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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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의 사랑


이 소설은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너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정사 장면을 요즈음엔 거리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고 설명한다.


이 책은 연하의 유부남 A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작가의 실제 경험을 적은 67쪽 정도(첫 문장을 9쪽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실제로는 60쪽도 되지 않는다)의 짧은 소설이다. 작품해설과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까지 다 합쳐도 100쪽을 넘지 않는다. 52쪽에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라는 글이 나오는 걸 보면 앞의 포르노 정사 장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덧붙여진 게 틀림없다. 불륜의 사랑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르노의 정사 장면을 마주하는 것만큼 당혹스럽고 부도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일까. 도덕적 검열, 가치판단의 잣대를 유보한 채로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언젠가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라는 책으로 주부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주부들 대부분이 남녀주인공의 심리나 갈등, 작가의 의도나 문체, 이야기의 전개방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그 소설이 실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 주인공의 무분별함과 무책임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그 여주인공은 육체적 불륜은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신들의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과시하려는 듯 맹렬히 비난했다.


<세벽 세 시~>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독자의 도덕성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검증하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나이든 한 여자가 연하의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며 느끼는 열정과 불안과 질투와 방황, 그것을 모두 포함한 자신의 삶과 시간들에 대해 적은 것이다. 도덕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증명하도록 하고, 이 소설 속에서는 여자(작가)의 마음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은 불륜의 현장을 목격한 아내 혹은 남편의 마음은 잠시 접어두자. 그런다고 해서 당신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이든 여자의 사랑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사랑의 열정이 사치가 되는 나이, 혹은 그 사치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나이를 자각하는 마지막 문장이 쓸쓸하다.

작가는 A가 떠난 후의 공허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사랑의 마법이 풀리고 열정이 사라진 뒤 늙어버리고 마는 여자. 그녀 앞에 놓인 시간들은 빛깔도 향기도 없이 칙칙하고, 의미 없이 공허할 뿐이다. 나는 이 문장을 앞에 두고 한참을 책 앞에 머물러야 했다. 단지 늙어갈 뿐인 내가 그 문장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이는 나를 통과한 시간을 세는 단위다. 어느 광고에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나이값을 매기는 요구와 조건은 까다롭고 엄정하다.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나의 나이값을 적절히 지불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게다가 내 앞에는 점점 나빠질 게 분명한 신체기능과 질병의 위험, 노인빈곤층으로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것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이는 숫자 이상의 것을 말한다. 아니 에르노가 A와 사랑하면서 느끼는 고통과 불안 중에는 분명 그녀의 나이에 기인한 것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이든 여자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이라서 언젠가 그가 떠날 것을 안다. 슬프다.

 

이야기하는 법, 기억하는 법. 존재하는 법


그녀가 사랑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새로웠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열정적 사랑이야기라기 보다 그를 사랑한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관찰자의 집요한 시선으로 사랑에 빠진 의 내면을 직시하고, 성실하고 섬세하게 적어나간다. 사랑에 빠져 이성을 잃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허우적거리는 여자와 관찰자로서 기록하는 여자가 동일인물이라는 게 신기하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대화라든가 폭발적인 감정선 같은 것이 별로 없어서 생생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나간 사랑이 남겨둔 흔적과 의미들, 여전히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들과 시간들을 글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현재의 라는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작가는 A와의 사랑을 복기한다. 자기 내면에 대한 글들이 명료하다. 작품해설 글을 읽어보니 이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삶을 쓴 것들인가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언니와 연인들이 그녀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작가가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작가의 작품 중에 <삶을 쓰다>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열두 편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들을 담은 선집이라는데, 생존하는 작가로는 최초로 갈리마르 콰도르 총서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삶을 쓰다>라니...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그녀의 이었고 그녀의 존재방식이었나 보다. 한 번 읽어보고 싶지만 아직 국내에 번역 출판이 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시계를 풀어놓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차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난 머지않아 그 사람이 조심스레 시계를 훔쳐볼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16쪽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17쪽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47쪽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5쪽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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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3-14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소설 엄청 좋아하는데요, 이 리뷰를 읽으니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이미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이 리뷰의 인용문을 보니 다 새롭고 또 명문이란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소설은 그 남자와 나의 사랑이야기 라기 보다는, 그를 사랑한 ‘나‘의 이야기지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특히나 47쪽의 인용문 좋네요.


날이 밝아도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무의미한 하루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섬사이 2018-03-14 22:42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다락방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알라딘 서재를 2년이나 떠나 있다가 돌아왔는데, 다락방님의 댓글이라니! 감격스럽네요.

이 책,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여자의 마음이 너무 잘 묘사되어 있어서 불륜이고 뭐고간에 한 여자의 사랑이라는 것에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아요. 그 47쪽의 문장은 저를 멍하게 만들었어요. 갑자기 슬퍼지고 쓸쓸해져서 책을 읽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자꾸 생각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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