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리 우리 음악 -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세종도서) 상수리 호기심 도서관 9
김명곤 지음, 이인숙 그림 / 상수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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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까지 굿거리장단이니 새마치장단이니 하며 장구채를 두들기며 실기시험을 준비하던 게 내 국악에 대한 지식 전부였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 교양과목으로 ‘국악의 이해’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그때서야 수제천도 듣고 영산회상도 들었다. 그 무렵 한창 ‘슬기둥’같은 현대적인 국악 실내악단이 생겨나면서 한번인가, 국악 공연을 보러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져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단소불기를 독려하는 것 같다. 가끔 음악실기 시험을 본다며 단소를 연습하거나 장단이 흥겨운 국악동요를 부르는 걸 보면 내가 학교 다닐 때에 비해서 국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걸 실감하곤 한다.

하지만 여전히 국악은 우리 귀에서 너무 멀리 있다. 가요와 팝송이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가끔은 우아한 서양고전음악이 끼어들 때도 있지만, 국악은 하루 종일 들리지 않는다. 자주 들어야 익숙해지고, 익숙해져야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국악과의 거리는 왜 이리 좁혀지질 않는지 모르겠다.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고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유봉’역을 맡았던 분이 아이들을 위해 이런 책을 낸 것도 아마 사람들이 국악을 너무 몰라주는 데서 오는 섭섭함과 답답함 같은 것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책 앞에서 좀 미안해지기도 했다.

고대의 ‘굿’으로 시작한 음악의 역사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현대로 흐르면서 각 시대별 대표적인 음악형태와 악기, 축제 등을 망라한다. 음악이라고는 하지만 신라의 향가나 고려의 향악(고려가요), 조선의 판소리처럼 국문학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조선시대의 세종대왕이 대규모의 음악 정책을 실시하면서 ‘정간보’같은 정확한 악보 표기법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가사는 전해질지언정 그 음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이 노래의 가사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에 대한 설명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는데, 판소리의 3요소와 판소리의 구성, 서편제와 동편제의 차이, 판소리 12마당에 대한 설명과 함께 명창들의 계보와 쇠락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별부록으로 책 뒷면에 붙어 있는 CD를 틀어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국악을 집중해서 들어보리라 결심하고 틀었는데, 아쉽게도 곡들의 대부분이 중간에서 뚝, 끊어져 버린다. 책 마지막의 CD에 수록된 곡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12곡 중 4곡만 곡의 일부가 실린 것으로 되어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판소리 사랑가도 중간에 뚝 잘라지고 만다. 일부만 실리더라도 너무 표 나지 않게 적당한 곳에서 슬쩍 끊겨도 될 법한데, 판소리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다가 가사 중간에 뭉툭 잘려나가 버린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일러스트에만 의존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악기라든가 정간보라든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유물이라는 경북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등등은 실제 사진 자료로 볼 수 있다면 더 의미가 깊었을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이 책은 쉽고도 재미있게 우리 음악사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란색 박스 안에 들어 있는 설명들도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우리 소리와 우리 음악을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주 듣고 익숙해지는 게 우선일 터.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 CD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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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를 누가 처음 발견했을까>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아메리카를 누가 처음 발견했을까?
러셀 프리드먼 지음, 강미경 옮김 / 두레아이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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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누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하고 물으면 눈꼽만큼의 의심도 없이 “콜럼버스!”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던 나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이 인도인 줄 알았다는 설명을 곁들여 가며 아이들 앞에서 잘난 척을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작가는 되묻는다. “정말 콜럼버스가 처음일까?”라고.
그래,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다. 특히 남미 페루 등지의 원주민들을 보면 우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으니까. 검은 머리에다 서구인들의 얼굴에 비해 좀 평면적이다 싶은 얼굴이어서 어쩐지 동양적인 분위기가 느껴졌었다. 이상하단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진 않았었다.

물론 콜럼버스가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이 책에서 인용한 콜럼버스의 말에 의하면 `균형 잡힌 몸과 선이 매우 고운 얼굴 등 아주 튼튼해 보이‘고 ’다들 키가 큰데 다리가 하나같이 쭉쭉 뻗었고 배가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쿠바와 히스파니(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아우르는 섬)에서는 ’이곳에 한 번 들른 사람은 절대 떠나고픈 마음이 들게 하지 않을‘ 곳이며 그 곳에 살고 있는 타이노 족은 ’다정다감하고, 욕심이 없으며,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세상에서 가장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 늘 미소를 짓‘는다고 하니 원주민들은 꽤나 풍요롭고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처참한 불행과 멸망을 돌려주었을 뿐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했다고 우리가 믿게 된 것은 어쩌면 그 발견의 결과가 너무나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71년 더 앞선 1421년에 정화제독이 이끄는 중국의 막강한 보선 함대가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 아메리카까지 갔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은 영국 해군 잠수함 함장 출신인 개빈 멘지스라는 사람으로 그가 근거로 내세우는 증거들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회의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가 인용하는 난파선과 유물 일부는 정말 중국인이 남긴 흔적으로 중국의 해상 여행객들이 소규모로 이따금 아메리카 해안에 상륙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보선 함대의 항해기록이 불태워져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기록이 남아있다면  중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 했는지를 알 수 있을 테고, 서구 열강이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식민지화 했던 것과 비교해 볼 기회도 생겼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북유럽에 내려오는 바이킹 무용담에서 시작된다.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빈란드 무용담’에 의하면 레이프 에릭손이라는 노르웨이 농부의 아들이 정착학 새로운 땅을 찾아 항해에 올랐다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나 지금의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남단 랑스오메도 지역에 정착촌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들이 원주민들과 어떻게 접촉했는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원주민들과 교역이 있었으며 그 와중에 오해가 생겨 폭력사태가 뒤따랐고 이 때문에 레이프의 동생이 죽었다는 내용이 무용담에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원주민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여겨 포기하고 그린란드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랑스오메도 지역에서 고고학자 앤 스타인 잉스타드와 그녀의 남편 헬게 잉스타드에 의해 정착촌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중국의 보선이 아메리카에 닿았다는 설보다는 증거가 더 확실해 보인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듣고도 채워지지 않는 의문은 이어진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없었을까, 하는. 작가는 약 13,5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클로비스 야영지와 약 1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피츠버그 근처의 메도크로프트 유적지 등등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또 유전학자들은 최초의 발견자, 그러니까 최초의 이주민을 2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 사이로 보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각 대륙의 최초의 발견자를 찾는 것처럼 까마득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인류의 조상이라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발견자를 찾아야 할 것이고, 그 최초의 발견자를 찾는다고 해도 그 발견자는 또 어디서 왔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인류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되고 만다. 일설에 따르면 인류의 시작이 60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기원한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외계인을 기원에 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쓴 작가의 의도는 발견의 가장 처음을 찾자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바늘 끝만큼의 의심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가르치는대로 그냥 꿀꺽 삼켜서 믿어버리는 우리의 단순하고 경직된 사고체계를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유연한 체계로 바꿔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제 누군가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이라고 묻는다면 ‘콜럼버스!’라고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가장 늦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그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은 이미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다양한 그림과 사진, 지도가 있어 읽기가 더욱 즐거웠다. 그러나 사진이나 그림을 설명하는 독특한 글자체가 잘 읽히질 않았다. 본문이 시작되는 맨 앞장의 오른쪽 하단의 글씨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좀 더 번역이 매끄러웠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특히 ‘마지막 빈란드 항해는 레이프의 상처한 이복 여동생 구드리드와 결혼한 이아슬란드 상인 토르핀 칼세프니가 이끌었다’(66쪽)라는 문장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껄끄러워서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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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 속 우리 얼굴>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옛 그림 속 우리 얼굴 - 심홍 선생님 따라 인물화 여행
이소영 / 낮은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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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예쁘장한 이층집이 좋았는데 지금은 푸근하고 아늑한 한옥에 끌리는 것은 아마 나이 탓일 게다. 우리의 옛 그림이 좋아지는 것도 나이에 따른 변화일까. 좋아졌다고 해서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옛 그림 속에서 예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정취라든가 편안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을 받고 표지의 ‘황현상’을 마주했다. 비교적 근대에 그려진 그림인데 피부의 결이며 눈가의 잔주름, 약간 사시인 눈동자, 그리고 눈썹 한 올까지 무척 세밀했다. 재작년이던가. 덕수궁미술관에서 비엔나 미술관전이 열렸을 때, 발타자르 데너의 ‘늙은 여인’이라는 작품을 보았을 때에도 극사실주의적 묘사에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극사실주의적 묘사를 통해 드러난 인물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해서 이명기의 <채제공>초상 등 거의 모든 우리의 전통 초상화에서 인물들의 뚜렷한 분위기가 흘러나온다.  경직된 부동자세의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그 앞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으흠.”하는 헛기침을 시작으로 내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 건, 그림 속 인물이 이국인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얼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초상화를 통해서만 우리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좀 더 다양한 그림을 통해 우리의 얼굴을 느끼게 한다. 신석기 시대의 <얼굴 모양 조가비>에서 시작한 얼굴은 고구려 무용총의 <접객도>를 거쳐 조선시대의 전통초상화들을 살피다가 미인도 등을 통해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풍속화 속의 인물들의 표정과 속마음을 살피기도 한다.

이야기 하듯 ‘~어요’체로 쉽게 풀어쓴 글이 부드럽고, 아래 사진처럼 그림 속 인물에 대한 설명글마다 작은 원모양으로 인물 그림을 따 놓아 아이들이 그림 속에서 그 인물을 찾아보기 쉽게 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자화상 그리기’로 아이들이 자기 얼굴을 그려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왼쪽 면에는 얼굴형, 눈, 코, 입, 귀 등등의 예가 각각 나오고 오른쪽 면의 청동거울 모양 안에 자기 얼굴을 관찰하며 그려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엔 빈 종이와 화선지가 붙어 있어서 직접 먹선을 그리고 채색을 해서 완성해 보도록 이끈다. 책 중간중간 <김유 초상> 속 호랑이 가죽의 가려진 얼굴 부분을 그려보라고 하거나, 김홍도의 풍속화들 속에서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을 찾아보라거나, 옛 그림 속 우리 옷과 쓰개를 소개하는 것도 아이들의 흥미를 돋울 것 같다.




이 책이 좋은 것은 단순히 우리의 전통회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들을 통해 우리의 옛 그림이 오늘의 그림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자화상 그리기’를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얼굴과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옛 그림들과 마주하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낄 때마다 어릴 때 우리 옛 그림이나 도자기 등의 유물을 좀 더 자주 접하고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곤 했다. 미술교과서마저도 서양미술과 그 기법에 대한 소개로 가득했던 것이 기억나서 아이들에게 전통 예술에 대한 길라잡이 역할을 해줄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래서 적어도 아이들이 서양미술보다 우리 옛 그림을 더 낯설어 하며 자라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지나치게 서구화된 미의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옛 그림 속 그 얼굴이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우리의 얼굴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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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7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9-10-28 07:40   좋아요 0 | URL
정말 나중에 읽어보면 꼬인 문장도 보이고, 오타도 보이고...
읽어주시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꾸벅~
 
숫자로 보는 세상 1 - 나의 우주 숫자로 보는 세상 시리즈 1
조대연 글, 강무선 그림, 고의관 감수 / 녹색문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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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유난히 수학을 어려워했던 사람은 ‘숫자’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숫자로 우주를 보잔다. 분명히 적응이 쉽지 않은 단위의 수가 나올 거라는 짐작은 했다.

차례를 살펴보니 첫 장의 제목이 ‘10의 26제곱’ 세상의 끝이다. 다행히 다음 장으로 넘어갈수록 단위는 점점 줄어서 맨 마지막엔 ‘10의 7제곱’쯤으로 마무리 된다. 내가 감당하고 적응할 수 있는 수의 범위를 넘어서서 그냥 멍~한 상태로 그 숫자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냥 무지무지하게 넓고 어마어마하게 무겁고 엄청나게 멀구나, 쯤으로 모든 숫자가 두루뭉술하게 뭉개지고 그 질량과 질감을 한꺼번에 상실하고 만다.

어차피 ‘우주’라는 것이 나에겐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미지’의 세계였으니 숫자를 들이대던 세상에서 제일 성능 좋은 천체망원경을 들이대던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작가가 “자연과학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낯설 뿐입니다.”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다행히도 이 책에선 숫자뿐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빗댄 크기 비교라든가, 설명을 돕는 일러스트들이 있어 이해를 돕는다.

이 그림은 태양계 행성들과 태양을 비롯한 여러 별들의 크기를 비교하는 그림이다. 아이들과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하루살이들이구나...”했더니 우리큰딸이 “하루살이는, 먼지야, 먼지.”한다. 이렇게 거대한 세상과 마주하면 갑자기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가끔 뉴스나 신문에서 들리던 ‘초신성 폭발’의 의미도 여기서 확인했다. 아무 별이나 펑! 하고 터지지는 않는다는 것, 적어도 태양보다는 크고 무거워야 한다는 것, 폭발하고 나면 자기 중력에 이끌려 작게 쭈그러들고, 중성자별이 되거나 블랙홀이 되고 만다는 것. 흠, 그러니까 지구가 폭발할 위험은 없다는 거다. 그보다 더 큰 위험은 46억 살인 태양이 55억 살 쯤이 되면 지금보다 10% 더 뜨거워져서 땅위의 생명체가 거의 멸종할 거라는 거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하늘을 찌르는 인류의 오만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할 거라는 것.

이 책에 나오는 가장 큰 수는 ‘구골’ 이다.  구골은 1뒤에 0이 100개 붙는 수인데 블랙홀이 서서히 증발하여 사라지는데 걸리는 시간이란다. ‘구골’의 시간 앞에서 난 묵묵해지고 만다. 구골의 시간 속에 티끌처럼 끼어든 나의 시간들이 한없이 사랑스러워진다. 그 티끌같은 시간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너무나 예뻐 보인다.

아무래도 우주처럼 낯설고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은 접하고 살아야 할까 보다. 과학책을 읽었는데, 우주보다는 나의 보잘것없음이 더 잘 보인다. 구골의 시간 속에서 유일무이한 보잘것없음. 그게 나다. 우리다...

아이들은 이 책을 나처럼 읽지는 않을 것이다. 싱싱하게 펄떡이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볼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는 아이들을 꿈으로 인도할 것이고 새롭게 알아가는 세상은 아이들을 지적탐구의 재미에 빠뜨리지 않을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책 끝에 ‘찾아보기’가 없다는 것이다. 비교적 잘 정리된 차례가 있고 ‘중력’같은 낱말은 책 여기저기에 산재되어 있어서 ‘찾아보기’에 올린다고 해도 너무 광범위해지겠지만, 그래도 ‘중성자별’이나 ‘적색왜성’같은 낱말 등등은 나중에 찾아보려면 책 전체를 뒤져야 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우주에 관한 여러 책들을 꺼내어 한 가지 주제로 찾아야할 일이 생길 경우에도 책 뒷부분에 ‘찾아보기’가 있는 편이 훨씬 일하기에 간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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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99%를 만들어낸 1% 가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놀라운 99%를 만들어 낸 1% 가치 명진 어린이책 10
윤승일 지음, 심인섭 그림 / 명진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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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나는 이 책이 자녀교육서인 줄 알았다. 에디슨이 했다는 “천재는 1%의 영감..” 어쩌구 하는 말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목을 보면서 한 치의 여유도 없이 1%마저도 남김없이 쏟아 붓는 훈련을 받아야 하나보다, 뭐 이런 느낌을 받았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한 마리 양을 가진 이웃의 양을 뺏는다는, 성서에 담긴 탐욕에 대한 경구는 왜 떠오르는지... 에디슨과 이 책 제목을 연결 짓는다면 99%는 피땀을 쏟아가며 노력으로 메워야 하고 1%는 또 죽어라고 영감을 다듬기 위해 훈련받아야 하는, 지친 어린 영혼들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100%가 되면 도대체 뭐가 된다는 거야? 괴물?’하며 공연히 책을 노려보기도 했다.

그래도 어디 읽어나 보자, 그따위 자녀교육서라면 서평에 잔뜩 흉을 봐줄 테다, 하는 꼬인 심사로 책을 펼쳤는데, 내 예상이 빗나갔다. 천만다행이다.

첫장에 김순권 박사의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무슨 씨앗일까』(박효남등저/유준재그림/샘터)처럼 동시대의 소위 위인급 인사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보니 숙제를 잘 해서 유명한 음료회사를 혼쭐내준 안나 데바타산과 제니 수오처럼 평범한 두 소녀라든가, 빨간 클립 하나로 이층집을 마련한 엉뚱한 청년 카일, 파키스탄의 카펫공장에서 탈출해서 노예처럼 일하는 어린이들의 비참함을 세계에 알리다가 암살당한 12세 소년 이크발 마시흐, 초콜릿 가격이 대폭 인상하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초콜릿 값을 내려달라고 시위한 캐나다의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인슈타인, 오프라 윈프리, 헬렌 권, 한비야, 리처드 파인만 등처럼 유명인사의 이야기와 나란히 놓여있었다. 심지어 불량품으로 만들어져 무려 5년간 서랍 속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포스트잇 접착제와 지나치게 번성하여 목화 농사를 망치게 한 덕분에 한 마을을 부자 마을로 만든 목화씨 바구미라는 벌레까지 그 가치를 100% 인정받는다.

이 책이 좋은 건,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1%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 있는 1%의 작은 가치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꿈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 1%의 가치도 죽어라 노력하고 다듬어서 내 것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뉴질랜드의 두 소녀의 집요함, 빨간 클립의 카일의 엉뚱함, 김순권 박사의 작은 눈, 헬렌 권과 아사누마 도시오의 꾸준함, 오프라 윈프리의 친구가 된 세 권의 책들처럼 지금 내 안에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이고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글쓴이가 머리말에서 제목에 썼던 “작고 볼품없는 것들의 힘 센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나도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지 않을까. 초등 저학년 아이가 있다면 잠자리에서 한 챕터씩 읽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고학년 아이라면 스스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저녁을 먹으면서 중학생 아들 녀석에게 빨간 클립의 카일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무척 신기해했다. 그러더니 밤에 이 책을 슬며시 빼들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에겐 노력에 앞서 꿈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꿈은 제쳐두고 노력하라고 다그치기만 한다. 이 책은 꿈과 노력을 모두 이야기하면서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억지를 부리거나 엉뚱한 짓하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라고 재촉하지 않아 좋았다. 그래, 세상은 우리가 앞만 보고 빨리 달린다고 바뀌는 게 아니라 무슨 꿈을 꾸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니까, 내 안에 있는 작은 1%의 가치에서부터 꿈이 시작되고,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의 인생이 즐거워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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