초"라는 인물의 이름도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혜초가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해 놓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화두의 내용을 살펴보면, 혜초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문익화상이 '네가 혜초니라.'라고 말했다. 저자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이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문익화상이 일깨우고자 했던 참된 의미는 '네가 부처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려한 것이 아닐까?

  저자 윤용진이 스스로 밝혔듯이, 불교 철학자도 아니요, 스님도 아니기에 깊이 있는 설명을 바랬던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다음에 '벽암록'의 본칙과 송, 수시, 착어, 평창까지 자세히 설명해 놓은 책을 읽을 때, 이 책과 비교하면서 나름의 이해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은 벽암록의 끝이아니라, 시작점이 셈이다.

 

  불교에 많은 관심이 있는 윤용진이 심혈을 기울여 풀이를 달아 놓았다. 여행을 하면서 틈틈히 볼 수 있는 책이다. 하나의 화두를 읽고 그 뜻풀이를 하고, 이를 윤용진의 풀이와 비교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선문답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간단히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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