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 둘은 직장 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괴짜 취급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책에서는 '섹스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리엇은 '처녀란 올바른 사람에게 사려깊게 줄, 예쁜 종이로 여러 겹 포장한 선물 같은 것'(p.10)이라고 생각했고, 데이비드는 '마지못해 사랑하게 된 한 여자와 길고도 어려운 관계를 한번'(p.9)가진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들이 꿈꾸는 가정의 모습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이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모습을 지켜보자면, 자식을 많이 낳아 사랑으로 키우고, 올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서양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떠오른다. 손님을 초대해서 함께 식사와 차를 마시고, 손님들에게 자기들이 이루어놓은 화목한 가정의 정경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떠한 여성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해리엇은 자신의 미래가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왕국의 열쇠를 그녀 손에 쥐어줄 것이고 그곳에서 자신의 본성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이며, 그것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인생의 모든 굴곡이나 진창을 처음에는 잘 모르면서 그러나 점차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그곳으로 나아갔다. 반면에 데이비드에게 미래는 그가 목표로 삼고 보호해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자기 부인은 이런 점에서 그와 같아야만 했다. 즉 그녀는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했다. 해리엇을 만났을 때 그는 서른 살이었고 야심찬 남자가 지닌 완고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일해 왔었다. 그러나 그가 일해 온 목표는 가정이었다. (p.13~14)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호텔로 써도 좋을만한 아주 커다란 빅토리아식 저택을 구입하고 아이를 낳고 친지들을 초대한다. 머리 속에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해리엇은 갓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좀 흐트러진 모습으로 천장이 높은 거실 한 쪽에 놓은 편안하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고, 데이비드는 그 안락의자에 살짝 몸을 기대고 서서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지으며 해리엇과 아기를 바라보고 있고, 놀러온 친척들은 소파에 앉아 새로 태어난 아기와 크고 고풍스러운 집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겠지. 다른 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며 놀다가 우르르 정원으로 뛰어나가기도 할 것이다.

해리엇의 친정어머니 도로시의 헌신과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재정적 지원이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경이지만 그래도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자기들이 이룩한 가정의 모습에 행복해하고 뿌듯해한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이제 보아라, 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 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 - 바로 이 삶.  (p.30~31)

 

그리고 해리엇은 폴을 출산한 이후 곧바로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녀는 쉽게 토라지고 화를 냈다. 복받치게 울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턱을 괴고 식탁에 앉아 뱃속의 아기가 자기에게 독을 퍼뜨린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폴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유모차에 누워 낑낑대며 울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보름 간 휴가를 내어 집안일을 도왔다.  (p.44)

 

다섯째 아이는 처음부터 좀 달랐다. 도로시는 해리엇의 자매인 사라를 도우러 가서 없었고, 해리엇은 처음으로 곤란을 겪고 예민해졌는데 이것은 데이비드가 바라던 '행복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알아야만' 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데이비드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치고 따져보게 된다.

 

사실 그는 3주나 한 달 동안은 사람들로 집안이 가득 차지 않기를 바랐다. 돈도 너무 많이 들었고, 또 자신들도 항상 돈이 모자랐다. 그는 부수입을 위해 일을 더 했고 또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유모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p.45)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도덕적 가치관이 무너지는 바깥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는 행복한 공동체로서의 가정은 서서히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의 태중에서부터 심상치않은 태동으로 해리엇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고,  태어난 후에도 가족의 행복을 파괴해나가지만 의사나 학교선생님, 다른 가족들은 벤이 '정상 범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해리엇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아니, 그는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보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그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번 경우가 얼마나 다른지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할 때 그녀는 커다란 부엌 칼을 잡고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을 했다. 마침내 이 긴 맹목적인 투쟁 끝에 실제로 서로 눈을 마주칠 때 그녀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p.66)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 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 (p.143)

 

이 책을 읽으면서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아이 벤이 아니었다. 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중성이었다. 사람들은 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파괴력과 괴기스러움을 잘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게 너무 공포스러운 나머지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해리엇에게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네가 히스테릭한 거라며 진정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공포를 피하는 것이다. 해리엇 또한 벤에 대한 모성과 두려움 사이에서 자신의 이중성을 확인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해리엇은 어쩐 일인지 재빨리 침대에서 나와 아기방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벤이 창문턱에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높은 곳이었다. 그 애가 어떻게 그 위에 올라갔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일순간 그 애는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해리엇은 생각했다. 하필이면 이때 내가 들어오다니.... 그러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p.81~82)

 

그 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 문 밖의 길로 뛰어나가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애를 잡으려고, 빵빵대는 차들이나 경고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뭉퉁하게 웅크린 작은 모습만 보면서 1마일 이상 뛰었다. 그녀는 울면서 숨을 헐떡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애를 잡으려고 결사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 그 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 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p.85)

 

책 중간에 데이비드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길 잃은 아이와 연못에 대한 이야기도 이중적 자아에 대한 은유로 느껴졌다. 해리엇과 다른 사람들의 이런 이중성은 극단의 결정을 하기도 한다. 벤을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요양소로 보내는 것이다. 거기서 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 해리엇의 모성이 요양소에서 벤을 구해내지만 벤이 집에 돌아온 이후 해리엇의 가정은 빠르게 해체되어버린다. 그리고 벤은 더이상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통제가 불가능할만큼 자라고 빅토리아식 커다란 저택은 벤의 패거리들의 아지트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책 속에서 해리엇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던 벤같은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 이유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우리는 벌 받는 거야. 그 뿐이야"

"무엇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헛소리" 그가 말했다. 그는 화가 났다. 이런 해리엇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건 우연이야. 누구나 밴 같은 애를 가질 수 있어. 그건 우연히 나타난 유전자야. 그것뿐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해." 그녀가 완고하게 주장했다.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p.159)

 

하지만, 우리가 불행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그것이었고, 나는 우리는 불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우리에게 닥쳤던 불행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불행 그 자체는 물론이고,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관련법을 제정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 드러난 여러 문제들까지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해리엇은 아주 오래전 이 지구에 살던 난쟁이나 거인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의 유전인자가 우리 속에 남아 있다가 벤과 같은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곤 한다. 그렇다면, 불행을 만드는 유전자도 우리 안에 깊이 숨겨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맞닥뜨렸던 불행은 우리가 가진 유전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다'는 핑계 속으로 나는 또 도망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 하나에 뜨끔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그를 제대로 보는 일을,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가? (p.177)

 

사람들이 벤을 거부했던 것처럼 나도 '제대로 보는 일'을,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살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본질을 인식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불편한 일이니까.

 

루쉰의 <광인일기>에서 모씨 형제 중 아우는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이런 글이 나온다.

 

사천 년간 내내 사람을 먹어 온 곳.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도 그 속에서 몇 년을 뒤섞여 살았다는 걸.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저자가 음식에 섞어 몰래 우리에게 먹이지 않았노라 장담할 순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인데.....

사천 년간 사람을 먹은 이력을 가진 나. 처음엔 몰랐지만 이젠 알겠다. 제대로 된 인간을 만나기 어려움을!

사람을 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광인일기>

 

<다섯째 아이>에서 말하는 유전이 <광인일기>의 식인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불행에 대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 불행을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사람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가 아직도 있을까?

 

이제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섯째 아이>를 들어야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는 대신 빨간책방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는데, 처음에 김중혁 작가가 이걸 듣기 전에 책을 읽고 글을 써보고 생각해 본 다음 듣는 게 좋겠다고 하는 거다. 하, 그래, 정리해볼게. 리뷰를 써 볼게. 그리고 나와 네가 어떻게 다르게 읽었는지 확인하러 다시 올게.

난 빨간책방 들으러 간다. (듣고나서 이 리뷰가 부끄러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