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지키는 사람들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림책 1
신순재 글, 한지선 그림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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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표지부터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림책이 틀림없는데, 어째서 만화의 느낌이 나는 건지.. 혹시나 해서 휘리릭 속을 훑어보니까 어, 정말 만화같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표지만 보고 만화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림책의 그림과 만화책의 그림은 어떻게 다른 걸까? 말풍선이나 몇개의 컷으로 화면을 분할한다거나 하는 눈에 띄는 특징 말고 그림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만화적 느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그 고민을 붙잡고 어영부영 며칠이 휙 지나가 버렸다. 어떤 과장된 표현이 들어있나 했지만  <마법사 똥맨>이라든가 <선생님 과자>같은 책에 그림을 그린 김유대의 그림에 비하면 특별히 과장된 그림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 말이다.  스스슥 선의 느낌을 살려 그린 듯한 그림 때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어쨌든 무겁고 진지하다는 느낌이 덜하니까 아이들은 더 쉽게 책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예전에 비하면 참 많이 소박해지고 다양해진 것 같다. 뭔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까운' 직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달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몇 차례 읽고 난 느낌을 미리 말하자면 '일'보다는 '사람' 또는 '삶'의 소박하면서도 강인하고 따뜻한 모습이 더 마음에 남았다. 사계절 출판사의 '일과 사람'시리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데, 이번에 창비에서 나온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림책' 시리즈도 '사람이 하는 일'보다는 '일 하는 사람'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지 않아서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사계절 출판사의 '일과 사람 시리즈'가 한 권의 책에 하나의 직업을 담고 있다면 창비의 이 '사람이 보이는 사회 그림책 시리즈'는 어떤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는 하나의 직업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다른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책은 제목대로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경찰관, 구급대원, 새벽 수산물시장의 사람들, 환경미화원, 도로정비원, 천문학자, 그리고 택시운전기사. 마지막으로 조카 영두와 함께 밤에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와서 밤을 지새우며 만화를 그리는 영두의 고모까지.

 

사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내 친정오빠는 디자인 일을 한다. 20대 대학시절부터 밤새기를 밥먹듯 하는 올빼미다. 친정엄마는 항상 그런 오빠를 탐탁치 않아 하신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오빠와 아직도 그 문제로 티격태격하시는데, 간혹 나한테 오빠에 대한 못마땅함을 드러내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다, 농사짓고 살던 때나 해뜨면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가는 거였지, 요즘은 일하는데 밤낮이 따로 없다고 말씀드리지만 말씀드릴 때뿐이다. 오빠의 건강을 염려하며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오빠의 밤샘을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신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을 우리 친정엄마에게 읽어드리고 싶었다. 여든을 바라보시는 우리엄마의 노심초사를 이 책으로 덜어드리고 싶었다.

 

버스커버스커의 '서울사람들'이란 노래를 듣는다. '아가씨 어디가 클럽가요, 아니요 오늘도 야근해요~'하는 가사가 흐른다. 낮에 일하든 밤에 일하든, 무슨 일을 하든 고단함을 덕지덕지 어깨에 짊어지며 살아가는 거라고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또는 그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내가 고맙고 소중하고 대견하다고 여겨주는 사람들이 많다면 힘들어도 견디며 살만하지 않을까. 이 책을 참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우리 아이들에게 '일'의 소중함과 함께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 고마움을 갖게 한다는 것. 시리즈 제목대로 사람의 직업적 기능이 아니라 '사람'이 보인다는 것.

 

아이들의 공부가 중요해질수록 지식정보그림책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지식정보그림책들에 묻혀 수준높은 순수문학적(이런 게 있었나? 싶지만 아무튼 용어선택에 대한 문제점은 그냥 넘어가주기를..) 그림책이 점점 사라져갈까봐 두렵다. 지식정보그림책은 아이들에 대한 어른의 욕구가 반영된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아이들이 이런 것 까지 알아야하나? 싶을 정도의 내용을 담은 책들을 보기도 한다. 지식정보그림책의 증가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요구라 한다면 조금은 아이들 입장을 헤아린 책들로 만들어지길 바란다.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니라 '사람'을 보여주는 이 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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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4-04-1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 교과를 일찍 배우면서 어린이책 출판 판도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이 책, 그림과 설명은 그림책 읽는 아이들 연령에 맞는 것 같아서 반갑더라고요. 그런데 밤에 일하는 사람을 '투명인간'이라고 한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_- 재밌게 쓰려고, 또는 안 보여도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뜻으로 썼겠지만 '안 보인다'를 기정사실화 하는 것 같아서 말예요.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영화 "빵과 장미"에서 사무실 청소일을 하는 사람이 유니폼을 가리키면서 '이 옷이 우리를 안 보이게 해준다'고 했던 것도 생각나고요. =_=

섬사이 2014-06-20 13:10   좋아요 0 | URL
이렇게나 늦은 댓글이라니! ㅠ.ㅠ
잘 지내시죠?
얼마 전에 도서관에 원종찬 선생님이 오셔서 우리의 근대아동문학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어요.
그것도 세 번이나!!!
네꼬님 생각이 나던걸요. ^^
 
소풍
존 버닝햄 글.그림, 이상희 옮김 / 토토북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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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그림책의 모든 것>(마틴 솔즈베리, 모렉 스타일스 지음/시공아트)을 읽다가 존 버닝햄에 대한 이런 글을 만났다.

 

버닝햄은 런던의 센트럴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와일드스미스와 키핑과는 달리 데생에 전혀 재능이 없었다. 그의 드로잉은 서툴렀을 뿐 아니라, 솜씨는커녕 매너리즘조차 없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학창시절에 동료들은 실사 작업실에서 쩔쩔매는 그를 보고 비웃었다. 그러나 졸업 후 그는 바로 그래픽 아트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버닝햄의 그림책들은, 데보라 오르가 이야기했듯이 "......시장의 상품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한 예술가가 자신만의 창조에 대한 열망을 구체화하여 표현한 독창적인 공예품임이 분명하다."

버닝햄은 특별히 어린이 책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어린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결코 잘난 체 하지 않았으며 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매우 현명하게 소통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문장들을 읽었었다. 존 버닝햄의 그림은 솔직히 다른 그림책 작가들에 비해 좀 어설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책을 읽으면 뭔가 가슴을 찡하고 울리는 게 있다. 그게 그의 '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매우 현명하게 소통'하는 탁월한 능력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그가 그림책 작가로서 이만큼의 명망을 쌓고 인정을 받는 것은 그림실력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소통능력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이 책은 3살~5살 정도의 유아들이 즐겨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버닝햄은 언덕 꼭대기 집에 사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서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검피 아저씨>나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처럼 소풍을 가기 위해 길을 가다가 동행이 생긴다. 양과 돼지와 오리. 아이들은 이들의 동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소풍 도시락도 함께 먹자고 한다. 그런데 난데없는 황소의 등장.....이라지만 그림은 이렇다.

 

 

이건, 황소가 아니라 젖소...아닌가?  가끔 유아들 책, 그 중에서도 번역책에서 이런 오류들이 발견되곤 한다. 어른들은 이 장면에서 "어? 황소가 아니라 젖소같은데? 번역을 잘못했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유아들은 이걸 그냥 받아들인다. 저렇게 생긴 소도 황소라고 하는구나, 하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이런 소는 젖소라고 하는데 황소라고 잘못 나왔네"라고 정정을 해주면 되겠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신뢰를 잃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지식을 네이버에 물어보는 사람으로 자라면 어쩌란 말인가. 적어도, 책이 네이버보다는 편리하고 재미있지는 않을지언정 보다 깊이있고 신뢰할만 하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모든 지식은 의심해보아야 한다지만 젖소와 황소의 정의를 의심해 보자는 게 이 책의 의도는 아닐 거라고 본다, 나는.)

 

쫓아오는 젖소 같은 황소를 피해 오리, 돼지, 양, 남자 아이, 여자 아이는 숲으로 도망을 간다. 그리고 '찾기 놀이'가 시작된다.

 

 

 

 

 

 

 

 

 

 

 

 

 

 

 

 

 

 

 

 

 

 

 

 

 

 

 젖소 같은 황소를 피해 달아나 숨은 아이들 찾기다. 너무 쉽다. 너무 쉬워서 사실 6,7세 정도만 되어도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젖소 같은 황소가 가 버린 다음, 아이들은 도시락 먹을 곳을 찾아 나서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양의 모자가 날아가고, 돼지가 공을 떨어뜨리고, 오리가 목도리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차례로 일어난다. 물론 다같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데 이 또한 독자도 참여해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야 한다.

 

 

 

 

 

 

사진을 붙이다 보니 두 장면이 펼친 양쪽 면에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양의 모자 한참 뒤에 오리의 목도리 찾기가 나온다. 뭐, 어쨌든 위의 그림에서도 알겠지만 찾기 놀이는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5살 이하의 유아에게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로 십대의 문턱에 서게 된 우리 막내만 하더라도 서너살 무렵엔 이런 책 들을 얼마나 좋아하며 즐겼던가. 너무나 쉬운 찾기 놀이 책을 즐기며 한없이 뿌듯해하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아이들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른다. 옆에서 읽어주던 엄마가 못 찾는 척하면 더 기뻐하며 거만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우리 막내는 시시하다고 투덜댔지만 이 책은 엄연히 십대의 문턱에 아슬아슬 서있는 딸을 위한 책이 아니었으니까.

이 책에서는 찾기 놀이가  버닝햄이 선택한 '현명하게 소통하는 방법'이고, 착하고 순박한 동물들과의 소풍과 도시락은 아이들에게 '시적으로 이야기하는' 장치인 것 같다.

 

 

 

 

 

 

 

 

 

 

 

 

 

 

 

 

 

 

 

 

 

 

 

 

 

 

 

 

동물들은 환한 풀밭에서 소풍 도시락을 함께 먹고 신 나게 놀고 '모두 잔뜩 지쳐서' 언덕 위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은 동물들에게 "우리 집에서 자도 돼."라고 이야기하고 기꺼이 침대를 내어준다. 친구들과 소풍 가서 먹을 것도 같이 먹고 지치도록 신 나게 놀고, 그 다음에 뿔뿔이 헤어질 걱정없이 친구랑 같이 잠을 잔다는 건,,, 내가 애 셋을 키워봐서 아는데 이건 아이들을 정말 미치도록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 중에 하나다. 엄마로서는 정말 쉽지 않은 희생이 따르는 일이고.  이 그림책에 엄마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엄마의 그런 피곤한 면모를 숨길 수 없어서인지도.

 

맨 마지막 장면.

 

 

 

 

 

 

 

 

 

 

 

 

 

 

 

 

 

 

 

 

 

 

 

 

 

 

 

나는 이 마지막 장에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바로 저 문장 때문이었다.

"오늘 밤 내가 어디서 자는지 알아맞혀 볼까요?"

이게 무슨 뜻일까... 틀림없이 어려운 낱말은 없는데 뭔가 문장이 꼬여있는 것 같았다.

이 문장에서 '내가 어디서 자는지'를 나더러 맞혀보라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어디서 자고 있는 걸' 내가 알아맞혀 보겠다는 건지...  저 문장에서 '내'에 상응하는 술어는 '자는지'일까, '알아맞혀 볼까요?'일까. 저 '볼까요?'가 '볼래요?'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면 작중화자였던 '나'는 누구인 걸까?  저 달이었을까? 아니면 집인가?

 

이 그림책의 원서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존 버닝햄의 책들 중에 이 책이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젖소 같은 황소와 저 마지막 문장을 좀 다듬는다면 유아들에게 추천할만한 책이 될 것 같다.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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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1-0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ull (원문을 찾아봤어요)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해석했네요. 보통 bull을 황소로 해석하긴 하는데 그림이 있으니 좀 센스 있는 번역자라면 생각을 하고 단어를 썼을텐데, 아쉽네요.
이 책 리뷰가 많이 올라와서 저도 관심이 갑니다.

섬사이 2014-01-02 00:40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hnine님.
제 서재에 새해 첫 발자국을 찍어 주셨네요. ^^
원문에 'bull' 이라고 되어 있군요. 하긴 저 소를 젖소라고 하는 게 정확한 건지도 좀 애매했어요.
'젖소'라면 마땅히 있어야할 그게 보이지 않아서요.
그럼 이 소에 대한 문제는 존 버닝햄의 애매한 실수라고 해야 옳은 걸까요?
그럼 맨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된 걸까요?
구립도서관 영어책 코너에 가서 한번 찾아볼까 하고 있어요.
이 책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수의 탄생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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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실의 새 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망설임없이 읽기 시작한 책. 이야기의 첫 머리에는 일수의 엄마 아빠의 만남과 결혼, 결혼을 한 후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서로에게 심드렁해지기까지의 과정이 나오는데 그걸 읽으면서부터 나는 즐거웠다. 여자의 잘록한 허리와 수줍은 웃음이 마음에 들어서 '이 사람과 결혼해서 날마다 저 모습을 봐야겠다.'고 다짐하고 결혼했지만 아내의 수줍음은 사라지고 결혼한 지 오 년 만에 잘록한 허리가 완벽한 항아리 형으로 변신해서 바라보면 한숨이 나오더라는 이야기, 남자에게서 풍겨오는 기분좋은 비누 냄새와 유머감각이 마음에 들어서 '이 사람과 결혼해서 날마다 재밌는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결혼했지만 남자가 남편이 되고부터는 점점 게을러지고 지저분해져서 코를 쥐고 괴로워했다는 이야기. 그래도 그냥 그럭저럭,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부부로 살았다는 이야기는 첫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걸쳐서 짤막하게 쓰여있었지만 팔딱팔딱 살아있는 생생한 문장들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부부의 결혼 이야기는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더라, 라는 켸켸묵은 진리를 꺼내들고 앞으로 태어날 일수의 인생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건 아니고, 책을 다 읽고 나서 곰곰 생각했더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생각해볼 때 사실 일수 엄마, 아빠의 결혼 스토리는 없어도 무방하니까, 굳이 이 이야기가 책의 앞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건 앞으로 일수의 앞날이 생각대로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복선일 수도 있다는 거다.

 

일수는 이 부부가 결혼한지 15년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다. 게다가 행운의 숫자 7이 겹친 7월 7일에 태어났고, 로또 당첨의 길몽이라는 황금똥의 태몽을 꾸고 잉태된 아이다. 그러니 부모, 특히나 엄마의 극진한 사랑과 관심과 기대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철철 넘쳐난다. 엄마는 일수가 출세하고 성공해서 자신을 돈방석에 앉혀줄 거라는 부푼 기대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일수가 무럭무럭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일 년 내내 상장 한 번 못 탄 일수를 위해 잠시 고민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일수에겐 착한 구석이 없었어요.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고 착한 건 아니니까요. 일수는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칭찬할 것도 야단칠 것도 없는 아이였죠. 2학년, 3학년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일수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눈에 띄게 못하는 거도 없는 아이였죠. 선생님들은 가끔 일수가 자기 반 아이라는 걸 잊어버렸어요. (29쪽)

 

그러니까 일수의 문제는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데, 나는 일수의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아, 어쩌면 일수가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수가 '생일잔치를 회갑처럼 하는 것 말고 특별할 게 없는 백일수 어린이'(31쪽)가 되어버린 것도, 말끝에 늘 '같아요'를 붙여서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며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숨기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탄생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커다란 걸 기대하고 있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혹은 정말 자신이 없다는 아주 극소심한 의지표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엄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부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일수의 고민이 드러난 것일 수도.  일수의 아빠는 그런 일수를 측은히 여기며 아내에게 한 마디 한다. 

"일수한테 너무 기대하지 마. 대단해지지 않았을 때, 엄마에게 죄지은 느낌으로 계속 살게 될지도 몰라." (51쪽)

물론 아들에 대한 기대로 눈이 먼 엄마에게 남편의 충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헛소리 취급을 받지만.

 

어떤 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일수가 4학년이 되어 서예반에 들어가면서 약간의 반전을 맞는다. 일수의 '하면 된다' 서예작품이 '새마을초등학교 개교 30주년 기념 전시회'에 서예부 대표로 전시된 것이다.  이 일로 일수가 한석봉 뺨치는 유명한 서예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된 일수 엄마는 일수의 손목을 잡아끌고 급기야 동네 최고의 명필을 찾아가 제대로 서예를 배우게 한다. 한석봉의 꿈을 꾸는 엄마와 달리 겹받침을 틀리지 않고 잘 쓰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를 가졌던 일수가 6학년이 되어 겹받침이 헛갈리지 않게 되자 명필은 일수의 어머니를 불러앉히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수는 자기 글씨체가 없습니다. 그날 그날 교본에 있는 걸 따라할 뿐이에요. 당연하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인데."

명필은 조금도 떨지 않고 대답했어요.

"뭐라고? 우리 일수가 뭘 모른다고?"

어머니 목소리가 커졌어요.

"당신 아들은 자기 감정을 몰라. 자기 마음을 담는 게 서옌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해. 더 이상 하면 독이 될 뿐이야!"

명필의 목소리도 커졌어요. 어머니보다 더 크게, 더 세게 반말을 했죠. (65쪽)

 

 

일수는 서예학원에서 잘렸다. 언젠가 명필은 일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었다. "일수야, 너는 누구니?", "그런 거 말고, 너는 누구니?"라고.  그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은 명필, 딱 한 사람이었는데, 야속하게도 그 명필이 일수를 잘라버렸다. 이렇게 난데없이 불쌍할 수가. 명필만은 주눅들고 위축된 일수에게 언젠가 벼락같은 깨달음을 내려주어 일수가 자기 스스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어주기를 바랐는데 말이다.

 

하기는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일 거다.  120쪽 정도의 이 얇은 책 속에 주인공의 30 여년의 세월을 조금도 허술하지 않게 짜임 좋게 담아놓은 것 말이다.  일수가 서른이 넘는 어른이 될 때까지의 삶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살면서 깨달음은 그렇게 쉽게 오지도 않고, 꼬인 인생은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고, 일수 아빠의 말처럼 인생은 별 것 아닐 수 있다라고. 하지만 스펙터클하지도 버라이어티하지도 않고, 력셔리나 판타스틱 같은 단어와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손아귀에 잡혀 되는대로 끌려다니며 살아서는 안된다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작가는 일수의 탄생부터 서른을 넘긴 나이까지, 그 별 볼일 없는 삶의 여정을 모두 이야기해야 했던 건가 보다. 대부분의 어린이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경우다.

 

일수 씨는 천천히 가훈을 읽기 시작했죠. 짧아서 쓰기 좋은 가훈과 길어서 쓰기 힘든 가훈, 웃기지 않는 가훈과 웃긴 가훈, 많이 써 본 가훈과 처음 써 보는 가훈, 아이가 썼다고 치거나 부모나 조부모가 썼다고 치는 가훈의 구별은 사라졌어요. 오직 하나 '나의 가훈'으로 삼고 싶은 것과 '나의 가훈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만이 있었죠. 그리고 동네 최고의 명필이 했던 질문이, 질문하던 눈빛이 떠올랐어요. 일수 씨는 거울 앞에 섰어요. 그리고 오래전 받았던 질문을 따라했어요.

"일수야, 넌 누구니?"

"그런 거 말고, 넌 누구니?"

"네 쓸모는 누가 정하지?"

다리가 저릴 때까지, 일수 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 보았어요. 국민, 시민, 예비군, 어머니의 하나뿐인 아들, 가훈업자, 일석 반점 단골, 문구점 아저씨인 일수 씨는 분명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닌 일수 씨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죠.

(117쪽)

 

작가는 스스로가 명필이 되어 독자에게 묻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 보라고 하고 있는 거다. 

책을 덮으면서 가슴이 찌리릿했다. 이 험하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는 성공한 위인의 이야기나 일류대 입학을 위한 학습전략 따위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서.  아이들이 우리들의 말에 귀를 닫는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할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기껏해야 일수의 엄마처럼 아이들의 출세와 성공과 돈방석을 바라면서 마치 인생의 대단한 비법이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거만을 떨고 있는 건 아닌지.

그냥 그저 물끄러미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넌 누구니?", "그런 거 말고, 넌 누구니?", "너의 쓸모는 누가 정하지?"하고 물어보는 걸로 충분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생생한 볼륨과 질감을 가진 책 속 인물들과의 만남이 무척 신 나고 즐겁다. 역시, 유은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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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마법서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6
장자화 지음, 전수정 옮김 / 보림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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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이런 제목을 가진 책에 끌릴 수 있구나.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했다. 어린이 책들 중에는 판타지를 담고 있는 책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렇지. 바다 마법서라니. 제목부터가 신비감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이 반감되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엔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다. 차라리 다른 책을 빌려올걸, 하고.

 

낯선 중국작가의 이름과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이라는 시리즈 제목에 기대서 조금 시큰둥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7개의 단편과 1개의 중편이 들어있는데 모두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돌고래 그림자>, <유리 고래>, <바다 상상화>, <환초 요정>, <바다로 보낸 편지>, <떠 있는 배>, <밀림의 신기한 배>, <바다 마법서>.  제목들이 적혀진 목차에서부터 비릿한 바다냄새가 날 것 같았다. 이 작가는 바다와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판타지 동화 세계>(이재복 지음, 사계절>라는 책을 보면 '판타지 동화는 대개 주인공이 고립된 목숨이다.'(87쪽)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의 주인공들도 외롭고 상처입은 인물들이다. 당연히 애틋하고 아련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이야기에 감돌고 있다. 생각해보면 정신이 쏙 빠지도록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한 판타지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은 늘 약간의 우수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유명한 해리 포터마저도 얼마나 외롭고 끔찍한 유년기와 아동기를 지나왔던가! 그러니 이 책의 주인공들이 아무리 외롭다한들 다른 판타지 책의 주인공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인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바다 마법서>를 제외하고는 판타지의 주인공들치고 무력한 것 같다. 대부분의 판타지 동화에서 주인공은 판타지 공간 안에서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들을 해결하고 구원을 실현하는 데 비해 이 책의 주인공들은 적극적인 현실 극복보다는 현실 도피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판타지 세계에서 또 다른 혼란에 빠져버리거나.

 

그래서 난 주인공보다는 작가가 다루는 이야기 속 시공간에 더 매력을 느꼈다. <판타지 동화 세계>에서 저자는 판타지 동화에 나타나는 시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

'목숨은 두 가지 시간을 산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흐르는 시간이 있다. 자연의 시간이다. 일정한 규칙 없이 목숨의 내면에 들어 있는 간절한 바람이 무엇인가에 따라 제 맘대로 흐르는 시간이 또 하나 있다. 이 시간에는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라. 마음의 시간이라 해도 좋고, 상상의 시간이라 해도 좋고, 판타지의 시간이라 해도 좋고, 간절한 바람의 시간이라 해도 좋고. 이렇게 목숨은 자연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을 함께 산다.' (<판타지의 동화 세계>,175쪽)

물론 내가 매력을 느낀 것은 주인공이 경험하는 마음의 시간이며 판타지의 공간이다.  하지만 '마음의 시간'이라든가 '판타지의 공간'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핀다 하더라도 안개에 싸인 듯 그 윤곽을 드러내지 않고, 그마저도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는 것이 마음의 시간이자 판타지의 공간이 아닐까. 게다가 그 시공간은 개인적이고 중의적이며 해석이 모호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 작가는 그런 모호함을 참 잘 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이 환상으로, 환상이 현실로 변하는 그 경계에서 긴장하게 만든다.

 

작가가 이 책에서 고집하고 있는 '바다'라는 배경도 마음이 쓰였다. 생각해보면 바다는 마지막 남은 미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지'라는 것,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의미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바다는 위안을 얻는 고향이자 생명의 근원지이기도 하고, 끝없는 탐험과 모험의 대상이며, 불확실한 미래라고도 볼 수 있는 변화무쌍한 공간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이 바다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굉장히 큰 힘이 느껴진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시간 상자>를 읽었을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물음표 하나를 남기는 미스테리 환상동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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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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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서영재라는 젊고 발랄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책 분석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내 거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뽀개질 것 같은데. 다른 사람 작품은 오락이고 휴식이에요. 고통은 작가가 쓰면서 충분히 받았을 테니까 나는 즐기는 거죠. 시간과 돈을 투자한 독자의 위엄입니다. 하하하” (35쪽)

생각해보면 정말 즐기면 그 뿐인데 나는 왜 또 꾸역꾸역 리뷰를 쓰겠다고 이러고 있는 걸까.

나는 이 곳을 출판물 가락시장이라고 부른다. 글쟁이들이 농사짓듯 써낸 많은 원고들이 이곳에서 책으로 다듬어져 전국으로 유통된다. 이제 책의 운명은 독자의 몫이다. 날로 먹든 가공해 먹든, 삼으로 죽을 써서 개를 주든, 파뿌리를 구워 임금님 상에 올리든, 작가는 그것에 토를 달 수 없다. (63쪽)

그러니까 내가 이 밤에 컴을 켜고 책상머리에 앉아 이러고 있는 건 책을 요리해 먹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

 

『완득이』로 처음 만났던 김려령이라는 작가가 19금 성인 소설을 썼다는 말이 들렸다. 김려령 작가가 쓴 책이라면 첫 책 『완득이』에 대한 강한 인상이 남아서인지 기대감을 갖고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인데 지금까지『완득이』만한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그래서일까.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이라면 완득이만큼 강한 캐릭터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훅 밀려오는 감동이라든가 가슴 속에서 한동안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뭔지 모를 단단한 알맹이 하나를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어린이나 청소년 책을 비하해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어린이나 청소년 대상의 책들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제약이 있을 테니까, 다 큰 성인을 상대로 이야기를 한다면 작가 입장에선 더 자유롭게 막힘없이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섣부른 짐작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것 같다.

 

마흔여섯 살의 미남 작가 정수현은 삶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불행한 사람이다. 삶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제대로 끼워져야 할 단추는 바로 가족일 터. 따뜻하고 다정하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난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고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 비록 살아가는 날들 내내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유년의 행복한 기억이란 얼마나 값진 것일까. 불행하게도 정수현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다. 책에서는 정수현을 개천에서 난 용으로 표현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나온 곳은 개천이 아니라 수렁이나 늪인 것 같다. 빠져나오려고 기를 써보지만 결국은 붙잡히고 마는. 태어났더니 난 이미 살갗 밑에 불행이라는 진피가 하나 더 끼워져 있더라, 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도저히 벗겨낼 수 없는 불행이다.

어머니는 아내가 보통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 정신 똑바로 차려. 여자는 골라도 어머니는 못 고른다고 했어. 발에 채는 게 여자라도 어머니는 하나라고! ......어머니, 내가 고른 사람도 아닌데 평생 버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머니인 건 어떠세요? 발에 채는 여자는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지면 되는데, 발에 스치기도 싫은 여자가 어머니라고 딱 붙어 있는 건요? 내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까지 어머니일 당신, 숨이 막힙니다. (51)

숨막히는 어머니도 그랬지만 갈비뼈가 부러지고 고막이 터질 정도로 자신을 두들겨 패는 형이나 그 형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아버지도 수현의 잘못 끼워진 첫단추였다. 더 불행한 건, 다시 고쳐 끼울 수 없는 첫단추라는 거다.

 

수현의 아내는 모래바람 몰아치는 사막 같이 황량하고, 남극의 겨울처럼 차갑다. 이 여자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레 이리 꼬이고 가시가 돋았을까, 궁금했지만 끝끝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나름의 아프고 고달픈 상처가 있었겠구나 짐작할 뿐. 그래도 용기내어 수현의 사랑을 얻고자 했던 것 같은데, 캄캄한 밤 차갑게 내리는 '습설'같은 삶을 살아온 수현에게 아내는 또 하나의 습설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집에는 늘 이길 원하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의 첫 자살시도를 막은 건 그런 죽음이 곁에서 벌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까다로운 작가에게도 직업적 친절을 보여야 하는 편집자의 자세, 그것으로 아내를 살렸다.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을 안 아내가 끝내 목숨을 버렸다. 많은 사람이 요절한 아내를 애도하고 아내를 잃은 나를 위로한다. 나도 아내를 애도한다. 그러나 사랑은 아니다. 목숨으로 흥정하는 사랑은 죽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다. (64)

 

그렇게 숨막히게 답답하고 눅진하고 무거운 나날을 살아가던 수현 앞에 서영재가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영재라는 인물은 가장 도드라지는 매력을 갖고 있다. 수현에게는 영재가, 아마도 온통 눈앞을 가리며 내리던 습설 속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는 동그란 해님처럼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라 했던 수현에게 영재는 싱싱하고 밝고 따뜻한 삶의 면면을 열어 보여주었던 것이다. 수현이 영재의 집을 찾아갔던 날 보았던 노란 패브릭 커텐처럼.

왜 웃어요, 사람 말하는데. 나야 워낙 개 같으니까, 이 새끼 작업 들어갔구나 하고 마는데, 아시잖아요, 글 쓰는 애들 은근히 순진한 거. 가끔 선배님이 하도 유명하니까, 작가답지 않게 좆나게 예쁘게 생겼으니까, 아 뜨거워, 아 씨, 이 담배 왜 이렇게 짧아.”

주유소에서 받은 물티슈로 영재의 손가락을 감쌌다.

왼손. 검지와 중지 안쪽으로 작고 붉은 반점이 돋았다.

이거 봐, 이거! 막 벌렁벌렁해. 이렇게 해서 꼬신 애들 몇 명이에요? 왜 자꾸 웃어요!”

너 예뻐서.”

예쁘죠, 얼마나 예쁘냐면요, 내가 눈가에 주름만 없애면 십대로 회춘한대서 성형외과에 갔잖아요. 나는 단지! 주름 하나 없애려고 갔는데, 거기 간호사 언니가 환자님은 이마랑 눈이랑 코랑 팔자주름이랑, 그러면서 자꾸 나보고 환자래. 내가 아주 중환자였더라고! .......왜 자꾸 해장국이 술처럼 올라와. 내가 지금 어디 아파서 환자는 돼봤어도, 못생겨서 환자 돼보기는 처음이야. 이거 의료보험 적용해야 해. 타인의 생명에 지장이 있어. 나 보는 순간 안구에 치명적인 피해가 간다고! , 우리 엄마 맨날 골골대더니만 못생긴 병에 걸린 거였어. 가족력이야. 왜 자꾸 웃어요? , 그래, 선배님 얼굴은 건강하다 그거죠? 만수무강하세요. , 손 따가워.” (47쪽)

영재가 쓰는 이 언어의 싱싱함이란. 수현은 이런 영재의 말을 '영재의 목소리와 어투가 결합하면서 발생한 화학반응으로 말의 온도가 올라간다. 영재가 따뜻한 이유다.'(101쪽) 라고 했다. 사랑에 대해서 영재는  '사랑은 잘 놀고 있는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쓰레기통을 살짝 들어주는 거거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헛갈리게 굴지 않는다고. 고무줄 끊는 건 진짜 나쁜 놈도 하잖아. 사랑은 앞뒤 잴 것 없이 명확한 거야.” (117쪽) 라며 수현을 예쁘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표지의 그림이 말하듯, 수현의 삶에 잘못 끼워진 첫번째 단추, 절대로 다시 고쳐 끼울 수 없는 그 첫 단추는 수현을 음산하고 끈끈한 수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수현은 영재와의 사랑이 아프다. '내가 바란 건 오직 하나였다. 나를 그냥 가만히 두는 것'(101쪽)이라고도 하고,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제발 사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103쪽)라고 하면서 견디기 힘든 죄책감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삶은 왜 걸핏하면 어깃장을 놓고 뭐 하나라도 손에 거저 쥐어주는 게 없는 것인지. 첫번째 단추는 운이 없었더라도 두 번째나 세 번째에서 제대로 끼워서 다시 하나씩 하나씩 잘 끼울 수도 있는 걸 텐데 말이다.  너, 영재 사랑해? 그래, 그럼 그동안 네가 잘못한 거 다 용서하고 없던 걸로 해줄 테니까, 이제 착하고 예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더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수현은 영재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디쯤을 계속 분주하게 오간다.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엉켜 있어서 긴장하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 번 더 읽으면 이야기의 깊은 속을 좀 더 잘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끌리는 소설은 솔직히 아니었다. '와, 재미있다'와 '와, 감동적이야' 사이의 어중간한 자리에 붕 떠있는 소설이랄까. 그저, 수현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약간의 고단함과 그 고단함을 이기고도 남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을 뿐이다. 삶을 온통 사랑으로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그릇이 작고 품도 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명하고 명확하고 밝고 따뜻한 무언가가 늘 내 가까이에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나 자신이라면 더 좋고.

그것은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지 않은 모든 만약의 길은 후회와 미련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삶을 지키며 잘 살아내길 바랄 뿐이다. 살아 있는 당신에게 행운이 가닿길.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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