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되렴 책읽는 가족 47
이금이 지음, 원유미 그림 / 푸른책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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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님의 첫 장편동화다.  1988년에 출간된 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절판되었다가 2005년에 개정판으로 재출간된 책이다.  처음엔 <가슴에서 자라는 나무>였던 제목도 <다리가 되렴>이라는 책 내용과 더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으로 바뀌었다. 

책의 제목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이 이야기에는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강이 등장한다.  서로 오고 갈 수 있는 다리도, 배도 없다.  소통을 위한 수단과 방법들이 모색되어지기 보다 거부당하고 포기함으로써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강은 더 넓고 깊어진다.

안터말 아이들과 희망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 아이들 사이를 흐르는 강도 서로 넘나듦이 불가능한 광대한 강이었다.  이 사이에 서울에서 전학 온 '은지'라는 아이가 다리를 놓으면서 강은 점점 시냇물이 되었다가 도랑물이 되었다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은지는 그 중간자적 입장답게 어머니를 여의고 위암에 걸린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다.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의 가능성을 가진 아이.  안터말과 희망원 사이에 놓인 아이인 것이다.

또 다른 강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모와 자식을 모두 잃은 기와집 할아버지와 기와집 할아버지네 집에서 머슴으로 일했던 순보할아버지 사이에 놓여진 강이다.  순보할아버지는 당시에 북한 인민군 쪽에 서서 기와집 할아버지의 부모와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그 사이의 중간자가 되어주는 사람은 은지의 단짝친구 순혜네 할머니다.  순혜 할머니의 가슴 속은 오래 된 장롱 같아서 지난 날의 기억들이 잘 빨아 넣어 둔 옷가지들 처럼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그 많은 사연과 기억으로 지난 날의 아픔과 절망들을 꼭 안아 녹여내는 분인 것이다.  그래서 순보할아버지가 안터말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받아들여지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던 곳도 순혜네 할머니의 인정 가득한 마음 속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해 본다.  그 강에 흐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편견, 무관심, 오해, 몰이해, 오만과 이기심, 패배주의와 자기 연민, 열등의식...  그렇다면 그 강물을 건널 다리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

어떤 사람은 다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강의 물결을 더 거세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갈등과 대립이 필요악처럼 존재할 수 밖에 없다면 적어도 강물에 깊이를 더하거나 넓이를 보태는 일이라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스스로 다리가 될 재간도 용기도 없으면서 한강에 다리 늘어나듯이, 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고 뻔뻔한 바램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니면 강을 흐르는 것이 사랑, 이해, 온정, 수용, 나눔..뭐 그런 것들로 바뀌어서 사람들이 그냥 강물에 풍덩풍덩 몸을 던져 모두 즐겁게 어우러져 헤엄치며 놀 수 있던지.. 아예 다리가 필요 없는 세상, 우리가 정말 원하는 건 그런 세상이련만. 

역시 이금이님이다.  이금이님이 이야기라는 보자기로 싸서 안은 세상이 따뜻하고 아름답다.   이금이님도 우리 시대에 흐르는 갈등과 대립의 강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름답고 튼튼한  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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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 뭐라나 하는 쥐 책읽는 가족 13
이금이 지음, 송진헌 그림 / 푸른책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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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님이 쓰신 단편동화집은 처음 읽어본 것 같다.  난 이금이님이 장편에 강한 글의 호흡을 갖고 계시다고 생각했었다.  <너도 하늘말나리야>도 그렇고, <유진과 유진>이나 <주머니 속 고래>, 그리고 <밤티마을>시리즈까지 장편의 호흡을 가진 작가라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한 대표작품들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 담긴 짧은 동화들은 그러한 나의 편견을 싹 뒤집어 버렸다.  이금이님은 단편에도 막강한 호흡을 가진 작가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

이 책에 담긴 열 세편의 동화들은 대부분 세대간, 더러는 계층간의 갈등과 마찰이 종국엔 화해와 어울림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른들에게 무조건 어린이를 이해해야 한다는 설교도 아니고 어린이에게 어른들에겐 너희들이 알지 못할 복잡한 사정들이 있는 법이니까 어른 말씀 잘 들어야 한다는 교훈이나 연설도 아니다.  (물론 이금이님께서 그따위로 동화를 쓰실 리가 없다)  이 책에 흐르는 것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교훈과 설교가 아니라, 서로 맞잡은 손에서 온기가 통하는 화해의 무드다.

화해에는 늘 쌍방이 함께이어야 하듯이, 난 이 동화책도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세대간 계층간이 벽으로 단절된 그 지점에 소통과 화해의 작은 통로라도 마련되기를 바래본다.  다행히 이야기 대부분이 예닐곱장 분량의 짧은 이야기들이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으리라.  특히 이 책을 통해서 아이들을 향한 완고하고 메마른 어른들 마음에 따스한 이해심과 넓은 아량이 깃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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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8 15: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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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07-05-2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 님, 전 찬밥에 물말아 열무김치 올려 먹었어요. 쑥떡, 맛있었겠네요. 군침돌아요. 언제나 제 리뷰를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님도 오늘 하루 남은 시간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우리 선생님 폐하 난 책읽기가 좋아
수지 모건스턴 글, 카트린 르베이롤 그림, 이은민 옮김 / 비룡소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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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외부의 강압에 의해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의 억울함, 서글픔, 분노, 패배감, 자기연민 등등의 감정을 경험해보았는지. 

이 책에 등장하는 스틸리아노 선생님은 자기 일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다.  교실은 선생님에게 있어 "하나의 우주이며 가정"이고 "다양한 모습과 행동과 꿈을 볼 수 있는"  사랑스런 작은 공간이다.  스틸리아노 선생님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마저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기 일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선생님이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간에 자기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마지못해 직업을 버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기 때문에 자기 직업을 지겨워하면서도 계속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스틸리아노 선생님은 참으로 행복한 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스틸리아노 선생님에게 <정년퇴직>이라는 형벌이 떨어진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간혹 "뜻이 있는 곳이 길이 있다"는 명언을.잊어버리곤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명언이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무수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일을 시작할 때면 늘 핑계를 대곤 한다.  "그게 가능하겠어?" 하고.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외부적 강압에 의해 금지당할 경우라도 내가 그 일을 못하는 이유는 외부적 강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나의 애정과 열망의 부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며,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명제의 글들이 이 책의 줄거리 속에 드러나지 않게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삶을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주체는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일을 향하는 것이든 사람을 향하는 것이든, 무엇인가를 향한 애정의 에너지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책이었다. 

또 하나 가슴 속에 새겨진 글이 있다.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는 스틸리아노 선생님이 학생들의 과제 등이 맘에 들지 않을 때 쓰는 말이 있다.   
"스틸리아노 선생님이 만족스러워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뭐라고 할까요?"
모두 대답한다.
"다시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시 해보면 된다.  정년퇴직이라는 막강한 외부의 압력을 무너뜨린 우리의 스틸리아노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시 하면 된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승산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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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8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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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07-05-2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글을 저렇게 써놓았어도 저 역시 다시 시작하기 보다 포기하기를 더 쉽다고 여기는 사람 중에 하나랍니다. 저 글은 제 자신에 대고 다짐한 글인데 님의 마음을 두드렸다니 제가 어쩐지 머쓱해지네요. 아무튼 저도 고맙습니다. ^^

알맹이 2007-05-3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 수지 모건스턴과 이금이님의 달로 하신다더니.. 역시.. 이렇게 많은 책들이 있었네요. 나중에 추천 리스트도 한 번 만들어 주세요~

섬사이 2007-05-3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근데 5월 중에 다 읽기는 틀렸어요. 특히 이금이 님 책들은 아직 더 한참 걸릴 것 같아요. ^^
 
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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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이야기는 막연하고 파편적인 이야기였다.  알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공포가 있다는 거. 원전이 폭발하면서 유출된 방사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지금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기형아가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들을 나와 상관 없는 먼 나라 이야기쯤으로 덮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 책에 손이 갔을까? 사람들이 재미삼아 공포영화를 즐기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용기가 그 순간 갑자기 밀려올라왔던 걸까? 

껍질 속은 안전하다.  내가 쳐 놓은 장막 아래에서 살아간다는 건 참 아늑한 일이다.  내 울타리 안, 매서운 바람이 불지 않는 곳, 밖깥의 현실이 어둡더라도 스위치 딸깍, 전등불빛을 밝히고 커튼을 내리면 밖이야 어떻든 아무 상관없다.  당시 체르노빌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이라는 시각이 오기 전까지 체르노빌의 사람들도 그랬다.  체르노빌 사람들도 그렇지만 낙진의 70%가 떨어졌다는  벨로루시 공화국 사람들에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믿고, 아늑하고 단란한 가정을 성실하게 꾸려갔을 것이다. 

이 책은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이야기이다.  원전사고로 희생되는 아이들과 붕괴되는 가정, 그리고 은폐하기에 급급한 구소련 정부를 담고 있다.  저자가 저널리스트이자 반전, 평화운동가이므로 이야기의 구성이나 재미로 보자면 좀 허술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고발"이라는 가치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책의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때 발생했던 엄청난 방사능 낙진들, 원자로 안에 갇혀 있던 "죽음의 재"가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을지 생각해보라고.  이 죽음의 재는 당시 일천미터 상공까지 치솟아 올랐고, 핵구름은 기세 좋게 성층권까지 올라가 그 곳에서 수증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이미 지구는 '죽음의 재'에 포위당했으며 우리는 '죽음의 재'가 흘러든 물을 마시고, '죽음의 재'가 뿌려진 채소과 과일을 먹으며, '죽음의 재'가 발라진 풀을 먹고 자란 소의 고기를 먹고 있다고.. 이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그리고 아직도 구 소련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도 사람들은 원자력을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저자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을 부르짖고 있었다. 앞으로 세계에 건설될 원자력 발전소는 수천 기이며 1기 당 사고의 위험성은 2만 년에 한 번이라고 하지만 따져보면 그말은 세계에 만약 2천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고 계산하면 10년에 한 번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아니냐며 반문한다.  그 중 몇개가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지구 멸망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싹했다.

원자력 에너지의 필요성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견해라고도 주장한다.  원자력 산업이라는 게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군수산업 중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업종이며 원자력 발전소를 추진하려는 것은 에너지 부족 문제 때문이 아니라 독점자본의 이익과 결부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어린 이반과 이네사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 하는 건 내 싸구려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도 없이 혼자 쓸쓸하게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현실에서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자는 말한다.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다면, 원전을 도쿄 한복판에 건설하라고.  그래, 어쩌면 우리는 부르짖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다면, 세계 각국의 수도에 원전을 건설하라고. 우리나라는 청와대 옆에, 미국은 백악관 옆에, 영국은 버킹엄 궁전 옆에~!!!   그러면 적어도 부주의로 인한 원전사고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TV에서 흘러나오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정부측의 홍보 광고를 여과없이 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보게 하고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피해를 스스로 찾아볼 수 있게 하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  체르노빌 원전은 시멘트를 쏟아부어 막아놓았다는데, 그 시멘트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고, 그 틈으로 방사능이 새나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쳐 놓은 장막 안이 그다지 안전한 공간이 못된다는 불길한 신호가 울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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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5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7-05-25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땡스 투!!!
아시죠? ㅋㅋㅋ

섬사이 2007-05-25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정말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자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본받지 마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궁.. 그나저나 활기차게 시작하셔야 할 하루를 제가 망쳐버린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홍수맘님, 땡스투...^^

2007-05-26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5-26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 님, 외면하고 모르는 척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 것 같아요. 모르는 편이 마음은 더 편할테니까요. 하지만 알고 대응해 나가는 게 현명한 것이겠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이 책 읽기를 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테고요. 속삭인 님도 남은 주말 행복하게 보내세요. ^^
 
어느 할머니 이야기 난 책읽기가 좋아
수지 모건스턴 지음, 세르주 블로흐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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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코트를 입고 한손에는 가방을 한 손에는 우산을 든 할머니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림을 만난다.  연필로 그린 것인지, 콘테로 그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흑백의 톤으로 작고 왜소하게.. 세상에서 몇발자국 물러서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다음 장을 펼치면 시장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수채화로 맑게 채색된 그림 속에서 할머니를 찾는다.  아, 가운데 아랫부분, 빨간 코트를 입은 할머니가 시장가방에 물건을 담으려 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가 독자에게 이 할머니를 소개해주는 듯한 문체로 쓰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파서 힘들고 관절염 때문인지 신경통 때문인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걷는 것도 힘에 겨운 일흔 다섯살의 할머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할머니의 과거와 현재 속을 오갈 수 있다.  책을 좋아했지만 이제 눈이 좋지 않아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바느질도 뜨개질도 수놓기도 손이 말을 안들어서 할 수가 없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는 일조차도 힘에 겹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도 자기 가정을 꾸리느라 가끔 차 마시러나 들르는 쓸쓸한 집에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없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하면 된다고." 

그런 할머니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할머니가 "수많은 이야기들과 수많은 시들, 수많은 걱정들 그리고 한 줌의 농담으로 치장한 자기 얼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당신의 얼굴에 생긴 주름살에 대해  "어떤 건 재미있는 얘기들 때문에 생겼고, 어떤 건 힘들었던 날들의 눈물과 근심 때문에 생겼지.  어떤 주름들은 또 부드러운 사랑의 흔적이란다."하며 애정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건 곧 당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애정과 같은 것이기에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주름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것일게다.   비록 "세상의 사탕이란 사탕을 다 모아도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기는 쓴 맛을 없앨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더라도 말이다.

"힘든 시절을 견딜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좋은 날을 맞이 할 수 없다는 걸, 깜짝 선물과도 같은 기쁜 날을 맞이할 수 없다는 걸" 경험으로 터득한 이 할머니의 삶의 추억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을 적신다.

"할머니, 다시 한 번 젊어지면 좋으시겠어요?"라는 손자들의 질문에 생각할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이 할머니는 "아니, 내 몫의 젊음을 살았으니 이젠 늙을 차례야.  내 몫의 케이크를 다 먹어서 나는 배가 불러."라고 대답한다. 

할머니의 대답에 이어 작가는

  "할머니는 아름다운 경치도 보았고 험난한 길도 보았어.  할머니의 여행은 힘들기도 했고 달콤하기도 했지.  할머니는 똑같은 길을 다시 가고 싶지 않아.  게다가 할머니는 길이라는 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거든.  자기가 선택하는 길 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묻는다.

갑자기 슬퍼진다.  나도 모르게 눈 앞이 흐려진다.  삶이, 하루하루가 새털처럼 가벼웠던 나날들을 지나서 여기 이만큼 와버린 내 모습을 만난다.  내 몫의 케이크를 먹으며 그 맛을 제대로 느끼고나 살아왔는지,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내 주름살에 대해, 내 삶에 대해 애정을 갖고 돌아볼 수 있을지.. 그래서 :"이제 난 배가 불러"라고 말할 수 있을지..

할머니가 삶을 통해서 얻게 된 지혜들이, 그리고 언젠간 우리도 책 속에서 만난 이 할머니처럼 늙어가리라는 생각에 잔잔한 감동과 씁쓸함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초등학생들 뿐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읽히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어른들도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아름다운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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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5-1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동화에 대한 아름다운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

섬사이 2007-05-15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너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