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에 있으면 슬슬 발이 시려왔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서늘한 기운에 재채기를 하고 한기를 달래줄 가디건을 찾아 걸치기 시작했다. 뜨거운 커피 잔에서 올라오는 따뜻하고 하얀 김이 좋아졌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서 겨울과 서둘러 만나려는 것 같았다.

큰일을 마무리 짓고 난 후, 하루이틀은 그냥 멍하니 지냈다. 잠을 자고, 만사가 귀찮아 실컷 게으름을 부렸다. 그러다 갑자기 아, 소설을 읽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 현실을 아득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과, 현실하고는 다른 세계가 서로의 위치를 맞바꾸는 시간. 현실은 아득해지고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있던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소설은 그걸 가능하게 하니까.

여러모로 <나의 미카엘>은 요즘의 날씨,  나의 기분과 상황에 참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어느 겨울날 아침 아홉시에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다. 한 낯선 청년이 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강하고 엄청나게 자제력이 있었다. 나는 짧은 손가락과 납작한 손톱을 보았다. 관절 부위가 약간 거뭇한 창백한 손가락이었다. 그는 서둘러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고 나는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의 팔에 기대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넘어지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탐색하고 묻는 듯한 눈과 심술궂은 미소들. 그가 나를 잡아 주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짜주신 푸른 울 옷소매 사이로 그 사람 손가락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겨울이었다. (p.5-6)

 

한나와 미카엘은 이렇게 만났다. 한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동시에 격렬하고, 충동적이며, 자주 환상과 꿈의 세계로 빠져드는 여자이고, 그 반면에 미카엘은 지적이고 섬세하며 자제력이 있고, 책임감이 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다.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첫 만남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한나를 잡아주었던 것처럼 미카엘은, 한달치 수입을 쇼핑에 써버리고 쇼파와 안락의자 세 개를 사느라고 새 아파트의 계약금을 모을 수 없게 만들고 자기의 병이 더 심해도록 만들며 희열을 느끼는 한나를 받쳐주고 보살핀다. 그렇다고 한나가 잘못한 것이라고 질책할 수는 없다. 뭐랄까, 서로 딛고 있는 세계가 다를 뿐이라고 해야할까.

한나와 미카엘의 차이는 아들 야이르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엄마는 모든 걸 아는 것 같아요. 절대로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적이 없으니까. 엄마는 늘 알지만 설명은 못하겠다라고 하는데요. 만일에 설명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제 끝났어요."  (p.120)

 

"아빠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아빠는 모르면 모른다고 해. 아빠는 알고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그러지 않아요. 뭔가를 알면 설명할 수 있는 거야. 말 끝났어요." (p.239)

 

미카엘은 '설명이 가능해야 존재하는 세계'에 있고, 한나는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에 있다면 그 두 세계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미카엘과 한나는 계속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한나는 자꾸 현실의 계단에서 미끄러지고 미카엘은 그런 한나를 붙잡고... 그건 어쩌다 한 번은 로맨틱할지 몰라도 일상이 늘 그런 식이라면 두 사람 모두 견디기 힘들어질 테니까. 어쩌면 한나는 현실의 계단에서 넘어져 굴러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자기 발로 자기 세계에서 우뚝 일어서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쪽 세계에 있을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존재하지만 설명은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걸 느끼고 그 속에 손끝 하나라도 담그고 있지 않을까.

 

한나가 꿈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드레곤 호니 타이그레스 호니 하는 군함이 등장하는데 그와 함께 '노틸러스 호'가 나온다.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는 3척의 노틸러스 호가 있었고, 그중 마지막 세 번째 노틸러스 호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50년 대에 미국이 만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었다. 공상과학소설 속의 노틸러스 호와 실재했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 호. 그 이중적 의미가 이 소설의 신비감을 더하며 다가왔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는 한나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건 이미 내가 그 경계에서 아주 멀리 떠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나와 미카엘의 사랑은 점점 속부터 녹슬어간다. 어느 날 한나는 무화과나무 가지 위에 몇 년 동안 매달려 있던 녹슨 그릇이,  미풍도 불지 않고 고양이나 새가 건드린 것도 아닌 데 갑자기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것을 보고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강한 힘들이 실현된 것이다. 녹슨 금속이 부서졌고 그릇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나는 여태까지 내내 하나의 물체에서 완벽한 휴지를 관찰해 왔는데 그 안에서는 여태까지 내내 숨겨진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p.119)

 

설명하기 어려운, 혹은 설명이 불가능한 '숨겨진 작용'이 한나와 미카엘 사이에서도 일어나, 사랑은 무화과 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녹슬어가던 그릇처럼 서서히 녹슬고 조금씩 부서지다가, 어느날 갑자기 가지 끝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한결같고, 도덕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기의 의무와 책임에 충실하고, 충동적 욕구에 흔들리는 일 없이 변함없을 것 같던 미카엘도  파출부 포르투나를 보며 흔들리고, 초록색 눈에 풍성한 금발을 가진 친구 야르데나의 시험준비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안절부절한다. 그런 미카엘을 보고 한나는 질투하거나 분노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이미 사랑은 그 둘을 떠났고 녹슨 그릇처럼 부서졌다.

 

당신의 환상을 깨지는 않겠어요. 난 당신과 함께가 아니에요. 우리는 두 사람이지 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더 이상은 내 사려 깊은 장남 노릇을 할 수는 없어요. 잘 가세요.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나에게도 말이에요. (p.289)

 

미카엘에게 '잘 가세요'라고 한 뒤에도 여전히 한나는 꿈의 세계를 넘나들었을까.

 

미카엘이 떠나고 처음으로 나는 일어나서 밖에 나갔다. 그것은 변화를 일으켰다.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갑자기 멈춘 것처럼. 밖에서 하루종일 진동하던 모터가 저녁 때가 되어 갑자기 꺼진 것처럼. 그 소리는 하루종일 눈치채지 못하게 지나다녔다. 멈추고 나서야 느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정적. 그 소리는 존재했었고 지금은 멈췄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이다. (p.234)

 

찾아보고 싶었다. '멈췄고, 그러므로 존재했던 것'들.

멈춘지 너무 오래돼서, 이미 정적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존재했었지만 멈춰버린 게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들.

이 책 속 한나의 나이는 서른.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그게 뭐였는지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고 한들, 그걸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한나처럼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저녁에 비가 올거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겨울이 여기에도 올 것만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10-2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정말 좋았어요, 섬사이님.
그런데 섬사이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저는 섬사이님처럼 전체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저 손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자꾸만 나오는 손. 그리고 반복된 문장. `나는 잊지 않았다` .
문득 내 소설읽기는 언제나 부분에 집착하고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저는 어쩌면 그간 읽었던 모든 소설들을 죄다 다시 읽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섬사이님, 리뷰 잘 읽었어요.
좋은 리뷰에요. 이 책을 읽었던 당시가 떠올랐어요. 다읽고 서늘했던 그 느낌까지도요.

섬사이 2014-11-01 18:21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와락 ^^)
다락방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저는 부분을 보여주는 다락방님의 글이 좋아요.
저는 전체를 뭉뚱그려서 밋밋하게 느낌을 적어가는 반면에
다락방님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생생한 글을 쓰시거든요.
다락방님의 글을 읽으며 소심하게 `공감하기`를 누르면서,
제 글을 반성한 적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왜 글에다 나를 다 드러내지 못하나,
나는 왜 이 부분에서 이런 생생한 느낌을 받지 못했을까,
나는 왜 성실하게 책 읽고 성실하게 글을 쓰지 못하나.. 하고요.

다락방님의 글이 사랑받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암튼 지금은, 나, 다락방님께 칭찬받은 거... 맞죠?
신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