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미자 씨 낮은산 작은숲 12
유은실 지음, 장경혜 그림 / 낮은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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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유은실 작가의 새 책 <나도 편식할거야>를 읽게 되었다. 일곱살 막내랑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군더더기 없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글도 좋았고 먹성좋은 1학년 정이의 깜찍한 이야기도 정감있었다.  그렇게 "역시 유은실이야!"하며 읽고 나니 문득 아, 내가 아직 <우리동네 미자씨>를 안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우리 동네 미자 씨>뿐 아니라 <마지막 이벤트>도..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 한 번은 대출중이라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에 성공했다 - 빌렸다.  

돈도 잃고 사랑도 잃어 몸도 마음도 가난하고 외로운 미자 씨의 이야기는 어둡게 흘러가게 놔둔다면 끝도 없이 춥고 음울한 곳으로 흐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의 억척스럽고 궁상맞은 모습을 그리다가 난데없는 희망으로 끝을 맺는 잔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대책없이 밝고 슬프다.  

미자 씨는 '찢어진 모기장도 바꾸지 못하고 햬진 구두를 그냥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 그리고 잔치음식은 갖다주기 전에 찾아가 잔뜩 먹고 하다못해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도 뺏어 먹을 정도로 식탐이 강하다. 가난해서 배고픈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이라고 여기면 간단하겠지만 작가는 이 씩씩하고 밝은 미자 씨 이면의 슬픔을 슬쩍 보여준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죠. 미자 씨는 먹고 싶은 걸 참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돈을 몽땅 잃어버린 다음부터 말이에요.
"오늘도 눈치 없이 먹고 다녔나 보다."
밤이 되면 미자 씨는 하루를 돌아보며 슬픔에 잠기곤 했어요. 어떤 날은 훌쩍훌쩍 울기도 했죠.

 미자 씨의 억척스러운 식탐 뒤엔 잃어버린 것들이 남겨놓은 텅 빈 자리들이 훵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슬픈 것을 슬프지 않게 보여주고 웃고난 다음에 아프게 한다.  

<동태 두 마리>에서 미자 씨는 수요일과 토요일 아침마다 반찬거리를 트럭에 싣고 팔러 오는 부식차 장사가 선물로 준 동태 두 마리를 가지고 '얼큰 시원 동태찌개'를 만든다. 이혼한 부모때문에 큰아빠네 얹혀서 혼자 사는 5학년짜리 성지가 마을회관 컴퓨터로 검색해서 알아다준 레시피를 참고로 해서. 그런데 레시피대로 찌개를 끓일 수가 없다. 레시피에 있는 재료를 다 갖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초대받은 손님 성지는 그 점이 못마땅하다. 도무지 제대로 된 찌개가 될 것 같지가 않아 불만이다.  

"정말 그것만 넣을 거야?" 
"음, 걱정하지 마. 이렇게 해도 돼." 
"맛없잖아."
"아니야. 맛이 있긴 있어. 많지 않아서 그렇지 보통은 돼."
"아, 아줌마 보통은 보통이 아니라니까."
"........"
미자 씨는 마늘을 다지다 말고 성지를 물끄러미 바라봤어요.
"있잖아 성지야, 내 보통이 보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게?"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불행해져."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보통이라고 우기면서 살아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기를 쓰고 우기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불행해지지 않는다. 우리를 보통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것까지만 봐야 한다. 유명한 블로그에서 찾아냈다는 '얼큰 시원 동태찌개 만드는 법'같은 건 아예 눈을 질끈 감고 보지 않아야 한다. 보고도 못 본척 해야 한다. 갖가지 재료가 들어가야 하는'얼큰 시원 동태찌개 만드는 법'을 '보통'이라고 할 수 없듯이 억소리도 모자라게 비싼 집, 차, 옷, 가방, 구두 그리고 기죽이게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늘씬하고 예쁜 사람들이 절대로 보통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화려한 것들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가려진 다음에야 보통인 우리들이 비로소 아름답게 반짝 드러날지도 모른다.   

"칫, 어떤 미친 도둑이 아줌마네 집을 털어" 
성지가 피식 웃었어요.
"너 모르는구나. 캄캄한 데서 언뜻 보면 우리 집도 부잣집으로 보일지 몰라. 옛날에 니네 큰엄마가 그랬거든. 캄캄한 데서 언뜻 보면 나도 되게 예뻐 보인다고." 

모든 것을 밝게 드러내는 곳에서는 우리의 추레함도 적나라하게 드러날 터,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늘 속에 있는 것은 양지의 그러한 횡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외로운 성지는 외로운 미자 씨에게 올 때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가 된다. 치약의 다양한 사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 동태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법을 아는 사람, 동물학대에 대해서 자신있게 주장을 펼치고 여우목도리가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만나서 조금은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걸까.   

"성지야." 
"왜 그러는데."
"나 한 번만 안아 줄래?"
"그러면 들어갈 거야?"
"음."
"여우 목도리 풀어. 그럼 안아 줄게."
미자 씨는 목도리를 풀었어요. 그리고 성지를 꼭 안았지요.
"아, 숨 막혀. 팔에 힘 좀 빼."
성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어요. 사람 품에 안겨 본 게 아주아주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 외로움은 꽉 안아줘야 한다. 자꾸 억지로 쫓아내려하면 더 질기게 붙잡고 늘어질 위험이 있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그 사람이 외로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더 좋겠다), 하다못해 베개를 끌어안고서라도 외로움은 풀어내야 한다. 자기가 '보통'이라고 믿는 외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작가는 '내 안에 미자 씨가 있다.'고 했다.  내 안에도 미자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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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4-14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에도 미자씨가 있어요~~~~~~ 라고 고백하고 싶은 리뷰!

섬사이 2011-04-14 10:37   좋아요 0 | URL
그럼 우리 숨막히게 꽉 안아줘야 하는데.. ^^

다락방 2011-04-1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여동생 읽으라고 줬더니 "미자씨 읽으니까 언니 생각난다" 하더라구요. 제 안에도 미자씨는 있어요.

섬사이 2011-04-14 10:36   좋아요 0 | URL
우린 거의 모두 '보통'으로 외로운가 봐요. ^^

마녀고양이 2011-04-1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래서 오늘 잘 때도, 딸아이의 곰돌이를 꼭 껴안고 잤나 봐요. ^^

섬사이 2011-04-15 13:35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꼬맹이딸을 꼭 안고 자요.
꼬맹이딸이 자라서 제 품을 떠나면...그 땐 저도 곰돌이를.. ^^
 
<똘레랑스 포로젝트 1권, 2권, 8권>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모두를 위한 인권 선언문 - 인권 똘레랑스 프로젝트 8
안드레이 우사체프 지음, 이경아 옮김, 타티야나 코르메르 그림 / 꼬마이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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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똘레랑스 프로젝트 시리즈 세 권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든다.  <빅뱅과 거북이>, <내 가족과 다른 가족들>에 모두 키릴이라는 소년이 등장해서 이 시리즈가 전부 그 소년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나 보다 했는데, 이 책에선 정원 돌보는 일을 하는 초록색 작은이가 주인공이다.  책을 읽을 수록 이 초록색 작은이가 '인권'을 이야기하는 책의 주인공을 맡기에 얼마나 적절한 인물인지 깨닫게 되었다.  

재력이나 권력, 그것도 아니면 다수의 힘이라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초록색 잔디가 덮인 화단에 있으면 눈에 띄지도 않는 초록색 작은이로 살아가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건 뻔한 일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작은이는 어느 날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모두를 위한 인권선언문>이라는 책을 만나고부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자기의 권리를 찾는 일에 용기있게 나서게 된 작은이의 행로를 지켜보는 일은 흐뭇하다.  

인권은 약자를 멸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제대로 피어날 수 없다는 것, 인권이 약자를 포함한 '모두'를 위한 인권으로 바로 서려면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된다.  '인권'에 대해 모르던 사람들이 작은이의 외침을 듣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이 '당신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어요!'하고 칭찬하자 작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변한 것이 별로 없어요. 무슨 권리가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 권리를 싸워서 손에 넣는 것도 중요해요. 게다가 우리나라는 너무 커서 천 년이 지나도 나는 바꿀 수 없을 거예요.  
   

싸우지 않고도 권리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약자들의 권리는 싸움을 벌이고도 쥔 것 없는 맨손으로 싸움을 끝낼 때가 더 많다.  게다가 '듣는 귀'가 사라진 사회는 약자들을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더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내몰기도 한다. 약자의 억울함이 많은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을 터, 우리는 과연 어떤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모두'의 권리에 대해 논의하고 배려할 수 있는 사회를 아이들이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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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 포로젝트 1권, 2권, 8권>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내 가족과 다른 가족들 - 가족 똘레랑스 프로젝트 2
베라 티멘칙 지음, 이경아 옮김, 스베틀라나 필립포바 그림 / 꼬마이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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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계 문화의 다양성과 그에 대한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강조하며 출간된 '똘레랑스 프로젝트 1015'의 두 번째 책이다.  부모가 이혼하여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키릴과 할아버지와 할머니,부모님, 고모, 누나, 남동생 둘로 이루어진 아홉 명의 대가족 속에서 살아가는 다우트가 친구가 되어 오가면서 상반된 가족환경에 대해 서로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기준으로 가족을 만들어가는 키릴네 가족은 혈연을 중심으로 뭉쳤던 전통적인 가족관으로 바라본다면 그런 콩가루 집안이 없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가족관은 동성혼을 비롯한 가족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갖는다.  예를 들자면 키릴의 엄마 마리나는 음악가인 '필'이라는 남자와 사귀고 혼전임신을 한다. 그러고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정도로 '대범'(?)하다. 그런 키릴의 엄마가 동성혼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자 키릴네서 집안일을 봐주는 뉴라할머니가 발끈한다.

   
 

"아니, 애들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아이들이 왜 그런 걸 알아야 해?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그런 것들이 있으면 몽땅 감옥에 처넣었다고!" 
하지만 마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침착하게 대답했어요.
"성경 시대에는 돌로 쳐 죽였고요. 저는 제 아들이 동성애자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비난의 돌을 던지는 것은 어쩌면 타인을 이해하는 것보다 비난하는 게 자기를 방어하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익숙한 삶의 체계들, 그것이 가족이든 국가든 세계관이든간에 익숙해져서 편안해진 체계들을 지키려는 보수적 관념들이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흔들리다가 무너질까봐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그 두려움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까.  

개방적인 키릴네 가족은 각자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한다는 장점이 있다. 한 마디로 아주 쿨하다. 한편 전통적인 가부장적 대가족의 틀 안에 있는 가우트네 가족은 가족의 명예를 중요시하고 연기학교에 가고 싶은 레일라를 간호학교에 보낼만큼 개인의 의견보다 가족의 결정권이 더 우선시된다. 가족간의 결속력은 더 견고해보이고 엄격한 규율과 예절이 가정 내에 자리잡은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키릴 네 엄마가 키릴과 다우트에게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니?"하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물음에 키릴은 "엄마, 제가 생각하는 가족은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라고 대답하고 다우트는 "가족이란 핏줄이 같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한다.  키릴과 가우트의 대답은 각 가정의 가족에 대한 생각과 기준이 확연히 다름을 보여준다.

키릴네와 다우트네 가족을 비교해 볼 수는 있지만 우열을 판가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족이란 어떤 형태로 꾸려졌느냐 보다는 오직 그 내적인 유대감의 밀도와 질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는 키릴네 가족도 다우트네 가족도 나쁘지 않다. 두 가족은 상반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 받는다. 적어도 두려워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 것이다.   

마리나가 키릴의 동생을 낳고 집으로 돌아온 날, 다우트네 가족을 초대해 파티를 연다.  다우트의 부모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눈 대화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다우트네 아빠가 키릴 네 가족을 두고 "이혼한 남편에, 그 남편의 아내에, 또 재혼한 남편에, 전남편, 새 남편의 의붓딸에, 새 딸에 헌 아들에, 쌍둥이까지, 정신은 없지만 얼추 가족이 되었다'며 키릴 네 가족형태를 인정한다. 그러고는 아버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테니 말씀드리지 말라며 아내에게 경고를 하지 키릴 네 엄마는 말한다.

   
  당신은 아버님을 잘 모르세요. 현명한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법이라고요.  
   

근친혼, 동성혼,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다양한 결혼형태들이 나오지만 다문화가정이나 입양가정에 대한 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 현실에서는 다문화가정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책에 나와있지는 않더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니까 두려움보다는 현명함으로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고자 노력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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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 포로젝트 1권, 2권, 8권>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빅뱅과 거북이 - 우주 탄생 똘레랑스 프로젝트 1
아나스타시야 고스쩨바야 지음, 이경아 옮김, 표트르 페레베젠쩨프 그림 / 꼬마이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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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세상의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관용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것을 무조건 미워하고 공격하는 현상을 사회가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취지'로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책이다.  그 첫 권의 제목이 <빅뱅과 거북이>인데 우주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주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작에 대한 궁금증은 고대부터 시작되었을 터.  현대과학으로 밝혀진 빅뱅이론이 성립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이다.  각 나라와 온갖 민족들의 우주탄생신화와 창조기원설들은 민족적 특성을 엿보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지만 그 특유의 상징성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힘에 밀려 점점 옛날 사람들의 엉뚱한 이야기 쯤으로 전락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의 장점은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기원의 비밀 빅뱅과 세계 곳곳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창조설을 같은 무게로 다루었다는 점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빅뱅이 일어나기 전 '거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세계 여러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알'에서 탄생하는 설화들을 제시한다.  알에서 인간이나 동물 등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는 빅뱅이 일어나기 전의 엄청난 밀도의 물질의 폭발로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과학이론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과학을 맹신하고 신을 폐기처분하려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이 말하려는 바는 이 문장들에서 드러난다.

   
  너에게 두 시간동안 줄곧 이렇게 말하고 있잖니. 세상엔 수많은 생각과 관점이 존재한다고. 네 생각이 가장 좋아 보인다고 해서 그 생각이 유일한 진리인 것은 아니란다. 앞에서 말한 톨텍족의 설화와 신화를 잘 연구해 보렴. 어떤 내용인지 자세하게 연구해 본 후에 쓰레기장에 버리려면 버리려무나. 그런데 너는 핵폭탄과 생화학 무기를 발명한 과학이 고대의 신들보다 더 적은 희생자를 냈다고 생각하는 거니? 각각의 신을 숭배한 민족들만큼이나 다양한 신들이 있단다.  
   

이야기의 설정도 흥미롭다.  키릴이라는 소년이 언덕 위의 신비한 박사님 사마일의 집으로 몰래 숨어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 같다.  그러나 다분히 판타지적인 요소로 가득찬 사마일 박사의 집이나 박사가 맡고 있는 '행성의 조정자'역할이 이야기 속에서 그 질감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아이들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너무 컸던 걸까. 이야기가 중반으로 흐르면서 사마일 박사의 설명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 키릴이 사마일 박사의 집에 숨어들었을 때 세계수 중 하나인 무화과 나무를 쓰러뜨리는 바람에 인도네시아에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야기가 이런 사건들을 군데군데 더 짜임새있게 이어갔다면 훨씬 더 흥미로우면서도 아이들이 저자의 의도를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책이 되었을 것 같다. 소년 키릴이 박사에게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쳐가는 능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편이 이 책을 읽는 아이들 편에서도 훨씬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책의 편집에 관한 문제인데, 본문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중간에 커다랗게 끼어있는 설명자료글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진다는 것이다.  '창조론', '다윈의 진화론', '우주달력' 등등 설명글들이 많은데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도록 각 장 끝에 모아 실는다던가 아니면 작게 박스 처리를 한다든가 하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세계의 문화다양성과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표방하며 기획된 책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이들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점이 좀 걱정스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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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건축가의 건축 이야기 마음이 쑥쑥 자라는 세상 모든 시리즈 20
꿈비행 지음 / 꿈소담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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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건축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큰딸이 중2때 유럽여행을 계획하던 중,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건축물 -사그리다 파밀리에 성당과 구엘공원 등- 을 보고 싶다는 딸아이의 바람을 듣고 나서다.  유럽여행이 1년 뒤로 미뤄지면서 중3 때 한 달 정도 여행을 떠났지만 우리 딸아이의 바람은이뤄지지 않았다.  지금도 딸아이는 가우디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빛난다.   

이 책을 보고도 맨처음 질문이 "엄마, 가우디도 나왔어?"다.  200쪽의 책 속에 동서양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30개의 건축물들을 담아놓았으니 가우디에 대한 부분이 있더라도 딸아이의 호기심을 채우기엔 역부족일 것 같은데도 '가우디'가 없다면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사뭇 진지했다.  물론, 가우디는 있었다.  하지만 단 6쪽.   

30개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각각 6쪽씩이다.  가우디 편을 예로 이 책의 건축물 소개방식을 설명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건축물의 이름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해가 적혀있고 건축물의 사진이 들어 있다.  여기선 '근대 교회 건축의 대표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라고 건축물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 위에 작은 글씨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 1984'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아직도 건축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실려있다.  전반적으로 사진의 질이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그렇게 아주 형편없는 편도 아니다.   
 

 

 
  

 

그 옆 페이지 상단엔 건축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1882년에 건축이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완성되기까지 300년은 더 걸릴 것이며 가우디가 서른 살 때부터 짓기 시작하였지만 죽을 때까지 완공을 하지 못했다는 대략적인 설명이다. 
그 아래로 본문이 시작되는데 건축가와 건축물의 형태와 특징에 대한 글이 이어진다.   

 

 
  

 건축물과 연관된 인물들의 사진이 하나씩 등장하는데 여기선 건축가 가우디의 사진이 실렸다.  베르사유 궁전의 경우엔 마리 앙투아네트와 건축가 루이르보의 사진이 실리기도 하고, 타지마할의 경우엔 건축을 지시한 왕 샤 자한의 초상이 실리기도 한다.  건축가나 건축을 지시한 왕 등에 대한 자료가 없을 경우엔 클립을 꽂은 메모 형식의 짧은 설명이 대신한다.   
어떻게든 건축물과 연관된 인물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설명을 마치는 마지막 페이지엔 '속닥속닥 건축 이야기 하나 더'가 있다.  가우디의 경우 가우디가 그의 후원자 구엘을 위해 지었다는 구엘 공원에 대한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려있다.  주로 본문에 실린 건축물과 양식이 비슷하거나 본문에 등장했던 인물과 연관된 다른 작품이다.   

 

 

 

이런 형색에 맞추어 30개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마다 6쪽의 지면이 할애되어 설명된다.  그러다보니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깊이감이 있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세계 여러 건축물에 대한 상식을 갖추기엔 도움이 될 것 같다.    



책의 맨 뒷부분에는 두 개의 부록이 있다. 하나는 '한눈에 보는 건축 양식의 변천사'이고 다른 하나는 '도표로 보는 건축의 세계 연대기'다. 
'한눈으로 보는 건축 양식의 변천사'에서는 원시양식, 이집트 양식, 서아시아 양식의 고대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딸려나오는 건축양식이 참 다양하다.  문제는 이런 다양한 양식을 사진이나 그림 자료 없이 글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나부터도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로마네스크, 사라센, 비잔틴 등의 건축양식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아이들에게는 글로만 되어 있는 이런 설명들이 자칫 '건축은 따분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양식에 대한 설명은 본문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차라리 본문 중간중간 Tip처럼 양식에 대한 설명과 자료를 실어주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물도 공간을 시각적으로 즐겨야 하는 것이니만큼 사진이나 그림자료가 더 풍부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러자면 책값이 많이 비싸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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