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는 그림을 그리는 여자가 되었다. 중년에 이른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지 누가 꿈이나 꾸었을까. 그렇다고 내가 그림에 탁월한 소질이 있거나 정식으로 그림을 공부해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도서관 모임의 사람들과 함께 멋진 프로젝트에 뛰어들게 되는바람에 일이 그렇게 됐다.
저번 주에 나는 소나무를 한 그루 그려가야 했다. 소나무 말고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연산군과 연산군의 묘, 손병희 선생님과 손병희 선생님의 묘, 남산 팔각정, 낙타의 머리 등등도 그려야 했는데, 그런 것들을 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소나무를 그리려 할 때엔 아직 날이 밝기 전 캄캄한 새벽이었다. (그림 그리는 여자일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느라 밤도 샐 줄 아는 중년의 여자라는 사실이 기쁘다.)
핸드폰으로 소나무 이미지를 검색했는데 키 큰 소나무가 밑둥부터 꼭대기까지 잘리지 않고 나온 사진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잘리거나 하지 않으면 겹겹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진이라 소나무들의 가지와 잎이 뒤엉켜 한 그루 소나무의 형태를 제대로 떠오기 힘들거나.
그래서 최대한 내 머리 속에 소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애를 쓰며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나무 막대기에 강아지풀을 꽂아 놓은 모양... 혹시 모임을 같이 하는 다름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오해할까봐 '무지 어색한 소나무'라고 소심하게 해설을 달아놨다. 더러워진 빈 병을 닦기에 딱 좋을 것 같이 생긴 저 소나무를 사람들 앞에 내놓은 생각을 하니 한없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가지고 갈 그림들을 체크하다가 저 소나무 그림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우리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직접 보고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나 아이 자전거를 끌거나 무거운 장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가던 단지 길에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려니 이것 또한 어색하고 민망하고 쪼그라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열정을 가진 화가처럼 마음을 무장하고 소나무를 스케치했다. 그래서 탄생한 소나무 그림은 이랬다.
이 소나무도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강아지풀 꽂아놓은 막대기 같은 소나무보다야 백배천배 훨씬 나아졌다. 자세히 보니 소나무는 가지가 어긋나지를 않는다. 나란히 같은 높이에서 뻗어 나온다. 그리고 쭉 뻗은 가지 끝에 잔가지들이 뻗고, 거기에 바늘같은 이파리가 다닥다닥 무더기로 붙는 편이다. 소나무다운 소나무(?)를 그리려면 역시 '잘 보고' 그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날 미워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난 항상 도대체 쟤는 날 뭘로 보고 함부로 구는지 궁금했었다. 그 때 '날 좀 잘 봐봐.' 라고 얘기했으면 좀 나았을까? 그 아이 마음 속에 있던 나는 강아지풀을 꽂아 놓은 막대기같이 생긴 저 꼴사나운 소나무같은 것이었을까?
혹시 내 마음 속 누군가도?
집중해서 잘 본다고 그대로 똑같게 그려지지 않는 그림처럼 (똑같이 잘 그린다고 해도 가령 앞모습을 그리면 뒷모습은 가려지니까) 제대로 잘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방향에서의 모습에서는 오해의 여지를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게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사람도 나무처럼 그 모양이 해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는 거니까. 다른 방향에서 본 그 사람의 모습은 내가 모를 수 있으니까. 잘 본다는 건 중요하지만 본다고 그 사람의 면면을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그 사람의 면면을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어쩐지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기가 아쉽지만 그림 그리는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모이는 사람들 모두 열심히 그리느라 고생했는데 결과가 멋지게 잘 나왔으면 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