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아이 고정수 꿈소담이 고학년 창작동화 3
고정욱 지음, 원유미 그림 / 꿈소담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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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다분히 신파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 정수가 구순열이라는 기형을 갖고 태어난 아이라는 점, 정수의 아빠가 고아라는 점, 그리고 신파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시한부(이 책에선 정수의 엄마가 암이다.)까지, 신파의 구색을 골고루 갖추고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정수네가 부유하지 않다는 점도 신파의 보조요소 쯤이 될 수도 있겠다. 난 아이들이 신파의 주인공이 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신파라는 것이 누군가의 비극을 통해 감동은 쉽게 끌어낼 수 있을지언정 감정의 격랑, 대책 없는 동정심, 철없는 낭만 외에 남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뒷 표지를 보고 머뭇했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에게 소원이 뭐냐고 묻는 남자아이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 소개가 내게 위험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고정욱님인데, 설마 무턱대고 신파로 빠져들 지야 않겠지, 하는 생각이 위험신호를 차단했고, “말 잘하는 아이 고정수”라는 경쾌한 느낌의 제목이 책장을 펼칠 용기를 줬다.

정수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구순열, 쉽게 말하면 언청이로 태어난 아이다. 수술을 두 차례 받아서 생활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빨갛게 남아있는 수술흔적이 신경에 거슬려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려하고 남 앞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앞에 나가 발표하는 것이 두려운, 좀 소심한 아이다. 엄마는 늘 정수에게 “상처가 있어도 당당하게 너 자신을 보여주라”며 용기를 주려고 하지만 정수는 늘 ‘입이 안 보이게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을 하고 나서기를 싫어한다. 그런 정수가 투병하는 엄마의 고통스러운 모습과 엄마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아빠를 보면서 엄마가 늘 당부하던 말씀대로 변해보리라 결심을 한다.

코끝이 찡하게 저려오는 부분은 정수가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고하고 엄마를 위해 기도해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는 장면이다. 눈물까지 흘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열등감을 극복하고 사람들 앞에 선 정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감동적인 장면이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수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에 마음이 답답했고 정수가 헤쳐 나가야하는 숨은 난관들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제목의 “말 잘하는”은 단순히 언변이 좋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말 잘하는”은 “당당하게 자기 뜻을 펼친다”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정수의 이야기에서 찾은 희망은 그것이다. 엄마가 안계시다는 것, 구순열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 정수의 삶을 틀림없이 힘들게 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수가 당당하게 자기 뜻을 펼치는 ‘말 잘하는 아이’가 되어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야기 속에서 정수가 중증장애인으로 설정되었다면 엄마가 암에 걸려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의 극적효과를 위해 시한부인 엄마가 이용되었을 거라는, 못돼먹은 의심도 지워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현실 속에서, 떼거지로 겹쳐서 들이닥치는 불행을 보기도 하거니와 그런 불행을 겪는 아이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는 동화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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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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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성 님의 그림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늘 김동성 님의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보았을 때, 이런, 또 당하겠군, 싶었다.  어린이 책답지 않은-이건 장점일까, 단점일까?-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표지 그림.  표지에 코를 바싹 대고 후읍~ 숨을 들이마시면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독특한 그 향내가 가슴 속에 꽉 들어찰 것만 같았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김동성의 그림이다.  게다가 제목까지 ‘책과 노니는 집’이라니....‘책’이라면 마구 친한 척하고 싶은 이 몹쓸 버릇과 막연한 동경심까지 겹쳐 올해는 꼭 인터넷 서점의 일반회원으로 내려가고 말리라는 작심이 흔들리고 말았던 거다.  그렇게 내 의지의 나약함을 확인시키며 내 품에 안겨온 책이다.

1800년대 천주교의 탄압과 박해가 이 이야기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신유, 기해, 병오, 병인의 4대 박해 등 구구절절한 탄압의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역사동화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적 사건이 지나치게 부각되거나 이야기를 휘어잡고 흐르지도 않는다.  천주학에 관한 책 『천주실의』를 필사했다는 이유로 관에 끌려가 매를 맞고 숨진 필사쟁이 아버지를 둔 장이라는 소년의 성장 쪽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계책방 최서쾌와 심부름꾼 장이, 도리원의 미적과 낙심이와 청지기, 서유당의 홍교리는 자기가 몸담은 그 시대를 견디며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격랑의 시대를 운명처럼 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비장하다거나 영웅적이지 않다. 그러나 무력하고 소박한, 한없이 작은 사람들의 용기가 역사를 바꾸는 그 시대의 현장이 고스란히 담긴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가슴이 짠해진다.

사건을 일으키는 허궁제비라는 인물의 인상이 좀 흐릿하다는 생각이 들어 좀 아쉬웠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서학의 기준으로 볼 때, 포악무도한 허궁제비도 ‘불쌍히 여겨야 할’ 존재이기 때문일까?  기생 미적이 자신을 괴롭히는 허궁제비를 ‘불쌍하다’고 한 것도 어떤 특정한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 성서상의 원죄를 진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가엾게 여김이라는 느낌이 더 크다.  그래서 ‘불쌍한’ 허궁제비는 안개 자욱한 미궁 속을 헤매는 것처럼 뚜렷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그림도 글도 아름다운 책이다.  개인적으로 서유당 홍교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책에 대한 말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를 테면 『논어』『맹자』같은 책들이 너무 어렵다는 장이의 말에 홍교리는 “어렵고 재미없어도 걱정 마라.  네가 아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어려운 글도 반복해 읽고, 살면서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아, 그게 이 뜻이었구나!’하며 무릎을 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어려운 책의 깊고 담백한 맛을 알게 되지.”(p.53)라며 위로한다.  또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사 모으냐고 장이가 묻자 홍교리는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 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가을부터 준비하듯 나도 책을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당장 다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p.78)고 대답한다.

‘이제 책을 그만 사야지..’하고서도 이 책을 보고는 덜컥 사버린 -그것도 사는 김에 몇 권 더 사버린- 나로서는 정말 따뜻한 다독거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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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래 공부 못해 창비아동문고 244
은이정 지음, 정소영 그림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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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보니 한가운데에 뜀틀이 놓여있었다.  아이쿠, 오늘 뜀틀이야? 100M 달리기를 하면 19초의 장벽을 깨뜨리지 못 하는, 그것도 컨디션 좋고 운 좋아야 19초대에 겨우 들어오지 20초를 넘기는 게 자연스러웠던, 타고난 운동치였던 나는 뜀틀을 보고는 뛰기도 전에 먼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사뿐히, 가볍게, 우아하게 날아서 뜀틀을 넘지 못 하고 훌쩍 뛰어서는 뜀틀 위에 털썩! 그대로 올라타 버리는 나의 흉한 모습이 떠올라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괴롭고 불편하던지... 그 날은 유난히 맑고 따뜻한 봄날이었고, 하늘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싶을 만큼 파란 빛으로 쨍하게 펼쳐 있었고, 따스한 봄바람은 살랑살랑 가볍게도 불어댔건만, 아니나 다를까, 내 차례가 오자 난 변함없고 한결같이 뜀틀 위에 승마포즈로 털썩! 걸터앉고 말았다.  간절히, 정말 참 간절하게도, 그 순간 뜀틀이 정말 말로 변해서 따그닥따그닥 달려 운동장을 벗어나 주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았다. 

지금은 작고 펑퍼짐한 아줌마지만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반에서 크고 마른 편이었던지라, 선생님 보시기엔 키 크고 마른 아이가 뜀틀을 넘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으셨나 보다. 힘차게 달려가서 도움닫기를 한 후에 뜀틀 앞부분을 짚고 넘어야 한다고 누누이 반복해서 가르침을 펴신 후,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만을 위한 개인지도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가르침을 펴고 몇 번을 다시 시켜도 여전히 못하는 나를 도저히 납득하실 수 없던 선생님은 “뜀틀의 높이가 너에게 맞지 않나 보구나.”하시더니 뜀틀 2단부터 시작해보자고 하셨다.  몇몇 아이들이 나와서 뜀틀을 2단으로 낮추는 걸 도왔다. 

난, 그 좋은 봄날 너무나 괴로웠다.  반 친구들은 뜀틀 주변에 조르르 일렬로 앉아서 날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은 즐거워 보였고, 또 몇몇은 따분해 보였고, 또 몇몇은 한심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2단부터 한 단씩 뜀틀의 높이를 높여가던 선생님의 노고와 몇 친구들의 수고는 눈물겹게도 실패로 끝났고, 난 선생님의 눈물겨운 실패에 너무나 송구스러웠을 뿐 아니라,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너무나 창피했으며, 무엇보다 날렵하고 가볍지 못한 내 몸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난 ‘원래’ 뜀틀을 못하는 아이라는 것이다. 

우습게도 ‘원래 뜀틀을 못하는 것’은 그 날 이후 사는데 별 지장을 주진 않았다.  ‘원래 달리기를 못한다’거나 또 ‘원래 바느질을 못한다는 것’은 학창시절 체육실기나 가사실기 점수에 약간의 피해를 주었을 뿐, 뭐, 그다지 심각한 사태를 몰고 온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공부에 대해서는 ‘하면 된다’라거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결사의 비장함이 풍기는 잣대를 들이댔지만 뜀틀과 달리기, 바느질을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웠기에 살기가 고달프진 않았다.  분명히, 내가 수렵생활을 하던 시절에 태어났다면 뜀틀과 달리기를 ‘원래’ 못하는 나는 그 사회의 심각한 문제아가 되었을 것이고, 몇 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갔어도 바느질을 ‘원래’ 못하는 나는 여자로서 심각한 결함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휴우~~~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데 이 책 속 ‘찬이’는 ‘원래’ 공부를 못 한다.  중간쯤 못 하면 그나마 좀 괜찮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정말 못 한다.  대신 밝은 성격에 부지런함, 동물을 돌보는 야무진 손끝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타고났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공부만을’ 최고의 가치로 요구한다는 점이다.  선생님이 되어 처음 담임을 맡은 초보 ‘멋진 연희 샘’은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이 모두 ‘완벽’하기를 바란다.  그 ‘완벽’이라는 게 순전히 학습에 대한 요구다. ‘멋진 연희 샘’이 펴는 가르침도 순전히 ‘공부’에 올인이다.  그리고 멋진 연희 샘은 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해 질 거라 믿는다. 

그러나 선생님의 예상과는 달리 반 아이들은 표정이 점점 어둡고 굳어지고, ‘찬이’는 더욱 암울한 아이가 되어간다.  서로 순진하고 사이좋게 어울려 놀던 아이들은 학교 버스 안에서 선생님의 험담을 늘어놓고 찬이의 뒤통수를 때리며 ‘멍청한 놈!’이라고 비난을 퍼붓는 난폭함을 보이기 시작한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원래’ 못 하는 것 몇 가지쯤은 갖고 살지 않나?  그와 더불어 ‘원래’ 좀 잘하는 것 몇 가지쯤 함께 갖고 있고... 도대체, 우리의 어디에서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차이’와 ‘다름’ 덕분에 세상은 다양성을 획득하고 다채로운 삶의 재미, 개인의 매력과 개성, 재능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결말부분을 너무 서둘러 허겁지겁 끝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공부 제일주의(?)와 무한경쟁의 교육제도를 시골학교의 한 학급의 모습을 통해 참 잘 담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다가 가슴이 찡해지고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할 만큼.  세상의 많은 ‘찬이’들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아울러 뜀틀을 그 지경으로 못하고도 무사한 나의 인생을 위해서도) 짝짜자자자자자자짜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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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요란 푸른아파트 문지아이들 96
김려령 지음, 신민재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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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도 안 나오던 하얀 포니2, 대학 입학 선물로 지금의 남편이 사준 스누피가 그려진 양철필통, 탈수단계에 들어서면 헬리콥터의 이착륙 소리를 내던 세탁기, 열일곱 어느 날 생일선물이라며 그 아이가 주었던 보라색 손목시계, 늘어져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려 너무나 서운했던 좋아하던 노래가 담긴 카셋트 테이프, 집에 도둑이 들어 가져가 버린 소니 워크맨....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물건들이고 시시각각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냥 정이 붙는 것들이 있다.  하얀 포니2를 폐차장에 두고 돌아섰을 때에도 허전함에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고, 수명을 다한 세탁기를 앞에 두고 우리 아이들 기저귀 빨아 키워준 게 넌데, 그동안 참 고마웠는데, 못쓰게 되었다고 이렇게 내치게 되어 참 미안하다고 공연히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그런 것들 속엔 내 삶의 어느 한 부분이, 그것들과 함께한 그 동안만큼의 기쁨과 한숨이 엉겨 붙어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버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 커버린 어느 날, 어쩐지 그리운 마음에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갔던 날 새로 지은 낯선 건물이 나를 맞이했을 때, 예닐곱 살 때부터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살던 집이 허물어져 밝은 대낮에 속살을 다 들어내고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봤던 때에는 내가 곱게 간직했던 그리움이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모욕감을 느끼고 황망히 돌아섰었다.

이런 기억들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이 책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니 적극적인 개입도 마다하지 않는 낡은 아파트 네 동과 상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기동이와 기동이네 할머니, 만화가 천기호 선생, 교장선생님인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단아는 마치 세상 횡포에 상처받고 쫓겨 와 푸른 아파트 안에 겨우겨우 자기 둥지를 잡고 살아가는 작은 새들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고양이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게.  푸른 아파트가 자기 안에서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세상에 나는 것들은 다 지 헐 몫을 가지고 나는 것이여.  허투루 나는 게 한나 없다니께.  고 단단하던 것들이 이렇게 제 몸 다 낡도록 사람들 지켜 주느라 얼마나 고생혔냐.  인자 지 헐 일 다 하고, 저 세상 간다 생각허니. 짠허다.” (p.168) 

살아가는 일의 난감함과 누추함을 “제 몸 다 낡도록” 고생한 어떤 것들에게 위로받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코끝이 쨍하도록 추운 날 집에 돌아오면 언 발과 손을 녹여주던 따뜻한 아랫목에, 또는 비염으로 며칠을 콧물로 고생하던 날 내 곁을 지켜주던 두루마리 화장지에, 추운 거리를 걷다가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던 따끈한 호빵에, 서러운 이별을 하고 외로워 미칠 것 같던 날 묵묵히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내 곁을 지켜주었던 그날의 작고 천진한 핸드백에, 오늘 바른 립스틱에, 내 모든 넋두리와 하소연과 투덜거림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받아주는 이 컴퓨터에.

오늘은 나도 기동이 할머니처럼  “니도 고생 많었다.” 고 말 건네고 따뜻하게 쓰다듬고 토닥여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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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빅토르 지그재그 1
드니 베치나 지음, 이정주 옮김, 필립 베아 그림 / 개암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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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그 때 둘째아이가 눈물샘이 막혀서 안과를 자주 들락거렸는데, 그 날도 아침 일찍 안과부터 다녀온다고 서둘러 애들 밥 챙겨 먹여 대충 치우고 부스스한 꼴로 둘째를 들쳐 업고 첫째는 손잡아 끌고, 슬리퍼를 신고 동네 시장 어귀에 있는 안과를 찾았다.  그런데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앉고 보니 맞은편에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당시 학교에서 미남 선생님으로 유명했던 분이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설마 나를 알아보시진 못하겠지? 그래도 인사를 드려야 하나? 이 꼴로 어떻게?’ 별별 생각을 다하며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진료 받을 차례가 되어 이름을 부르는데 하필이면 그 체육 선생님과 우리 둘째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이었다.  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얼굴이 벌개진 채 치료 받는 동안 울고 불며 버둥거리는 둘째를 끌어안고 진료를 끝내고 나왔는데, 처방전을 기다리는 사이 다시 맞부딪치게 된 상황에서는 도저히 더 이상 안면몰수를 할 수가 없었다. 
“저..... 김OO선생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저 OO여중 졸업생이예요.”
선생님, 날 보고 빙긋 웃으시더니만
“그래, 나 너 기억하고 있다.”
그 다음에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너무 사설이 길다고?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우린 숨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예외는 없다.  차라리 어리면 어려서 그렇다고 좀 봐주기라도 하지, 어른은 봐주는 것도 별로 없다.  그래도 좀 나은 게 있다면 적어도 옷장 속에서 괴물이 튀어나올까봐 걱정하거나 침대 밑에 귀신이 있을까봐 겁을 먹지는 않는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아마 어른이 신용불량자가 될까봐 두려워하는 거나 아이들이 옷장 속 괴물을 두려워하는 거나 두려움의 강도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문제는 극복이다.  난 옷장 속 괴물을 어떻게 없애버린 걸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빅토르처럼 멋진 갑옷을 만들 재주도 없었는데 말이다.  분명히 내가 무서워할 때마다 안아주는 어른이 있었을 거다.  내가 겁나서 움츠리고 있을 때마다 다독이며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었을 거다.  그게 누구였는지, 그 따뜻한 격려의 말이 어떤 거였는지 세세한 기억이 떠오르진 않지만.

이 책이 조목조목 열거한 아이들이 품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의 내용들을 읽으며 나와 우리 아이들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 웃음 짓기도 했고, 그리고 그에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는 이 책의 내용에는 100% 동감하지만, 그렇지만..... 빅토르가 그 무시무시한 갑옷 속으로 들어가 숨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 빅토르를 다독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누군가가 왜 하나도 없었는지가 너무 아쉬웠다. 

문제에 맞서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기 전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관계나 감정의 교류를 나눌 수 없다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닐까.  그 점을 작가도 느꼈던 걸까.  책의 마지막 부분의 지은이의 글에서 “의논해서 해결책을 찾”으라고 하고 추천의 글에서는 “필요할 땐 주저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세요”라고 하고 있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뒷부분의 지은이의 글이나 추천의 글까지 세세하게 읽어줄지, 노파심은 자꾸 가지를 뻗는다.  이쯤에서 가지를 끊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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