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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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의 사랑


이 소설은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너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정사 장면을 요즈음엔 거리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연하의 유부남 A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작가의 실제 경험을 적은 67쪽 정도(첫 문장을 9쪽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실제로는 60쪽도 되지 않는다)의 짧은 소설이다. 작품해설과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까지 다 합쳐도 100쪽을 넘지 않는다. 52쪽에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라는 글이 나오는 걸 보면 앞의 포르노 정사 장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덧붙여진 게 틀림없다. 불륜의 사랑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르노의 정사 장면을 마주하는 것만큼 당혹스럽고 부도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일까. 도덕적 검열, 가치판단의 잣대를 유보한 채로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언젠가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라는 책으로 주부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주부들 대부분이 남녀주인공의 심리나 갈등, 작가의 의도나 문체, 이야기의 전개방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그 소설이 실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 주인공의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그 여주인공은 육체적 불륜은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신들의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과시하려는 듯 맹렬히 비난했다.


<세벽 세 시~>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독자의 도덕성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검증하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나이든 한 여자가 연하의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며 느끼는 열정과 불안과 질투와 방황, 그것을 모두 포함한 자신의 삶과 시간들에 대해 적은 것이다. 도덕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증명하도록 하고, 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작가)의 마음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륜의 현장을 목격한 아내 혹은 남편의 마음은 잠시 접어두자. 그런다고 해서 당신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이든 여자의 사랑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사랑의 열정이 사치가 되는 나이, 혹은 그 사치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나이를 자각하는 마지막 문장이 쓸쓸하다.

작가는 A가 떠난 후의 공허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사랑의 마법이 풀리고 열정이 사라진 뒤 늙어버리고 마는 여자. 그녀 앞에 놓인 시간들은 빛깔도 향기도 없이 칙칙하고, 의미 없이 공허할 뿐이다. 나는 이 문장을 앞에 두고 한참을 책 앞에 머물러야 했다. 단지 늙어갈 뿐인 내가 그 문장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이는 나를 통과한 시간을 세는 단위다. 어느 광고에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나이값을 매기는 요구와 조건은 까다롭고 엄정하다.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나의 나이값을 적절히 지불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게다가 내 앞에는 점점 나빠질 게 분명한 신체기능과 질병의 위험, 노인빈곤층으로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것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이는 숫자 이상의 것을 말한다. 아니 에르노가 A와 사랑하면서 느끼는 고통과 불안 중에는 분명 그녀의 나이에 기인한 것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이든 여자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이라서 언젠가 그가 떠날 것을 안다. 슬프다.

 

이야기하는 법, 기억하는 법. 존재하는 법


그녀가 사랑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새로웠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열정적 사랑이야기라기 보다 그를 사랑한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관찰자의 집요한 시선으로 사랑에 빠진 의 내면을 직시하고, 성실하고 섬세하게 적어나간다. 사랑에 빠져 이성을 잃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허우적거리는 여자와 관찰자로서 기록하는 여자가 동일인물이라는 게 신기하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대화라든가 폭발적인 감정선 같은 것이 별로 없어서 생생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나간 사랑이 남겨둔 흔적과 의미들, 여전히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들과 시간들을 글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현재의 라는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작가는 A와의 사랑을 복기한다. 자기 내면에 대한 글들이 명료하다. 작품해설 글을 읽어보니 이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삶을 쓴 것들인가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와 연인들이 그녀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작가가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작가의 작품 중에 <삶을 쓰다>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열두 편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들을 담은 선집이라는데, 생존하는 작가로는 최초로 갈리마르 콰도르 총서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삶을 쓰다>라니...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이었고 그녀의 존재방식이었나 보다. 한 번 읽어보고 싶지만 아직 국내에 번역 출판이 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시계를 풀어놓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차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난 머지않아 그 사람이 조심스레 시계를 훔쳐볼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16쪽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17쪽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47쪽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5쪽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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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3-14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소설 엄청 좋아하는데요, 이 리뷰를 읽으니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이미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이 리뷰의 인용문을 보니 다 새롭고 또 명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소설은 그 남자와 나의 사랑이야기 라기 보다는, 그를 사랑한 ‘나‘의 이야기지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특히나 47쪽의 인용문 좋네요.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섬사이 2018-03-14 22:42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다락방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알라딘 서재를 2년이나 떠나 있다가 돌아왔는데, 다락방님의 댓글이라니! 감격스럽네요.

이 책,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여자의 마음이 너무 잘 묘사되어 있어서 불륜이고 뭐고간에 한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에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아요. 그 47쪽의 문장은 저를 멍하게 만들었어요. 갑자기 슬퍼지고 쓸쓸해져서 책을 읽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자꾸 생각났어요.

다락방님과 책에 대해 댓글을 나눌 수 있어 기뻐요!
 
에고라는 적 - 인생의 전환점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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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책인 줄 알았지

자기 계발서 류의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사람은 책 한 권 읽는다고 쉽게 변하는 게 아니라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뜻하는 바를 이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냥 그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그 사람과 나의 삶의 지점이 다르고 채워가는 삶의 내용과 의미가 다른데 그 사람의 경험과 사례가 나에게 똑같이 적용될 리 없지 않겠냐고, 내가 책한테까지 잔소리를 들어야겠냐고 고개를 돌렸다. 이 책도 심리학 책으로 오해하지 않았다면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 표지 뒤에 인쇄된 추천글처럼 이 책이 '완벽한 길잡이'라거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은 이 책을 읽기 전의 당신과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대함은 겸손한 시작에서 비롯되며 힘들고 귀찮은 일에서 비롯된다.(p.90)'나 '에우테미아 euthymia (p.163. '마음의 평정'을 뜻하는 그리스어)'처럼 내 지난날의 어느 한 부분을 돌아보게 하거나 지금의 나를 점검하게 하는 문장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에고'가 뭔데?

제목에서부터 에고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낸 이 책에서 에고는 프로이트가 정의한 에고와는 다른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에고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 
'거만함', 
'자기중심적 야망', 
'어떤 것보다 자기 생각을 우선시하는 특성', 
'합리적인 효용을 훌쩍 뛰어넘어 그 누구(무엇)보다 더 잘해야 하고 보다 더 많아야 하고 또 보다 많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 
'자신감이나 재능의 범주를 초월하는 우월감'

으로 정의된다. 저자는 사람은 누구나 열정, 성공, 실패라는 인생의 세 단계 중 하나에 속해 있는데, 에고는 이 세 단계,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단언한다. 저자가 설명하고 예시를 통해 드러내는 에고의 모습은 심술궂고 변덕스럽고 유아적이며 겁쟁이에다 제멋대로인 고집불통이고, 거만하다. 그런 에고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버티고 있으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을 방해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저자는 분노와 증오는 에고를 통제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에고를 잘 통제하는 사람은 '열망하지만 겸손'하고, '성공을 해도 자비'로우며 '실패를 해도 끈기'가 있다.

저자는 말콤 X, 독일 메르켈 총리, 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기타리스트 해밋,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 미식축구 감독 빌 월시, 조지 마셜 장군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예로 들면서 에고를 잘 통제한 예와 통제에 실패한 예들을 열거한다. 너무 많은 예시가 산만하게 느껴지고 저자가 말하려는 주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많은 예시를 통해서 '성공'과 '실패'를 단지 부와 명예, 권력을 얻거나 잃는 것으로 이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벨리사리우스와 말콤 X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에고를 통제하는 능력으로만 보자면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세운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버림을 받고 급기야는 두 눈을 잃고 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까지 추락한다. 에고를 잘 통제할 줄 안다고 해서 그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불러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에고를 통제하며 자기 길을 성실히 걸어온 사람이 에고를 통제할 줄 모르는, 아예 통제할 마음조차 없는 누군가(여기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물론 중세 동로마 제국의 이야기라고는 하나 황제로부터 업적에 대한 보상은커녕 누명을 쓴 채 가진 것마저 모두 빼앗기면서도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임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옳은 일을 했으며 '그것으로 족했다'라고 만족하는 것이 에고를 잘 통제했다고 칭찬받을 일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벨리사리우스가 자기가 믿는 바대로 에고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일에 성실했고, 우직하고 탁월한 능력을 가진 신하였고,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자기 안의 에고에 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공한 삶이라는 걸까. 

말콤 X의 경우는 또 어떤가. 뉴욕 빈민굴인 할렘가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마약과 도박, 매춘, 강도 등 범죄를 저질러 오던 말콤이 10년 형을 언도받고 5년간 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는 책을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인종차별 문제에 눈을 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말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간을 죽이지 않고, '살아 있는 시간'을 선택해서 자기 안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고 썼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말콤은 감옥에서 나온 후 과격한 흑인 해방운동을 벌였다. "백인은 악마다, 그 악마가 우리의 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같은 시기에 흑인 민권운동을 벌였던 킹 목사를 비난했다. 그렇다면 말콤 X는 에고를 잘 통제해서 교도소에 있는 동안 자신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시킨 사람인가, 아니면 에고를 통제하지 못하고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결국은 살해당하고야 마는 실패자인가. 

저자는 '에고를 버리고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p.278)고 말한다. '증오와 분노 대신 당신을 향한 모든 시선과 모든 말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모든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당신을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p.278)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려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죽어라 안 될 때가 있다. 남들한테 '수고했다'라는 말 한 마디 듣지도 못하고 오히려 오해받고 비난받는 거지 같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남들이 별생각 없이 던지는 칭찬이나 비난 한 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도 한다. 저자는 그럴 때 우리가 무기력에 빠져 지금까지 애써 견디며 해온 일들을 포기해버리거나 아니면 남들이 던져주는 인정을 듣지 않고는 일할 의욕을 느끼지 못하거나 작은 성공에 우쭐해져서 거만을 떨다가 고꾸라지는 일이 벌어질까 봐 경계하는 것이다. 


잠자코 일이나 해!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줄기차게 계속 무언가를 바라고 또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분노나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모는 행위로 이어질 뿐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그 일을 잘 해라. 그런 다음 흘러가게 두고 신의 뜻을 기다려라.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저 일을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p.243)

이런 글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누려야 마땅한 기본적이고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더라도 군말 말고 일이나 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어느 평화 활동가는 말했다. '분노의 영성'을 가진 사람만이 '평화'를 위해 움직일 수 있다고.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의 온갖 불평등과 폭력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저항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나는 그 평화 활동가의 말에 동의한다. 


세상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는 위의 인용글처럼 말콤이 세상을 향해 흑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을 외치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말콤의 삶은 죽음으로까지 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교도소에서 쌓은 지식으로 좀더 편한 일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콤은 세상을 바꾸기로 결심했고 그의 바람대로 흑인에 대한 차별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우리의 필요를 요구해선 안 된다는 저자의 조언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스토아 철학과 고대 그리스 로마 사상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20세기 철학가이자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필가이기도 한 버트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스토아 철학이 '자기 자신의 의지만으로, 또는 다른 인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도 인간의 삶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사람들이 모인 크고 작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선이 실현될 수 있다'고 여겼다고 설명하면서 '고독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의 조언이 어째서 이렇게 개인의 노력, 성실, 의지 등을 중요시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타인의 인정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말고 내가 가고자 한 방향을 향해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삶을 채워갈 것, 성공의 자리에서도 겸손하게 배움의 자세를 유지할 것, 실패를 인생 순환의 한 과정이라 여기고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할 것. 이런 이야기들을 적당한 인물 예시를 통해 반복하고 있다. 일찍부터 성공적인 인생을 달리다가 사업에 실패로 추락의 경험을 맛보고 방황했던 저자의 경험을 통해 나오는 글이라서 사업을 하고 있거나 진로를 준비하는 이들, 확신할 수 없는 꿈에 흔들리고 있는 이들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보태자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있는 에고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내 삶의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이를테면 나는 내 안에 오만한 겁쟁이 같은 에고가 똬리를 틀고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최근 풀리지 않던 일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모두 에고라고 여기고 귀를 막는다면 그것도 위험할 것이다. 그게 못된 망아지 같은 에고인지, 아니면 양심의 소리인지, 내 안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구조 신호인지 듣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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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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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연이어 소설을 읽었다.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소설만 연이어 읽어댄 데에는 현실도피라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일에도 지치고 사람에게도 지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에도 지쳐 있었다. 한동안 잠수를 타거나 아니면 모든 걸 두고 어딘가로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거나.. 했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여건이 안될 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소설 속에 푹 빠져 버리는 거다.

의기소침 무기력해져 있는 내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제목은 떨어진 당을 보충해 주고 '원기회복! 활력충전!'을 보장하는 한 병의 드링크제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이 책은 태양이 시뻘겋게 작렬하는 바다에서 갓 건져올린, 은빛 비늘을 눈부시게 반짝이며 펄떡펄떡 튀어오르는 크고 힘센 물고기 같았다.

 

'백리향 냄새와 월계수 잎사귀 향, 고수 향, 끓는 우유 향, 마늘 향과 함께 파스타를 넣은 수프 냄새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부엌 식탁 위'에서 태어난 티타는 그녀의 탄생이 예고했던대로 요리에 마술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신비한 재주와 능력을 타고 났다. 책을 읽어가면서 티타는 우리가 억눌러온 아름다운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인간의 식욕과 성욕. 식사 예절이라든가 체면이라든가 하는 것들 때문에 우리가 가진 탐욕스러운 식욕을 우아하게 포장하고, 성욕 또한 사회적 제도와 도덕적 규범의 틀 안에서 감춰거나 어두운 음지로 숨는다.  티타도 요리는 '요리법'이라는 틀에, 성욕은 '막내딸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관습에 갇혀 있다.

 

 한편 티타도 페드로에게 기다리라고, 자신을 멀리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따라야만 하는 관습이 없는 곳으로, 어머니가 없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말은 목구멍에서 뒤엉켜서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사그라졌다. (65쪽) 

 

티타는 이런 기분을 잘 알았다. 요리법에 나온 대로 따르지 않고 요리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티타는 마마 엘레나가 기필코 틀린 부분을 찾아내서 자기가 만든 음식을 칭찬하기는커녕 조리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호통을 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부엌과.... 그리고 인생에서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법칙들을 깨고 싶은 유혹도 뿌리칠 수 없었다.

(208~209쪽)

 

티타의 어머니 마마 엘레나는 티타를 억누르는 감시자이자 억압자이다. 크고 강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억눌려진 티타는 마법적인 요리를 통해 해방을 꿈꾼다. 사람들은 티타가 만든 음식을 먹고 타오르는 성적 욕구를 억누르지 못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페드로가 로사우라와 결혼할 때에는 티타가 만든 음식이 신랑신부를 포함 하객들 전체의 구토를 유발하기도 했다.

싱싱한 성욕과 식욕은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언니 헤르트루디스는, 티타가 페드로에게 받은 장미꽃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고 온몸에서 장미향을 풍기며 알몸으로 벌판으로 달려나간다. 열에 들떠 장미향을 풍기며 달려오는 헤르트루디스를 혁명군 장교가 말에 태워 떠난다. 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을 책에서 얼마나 꿈같이 아름답게 그려놓았는지.

하지만 그 후에 창녀촌에서 살게 된 헤르트루디스를 타락한 비운의 주인공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 나는 더 마음에 들었다. 헤르트루디스는 책의 말미에서는 혁명군의 여대장으로 등장하여, 페드로와 존브라운 박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티타에게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 씩씩하고 밝고 건강한 인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페드로와 티타의 관능적이고 열렬한 사랑도 인상적이었지만 난 존 브라운 박사의 따뜻하고 편안한 사랑도 좋았다. 이건 분명 내가 나이 들고 늙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아무튼 브라운 박사는 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마마 엘레나가 규범과 관습의 폭력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해와 관용의 따뜻함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마엘레나와 존 브라운 박사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자주 이성을 '사회적 규범을 따른다'는 것과 혼동했던 것 같다. 마마 엘레나와 존 브라운 박사가 천지차이의 인물인 것처럼 '지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과 '사회적 규범과 관습'은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게 당연한데 말이다.

 

브라운 박사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성냥을 만드는 과정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신 활동과 육체적 활동을 아무 문제 없이 별개로 분리할 수 있었다. 손놀림을 멈추거나 실수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문제까지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티타에게 계속 얘기를 하면서도 성냥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23쪽)

 

어쩌면 그는 성냥 만드는 일을 멈추고 티타를 애무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문제'같은 건 집어치우고 열렬한 사랑의 말을 쏟아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티타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이룰 확률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가 티타의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브라운 박사가 좋았다. 티타와 결혼할 수 없다고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찌질하다면 찌질하다고 할 수 있는 페드로 보다는. 하지만 티타는 젊고 관능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에 페드로를 선택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두 가지 욕구, 식욕과 성욕은 억누름을 강요받는 동시에 생명을 이루는 기본적인 욕구들이다. 조카에게 젖을 물리자 처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젖이 쏟아져 나온다거나, 또는 마마 엘레나의 망령을 물리치자 다시 생리가 시작되는 것 같은 장면들을 통해서 티타는 생명과 풍요의 여신 같은 모습도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음식에 대해 까다롭고 잘 먹지도 않았던 로사우라가 뚱뚱하고 입냄새가 심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티타는 밀이나 콩, 자주개자리의 씨앗은 자기 모습이 완전히 일그러지고 바뀌는 것도 아랑곳 않고 계속 싹을 틔운다고 생각했다. 이제 티타는 씨앗이나 곡물들이 새 삶을 주기 위해 자기 몸을 터트려 가며 껍질을 벌여 물을 깊이 빨아들이는 게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씨앗이나 곡물들은 자기 몸속에서 첫 번째 뿌리 끝이 삐죽 튀어나오는 것을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의 원래 모습이 망가져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새싹을 당당하게 세상에 보여주었다. 티타는 자신도 그런 단순한 씨앗이었더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자기 몸속에서 뭐가 자라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얘기할 필요가 없고, 사회적 비난을 감수한 채 부른 배를 안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씨앗에게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특히 무서워해야 할 어머니도 없었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사람들도 없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티타에게도 어머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마마 엘레나가 내린 저주가 언제 어느 때 저승에서 떨어질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8쪽)

 

따지고 보면 섹스를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야 무슨 잘못이 있으랴.  우리가 씨앗이 아닌 게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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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4-12-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올해 마지막 달의 첫날에 이 리뷰를 보게 되네요.
우리가 씨앗이 아닌 게 문제일 뿐... ^^
좋은 날 보내세요^^

섬사이 2014-12-03 15:5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반가워요~!!!
12월 첫날 프레이야님이 제 서재에 찾아와 주시다니
요즘 뭔가 추욱 처져있었는데, 기운이 나네요. ^^
프레이야님도 좋은 날 보내세요.

알맹이 2014-12-01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어져요.^^

섬사이 2014-12-03 15:57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고, 신비롭고.. 읽기 좋은 책이에요.
날이 춥지만 책과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내기엔 더 좋지요. ^^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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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 둘은 직장 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괴짜 취급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책에서는 '섹스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리엇은 '처녀란 올바른 사람에게 사려깊게 줄, 예쁜 종이로 여러 겹 포장한 선물 같은 것'(p.10)이라고 생각했고, 데이비드는 '마지못해 사랑하게 된 한 여자와 길고도 어려운 관계를 한번'(p.9)가진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들이 꿈꾸는 가정의 모습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이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모습을 지켜보자면, 자식을 많이 낳아 사랑으로 키우고, 올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서양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떠오른다. 손님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와 차를 마시고, 손님들에게 자기들이 이루어놓은 화목한 가정의 정경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여성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해리엇은 자신의 미래가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왕국의 열쇠를 그녀 손에 쥐어줄 것이고 그곳에서 자신의 본성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인생의 모든 굴곡이나 진창을 처음에는 잘 모르면서 그러나 점차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그곳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데이비드에게 미래는 그가 목표로 삼고 보호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자기 부인은 이런 점에서 그와 같아야만 했다. 즉 그녀는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했다. 해리엇을 만났을 때 그는 서른 살이었고 야심찬 남자가 지닌 완고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일해 왔었다. 그러나 그가 일해 온 목표는 가정이었다. (p.13~14)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호텔로 써도 좋을만한 아주 커다란 빅토리아식 저택을 구입하고 아이를 낳고 친지들을 초대한다. 머리 속에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해리엇은 갓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좀 흐트러진 모습으로 천장이 높은 거실 한 쪽에 놓은 편안하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고, 데이비드는 그 안락의자에 살짝 몸을 기대고 서서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지으며 해리엇과 아기를 바라보고 있고, 놀러온 친척들은 소파에 앉아 새로 태어난 아기와 크고 고풍스러운 집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겠지. 다른 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며 놀다가 우르르 정원으로 뛰어나가기도 할 것이다.

해리엇의 친정어머니 도로시의 헌신과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재정적 지원이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경이지만 그래도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자기들이 이룩한 가정의 모습에 행복해하고 뿌듯해한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이제 보아라, 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 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 - 바로 이 삶.  (p.30~31)

 

그리고 해리엇은 폴을 출산한 이후 곧바로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녀는 쉽게 토라지고 화를 냈다. 복받치게 울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턱을 괴고 식탁에 앉아 뱃속의 아기가 자기에게 독을 퍼뜨린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폴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유모차에 누워 낑낑대며 울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보름 간 휴가를 내어 집안일을 도왔다.  (p.44)

 

다섯째 아이는 처음부터 좀 달랐다. 도로시는 해리엇의 자매인 사라를 도우러 가서 없었고, 해리엇은 처음으로 곤란을 겪고 예민해졌는데 이것은 데이비드가 바라던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데이비드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고 따져보게 된다.

 

사실 그는 3주나 한 달 동안은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 차지 않기를 바랐다. 돈도 너무 많이 들었고, 또 자신들도 항상 돈이 모자랐다. 그는 부수입을 위해 일을 더 했고 또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유모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p.45)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도덕적 가치관이 무너지는 바깥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는 행복한 공동체로서의 가정은 서서히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의 태중에서부터 심상치않은 태동으로 해리엇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고,  태어난 후에도 가족의 행복을 파괴해나가지만 의사나 학교선생님, 다른 가족들은 벤이 '정상 범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해리엇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아니, 그는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보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그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번 경우가 얼마나 다른지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할 때 그녀는 커다란 부엌 칼을 잡고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을 했다. 마침내 이 긴 맹목적인 투쟁 끝에 실제로 서로 눈을 마주칠 때 그녀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p.66)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 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 (p.143)

 

이 책을 읽으면서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아이 벤이 아니었다. 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중성이었다. 사람들은 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파괴력과 괴기스러움을 잘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게 너무 공포스러운 나머지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해리엇에게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네가 히스테릭한 거라며 진정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공포를 피하는 것이다. 해리엇 또한 벤에 대한 모성과 두려움 사이에서 자신의 이중성을 확인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해리엇은 어쩐 일인지 재빨리 침대에서 나와 아기방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벤이 창문턱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높은 곳이었다. 그 애가 어떻게 그 위에 올라갔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일순간 그 애는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해리엇은 생각했다. 하필이면 이때 내가 들어오다니.... 그러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p.81~82)

 

그 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 문 밖의 길로 뛰어나가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애를 잡으려고, 빵빵대는 차들이나 경고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뭉퉁하게 웅크린 작은 모습만 보면서 1마일 이상 뛰었다. 그녀는 울면서 숨을 헐떡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애를 잡으려고 결사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 그 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 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p.85)

 

책 중간에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길 잃은 아이와 연못에 대한 이야기도 이중적 자아에 대한 은유로 느껴졌다. 해리엇과 다른 사람들의 이런 이중성은 극단의 결정을 하기도 한다. 벤을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요양소로 보내는 것이다. 거기서 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 해리엇의 모성이 요양소에서 벤을 구해내지만 벤이 집에 돌아온 이후 해리엇의 가정은 빠르게 해체되어버린다. 그리고 벤은 더이상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통제가 불가능할만큼 자라고 빅토리아식 커다란 저택은 벤의 패거리들의 아지트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책 속에서 해리엇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던 벤같은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 이유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우리는 벌 받는 거야. 그 뿐이야"

"무엇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헛소리" 그가 말했다. 그는 화가 났다. 이런 해리엇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건 우연이야. 누구나 밴 같은 애를 가질 수 있어. 그건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야. 그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해." 그녀가 완고하게 주장했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p.159)

 

하지만, 우리가 불행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그것이었고, 나는 우리는 불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우리에게 닥쳤던 불행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불행 그 자체는 물론이고,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관련법을 제정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 드러난 여러 문제들까지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해리엇은 아주 오래전 이 지구에 살던 난쟁이나 거인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의 유전인자가 우리 속에 남아 있다가 벤과 같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곤 한다. 그렇다면, 불행을 만드는 유전자도 우리 안에 깊이 숨겨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맞닥뜨렸던 불행은 우리가 가진 유전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다'는 핑계 속으로 나는 또 도망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 하나에 뜨끔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그를 제대로 보는 일을,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가? (p.177)

 

사람들이 벤을 거부했던 것처럼 나도 '제대로 보는 일'을,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본질을 인식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불편한 일이니까.

 

루쉰의 <광인일기>에서 모씨 형제 중 아우는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이런 글이 나온다.

 

사천 년간 내내 사람을 먹어 온 곳.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도 그 속에서 몇 년을 뒤섞여 살았다는 걸.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저자가 음식에 섞어 몰래 우리에게 먹이지 않았노라 장담할 순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인데.....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

사람을 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광인일기>

 

<다섯째 아이>에서 말하는 유전이 <광인일기>의 식인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불행에 대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 불행을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사람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가 아직도 있을까?

 

이제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섯째 아이>를 들어야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는 대신 빨간책방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는데, 처음에 김중혁 작가가 이걸 듣기 전에 책을 읽고 글을 써보고 생각해 본 다음 듣는 게 좋겠다고 하는 거다. 하, 그래, 정리해볼게. 리뷰를 써 볼게. 그리고 나와 네가 어떻게 다르게 읽었는지 확인하러 다시 올게.

난 빨간책방 들으러 간다. (듣고나서 이 리뷰가 부끄러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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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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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으면 슬슬 발이 시려왔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서늘한 기운에 재채기를 하고 한기를 달래줄 가디건을 찾아 걸치기 시작했다. 뜨거운 커피 잔에서 올라오는 따뜻하고 하얀 김이 좋아졌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서 겨울과 서둘러 만나려는 것 같았다.

큰일을 마무리 짓고 난 후, 하루이틀은 그냥 멍하니 지냈다. 잠을 자고, 만사가 귀찮아 실컷 게으름을 부렸다. 그러다 갑자기 아, 소설을 읽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 현실을 아득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과, 현실하고는 다른 세계가 서로의 위치를 맞바꾸는 시간. 현실은 아득해지고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있던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소설은 그걸 가능하게 하니까.

여러모로 <나의 미카엘>은 요즘의 날씨,  나의 기분과 상황에 참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어느 겨울날 아침 아홉시에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다. 한 낯선 청년이 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강하고 엄청나게 자제력이 있었다. 나는 짧은 손가락과 납작한 손톱을 보았다. 관절 부위가 약간 거뭇한 창백한 손가락이었다. 그는 서둘러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고 나는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팔에 기대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넘어지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탐색하고 묻는 듯한 눈과 심술궂은 미소들. 그가 나를 잡아 주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짜주신 푸른 울 옷소매 사이로 그 사람 손가락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겨울이었다. (p.5-6)

 

한나와 미카엘은 이렇게 만났다. 한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동시에 격렬하고, 충동적이며, 자주 환상과 꿈의 세계로 빠져드는 여자이고, 그 반면에 미카엘은 지적이고 섬세하며 자제력이 있고, 책임감이 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첫 만남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한나를 잡아주었던 것처럼 미카엘은, 한달치 수입을 쇼핑에 써버리고 쇼파와 안락의자 세 개를 사느라고 새 아파트의 계약금을 모을 수 없게 만들고 자기의 병이 더 심해도록 만들며 희열을 느끼는 한나를 받쳐주고 보살핀다. 그렇다고 한나가 잘못한 것이라고 질책할 수는 없다. 뭐랄까, 서로 딛고 있는 세계가 다를 뿐이라고 해야할까.

한나와 미카엘의 차이는 아들 야이르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엄마는 모든 걸 아는 것 같아요. 절대로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적이 없으니까. 엄마는 늘 알지만 설명은 못하겠다라고 하는데요. 만일에 설명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제 끝났어요."  (p.120)

 

"아빠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아빠는 모르면 모른다고 해. 아빠는 알고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그러지 않아요. 뭔가를 알면 설명할 수 있는 거야. 말 끝났어요." (p.239)

 

미카엘은 '설명이 가능해야 존재하는 세계'에 있고, 한나는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에 있다면 그 두 세계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미카엘과 한나는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나는 자꾸 현실의 계단에서 미끄러지고 미카엘은 그런 한나를 붙잡고... 그건 어쩌다 한 번은 로맨틱할지 몰라도 일상이 늘 그런 식이라면 두 사람 모두 견디기 힘들어질 테니까. 어쩌면 한나는 현실의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자기 발로 자기 세계에서 우뚝 일어서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쪽 세계에 있을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그 속에 손끝 하나라도 담그고 있지 않을까.

 

한나가 꿈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드레곤 호니 타이그레스 호니 하는 군함이 등장하는데 그와 함께 '노틸러스 호'가 나온다.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는 3척의 노틸러스 호가 있었고, 그중 마지막 세 번째 노틸러스 호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 대에 미국이 만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공상과학소설 속의 노틸러스 호와 실재했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 호. 그 이중적 의미가 이 소설의 신비감을 더하며 다가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는 한나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건 이미 내가 그 경계에서 아주 멀리 떠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나와 미카엘의 사랑은 점점 속부터 녹슬어간다. 어느 날 한나는 무화과나무 가지 위에 몇 년 동안 매달려 있던 녹슨 그릇이,  미풍도 불지 않고 고양이나 새가 건드린 것도 아닌 데 갑자기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것을 보고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강한 힘들이 실현된 것이다. 녹슨 금속이 부서졌고 그릇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나는 여태까지 내내 하나의 물체에서 완벽한 휴지를 관찰해 왔는데 그 안에서는 여태까지 내내 숨겨진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p.119)

 

설명하기 어려운, 혹은 설명이 불가능한 '숨겨진 작용'이 한나와 미카엘 사이에서도 일어나, 사랑은 무화과 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녹슬어가던 그릇처럼 서서히 녹슬고 조금씩 부서지다가, 어느날 갑자기 가지 끝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한결같고, 도덕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기의 의무와 책임에 충실하고, 충동적 욕구에 흔들리는 일 없이 변함없을 것 같던 미카엘도  파출부 포르투나를 보며 흔들리고, 초록색 눈에 풍성한 금발을 가진 친구 야르데나의 시험준비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안절부절한다. 그런 미카엘을 보고 한나는 질투하거나 분노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이미 사랑은 그 둘을 떠났고 녹슨 그릇처럼 부서졌다.

 

당신의 환상을 깨지는 않겠어요. 난 당신과 함께가 아니에요. 우리는 두 사람이지 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더 이상은 내 사려 깊은 장남 노릇을 할 수는 없어요. 잘 가세요.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나에게도 말이에요. (p.289)

 

미카엘에게 '잘 가세요'라고 한 뒤에도 여전히 한나는 꿈의 세계를 넘나들었을까.

 

미카엘이 떠나고 처음으로 나는 일어나서 밖에 나갔다. 그것은 변화를 일으켰다.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갑자기 멈춘 것처럼. 밖에서 하루종일 진동하던 모터가 저녁 때가 되어 갑자기 꺼진 것처럼. 그 소리는 하루종일 눈치채지 못하게 지나다녔다. 멈추고 나서야 느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정적. 그 소리는 존재했었고 지금은 멈췄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이다. (p.234)

 

찾아보고 싶었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들.

멈춘지 너무 오래돼서, 이미 정적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존재했었지만 멈춰버린 게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들.

이 책 속 한나의 나이는 서른.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그게 뭐였는지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고 한들, 그걸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한나처럼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저녁에 비가 올거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겨울이 여기에도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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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2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정말 좋았어요, 섬사이님.
그런데 섬사이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저는 섬사이님처럼 전체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저 손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자꾸만 나오는 손. 그리고 반복된 문장. `나는 잊지 않았다` .
문득 내 소설읽기는 언제나 부분에 집착하고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저는 어쩌면 그간 읽었던 모든 소설들을 죄다 다시 읽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섬사이님, 리뷰 잘 읽었어요.
좋은 리뷰에요. 이 책을 읽었던 당시가 떠올랐어요. 다읽고 서늘했던 그 느낌까지도요.

섬사이 2014-11-01 18:21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와락 ^^)
다락방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저는 부분을 보여주는 다락방님의 글이 좋아요.
저는 전체를 뭉뚱그려서 밋밋하게 느낌을 적어가는 반면에
다락방님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생생한 글을 쓰시거든요.
다락방님의 글을 읽으며 소심하게 `공감하기`를 누르면서,
제 글을 반성한 적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왜 글에다 나를 다 드러내지 못하나,
나는 왜 이 부분에서 이런 생생한 느낌을 받지 못했을까,
나는 왜 성실하게 책 읽고 성실하게 글을 쓰지 못하나.. 하고요.

다락방님의 글이 사랑받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암튼 지금은, 나, 다락방님께 칭찬받은 거... 맞죠?
신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