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가 나는 날 내 친구는 그림책
미로코 마치코 글.그림, 유문조 옮김 / 한림출판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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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나는 날>.

이 책의 제목을 듣는 순간, '늑대가 난다구?'하는 호기심부터 툭 솟아났다. 갈필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제목의 글씨를 보면서, 표지의 거친 터치로 그려진 동물들의 그림을 보면서, 어렴풋이 바람과 관계되는 내용일 거라고 예상을 했던 것 같다.

 

 

 

표지를 들추자 노란 바탕에 날아가는 하얀 새떼들이 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늑대도 날고 새들도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버라이어티한 일이 벌어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책은 늑대가 나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오늘은 바람이 세다.

휘잉 휘잉 세차게 분다.

 

이고, 펼친 양면에 가득히 사선으로 거칠게 그어진 붓자국들이 내 머리 속에 윙윙 바람을 일으킨다. 오른쪽 아래 머리카락을 온통 흩날리며 걷는 아이가 작게 그려져 있다. 이 책 속에서 내가 따라가야 할 아이다.

 

제목이 왜 <늑대가 나는 날>인지는 다음 면에서 알 수 있다. 아이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늘에서 늑대가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올 여름 어느 밤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해서 겁을 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난 좀처럼 듣기 어려운 커다란 바람 소리를 즐겼다.  밖에서는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집안으로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의 결이 베란다 샷시 창을 요란하게 쓸고 지나갈 뿐 집안의 공기는 얌전했다. 그 때 나도, 어디선가 맹수들이 몰려와 날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 아이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아이는 내내 혼자다. 엄마나 다른 가족들은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고 천둥이 우는 저녁에. 난 오래된 엄마의 습성으로 책 속 아이를 걱정하지만 아이는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내색하지 않는다. 아이는 상상으로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메우고 견디는 것 같다.

 

아마도 아이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려고 책을 찾고,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쳤을 것이다. 찾는 책은 박쥐가 가져가고, 노래를 부르자 새들이 한꺼번에 날고, 피아노를 치는 동안 다람쥐들이 시계바늘을 몰래 돌려놓았다. 빗방울과 함께  검은 방울무늬의 치타들이 모여들고, 거대한 고래가 커다란 밤을 끌고 왔다. 아이는 이불 속에 누워 거북이들이 시간을 되돌려 놓아 천천히 지나가는 고요한 시간을 느낀다.  그리고 드디어,

 

비가 그쳤다.

바람이 약해졌다.

천둥도 멈췄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약해지고, 천둥이 멈춘 건, 비가 다 쏟아지고, 바람이 잠들고, 비구름이 흩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덮은 아이의 그림 위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약해지고, 천둥이 멈춘 진짜 이유가 적혀 있었다.

 

내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 맹수들이 날뛰는 것처럼 바람이 불던 밤에도 우리집 막내는 그 요란함 속에서도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바람은 나에게만 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그 밤은 여느 밤과 똑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비도 바람도 천둥도 거센 소란스러운 밤의 정경을 담았으면서도, 절대로 시끄럽지 않다. 마치 밖에서는 맹수처럼 울어대는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집안의 공기는 얌전했던 그날 밤처럼, 밖이 요란해서 오히려 안의 고요와 평화가 더 잘 느껴지던 그 시간처럼, 이 책은 나를 비바람과 천둥이 치는 밖으로 내몰지 않고, 혼자 있는 아이의 마음 속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비바람 요란한 밤의 정경을 혼자 있는 아이의 상상과 은유로 묘사해가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 소란한 밤을 소란하게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그 소란함의 반대편에서 혼자 있는 아이의 움추러진 감정과 정적인 분위기를 살린 점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작가의 자유로운 화풍의 그림도 마음에 든다. 작년에 없는 재주를 짜내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아이의 그림 같은 이런 대담한 선의 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

작가의 홈페이지  http://www.mirocomachiko.com 에 가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작가의 다른 그림들도 무척 마음에 든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동물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 같다) 살짝 다시마 세이조나 초 신타의 그림이 떠오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의 그림이 더 시원시원하고 자유로우면서 뭔가 신비감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론은, 난 이 작가가 참 마음에 들고,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을 더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그림책에 대해 쬐끔 질투를 느낀다는 것? (정말 쬐끔일까...?)

 

아파트 가로등이 너무 밝은 탓일까. 한밤중에 매미가 운다. 매미소리만 아니면 늑대도 치타도 없는 고요한 밤이었을 거다. 잠든 아이에게는 자기 꿈 속이 가장 소란할 시간이다. 아이를 깨워 이 책을 읽어주고 매미 울음소리에 귀기울이게 하고 싶어지지만 음. 난 이성적인 엄마니까, 그 충동을 가만히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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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 그림책은 내 친구 38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논장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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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고는 먼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3년 전쯤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라는 그림책으로 '로타'를 만난 적이 있어서 오랜만에 재회하는 기분이랄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야  워낙 아이들의 세계를 잘 그려내는 작가라고 인정받는 대가니까 내가 뭐라고 중언부언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린드그렌의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태주의 <풀꽃>이나 이창희 시, 백창우 곡의 <꽃은 참 예쁘다> 같은 시와 노래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예쁘지 않은 꽃은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 보거나 오래보지 않아서 예쁘고 사랑스러운 줄을 모른 채 무심히 살고 있고, 린드그렌은 꽃 하나하나의 빛깔과 모양과 향기를 오래오래 보고 자세히 또 보고 마음에 담아서,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우리 앞에 이렇게 글로 펼쳐놓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린드그렌의 글을 읽고 그제서야 "아! 그래! 어릴 때 우리도 이랬고, 우리 아이들도 이렇지!"하고 그 사랑스러운 유년의 시기를 돌아보며 감탄을 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린드그렌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아이들을 향한 린드그렌의 따스한 눈빛을 느끼게 된다. 이 책도 딱 그렇다.  

 

'뭐든지 다 오빠 언니랑 똑같아지고 싶었'던 5살 로타는 요나스 오빠와 미아 마리아 언니처럼 '진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바람을 가르며 언덕을 내려오고 싶다. 생일 선물로 '진짜 자전거'를 못 받자 이웃에 사는 베리 아줌마의 창고에서 '진짜 자전거'를 훔치기로 결심한다. 우리집 10살짜리 딸아이는, 비밀 운운하며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이 자존심 강한 로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웃음짓다가 자전거를 훔치려고 마음 먹는 부분에서는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린드그렌의 글은 어른들에게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을 잘 파고드는 것 같다.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도 불필요한 일인 것 같다. '뭐든지 다 오빠 언니랑 똑같아지고 싶은' 로타의 도전과 모험과 역경과 극복의 이야기라고만 설명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린드그렌의 글맛을 느끼지 못한 채 책의 줄거리만 자세히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굳이 그림책으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을 거다.  그림작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림 없이 글만 읽어도 이야기는 생생하게 전달되니까. 그러나 그림이 있으면 아이들의 책에 대한 호감은 높아진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개인적으로 린드그렌의 책이 그림책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굳이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단,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림 부분에서 내가 재미있게 느꼈던 건 같은 또다른 로타 이야기인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라는 그림책을 펼쳐놓고 이 책과 비교해 보았을 때였다.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나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나 모두 한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일론 비클란드'라는 작가인데 린드그렌 책 대부분에 그림을 그린 것 같다.  (삐삐 시리즈는 일론 비클란드가 아니라 롤프 레티히가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두 그림책이 모두 로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고, 그림작가가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림의 느낌이 참 다르다.<로타는 기분이 좋아요>는 부활절 시기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는데 그림의 분위기가 좀 을씨년스럽다. 모르겠다. 스웨덴은 부활절 즈음까지도 이렇게 겨울같은 풍경이 계속되는지는..  그에 반해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는 꽃이 만발하고 초록 이파리들이 싱그러운 봄의 기운이 가득 차있다.  로타의 집이 있는 거리 풍경을 예로 들면 이렇다.

 

 

 

 

 

 

위의 그림이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에 나오는 로타네 동네 풍경이고, 아래 그림이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에 나오는 그림이다. 두 그림에 나오는 집들이 비슷해서 어느 집이 로타네 집인지 금세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의 그림이 더 어둡고 칙칙하다.

 

이웃집 아줌마도 양쪽 책에 다 등장하는데, 그 이웃집 아줌마네 방 풍경도 아주 흡사하다.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에는 베리 아줌마네로 나오고,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에는  베르크 아줌마로 등장한다.

 

 

 

 

 

 

 

탁자 위에 놓인 전등과 의자, 소파, 소파 위의 쿠션, 바닥에 깔린 카펫, 벽지와 화장대, 화장대 위에 놓인 액자..

모두 똑같다. 텔레비젼과 청소기, 강아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식탁에 로타네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식탁에 테이블보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지만 가족들이 앉은 위치가 똑같다. 

 

그림의 느낌이 사뭇 다르지만 같은 작가의 그림인 것 맞는 것 같다. 작가의 그림풍이 왜 이렇게 다르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교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그림의 톤이 밝고 색도 더 선명하고, 그림이 좀 더 귀여운 느낌이 들어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이들이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의 그림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싶다. 예쁜 그림이 모두 훌륭한 그림이 아니라는 거, 안다. 하지만 밝고 사랑스러운 로타 이야기와 <로타는 기분이 좋아요> 풍의 그림은 뭔가 잘 안맞는 느낌이 든다.

 

얼마 전에 린드그렌의 평전을 읽었다. 고통스러운 십대시절을 보내며 상대적으로 린드그렌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더욱 빛나는 보석으로 간직했을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이 린드그렌에게는 행복했던 유년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린드그렌에 대해 다시 감탄하며 린드그렌의 책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사랑스럽고 깜찍한 로타를 <나 이사 갈거야> (논장)과 <말썽꾸러기 로타>(다락방),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논장)에서 더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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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영원한 삐삐 롱스타킹 여유당 인물산책 1
마렌 고트샬크 지음, 이명아 옮김 / 여유당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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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그녀에 대한 내가 몰랐던 이야기.

작가로서의 그녀는 너무나 훌륭하지만

여성으로서의 그녀,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삶은 아프다.

이 책을 읽어서

그녀의 책들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세 살 적 여름이 기억나요. 더 이상 놀이를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더 이상은 안 됐어요. 너무나 당혹스럽고 슬펐어요." (36쪽)

그렇다면 그녀는 출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출판되려면 그 책이 좋은 책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외하고는 어떤 요구 사항도 없었다. "미래의 어린이책 작가에게"라는 글에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자신이 지키고 있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을 밝혔다. 언어를 아이들에게 맞게 잘 가려 쓰고 다듬어야 한다는 점과,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삼가야 하지만, 아이들 마음에 쏙 드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는 흘러넘쳐도 좋다. (108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직감에 몸을 내맡긴다. "머리를 너무 많이 굴리지 말라! 그것이 최선이다. 솔직히 터놓고 마음 가는 대로 써라. 난 모든 어린이책 작가들이 어른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당연히 허용되는 자유, 곧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쓸 자유를 누리기 바란다." (109쪽)

"무엇을 위해 아이들을 교욱하려는지 끝도 없이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모든 아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로지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그 아이에 관해서만 생각한다고 되풀이해서 대답한다." (115쪽)

"엄마는 자신의 십대 시절을 조금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요. 그 시절을 텅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우리 관계는 무척 돈독했어요." (126쪽)

스투레가 세상을 뜨자 아스트리드는 일과를 필요에 맞게 조정했다. 새벽 5시나 6시에 일어나 차를 끓인다. 그리고 빵 두 조각에 잼을 발라 재빨리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장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시간을 이용해 원고를 쓰는 습관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스톡홀름의 집에서든, 여름을 보내는 푸루순드에서든 침대에 누워서 속기를 했다. 속기를 마치고 나면 바사 공원이 내다보이는 책상 앞이나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푸루순드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마음에 들 때까지 손질한다. (132쪽)

"한 문장을 열 번 넘게 고쳐 쓰는 일이 잦았다.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문장들을 내 귀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내 귀에 최고의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올 때까지 쓰고 다시 쓰고 또 고쳐 썼다. 어느 한 곳도 뚝 끊어지는 일 없이 문장들이 선율을 타고 흐를 때까지..... 난 독특한 언어의 가락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가락도 이야기도 내 마음에 꼭 들어맞아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울림이다." (132쪽)

글을 쓰면서 그녀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였다. "글쓰기. 그것은 고된 노동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가장 근사한 일이다. 아침이면 글을 쓰고 밤이 되면 생각한다. 아! 내일 아침이 밝아 오면 다시 글을 쓸 수 있겠지!" (134쪽)

마르가레타 스트룀스테트는 말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 세계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여자애를 한 명이라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작품 속의 외로운 남자아이들에게는 라르스를 바라보는 아스트리드의 감정이 조금은 녹아 있다. (151쪽)

"꿈의 세계를 꽃피우는 자양분으로 책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책만 있다면,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영혼의 방에 은밀히 들어앉아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들을 그려 낼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그림들이 꼭 필요하다." (159쪽)

작가는 아이들에게 승리를 안겨 줌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162쪽)

책을 쓰기 시작하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일을 중단하는 것도 관심을 흩뜨리는 것도 참지 못했다. (165쪽)

'더 간단히 말할 수 없을까? 더 소박하게.'(171쪽)

그녀의 작품 활동은 완전히 끝이 났다. 아직도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들이 떠올랐지만 말이다. 1987년 9월 어느 날, 집 앞 바사 공원 위로 땅거미가 내릴 무렵 아스트리드는 친구 마르가레타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녁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머릿속에 온갖 상황들을 생생하게 그려 놓고 말도 안 되게 아이들 같은 이야기를 계속 떠올려. 그러곤 이야기 속의 일들을 다 겪어 봐. 내가 직접 주인공 노릇을 하면서 말이야. 사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털어놓지 못했어. 아직까지도 이렇게 어린아이 같다는 게 조금 창피하잖아."(207쪽)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자기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꿈틀거리는 본능은 '돌보기 본능'이라고 말하곤 했다. 외로운, 겁먹은 아이를 돕는 꿈은 한결같이 그녀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이 아이는 때로는 꼬마 칼, 때로는 미오나 베르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변함없이 라르스이기도 할 것이다. (208쪽)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은 그녀는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꼭꼭 숨어 버리려고요. 어딘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거예요. 저를 어디서도 찾지 못할 겁니다. 약속할게요. 아무도 저를 찾지 못하게 되겠지요."
-중략-
2002년 1월 28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눈을 감은 날은 월요일이었다. 그녀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한 달 내내 고생하다 마침내 삶을 마감했다. (220쪽)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난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농부의 딸로 산, 스몰란드 출신의 아스트리드이다."
1996년 저 높은 하늘에서 발견된 유성 3204번이 우주 곳곳을 날고 있다. 러시아 학술원은 그 유성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이름을 따 붙였다. 아스트리드가 날고 있는 우주 어딘가에 진실이 놓여 있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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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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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책꽂이에 꽂혀있던 세계문학전집의 갈색 책등을 훑어 보고 있었다. 아마 무지 따분하고 지루한 날이었나보다. <죄와 벌>, <적과 흑>, <전쟁과 평화>, <보봐리 부인>, <이방인>... 여기저기서 들어본 제목들이 가지런하게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중에 내 눈을 붙잡는 제목이 있었다. <달과 6펜스>. 단발머리 중학생 여자아이가 보기에 그 책은, 묵직하고 심각한 다른 제목들 사이에서 무척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제목으로 돋보이고 있었다.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뽑아 들었고, 방학 때였는지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이 책을 붙들고, 제목에서 느꼈던 낭만과 감성의 문맥을 만나려고 애쓰며 씨름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지루하고 힘든 씨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긴 시간이 흐르고 이 책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읽었다'는, '읽어냈다'는 사실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만났을 문장 한 줄은 커녕 낱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누가 그 책이 어떤 내용이었냐고 묻는다면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과연 읽었다는 건 사실일까? 그 날 나는 도대체 책을 붙잡고 뭘 했던 걸까? 말 그대로 읽은 게 아니라 씨름을 했었나 보다.

 

쉰이 멀지 않은 나이에 다시 이 책을 펼쳤다. '읽었다'는 사실만 있을 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책. 그런데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범상한 삶에 대한 낭만적 정신의 저항'(p.11)이라는 글 위에서 잠시 멈췄다. 하하, 웃음이 났다. 이런 류의 글이 이어진다면 여중생이었던 내가 이 책과 어떻게 공감을 나눌 수 있었겠는가. 오래 전 그 여중생도 틀림없이 범상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범상한 삶이 주는 무기력과 공허감 따위는 없었다. 심심하고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조차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반짝임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대책없는 낭만의 꿈은 꾸었을지언정 '낭만적 정신의 저항'의 처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나는 저 문장 하나로 이 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처럼 책을 읽는다기 보다 씨름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행간의 깊은 의미를 짚어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읽지 않더라도,  이 책이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쓴 소설이라는 건 알게 된다. 산업혁명 이후 변화를 겪으며 문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타히티로 떠난 고갱에 대한 이야기는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고갱과 겹쳐지는 인물은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인데, 고갱의 비참했던 삶에 소설의 극적인 픽션이 더해지면서 비상식적이고 기괴한 성품을 얻게 된 스트릭랜드는 독자를 책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얼마쯤 책을 읽어가다 보니까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에서 자꾸 니코스 키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아마도 허위와 가식으로 뒤덮힌 세상을 조롱하듯 거침없이 신념대로 밀고 나아가는 성격 때문인 것 같은데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내 어렴풋한 기억을 더둠어 보자면 조르바가 건강하고 유쾌하고 자유롭게 삶을 통째로 끌어안고 살아간다면, 스트릭랜드는 비극적 운명의 그림자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스인 조르바>도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구나..)

 

예를 들면 이런 글들. 증권브로커였던 스트릭랜드가 그 안락하고 편안한 삶과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나고 난 후, 글 속의 화자인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가서 스트릭랜드를 만나는 장면이다.

 

한 번은 이렇게 비꼬아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중략)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중략)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중략)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77

 

한편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에서는 이런 글이 나온다.

 

재수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을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지락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p.507

 

스트릭랜드와 조르바가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뒤적이다 발견한 문장들이다. 양심이니 질서와 안녕이니, 정해진 순서를 따라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러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스트릭랜드와 조르바 앞에서는 여지없이 갈가리 찢겨져서 편안하고 안락하고 폼나게 사는 게 꿈이었던 내 자신이 지네만도 못한 보잘 것없고 좀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자기만의 확신을 가진 두 인물 앞에서 나는 놀라고 당황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통쾌한 해방감과 막연한 동경과 경외심을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찬찬히 두 책을 읽다 보면 서로 비슷한 듯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통하지만 사뭇 다른 두 인물을 드러내줄만한 더 적당한 문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스트릭랜드 주변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을 책을 통해 관찰하는 것도 씁쓸한 재미를 주었다. 가난하고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지만 진솔한 사람들과 우아하고 지적인 영국 중상류층 삶의 가식과 허례가 대비를 이루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면면의 틈바구니에는 내 모습이 슬쩍슬쩍 보이기도 한다.

 

스트릭랜드는 문둥병에 걸려 자기가 살던 낡은 오두막 벽에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함께 살던 원주민 여자 아티에게 자기가 죽으면 작대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오두막을 완전히 태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실제 고갱은 타히티에서 심장마비로 죽었고, 유언같은 작품으로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작품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불에 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묘사한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작품이 작가가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묘사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달과 6펜스>를 읽고 나서 고갱의 마지막 작품을 보는 내 마음은 그 전과 같지 않다.

 

 

여전히 달을 향해 날아오를 수 없는 나. 앞으로도 달을 향해서 날아오를 일이 없을 것 같은 나.

달을 잊지 않고 매일매일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좋을 텐데, 난 자주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달마저도 잊고 산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56쪽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 -75쪽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90쪽

그야 인간이라는 예측불능의 존재를 두고 얘기할 때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어쨌든 블란치 스트로브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생각했던 인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친구의 신뢰를 비정하게 저버린 행위는 이상할 것이 없다. 남의 불행이야 어찌 됐든 제 기분만 만족된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것, 그것은 그라는 인간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다. 고마움이라고는 전혀 몰랐고 동정심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면 으례 갖기 마련인 감정들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 왜 그런 감정이 없느냐고 탓한다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야수더러 왜 그렇게 사납고 잔혹하냐고 탓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58쪽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211쪽

인생은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한 일들의 뒤범벅이고 웃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하지만 웃으려니 슬펐다. -223쪽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이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어찌 감히 말대꾸를 하겠는가. -260쪽

세상은 이상한 짓을 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 것, 사람은 자기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생겨먹은 대로 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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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도 김씨 김수로 사계절 아동문고 85
윤혜숙 글, 오윤화 그림 / 사계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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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그 속에서 여러가지 벽을 만나게 된다. 사람마다 다 나름의 역경과 고난이 있듯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저마다 부딪치게 되는 벽이 있으니까.  책을 읽는 나는 그 벽 앞에서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으쌰으쌰 응원하기도 하고, 답답함에 열불이 나서 냉수를 들이키기도 한다. 어린이책을 읽으면 주인공이 '어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안타까움도 응원도 열불도 배가 되곤 한다.

 

'김수로'는 12살 남자 아이다. 아빠는 '김하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나라로 귀화한 인도인이다. 아, 써놓고 보니 이 말도 틀린 말이다. 수로와 김하산씨가 듣는다면 펄쩍 뛸 일이다. 제대로 고쳐 말하자면  김수로의 아버지 김하산 씨는 인도인이었지만 이제 우리나라로 귀화한 우리나라 사람이다. 아들인 수로가 보아도 '크고 깊은 눈, 두툼한 입술, 숯검댕처럼 굵은 눈썹, 까무잡잡한 피부만 아니면 나도 가끔 우리 아빠가 인도 사람 맞나 헷갈릴'(p.17)정도로 김하산 씨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완벽 적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에게는 아빠가 원래는 인도사람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시작되는 고민이 있다.

 

수로네 세 식구는 할아버지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데, 깐깐하고 엄격한 대목 일을 하시는 할아버지가 아빠를 싫어한다는 게 수로의 고민이다. 수로 생각에 할아버지가 아빠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빠가 인도 사람이기 때문인데 책에 또다른 이유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로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건 서류상 절차상 '한국인'으로 인정은 받았다고 해도 사람 사이에서 심정적(?)으로 '한국인'으로의 대접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우리 나라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다문화 가족의 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 가치관을 가지며 살아온 다른 국적의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정을 붙이고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러니 할아버지가 외출하신 틈을 타서 할아버지의 목공방에 숨어들어 목공작업에 열심인 아버지를 보며 '내 소원은 우리 할아버지와 아빠가 다른 집들처럼 서로 친해지는 거'(p.10)라고 하는 수로의 소원이 이해된다. 어느 날 인도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냐는 수로의 질문에 김하산 씨는 '순례자'였다고 말한다. 히말라야를 아마 스무 번도 넘게 오르셨을 거라면서.

 

"인도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많아. 무엇에 얽매이는 게 싫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세상을 배우는 거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인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처럼 떠돌이 병을 앓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 같았다. 대목인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평생 한뎃잠을 주무셨다. (p.89)

 

온정성을 다해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아갈 집을 짓는 대목 할아버지로서는 머무는 데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순례하는 인도인들의 관습과 가치관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비록 똑같이 '떠돌이병'을 앓았다고 해도 병의 증상과 원인이 다른 병인 셈이다. 그러니까 김하산 씨가 인도 사람이어서 싫은 이유에는 이런 충돌과 갈등들이 함께 들어있는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보듬어 앉는 '집'이라는 공간을, 그것도 나름의 완고한 철학과 고집을 갖고 짓는 대목이라는 것은 인도인 사위 김하산을 결국엔 보듬어 안을 것이고 수로의 소원은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또 하나의 큰 고민은 얄미운 외사촌 종수에게서 시작되었다. 수로와 한 반인 종수는 교실에서 '패밀리가 떴다'라는 게임을 벌인다. 김씨와 이씨 성을 가진 아이들끼리 모여 누구네 조상이 더 잘났는가를 따지는 건데, 수로가 은근슬쩍 김씨 패밀리 쪽으로 다가가자 종수는 수로에게 '우리 나라 사람이긴 한데 토종이 아니'(p.44)라고 하며 수로를 혼란에 빠뜨리고 만 것이다. 집까지 가는 길에 시장골목을 걸으며 '저 상추는 토종일까, 외래종일까? 뽀바이가 좋아했으니까 시금치는 토종이 아닐지도 몰라.'(p46)라며 혼자 고민에 빠질 정도로.  이 고민의 해결은 12살 남자아이 같지 않게 의젓하고 생각 깊은 같은 반 친구 태석과 멋진 담임 선생님에 의해 해결된다. 어느 날 선생님은 자기 성의 시조에 대해 조사해 오라는 숙제를 내 준다. 화산 이씨인 태석이는 자기 시조는 베트남의 가장 오래된 리 왕조의 왕자였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가야국의 김수로 왕과 결혼한 인도의 공주 허황옥 이야기를 들려주며 수로와 선생님의 몸에는 똑같이 한국인과 인도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인도 김씨도 한국인의 성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어느 김씨세요?"

"네, 저는 인도 김씨입니다."해도 아무도

"네? 인도 김씨요? 그럼 인도에서 오셨어요?"하는 바보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될 거다.

지금 베트남에서 온 리 왕조의 왕자나 인도에서 온 허황옥 공주의 후손들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듯이.

그러니까 이 책은,  결국 우리는 다같이 섞여 살게 되어 있으니 '가짜'니 '토종'이니 '다문화'니 하는 말들이 다 쓸데없고 부질없고 무의미한 말이고 편견이라고, 그런 옹졸한 마음에 잡혀있지 말고 빨리 사이좋게 섞여 살아갈 궁리를 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다.

 

김수로나 김하산 씨보다 더 힘든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들 곁에 '이태석'같이 똑똑하고 줏대있고 의젓한 친구가 있을까?  수로네 담임 선생님처럼 센스있고 멋진 분이 계실까?  특히나 '이태석'이라는 아이는 너무 멋지고 이상적이라 좀 현실감이 없어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별 하나를 뺐다. 진짜로 그런 아이, 그런 선생님이 계실까 하는 의문을 접고 '이런 친구, 이런 선생님이 되어 주세요' 하는 작가의 착한 바람이 깃든 거라고 이해하자고 하더라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가 너무 무거우니까.

 

문득 나의 시조가 궁금해져서 찾아 봤다. 놀랍게도 나의 시조는 기원전 117년 신라 건국 이전 부족국가 시대의 촌장이다. 2,100년도 전의 까마득한 이야기가 내 안에 있었구나. 그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고, 그 삶 속엔 수 많은 사연과 사건들이 얼룩져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야말로 '다문화'라는 말로는 모자랄 세계 문화의 응집체이자 인류 모든 혈족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자부심을 느껴도 좋은 걸까?) 사정이 이렇다면 시조를 따져서 우리끼리는 같은 핏줄이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나의 성씨의 기원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다 하더라도 혼인으로 섞인 피만 따진다 쳐도 내 안에는 온갖 성씨, 온갖 민족들의 피가 다 흐르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2천년 전의 시조의 끈을 잇고 있는 우리가 참 독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핏줄에 대한 집착이 무시무시하다는 뜻일 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어린 김수로와 김하산 씨들의 고단함을 손톱만큼 알 것도 같다. (소심하게나마 으랏차차, 힘내세요,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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