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요 선생님 - 남호섭 동시집
남호섭 지음, 이윤엽 그림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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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그냥 이렇게 좀 더 따뜻해질 수도 있는데 말이야.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호빵처럼 서로에게 살갑게 다가갈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뭐가 그리 어렵고 복잡한 걸까.  찬 바람 쌩쌩 부는 겨울날 발이 시릴 때는 능청거리며 창을 넘어 들어와 눕는 햇볕 한 자락에도 실없이 웃으며 기분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 

어제는 산을 올랐어.  정말 오랜만에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들었다니까.  정말정말 아주아주 오랜만에.  내 심장이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난 망아지 같았어.  그동안 늘 조용히 걷기만 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 오랜만에 신나게 뛰니까 정말 살 것 같다고 소리치는 것만 같더라구.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거, 그렇게 복잡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 가끔 자는 아이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기껏해야 귤 하나 크기만 할 작은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가 들려.  얼마나 열심히 쉬지 않고 뛰고 있는지 살아서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감격하게 된다니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며 살아야 하는 건지도 몰라. 들어봐,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 소리를, 들어봐, 내 피가 뜨겁게 돌아가고 있는 소리를, 들어봐, 네 것과 비슷한 내 소리를.... 하면서 말이야.

봐, 여기.  만우절에 선생님들이 “오늘은 쉽니다.”라는 글을 교무실 문에 붙여 놓고 다 도망간 이야기, 스승의 날에 아이들이 싸준 김밥 도시락을 들고 선생님들이 소풍가는 이야기, ‘코끝에 송골송골 땀방울 맺히도록 / 매운데도 우리는 끝까지 먹었습니다. / 바닥을 박박 긁어 먹었습니다. // 서로 바라보며 웃는데 / 이에 고춧가루가 끼여 있었습니다. / 그래도 안 부끄러웠습니다. / 우리는 한 식구가 된 듯 했습니다.’ 라며 한솥밥 먹고 스승과 제자가 하나 되는 시들을 읽고 나면, 그래, 꼭 지금처럼 팍팍하게 살 필요는 없을 텐데,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겠냐구. 

우리 손으로
교실을 지을 수 있다면,
먼 산이 보이는 큰 창에는
하늘을 한가득 담아 두고

반대쪽 창에는 숲을 들어앉히고
새잎 나서 단풍 들 때까지
다 볼 수 있을 텐데.

열어 놓은 창으로
이따금 산새 날아들어
공부하던 것도 까먹고
선생님하고 새 잡아라,
새 잡아라 함께 할 텐데.

바닥은 꼭 온돌로 해야지.
책상 밀쳐놓고 스무 명 둘러앉아
놀다가 공부하다가 놀다가 공부하다가
벌렁벌렁 드러누워
잠잘 수 있게 해야지.

우리 손으로
커튼 만들어 드리우듯
교실 지을 수 있다면.

       우리 교실  -간디학교15 중에서

그 까짓 것, 이런 교실 하나 지을 때 슬쩍 거들어주는 일 쯤 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야야, 온돌 파이프 촘촘히 잘 깔어, 하고 잔소리 좀 하면서 수박 한 통 쓱쓱 썰어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잖아.  점점 몸 쓸 줄 모르고, 마음 쓸 줄도 모르고, 갈수록 머리 쓸 줄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요즘 아이들을 등허리에 땀방울 줄줄 흘러내리도록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교육이라면 교육이지, 뭐. 

- 오늘은 내가 쓴 신데 들어 볼래?
이런 날은 우리가 시의 주인공이 된다.
선생님은 일부러 야단치지 않아도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으면
스스로 잘하리라는 걸 아시는 모양이다. 

               시 읽어 줄까 - 간디학교 16 중에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계신다면 아마도 기적이 일어날 거야.  그런 선생님이라면 ‘내 휴대전화에 제 이름 대신 ’내 여자 친구‘라고 버젓이 새겨 놓고’ 졸업해 떠나버리는 여학생 하나 쯤 있는 거야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니겠어? 

‘벌의 몸무게도/ 무겁다.’고 느낄 만큼 살아있는 것들이 소중하고, 비 오는 날 동무와 우산을 같이 쓰며 ‘내 왼쪽 어깨와 / 동무 오른쪽 어깨가 / 따스하게 서로 만납니다. // 우리 바깥쪽 어깨는 사이좋게 비에 젖고 있습니다.’처럼 서로의 마음 한 조각 나누는 일이 흐뭇하고, ‘고속철이 씽씽 달리는 요즘 / 느릿느릿 달리는 통일호를 타고 / 한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태워 주는 / 작은 역들을 지나면 / 거기 선암사가 있습니다.’라며 느리지만 작은 것도 챙기며 사는 것도 썩 괜찮다는데, 넌 어때?

그렇게 조금 숨통을 풀어놓거나 좀 느리게 걸어보거나,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갑자기 덥석 잡아보거나 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  친구랑 밤새 수다를 떨거나 보온병에 커피를 타가지고 공원에 나가 낯모르는 사람이랑 나눠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과자 한 봉지 사들고 놀이터에 나가서 동네 꼬마들이랑 작은 잔치를 벌이며 놀아보는 것도 좋고... 조금만, 아주 조금씩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답답한 담벼락에 살살 구멍을 내보는 거, 그래서 아주 작은 바람이라도 흘러들게 하는 거, 그거, 그렇게 불가능한 걸까?  그러다가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걸 꿈꾸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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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생각하는 개똥클럽 높새바람 20
수지 모건스턴 지음, 최윤정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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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제목보다는 수지 모건스턴이라는 작가에 이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너무나 유명한 <조커>라든가 <공주는 등이 가려워>,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 등은 물론이고 <공주도 학교에 가야한다>, <우리 선생님 폐하>, <어느 할머니 이야기>, <0에서 10까지 사랑의 편지>, <딸들이 자라서 엄마 된다>, <중학교 1학년> 등을 읽으며 유쾌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라 기쁜 마음으로 책을 펼칠 수 있었다.  수지 모건스턴, 쏙 빠져들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겁게 이어가면서도 할말은 다 하는 작가가 아니던가.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간혹 식당이나 옷가게에 액자처럼 걸려 있는 성경 구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였다.  주인공 자크가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친구와 머리를 맞댄 끝에 만들어낸 개똥 클럽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고 유쾌했기 때문이다.  이 책 <개똥 클럽>은 프랑스인들의 유별난 개 사랑의 이면을 살짝 들추면서 환경문제를 언급하고, 어린 친구들의 기발하고 엉뚱하고 야무지고 발랄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길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개똥’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개똥’, 거리환경을 해치는 불결한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보면 그만이지만, “개를 교육시킨다는 건 자기 자신을 교육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주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의식하는 것이며 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의식하는 거”(p.47)라는 자크의 할머니 말씀대로라면 ‘개똥’은 곧 우리의 버려진 양심과 책임감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심심함이 클럽 결성의 원동력이었지만 개똥문제를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며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행동으로 직접 부딪치며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고 깨달아가는 아이들의 좌충우돌하는 깜찍 발랄한 모습들이 부럽기도 했다. 특히 개똥 문제로 자크와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던 뤼씨가 자기 개를 사고로 잃고 슬픔에 빠지자 자크가 위로하고 다독여주는 장면은 어느새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화해할 만큼 성장한 아이들의 멋지고 흐뭇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즐겁다.  “부주의한 어른들을 고발”(p.128)하면서 “어른들에 대해서 지독하게 실망”(p.128)했다는 아이들의 발언에야 구차한 변명이라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쩌면 그게 또 보기 싫고 냄새나는 개똥 하나를 보태는 일인 것 같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이제 예순을 넘겼다는 수지 모건스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이제 소위 말하는 ‘감각’을 잃을만한 나이인 것 같은데도 여전히 건재함을 느끼게 한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단다. 똑똑하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과 그 상황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전부 다 이해하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되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것까지 제대로 다 해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다 ‘꿈’일 뿐이야.”(p.126)같이 다분히 교훈적이고 잔소리스러운 말을 티 나지 않게 슬쩍 이야기 속에 끼워 넣을 줄 아는 재주를 가졌고, 부유한 집안 아들인 티에리를 두고 “그렇지만 애들이 걔를 안 좋아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게 아니고 걔한테서 보이는 우월감 때문이다.  걔는 돈과 물질적인 것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p.23)라며 소비를 과시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속내를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살짝 꼬집어주는 능력도 지녔다.

그러고 보니 이 얇은 책 속에서 ‘개똥’이라는 글감 하나 가지고 환경, 양심, 책임감,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에 대한 이해와 포용, 현대인의 소비 과시, ‘꿈’을 이루기 위한 집요한 노력과 ‘똑똑하다’라는 말의 의미까지 참 많은 문제와 가치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수지 모건스턴의 글들은 대부분 말끔하게 정돈된 세련되고 깨끗한 방보다는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산만한 방을 닮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온갖 잡동사니로 어질러진 것 같은 그 방에서 구석구석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내고 그 방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방주인의 너그럽고 푸근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에 나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 느낌이 좋아서 수지 모건스턴의 책을 만나면 반갑고 자꾸 다시 찾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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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공주 힘찬문고 35
조지 맥도널드 지음, 김무연 그림, 이수영 옮김 / 우리교육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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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들은 모두 하나같이 완벽한 모습들이다.  재투성이거나 100년 동안 잠을 자더라도, 그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마음씨도 고울 뿐 아니라 역경 앞에서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하늘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그 인내와 착한 마음, 완벽한 미모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들은 백마를 타며 등장하는 멋진 왕자님을 만나 행복한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는 게 주된 줄거리다.  외적인 상황이 그녀들에게 고난과 역경을 가져오지만, 그 역경과 고난이라는 게 오히려 그녀들을 더 돋보이게 하지 않던가. 그녀들에게는 그저 참고 기다리면 행복은 굴러들어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그녀들은 현대여성의 모델로는 기준미달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해서 그녀들이 만들어낸 온갖 신드롬과 콤플렉스들을 생각하면 속았다는 불쾌함과 함께 아직도 이 사회 속에 건재하고 있는 공주에 대한 환상과 고정관념들에 한숨이 새어나오기도 한다. 

여기 또 하나의 공주 이야기가 있다.  <가벼운 공주>라는 독특한 제목이 <종이봉지 공주>만큼이나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내가 공주 까부수기에 은근히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조지 맥도널드다.  지금 중3인 큰딸이 초등학교 2,3학년 때쯤 이 작가가 쓴 <공주와 고블린>이란 책을 무척 좋아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과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이 좋아하는 작가였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공주와 고블린>이라는 책에서도 ‘아이린’이라는 이름의 공주가 등장하는데 ‘슈렉’의 피오나 공주처럼 파격적인 외모를 갖추지는 못한 아름다운 공주지만, 모험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하면서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벼운 공주>는 <공주와 고블린>에 등장하는 아이린보다 훨씬 더 독특하다.  고모인 마켐노이트 공주(사실은 사악한 마녀)의 저주 때문에 무게를 잃어버린 공주는 단순히 몸무게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무게를 모두 잃게 된다. 바로 이 ‘무게’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상상력이 이 책의 매력인 것 같다.  무게를 잃었기 때문에 공중을 둥둥 날아다니는 공주는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정서적 공감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불가능한 공주는 아이러니하게도 한없이 가벼운 자기 세계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세계를 확장하는 일 자체가 고모의 저주로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공주에게 가장 좋은 일은 사랑에 빠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게가 없는 공주가 무엇엔가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라고.  이런 공주가 자기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하고 있는 왕자의 노래를 듣고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단순한 문장은 가벼운 공주가 타인과의 진지한 관계 맺기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탄이고 이는 곧 그녀의 가벼운 세계에 금이 가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공주는 호수에 빠져 죽을 뻔한 왕자를 구해내고 생전처음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무게를 되찾는다.  작가는 ‘마침내 그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공주가 두 발로 서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마침내 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무게를 찾고 내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그 말이 어쩐지 가슴에 와 박혔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너무나 가벼운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함께 겪어가야 할 일들을, 너와 내가 함께 따뜻한 관계를 일구어야 가야 하는 일들을 아직도 충분히 잘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너무나 가벼운 사람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에 <가벼운 공주>와 함께 <거인의 심장>이라는 동화가 한 편 더 들어있다. 트릭시위와 버피보브라는 남매가 우연히 거인의 나라로 들어갔다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못된 거인 선더섬프를 물리친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해를 맞이하러 가기 위해 가족을 돌보지 않는 종달새를 보고 부르는 아이들의 노래가 아름답고, 거인 선더섬프가 아주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고는 그 죄책감을 씻기 위해 일요일에 희고 긴 양말을 신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이야기 마지막에 트릭시위와 버피보브는 거인의 심장을 쥐고 위협하면서 선더섬프에게 어린아이를 잡아먹지 않고 거인국 국경을 넘어오지 말라는 것과 함께 ‘앞으로 다시는 평생토록 일요일에 흰 긴 양말을 신지 말라’고 요구한다.  자신의 과오를 우스꽝스러운 방법으로 합리화하고 위로하는 우리 모습에 대한 풍자다.  일주일 내내 죄를 짓고는 주일에 교회에 가니까 자기는 착한 사람이고 구원받을 것이라 떠드는 사람과 선더섬프의 모습이 뭐가 다를까.  우리는 모두 거인 선더섬프의 희고 긴 양말을 가지고 사는 셈이 아닐까. 

1800년대를 산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당시로서는 꽤 새롭고 신선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나도 뭔가 고전적인 분위기이면서도 새롭고 참신한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재투성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손톱 밑이 까맣지도 않을 뿐 아니라 희고 매끈한 손을 유지한 신데렐라나 100년 동안 잠을 자고도 왕자님의 입맞춤 한 방에 침 흘린 자국이나 눈꼽 하나 달지 않고 냉큼 깨어나는 미녀보다는 훨씬 매력적이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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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풀 도감 (양장) - 우리 땅에 사는 흔한 풀 100종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10
김창석 글, 박신영 외 그림, 강병화 외 감수 / 보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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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참 보리답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이 많이 들고, 공이 많이 드는 만큼 책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이나 비용도 많이 들었을 텐데, 출판사 이익을 따지자면 이렇게 만들기도 어려운 풀 도감 같은 책 말고 재미있는 창작 그림책이나 아니면 외국의 유명 작가의 그림책 판권을 따와서 출판하는 편이 더 쉬웠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풀 도감을 만들더라도 더 쉽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공을 들여 세밀화를 그려서 분류하고, 설명을 붙이고, 다르게 불리는 이름을 찾아 적어 놓고, 우리 이름으로 찾아보기까지 따로 책 뒷부분에 실어놓고....  무엇보다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봄, 여름이면 화단에 지천으로 돋아나는 풀들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한 번은 큰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명아주’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있었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는 ‘명아주’란 풀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풀이라는데도 말이죠.  그 이후로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여전히 모르는 풀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책 속에서 이름은 모르지만 모습은 낯익은 풀들을 보고 반가웠던 것 같아요.  올 여름에는 화단에 내놓은 에어컨 실외기 앞에 자라난 키 큰 풀들을 뽑아냈었는데요, 풀 도감 책을 보니 그 풀이 바로 명아주였습니다.  큰아이 초등학교 때 명아주를 몰라서 아무 풀이나 뽑아 보냈었는데 말이죠.  알게 된 풀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큰아이 방 베란다 창문을 열면 가득 돋아난 풀이 있는데, 그 풀의 이름은 ‘질경이’더군요.  질경이는 놀이터 나무 밑 빈터에도 많이 돋아있는데, 볼 때마다 무슨 풀인데 이렇게 많이 무리지어 돋았을까 하면서도 그냥 지나쳤었거든요.  또 우리 집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주 작은 하늘색 꽃이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아주 작은 꽃이죠.  특히나 큰딸이 봄에 그 꽃을 보면 참 반가워하는데요, 그 꽃 이름이 ‘꽃마리’였네요.  어릴 적 친구들과 우산을 만들며 놀던 풀의 이름도 이제야 확인했습니다.  ‘바랭이’라는 풀인데, 강아지풀만큼이나 흔하게 보던 풀이었거든요.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가르쳐주셨던 ‘꿀풀’과 ‘엉겅퀴’, 결혼하고 시댁어른들과 여행을 갔을 때 시어머님이 가르쳐주신 ‘아기똥풀’, 얼마 전 산소에 갔다가 만난 ‘달맞이꽃’, 도서관 가는 길에 막내가 나팔꽃이라고 착각했던 ‘메꽃’...  책에 실린 풀들을 보며 제 기억 속의 풀들을 기꺼이 꺼내놓게도 되네요.

그렇게 하나하나 정겹게 풀의 이름과 모습을 읽어가다 보면 가슴 속이 훈훈해집니다.  게다가 풀 하나하나에 적힌 설명글까지 읽다보면 그 하찮아 보이던 풀의 강하고 소중한 생명과 그 착하고 소박한 품성이 느껴져서 공연히 벅차지기까지 합니다.

전 이 책을 읽고 씨앗도 숨을 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생명을 담은 아주 작고 단단한 그릇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씨앗 자체가 숨을 쉬고 있다니 놀랍더군요. 또 광대나물이나 제비꽃 같은 풀에서는 꽃잎을 열지 않는 ‘폐쇄화’를 볼 수도 있는데, 곤충이나 바람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안에서 스스로 꽃가루받이를 하기 위해서랍니다.  풀들도 참 똑똑하고 영리하게 나름대로 어려움을 해쳐나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흔하고 쓸모없는 잡초라고 여기기 쉬운데, 이 책을 보니 이들의 쓰임새가 또 놀랍습니다.  거의 다 약으로 쓰이는 건 기본이구요, 훌륭한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생활도구를 만드는 재료가 되기도 하고, 빈궁할 때 먹거리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강아지풀로 밥을 짓거나 죽을 쑤어 먹고, 그 뿌리를 캐어 기생충 약으로 썼다는 글을 읽고는 강아지풀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도감’이라는 책의 형식에 따르다 보니 좀 딱딱하고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 책을 펼쳐보고는 참 좋은 책이긴 한데 아이들에게 이 책이 먹힐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했죠.  좀 더 재미있어 보이게 편집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일었고요. 그런데 읽기 쉬운 설명글과 ‘풀’이라는 친근한 주제가 도감이 갖는 형식의 딱딱함을 많이 벗겨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중1 아들 녀석이 반겨합니다.  여름방학 과제에 과학탐구보고서를 써가야 하는 게 있는데, 이 책을 참고로 우리 풀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 되겠다고 좋아하네요.  날씨 좋은 날, 아이와 함께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겠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의 화단만 뒤져도 만날 수 있는 풀이 꽤 될 것 같아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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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랑별 때때롱 (양장) 개똥이네 책방 1
권정생 지음, 정승희 그림 / 보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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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이 영면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기신 동화가 바로 ‘랑랑별 때때롱’이다.  병드신 몸으로 집필하시기가 무척 힘드셨을 텐데, 이 책 어디에도 선생님의 고통은 스며있지 않다.  맑고 순수하고 따뜻하고 천진한 아이들의 고운 마음만 한가득 부려놓으셨다.  그게 더 마음이 아파온다. 

소리 내서 말하면 입안에서 방울 소리라도 울려 퍼질 듯한 어감을 가진 제목, ‘랑랑별 때때롱’. 지구별 농촌에서 살고 있는 새달이와 마달이는 어느 여름날 밤에 랑랑별에 살고 있는 때때롱과 매매롱을 만나게 된다.  만난다고는 했지만 사실 처음엔 목소리만 듣고 이야기와 쪽지, 사진만 오가는 사이다.  티격태격 작은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지만 어느 새 정들고 서로가 궁금해지는 친구가 된다.  그러다가 새달이와 마달이는 결국엔 랑랑별에 놀러갈 수 있게 되는데, 랑랑별은 자연과 어울리고 밥상에 반찬 세 가지만 놓으며 소박하게 살아가고 아이들은 모두 고루고루 먹고 열심히 일하고 뛰어놀고 공부는 학교에서만 해도 되는(p.120) 아름다운 별이다.  권정생 선생님이 이상향으로 생각한 곳이 바로 랑랑별인 것 같고 어쩐지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님을 랑랑별에 가면 만나뵐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기 때문인지 책  곳곳에서 어린이와 어린이가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염려가 드러난다. 
“맞아요, 일은요, 사람이 땀 흘리며 열심히 해야 해요.”(p.186)라든가,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살아야 한다.“(p.180), "그래, 그게 정상이야. 열 살이면 아무것도 모른 채 즐겁게 뛰어놀며 살아야 한다고 돌아가신 고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그러셨거든.  그 할아버지는 맞춤 인간이니, 로봇이니, 과학이 너무 앞서 가는 걸 반대하셨어.  사람은 순리대로 태어나서 자라야 한다고.”(p149)와 같은 말씀은 사람의 편의대로 어린이의 삶은 물론이고 자연과 세상을 억지로 부자연스럽게 변형시키려는 인간의 오만을 꾸짖는 것만 같다. 

아름다운 그림자극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정승희 님의 그림은 동화의 맛을 더욱 끌어올려 준다.  하지만 읽으면서 좀 염려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요즘 아이들에게, 특히 도시에 사는 많은 아이들의 공감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눈부시게 발달해가는 과학문명에 대한 경계심, ‘훌륭하게 잘 사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 자연과 생명에 대한 존중, 어른들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아이들의 순수한 본성이 이야기 속에 드러나 있지만 새달이와 마달이의 사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 좀 아쉽다. 

마지막 동화를 남기면서 권정생 선생님은 책 머리말에 동물 복제에 대한 반대 글을 남기셨는데 그 반대의 이유가 권정생 선생님답고 명쾌하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야”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장 근본을 맑게 들여다보시는 분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동화가 “그다지 잘 쓴 동화 같지는 않”아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까지 하셨다.  그런데 솔직히 사과하셔야 할 만큼 재미가 없지는 않다.  특히 뒤쪽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흥미로워지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담뿍 묻어나서 읽는 동안 아주 포근했다.

아이들은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사랑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인지 자기를 예뻐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동화를 쓰신 분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좀 억지스러운 주장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아이들이라면 말투가 좀 어색하다든가 하는 문제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는데, 바로 여기 이 책 속에 권정생 님의 어린이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이 녹아있으니 말이다. 새삼 그 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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