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있다.

「3시의 나」, 아사오 하루밍이라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가

1년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오후 3시에 자기가 뭘 했는지를 짧게 기록해 둔 것이다.

책을 읽기도 전에 글의 기획이, 아이디어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그것도 막내가 이제 겨우 초등 2학년인 나같은 아줌마는

오후 3시에 벌어지는 일들은 너무 뻔해서

오히려 오전 11시쯤에 벌어지는 일들을 써야 글이 다양해질 수 있겠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궁리로 머리를 굴려보기도 했다.

 

책에 쓰여진 작가의 사는 모습이 활발하고 다양해서 젊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읽다가 중간에 작가 소개글을 확인해보니 1966년생,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았다. 

이런 나이에도 이런 글이 나올 수 있구나,

난 나에게 다양한 무게의 추를 너무 많이 올려놓고 사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내 사는 모습을 돌아보며 고민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읽는 기분이 든다.

40대인 내가 10대나 20대 혹은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던 30대에 써놓은 일기들을 읽으면

당시엔 힘들고 지겹게 느끼던 것들이 사랑스럽고 기특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뭐, 때론 창피하고 부끄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두툼하게 쌓인 지나온 시간의 더께가 그런 것들 마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해줘서,

오래된 일기장을 읽고 나면  조금은 내가 대견하고 심지어 예뻐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일들을 잘 견디며 살아줘서 고마워, 하는 기분이랄까.

오래된 일기같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지금의 내 모습에 그렇게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내 곁에서 따뜻한 인연이 되어준 사람들과 날카로운 상처가 되었던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의 작가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며 '간장 끼얹는 걸 깜빡 잊은 두부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난 한번도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 본 적이 없다.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너무 강하게 나를 휘감아서

거리를 두고 표현하고 묘사할 만큼의 여유를 챙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정말 작가구나, 싶었다.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일 때 넘치지 않도록 가스불을 지켜보며 조절하듯

분노와 미움을 객관화해서 표현하는 것이 작가적 능력이 아니고 뭘까. 

일반인인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이르지 못한 경지다.

그나마 이 작가가 나보다 나이가 쬐끔 더 많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그 쬐끔의 차이 동안 과연 나는 감정의 가스불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될까?)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그 느낌을 소중히 기록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게를 자르고 있는 엄마의 손가락에 끼워진 핑거코트, 자주 가는 식당이나 카페, 상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다정하거나 의아하거나 꼴불견인 모습들, 산책하다가 발견한 네모난 유채꽃밭, 같이 사는 고양이 냥코, 

지인들과 어울려 함께 한 식사와 여행 그리고 여러가지 일과 업무들. 읽은 책들에 대한 글들이 짧지만 친근하다.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서, 얼마전 한 종교방송에서 하느님을 섬길 줄 모르는 일본 같은 국가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부르짖던 어느 성직자의 주장이 정말 이루어진다면. 이 작가가 너무 슬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될 정도였다.  (물론 그 성직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니다.  TV를 보면서도 저 성직자 좀 오버한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일본에서 잘 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라면 나와는 사는 모습이 참 많이 다르겠지만

때론 우울에 빠지고, 지독한 감기로 고생하고, 무력감에 시달리고, 일에 지치고, 실수하고, 속상해하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힘을 빼고 쓴 글이라서인지 이질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내 인생이야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지금까지 살아온 모양대로 그렇게 주욱 이어가겠지만

그런 삶이라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는

나 같은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마치 나태주 시인의 <풀꽃>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도 나온다. 

'수수한 것은 가까이 다가가야만 눈에 보인다.'라고.

수수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일상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정하게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은 충동이 용솟음치게 만드는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내가 생각한 건

우리의 일상은 소소할지언정 시시하지는 않다는 것.

나름 잔잔하게 빛나며 흘러가고 있다는 것.

 

음, 바로 그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