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는 시끄럽다 책읽는 가족 56
정은숙 지음, 남은미 그림 / 푸른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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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나?  아파트 단지 앞 큰 길 건너에 있는 빌딩 1층에 해물 샤브샤브 뷔페가 새로 문을 열었었다.  그 후 한동안은, 막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면 아줌마들 서넛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 샤브샤브 집 맛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곤 했다.  다리 하나 건너면 화려한 강남이 펼쳐지는 동네라서 그런지, ‘근처에 아주 근사하고 맛있는 집 있어.’라고 이야기할 만한 음식점이 동네에 없었던 터라 아줌마들의 수다 재료로 삼기에 딱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막내를 데리고 시장 쪽 마트를 가려고 단지를 나서는데, 어디선가 장송곡이 들려왔다.  샤브샤브 집이 있던 건물 앞에 상복을 입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카세트로 장송곡을 틀어놓고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가로수 사이에 펼쳐 걸어 놓은 플래카드에는 ‘대통령은 뭐하나, 귀신은 뭐하나, OOO 사장 안 잡아가고’, ‘아들아 딸들아 이 원통함을 절대로 잊지 마라.’ 등등의 글귀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써 있었다.  아마 건물주가 세입자들을 등쳐먹은 모양이다.

우리 동네에도 몇 년 전부터 재개발 붐이 불었다.  나야 아파트에 살고 있고, 부동산 투기와는 한참 먼 사람이라 재개발이라고 해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작년인가에 동네 주택의 평당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는 이야기를 동네 아줌마한테 듣고는 무척 놀랐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가게가 부동산인 걸 보면, 한 몫 챙기려는 투기꾼들의 전문적인 ‘작업’도 평당 가격을 끌어올리는데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내가 관심을 기울여 속속들이 살펴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동네도 시시때때로 들썩이고 소란스럽게 덜커덕거리며 부대끼는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동네는 시끄럽다>며 한 집 한 집 짚어가며 소란한 사연을 들려주는 이 책은, 그래서 겉으론 아무리 고상하고 우아한 척 해도 속으론 지지고 볶으며 사는 거라고, 뒤집어 탈탈 털어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살다보면 눈물에 젖을 때도 있고 그 눈물을 웃음바람에 말리는 날도 있다고,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도 없지만 또 그게 인생의 묘미 아니겠냐며 어깨를 다독여주는 맛이 난다.  이 책 덕분에 장보러 나가는 길에서 우리 동네를 새롭게 ‘구경’하는 느낌으로 찬찬히 둘러보는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마치 마을 수호신이라도 되어서 허허 웃으며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는 느낌이랄까. 

동화이니만큼 아이들 시각에서 본 어른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개발이익을 노리는 엄마의 뜻에 따라 다 쓰러져가는 백조연립으로 이사한 진욱이의 눈에는 재건축을 둘러싸고 벌이는 어른들의 다툼이 도무지 불가해하고, 아파트 주인이 꿈이라는 엄마의 장래희망이 아무리 생각해도 시시하기만 하다.  낡고 허름한 백조연립 앞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촬영이 있던 날, 친구 수정이와 미나의 단역 출연 경쟁을 둘러싸고 벌이는 어른들의 수상한 행동과 들끓는 뒷담화가 수정이와 진욱이의 순수함과 좋은 대조를 보이는가 하면 동네 지하철역 옆에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을 두고 아이들 사이에서 생겨난 상대적 빈곤감과 위화감을 극복하려는 호빈이의 눈물겨운 ‘스테이크 대작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아이들의 반장 선거와 어른들의 통장선출을 놓고 ‘밑창 뜷린 신발’과 '떡 돌리기‘라는 창조성이 결여된 천편일률의 방법을 동원한 어른들의 잘못된 경쟁은 아이들에게는 그저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정작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반장 선거는 일종의 이벤트거리일 뿐인데 엄마들이 과도하게 오버하며 극성을 부리는 모습이 희극적이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 제과점의 단팥빵과 어려운 가정환경을 가진 단짝 친구네 붕어빵 사이의 매출과 수입증감의 희비의 쌍곡선 때문에 벌어지는 금옥이와 은재네 이야기는 마음이 짠해진다.  먹고 산다는 게 뭔지, 하며 저절로 한숨이 폭 새어나온다.  세탁소 집 아들 민석이가 세탁소만의 특권으로 오만한 모범생 희준이의 비밀을 알아냈을 때엔 ’거봐, 사람 겉으로 봐서는 모르는 거라니까.‘라고 중얼거리며 둘의 화해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아이들에게 이 책은 모험도 판타지도 어쩌면 희망이나 꿈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평범한 보통 동네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서민의 복닥복닥한 이야기, 그래서 너무 익숙하고 친근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너무 살가워서일까?  장보러 나선 길에 마주치는 아이들, 무더운 여름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쮸쮸바 하나씩을 입에 물고 친구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꼭 이 책 속에 나오는 진욱이나 민석이, 호빈이, 수정이, 미나 같이 느껴진다.  그토록 우리와 참 가까운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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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담은 도자기 숨은 역사 찾기 5
고진숙 지음, 민은정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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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옛집 달항아리>

지난 해 여름에 성북구에 있는 최순우 옛집에 가본 적이 있었다.  참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의 집이었는데, 뒤뜰로 돌아가니 ‘달항아리’라고 부르는 백자가 있었다.  최순우 님은 생전에 그 달항아리에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무척 사랑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본 달항아리는 벌건 대낮에, 그것도 뜨거운 여름 한낮에 밖에 나와 햇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좀 생뚱맞아 보였었다.  그러고 보니 난 도자기를 밝은 하늘 아래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박물관의 좀 어두침침한 전시실 안에서나 아니면 집 안 거실이나 마루, 또는 안방 같은 실내에서나 봐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작은 도자기도 아니고 커다란 백자가, 그것도 어딘지 균형이 맞지 않은 듯 조금은 기우뚱해 보이는 백자가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반사하고 있는 모습은 낯설고 생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우리가 도자기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우리의 생활 안에 도자기의 공간은 격리된 실내였고, 내가 아는 도자기는 나와는 너무 아득한 문화재이거나 고이 모셔둬야 하는 장식물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최순우 님은 도자기를 느끼고 즐기고 어루만지며 사랑할 줄 아는 분이셨던 것이다. 아무튼 최순우 옛집에서 그 달항아리를 본 후로 내가 도자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도자기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어린이 책이라지만 어린이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은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도자기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소멸을 참 잘 엮어냈다. 신라말의 최후의 토기라고 할 수 있는 구림도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고 있는 이 책은 그 후 고려시대에 전남 강진의 진흙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가 호족의 후원을 받고 중국 오월국의 도공까지 모셔다 벽돌가마로 만든 청자를 물리치는 이야기로 도자기에 대한 설명을 본격적으로 풀어간다.  내가 몰랐던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져서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청자에 열광했던 이유, 그리고 그 청자에도 우리가 흔히 아는 비색청자나 상감청자 외에 녹청자, 상형청자, 햇무리굽 청자, 간지명 청자, 진사청자 등과 같은 여러 종류의 청자들이 있었다는 이 책 첫 부분의 글을 읽을 때부터 난 벌써 이 책이 너무 고마워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로 넘어와 귀족과 왕실만을 위한 도자기가 아닌 백성들을 위한 자유로운 느낌의 분청사기가 등장하고 세종이 분청사기를 사랑하고 청화백자의 수입과 제작을 막은 깊은 뜻에서는 ‘역시 세종대왕’이라며 찬탄할 수밖에 없었고, 책에서 인화문, 귀얄문, 덤벙문, 조화, 철화, 빙렬 등의 용어 설명을 읽으며 행복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왕조의 변천과  새로운 지배세력의 등장과 몰락을 지켜보며 이름 없는 도공들의 치밀한 연구와 창조적 열정 속에서 탄생한 도자기들.  이 책에서 알게 된 우리나라 도자기의 역사를 보면 맨 먼저 자기소의 그 이름 없는 도공들의 열정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찬란한 도자기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고종 때 일본인들이 들어와 고종임금에게 “청자를 구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청자요? 그게 뭐지요?”하며 되물었다는 이야기는 비운의 구한말의 역사와 함께 몰락해가는 우리 도자기의 비참한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가슴이 아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제 도자기를 보면 좀 더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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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책 + CD) - 섬진강 아이들이 쓰고 백창우가 만든 노래 보리 어린이 노래마을 2
마암 분교 아이들 시, 백창우 작곡, 김유대 그림 / 보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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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화창하고 따뜻했던 어느 봄 날, 네 살 배기 아이와 함께, 자주 들르곤 하는 어린이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공립도서관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책도 읽고, 싸가지고 간 간식도 나눠 먹을 수 있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라, 늘 그렇지만 그날도 아이는 책보다는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나는 밖을 향해 나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밝고 가벼운 봄의 기운을 흡수하며 넋을 놓고 앉아 있었는데, 도서관을 지키는 선생님 한 분이 카세트에 CD를 얹어 노래를 트시곤  동그랗게 생긴 낮은 책상에 아이들과 엄마 몇몇이 모여 앉아 있는 쪽으로 가서 앉으셨다. 그러고 나서 너 댓살 정도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며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함께 부르는데, 그 노래가 어찌나 정겹고 재미있던지 어느새 나도 쫑긋 귀를 기울이며 듣다가 곁에 다가가 함께 앉았다.  우리 아이도 어느새 노래 소리에 이끌려 와서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따라 부른답시고 노래책을 보며 어설프게 흥얼거리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노래책을 살펴보니 김용택 시인과 함께 공부했던 마암분교 아이들이 1998년에 쓴 시에 백창우님이 곡을 붙인 노래들이었다.  백창우님의 전래동요 CD를 집에 갖고 있는데, 물론 그것도 좋지만 이 노래들처럼 가깝고 정겹고 친근하고 재미있게 듣진 못했던 것 같았다. 

결국 그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주문했다.  한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악보는 더더구나 볼 줄 모르는 네 살 배기 작은딸이 이 CD를 틀면 꼭 노래책을 갖다 펼쳐놓고 지금 어느 노래가 나오는 거냐며 묻는 걸 보면, 아이도 그날 도서관에서 동그랗게 둘러앉아 함께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꽤 좋은가 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베란다 창 밖을 내다보며 “비가 온다, 뚝뚝, 비가 온다, 뚝뚝”하며 노래 부르고, 변기에 올라앉아 쉬하면서 “할 수 없이 싸버렸네~~”하고,  심심해서 같이 놀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지 어떨 땐 갑자기 “내 친구 이름은, 내 친구 이름은~~”을 부르기도 한다. 

마암분교 아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든 순박한 시들이 노랫말이 되어서인지, 아이들 마음에 참 잘 다가가 웃음 짓게 만드는 그런 노래들이다.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어른들도 잊었던 어린 날의 추억 한 조각, 잃어버렸던 동심의 아련한 파편들이 찌든 마음 한 구석에서 반짝이는 걸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릴 적 친구들과 팔방하고 고무줄놀이 하던 먼지 뿌연 운동장이며, 동네 언니가 돌부로 시멘트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들려주는 무서운 옛날이야기를 같은 또래 꼬맹이 친구들과 둘러앉아 듣던 기억하며, 부뚜막에 가마솥 모양이었던(지금은 가스오븐렌지에 예쁜 냄비더라만) 소꿉장을 꺼내어 빨간 벽돌 갈아서 고춧가루라고 하며 놀던 기억,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던 기억, 생전처음 수영장에 놀러가 미끄럼틀 타다가 물에 빠졌던 기억까지 차례로 떠올라 베시시 웃게 만드는 그런 노래들이다.

놀이터에 나가 아이가 탄 그네를 밀어주면서 요즘은 “꽃은 참 예쁘다, 풀꽃도 예쁘다, 이 꽃 저 꽃, 저 꽃 이 꽃,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다보면 놀이터에 놀러 나온 아이들이 다 예뻐 보인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이를 따라 나온 엄마, 할머니들도 예쁘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참 예쁘고 괜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예쁘고 괜찮은 노래들이 마음속까지 흘러들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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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우의 해적들 - 싱가포르 편 세계의 전래동화 (상상박물관) 7
디 테일러 글, 락 키 타이 오두아르 그림, 신은주 옮김 / 상상박물관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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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전래동화 11편이 들어 있는 책이다.  전래동화치고 좀 시시하고 허무한 결말을 보인다는 평이 있어서 미리 각오를 하고 읽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나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싱가포르에 직접 가 본 경험이 없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싱가포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껌을 팔지 않는 나라’, ‘깨끗한 나라’, ‘질서 의식으로 중무장된 나라’, ‘담배꽁초 하나 잘못 버려도 인간성을 의심받고 벌금을 내야 하는 나라’ 등등으로 좀 좋게 말하자면 수준 높은 선진문화 질서의식의 표본이고, 좀 깎아 내리자면 융통성 없는 완전무결 범생이 국가라고나 할까.  잠시 머무르는 여행자들에게야 깨끗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테지만 저 나라 국민들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을 저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법, 규범, 질서 등에 꽁꽁 묶여서 통제받으며 숨 막혀서 어떻게 살아가나 하며 안 해도 될 걱정을 하게 만드는 나라였다. 살다보면 답답하고 울화통 터지는 날도 있어서 그런 날엔 캔맥주 한 잔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빈 캔에 화풀이하듯 힘껏 뻥 차서 요란하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그런 날도 있지 않은가..  가끔은 왕짜증나게 구는 직장 상사 대신 질긴 풍선껌 한통을 모조리 입안에 털어놓고 소리도 요란하게 짝짝 질겅대며 씹어대다가 회사 옥상에 올라가 “에라~이 못된 XX야!!”라는 저속한 말 한 마디와 함께 빌딩 밖으로 날려 보내고 싶은 그런 날도 있고. 

아무튼 싱가포르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자연환경이나 문화보다는 국민들의 신통방통하게 고분고분한 질서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킬킬거리고 웃으며 재미있게 읽게 되었던 것도 이야기 속에서 허튼 짓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이야기 ‘싱가포르 섬은 어떻게 생겨났나’는 깊은 바다 속 왕국의 포악하고 욕심 많은 하이 룽 왕이 내린 바다 밖에서는 수영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바다 위까지 수영을 나갔던 두 인어 시플럼과 시펄이 말뚝망둥어로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분명 바다 밖으로 나가서 수영하지 말라는 명령은 욕심 많은 왕이 자기 혼자 보물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내린 부당한 명령이고, 왕의 성격 또한 포악하고 거짓말쟁이로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어긴 시플럼과 시펄이 오히려 벌을 받는 것으로 나온다.  일반적인 전래동화라면 부당한 금기를 깬 주인공이 어느 정도의 고난을 겪은 후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으로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상큼하리만큼 의외의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강조하듯 법과 명령을 어기면 불행해진다는 교훈을 남기는 것 같다. 

그런 예는 곳곳에서 더 눈에 띄는데 ‘숲의 여왕’에서는 비밀의 정원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발을 들여놓은 리아공주가 그 댓가로 세상에서 제일 큰 꽃이라는 라플레시아(이 꽃의 냄새가 굉장히 지독하다던데)로 변하기도 하고  ‘사라진 아이들’에서는 금지된 숲으로 들어간 딘과 마흐무두라는 두 아이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기도 한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을 이끌고 들어가는 인물도 전혀 없이 그저 금기를 어겼다는 사실 하나로 아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금지된 숲으로 들어가는 용감한 영웅은 더더욱 없다.  싱가포르의 시조설화라고도 할 수 있는 ‘파라메스와라 왕자와 싱가푸라’에서도 제 아무리 싱가푸라의 시조왕이라고 할지라도 문제를 일으키기를 즐기는 왕은 끝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같다.  싱가포르인들의 놀랄 만큼 철저한 준법정신은 바로 이런 전래동화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전래동화들처럼 권선징악이라든가 정직과 지혜에 대한 교훈이 기본적인 밑바탕이 되고 있긴 하지만 싱가포르의 전래동화는 거기에서 살짝 빗겨난 듯한 의외성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앞에서 언급했던 인물들처럼 법과 금기를 어기는 ‘허튼 짓’일랑 하지 말고 성실한 도비(세탁부) 라마누잔이나 부지런하고 선량한 ‘황금 들판의 두 여인’ 완 말리니와 완 엠포크처럼 열심히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더 강하게 읽히는 것도 그런 의외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상상박물관의 전래동화 시리즈라면 그림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데, 이 책의 일러스트도 역시 싱가포르 사람이 그린 것이다. (미국편과 중국편은 우리나라 일러스트 작가가 그림을 맡았다.)  비만체형이라고 할 수 있는 둥글둥글 통통한 인물 그림이 무척 독특하다.  게다가 부드러운 색채와 명암은 싱가포르의 따뜻하고 밝은 햇볕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림 보기도 이야기 읽기도 무척 즐거운 책이었다.

 

*** 오자 발견
124쪽 ‘케르바우 히탐을 뒷짐을 진 채 갑자기 흥미를 보이며 가슴을 내밀고 물었습니다.’
--->  ‘케르바우 히탐은’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어린이들이 읽을 책이니까 더욱 신경 써서  교정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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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동쪽 달의 서쪽 - 노르웨이 편 세계의 전래동화 (상상박물관) 6
아스비에른센과 모에 지음, 카위 닐센 그림, 김대희 옮김 / 상상박물관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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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TV에서 북유럽의 겨울 풍경을 본 적이 있다.  드넓고 울창한 침엽수림을 뒤덮은 광대한 설원은 나의 상상을 뛰어 넘는 신비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래, 저런 자연을 가졌으니까 눈의 여왕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거구나.’하며 감탄했었다.  각 나라의 옛이야기들은 그 나라의 자연과 풍물, 역사와 문화가 녹아있다는 말을 직접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해의 동쪽 달의 서쪽>은 북유럽의 나라 중에서도 노르웨이의 전래동화를 모아놓은 책이다.  핀란드, 스웨덴과 붙어 있는 냉대기후의 나라, 노르웨이.  핀란드가 1년 중 8개월인가가 겨울이라고 했으니 노르웨이도 겨울이 춥고 길기는 핀란드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도 부엉새가 우는 겨울밤 화롯불 앞에 모여앉아 더러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더러는 화롯불 속에 묻어둔 군밤 까먹어가며 도란도란 피어올랐듯이 이 책에 들어 있는 여덟 편의 전래동화도 8개월이나 되는 길고 긴, 게다가 우리나라 겨울이랑은 비교도 되지 않게 무지하게 추운 겨울밤에 탄생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을 덜컹덜컹 흔들고 지나가는 겨울바람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노르웨이의 아이들은 설피를 신고 눈 쌓은 겨울 숲을 지나 자신의 실수로 잃어버린 아름다운 아내를 찾아가는 용감한 왕의 이야기(하얀 눈 왕국의 세 공주)나 북쪽 바람의 등에 업혀 사랑하는 왕자를 찾아가는 소녀 이야기(해의 동쪽 달의 서쪽)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았을까.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심술궂은 동장군 취급을 당하는 북풍이 이 책 속에서는 꽤 멋진 역할을 담당하는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긍정적인 존재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의 노르웨이 판이라고 볼 수 있는 ‘해의 동쪽 달의 서쪽’ 이야기에서는 막내딸이 왕자를 찾을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해주고 있고,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북풍을 찾아간 청년’ 이야기에서도 심술궂기는커녕 밀 석 되의 값을 후하게 치루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난 극복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집안일을 만만하게 생각한 남편’, ‘북풍을 찾아간 청년’, ‘염소 삼형제’ 이야기처럼 해학적이고 소박하며 친근한 이야기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 더욱 좋았던 것 같다.  주인공들이 계속 괴물 같은 인물들과 싸우거나 금기를 깨는 모습에 마음을 졸이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모습에 긴장하고 있던 중간에 만나게 되는 이런 소박한 이야기들은 마치 쉬어가는 페이지처럼 아이들이 잠시 마음을 놓고 감정을 이완시킬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화려하고 섬세한 그림들은 이야기의 맛을 더하고 있다.  팔다리가 모두 늘씬하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화려한 갑옷이나 드레스를 입은 용맹한 왕자와 청년, 공주와 아가씨들의 그림은 이야기와 함께 아이들을 상상의 세계로 끌어들이고도 남을 것 같다. 상상박물관의 전래동화 시리즈는 대부분 각 권마다 그 나라의 색깔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실려 있어 더욱 애정이 간다.  아이들은 각 나라의 전래동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나라에 대한 상상을 펼치겠지만 그림을 보면서도 이야기에 못지않게 상상력을 자극받게 될 것 같다.  그림책이나 동화책 속의 좋은 그림들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 책을 읽다가 두 군데에서 오자를 발견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니만큼 2쇄 때에는 바로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33쪽 ‘그리고 당신이 옷을 빨 수 있는 시혐해 보고 싶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이 그 옷을 빨면 됩니다.’  ---> ‘시험해’

52쪽 “네가 나의 을 날려 버렸을 때 내가 슬퍼했던 만큼 너도 슬퍼하게 될 것이다.”
----> ‘해’로 바꾸어야 함.  별, 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다음 마지막 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에서 달이라고 또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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