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나 자신도 지구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야. 지구는 단지 전설적인 이름일 뿐이라네. 지구라는 이름은 고대 신화 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지. 그 단어는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아. 하지만 우리로서는 인간 종족의 근원이 되는 행성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로 이해하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실질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어떤 행성이 지구인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네.”

 

(130)

2파운데이션은 그와 그의 몇몇 전임자들이 통치해 왔고 그들이야 말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1파운데이션은 물리적인 힘, 고도의 과학기술, 전쟁 무기 등의 분야에서 매우 우월했다. 반면 제3파운데이션은 정신적인 능력, 심리학, 정신력에 의한 제어 등의 분야에서 우세를 유지했다. 따라서 이들 둘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분쟁에서 설사 제1파운데이션이 아무리 많은 무기와 우주선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제2파운데이션이 아무리 많은 무기와 우주선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제2파운데이션이 우주선이나 무기를 조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어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제2파운데이션이 그렇게 신비로운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들 그 비밀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겠는가?

 

(251)

올란첸 초공간 이론의 수학에 대해 얘기드리길 기대하지는 마세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만약 정상적인 우주 공간을 빛의 속도로 여행했다면,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1파섹당 3.26년의 비율로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에요. 물론 우리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소위 상대론적 우주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했던 초공간 도약은 상대성 법칙이 적용되는 조건을 넘어서는 것이고 적용되는 법칙도 전혀 다르지요. 상대론을 벗어나서 초공간적 우주론에서 볼 때 은하계는 아주 미세한 객체에 불과하지요. 그것은 이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무런 차원도 없는 작은 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떠한 상대론적 효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540)

그렇소, 절대 그럴 수 없소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겠소?” 나는 여전히 가이아의 일부분일 것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일 것이오. 우리들 중에는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집단기억을 발전시킬 방도를 찾을 수 없을까 생각하는 신비주의자들도 있소이다. 하지만 가이아의 감각으로는 그러한 노력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어떠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것은 단지 더러운 현재의 의식일 뿐이오. 물론 상황이 변화하면 가이아의 감각도 역시 변하겠지. 하지만 나는 가까운 미래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545)

방금 나는 손님들에게 영원(永遠)’에 관해 이야기해 주던 참이었소. 그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당신들은 서로 다른 무한한 숫자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하지. 모든 개별적인 사건들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오. 따라서 각각의 사건들이 가지는 엄청난 숫자의 선택가능성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각도에서 미래에 벌어질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오.

블리스가 방금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소. 아니면 조금 일찍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할 수도, 훨씬 먼저부터 함께 할 수도 있었을 것이오. 또한 지금 이곳에 들어올 수도 있소. 그녀는 다른 블라우스를 입을 수도 있었고, 이 블라우스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몸에 밴 습관과는 달리 나이 든 사람에게 다정하게 미소를 짓지 않았을 수도 있소. 이처럼 하나의 사건이 가지는 수많은 선택 가능성들 중에서, 아니 한 사건의 수많은 가능성 한 가지 한 가지에서도 우주는 그 이후 전혀 다른 궤적을 가질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은 모든 사건마다, 그리고 모든 선택 가능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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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리뷰툰 냉정과 열정 : 열정 편 - 이제 읽을 때도 됐다, 인류 최고 지성들의 마스터피스 고전 리뷰툰
키두니스트 지음 / 골든래빗(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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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만화를 즐겨 보지 않는 편인데, 가끔 과학과 책에 관련된 만화가 있으면 읽곤 한단다. 책에 관한 만화 중에 아빠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은 키두니스트 님의 <고전 리뷰툰> 시리즈란다. 책을 읽고, 그것도 고전을 읽고, 글로 써도 쉽지 않은 리뷰를 웹툰으로 그리다니그리고 내용도 너무 재미있어서 키두니스트의 리뷰툰을 보다 보면 소개해준 책들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되더구나. 마치 가스라이팅 당한 기분이랄까.

키두니스트 님이 2년 만에 새로운 <고전 리뷰툰>을 들고 돌아오셨단다. 부제로 냉정과 열정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이번에 출간한 것은 그 중에 열정 편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책 표지 색상도 짙은 붉은 색으로 한 것 같구나. 전작들은 흑백이었는데, 이번 책은 칼라판으로 출간되어 더 좋았단다. 이번 책에는 모두 여덟 권의 고전 리뷰툰이 실려 있었단다.

제인 에어. 드라큘라. 두 도시 이야기. 웃는 남자. 금각사. 아르센 뤼팽. 오페라의 유령. 삼총사.

이 책을 읽는 시점에서 아빠가 읽은 책은 모두 4편이었단다. 드라큘라, 오페라의 유령, 삼총사, 아르센 뤼팽.. 아르센 뤼팽은 워낙 작품들이 많아서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이 책에서도 소개해준 <기암성> <813>은 읽었으니, 읽는 걸로아빠가 이 책을 읽는 시점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곧바로 <제인 에어>를 읽었기 때문이란다.^^

 

1.

키두니스트의 리뷰툰은 스포일러를 하지 않을 만큼의 줄거리 소개와 함께,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실력의 글 솜씨, 아니 그림 솜씨가 일품이구나. 그래서 안 읽은 책들의 리뷰를 보다 보면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책에 소개된 책들 중에 아빠가 안 읽은 책 중에 <금각사>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집에 있으니 조만 간에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단다. 그리고 지난주에 곧바로 <제인 에어>를 읽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읽었단다. 그 이야기는 <제인 에어> 독서 편지할 때 할 게.

….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고아인 제인 에어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온갖 힘든 일을 다 겪고 결국은 해피 엔딩의 소설이었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영화나 드라마로 너무 많이 유명해진 작품이라서 오히려 책을 읽은 사람이 적은 그런 작품일 거야. 아빠도 몇 년에야 완역본을 읽었으니 말이야. 키두니스트 님이 정리해 주기로는 <드라큘라>는 기록형 문학의 종결자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어. 일기와 편지 형식을 빌려 아주 세세하게 기록한 것처럼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단다.

..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런던과 파리 두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것이래. 키두니스트의 리뷰툰을 보면서 이 책도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단다. 이 책도 우리 집에 있어서 잠깐 찾아보려고 했는데 어디 있는지 못 찾았단다. 이번 주말에 꼭 찾아서 조만 간에 읽어보려고 해. 아빠가 관심 있어 하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을 했다고 하니 더 읽고 싶구나.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도 소개해주었어. 아빠가 예전에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어렵지만 재미있게 읽어서 사 두었었단다. 작년에 유럽 여행을 가기 전에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을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빅토르 위고의 소설은 스토리 라인 이외에 온갖 잡학사전 같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읽기 쉽지 않다는 거였어. 키두니스트 님도 그 점을 짚어 이야기했는데, <웃는 남자>도 마찬가지로 온갖 인문학적 사설이 잔뜩 실려 있다는구나. <웃는 남자>의 배경은 영국이라고 하는데 프랑스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영국을 싫어했는지 영국 비하하는 발언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구나.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라는 소설은 교토에 있는 금각사에서 실제 일어났던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고 하는구나. 지은이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은 공부도 엄청 잘해서 행정고시도 패스를 했다고 하는데 글도 잘 써서 소설가의 길을 걸었대. 하지만 이상한 짓도 많이 했다는 구나. 30대에는 극우 헬스맨을 자처했다고 하고, 할복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했어. 머리가 너무 좋다 못해 뇌가 과부하가 된 모양이구나.

….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기암성>, <813>도 맛보기로 소개하고 <신사도둑>이 실린 단편집에 대한 소개도 해주었단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오령>은 워낙 오페라로 유명한 작품이라서 이것도 원작을 읽은 이는 적을 수 있는데, 아빠는 오페라보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었단다. 오페라도 볼 생각은 없었는데, 엄마가 보러 가자고 해서그것도 한참 시간이 지났구나.

마지막으로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누군가 아빠에게 가장 좋아하는 고전 소설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망설이지 않고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답을 한단다. 5권으로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장이 휙휙 넘어갔던 기억이 있구나. 고전도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해준 책이었어. 아빠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를 읽고 그의 또 다른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읽은 책이 바로 <삼총사>란다. <삼총사>를 읽기 전에 어렸을 때 TV 만화 시리즈로도 봤고, 커서는 영화로도 봤기 때문에 줄거리를 대충 알고 있었지. 그래서인지 아빠는 <삼총사>보다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훨씬 좋았단다. 키두니스트 님이 <몬테크리스토 백작>도 리뷰툰으로 그려주셨으면 좋겠구나.

….

이번에는 별책부록도 하나 있었단다. 키두니스트 님이 생각하기에 미래에는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을 하나 선정해서 리뷰툰을 그려 별책부록에 실었단다. 그것은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라는 책인데, 이 책도 출간되었을 때 인터넷 서점에 많이 노출되어 책 제목은 알고 있던 책인데 읽지는 않았단다. 키두니스트 님이 추천한 책이니 이 책도 리스트에 올려두어야겠구나.

….

만화책이라서 그런지 순식간에 읽긴 했는데,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은 좋은 책이었단다. Jiny가 이번에는 만화책을 보냐고 물어봐서, 이 책 재미있다면서 Jiny도 한번 보라고 했잖아. 지금은 바쁘더라도 나중이라도 꼭 한 번 보렴.

그럼은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안녕하세요. 고전문학 리뷰툰을 그리고 있는 키두니스트입니다.

책의 끝 문장: 세상에는오로지 너무 재밌다는 이유로 고전의 반열에 든 작품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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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말이란 건 그냥 말이 아니란다, 아가. 말은 우리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 이상이야. 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말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지. 그건 절대 일방통행이 아니야.”

나는 엄마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이보다다 더 똑똑한 엄마를 기대할 수 없었다.

말을 부드러운 무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아가. 네가 아버지가 모르는 말을 썼을 때 아버지가 왜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알겠니?”

 

(182)

어느 날 너는 우리에게 자기는 왜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냐고 물었다. “금주는 할아버지가 둘인데, 어째서 난 영이야?” 네가 투덜댔다. 나는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우리를 새로운 질문의 무한루프로 빨아들였다. “돌아가신 게 뭐야?” 그건 죽은 걸 뜻한단다.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더 이상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뜻이란다. 하늘나라로 가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야. “하늘나라에서는 뭘 해?” 누구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단다, 미희야. “?”

 

(189)

네가 내게서 제일 처음 배운 것들 중 하나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기술이었다. 학교에서 너는 똑똑해서 모든 과목을 잘했다. 딱 하나 생활총화만 빼고. 매주 진행되는 이 자아비판 시간에 모두들 돌아가며 자신이 당을 상대로 저지른 죄-위대한 수령 동지의 이상에 반하는 말이나 행동 또는 정신력 일탈-를 고백해야 했다. 그것은 소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염탐하도록 훈련시킨다. 당은 그것을 반성하라고 표현하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그것을 자기 감시라고 부를 것이다. 정말 골칫거리는 너의 반응이었다. “엄마, 선생님이 고백할 게 절대 없는데 자꾸 고백하라고 강요해! 그래놓고 글쎄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서 죄를 짓고 있다고 화를 내며 소리 지르며 뭐야!”

 

(232-233)

나는 우리 결혼의 첫 번째 미세한 균열을 찾아내기 위해 내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언제부터 우리 자신을 우리가 딱하게 여겼던 다른 평범한 부부들과 다름없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을까. 예를 들어 식당에서 서로의 얼굴이 아닌 서로의 어깨 너머 빈 공간을 쳐다보는 부부. 이제 싸우고 싶지도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한 관심이 고갈된 부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부. 오로지 자식 때문에 함께 사는 부부처럼 말이다.

 

(267-268)

정말 이상한 광경이군. 미희는 생각했다. 혜산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이미 국경 건너편의 광경에 익숙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자신의 마을을 돌아보는 것은 그녀가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상황이었다. 어둠 속에서 낮게 그려진 회색 스카이라인이 너무도 친숙하면서도 너무도 낯설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와 자신의 얼굴 위에 둥둥 떠서 자신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유체 이탈과 같은 경험이었다. 국경을 넘기 위해 이동해야 했던 그 짧은 물리적 거리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317-318)

미희는 마치 납치범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이 아이가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살아서 성장하게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내 몸에서 무엇이건 가져가도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내 몸에서 무엇이건 가져가도 좋고 내게 당신이 원하는 다른 어떤 비극을 줘도 좋아요. 내 다리를 앗아 가도 좋고, 내 눈을 앗아 가도 좋고, 심지어 내가 간 뒤에 이 아이가 정상적으로 살 거라고 보장만 해준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요. 깨어 있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작은 핏덩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아느니 차라리 영원히 잠들겠어요.

 

(333)

갓 태어난 아람이는 하나의 블랙홀이었고 우리는 그 블랙홀에 기꺼이 빨려 들어갔다. 울음과 단속적인 짧은 잠과 수시로 폭발하는 식욕으로 우리의 잠을 앗아 가고 우리의 모든 일상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완벽한 폭풍이었다. 동시에 아람이는 우리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경이로움으로 채웠다. 그 아이는 우리가 지금은 잊은 어린 시절의 놀라운 경험들-우리가 이 세상의 신참자로서 주변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어떻게 모든 평범한 물건이나 사람이 우리의 무한한 호기심에 불을 붙였는지-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삶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은 그토록 정신이 고양되는 경험이다.

 

(380)

내가 전에 갈망한 적 없던 흙을 갈망하게 되면 그냥 먹는 거지. 내 몸을 새것처럼 보존해서 110세까지 살려고 애쓸 생각은 없어.” 묵 할머니가 킬킬거렸다. 그녀는 카르페디엠은 안 그래도 충분히 무모한 10대들에게 설파할 것이 아니라고, 그녀처럼 쪼그라든 늙은 몸들을 위한 경구라고 말했다. “오늘을 즐겨라. 그야말로 내일이 없을지도 모르잖나.” 그녀가 속삭이고는 또 다시 킬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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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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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란 소설의 작가 앤드루 포터의 새로운 소설집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보았단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작년에 읽었나? 재작년에 읽었나?  헛갈려서 독서기록을 찾아보니, 이런... 2020년에 읽었네. 벌써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4년 전이라니... 요즘 가끔 이렇단다. 작년에 읽은 책 같은데 찾아보면 훨씬 오래 전에 읽은 것으로 판명되는.... 나이를 먹으면서 뇌 작동에 이상이 오는 건지... 이번에 읽은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사라진 것들>도 출간된 지는 꽤 되었는데, 알게 된지 얼마 안 되어 이번에 읽게 된 것이란다. 아빠가 단편소설보다는 장편 소설을 좋아하는 편인데, 앤드루 포터의 단편소설들은 전에 읽은 책이나 이번에 읽은 책 모두 좋았단다.

...

이번 소설에는 총 15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두어 페이지밖에 안 되는 엄청 짧은 소설부터 중편에 가깝게 긴 소설들도 있었단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십 대 중년의 유부남이 주인공이라는 거야.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 있고, 육아에 대한 힘듦이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져서 몇 년 전 아빠의 모습이 생각나서 공감이 많이 갔단다.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육아는 없겠지만, 때론 자신의 즐거움이 육아로 사라진 것에 대한 솔직한 아쉬움도 소설 속에서 그려진단다. 그 중에 <담배>라는 아주 짧은 소설 속에서 담배를 피지 않는 아빠조차도 담배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히 느껴지더구나.

======================

(26)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

 

1.

, 그러면 이번 소설집에서 몇 편을 소개해 줄게. <오스틴> 어떤 파티에서 정말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났단다. 그런데 아이가 있는 이는 주인공뿐이었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세월에 묻어나 많이들 변하고 생각하는 것들도 달라져서 한 십대 소년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서로 다름을 느끼게 되었단다. 젊은 시절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있던 친구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거쳐오면서 생각들도 많이 달라진 것 같구나. 아빠가 최근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든 생각이었는데, 아빠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

<첼로>라는 소설은 데이비드와 내털리라는 부부의 이야기인데, 첼로 연주자였던 내털리에에 어느날 파키슨 병과 관련 있는 증상이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단다. 소설에서는 파킨슨 병까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중년의 나이에 몸에 나타나는 증상에 예민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춰 소설은 그려졌단다. 이것 또한 공감이 많이 가더구나. 아빠도 몇 달 전에 건강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있어서 재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별의 별 생각을 다 했던 생각이 떠오르더구나. 사십 대가 되면 영양제를 더 찾고 그렇게 되는 법이지.

...

<라인벡>. 리처드라는 주인공에게 20년지기 친구들인 데이비드와 리베카가 있단다. 그런데 데이비드와 리베카는 부부 사이야. 그리고 리처드는 독신이고... 그들은 무척 친해서 늘 이웃에 함께 생활을 해왔는데... .. 그림이 그려지니? 이런 관계는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 소재인데 말이야.. 이 소설은 어떻게 끝은 맺었을까?^^

....

<숨을 쉬어>. 주인공의 어린 아들이 수영장에서 빠져 죽을뻔한 사고가 있었단다. 이 일로 주인공이 트라우마로 공황장애를 겪기도 했어. 아이가 가끔씩 큰 기침만 해도 그때마다 아버지는 공황장애에 빠지는 이야기였는데,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지? 기억이 벌써 가물하네.

...

<실루엣>. 스티브와 에이미는 부부 사이. 스티브와 폴은 친한 친구 사이. 폴과 일레인은 부부 사이. 그런데 스티브는 정년교수직 임용에 8:7로 떨어지고 말았어. 그런데 그 심사위원 중에 폴이 있었고, 폴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것에 강한 의심이 있었고, 정황도 있었어. 폴과 스티브는 여전히 가까이 지내지만, 스티브의 마음 속에서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폴의 집에 방문했을 때, 폴의 집에서 기념품 등 소소한 물건들 이것저것을 슬쩍 집어왔단다. 어느날 그들의 친구 게릿의 부부까지 세 쌍이 함께 파티를 하게 되었는데, 게릿의 아내 린지가 임신을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아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일레인이 임신을 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일행들.. 이런 것도 공감이 많이 갔어. 아빠도 아이가 없는 친구가 섞여 있는 무리에서 이야기를 할 때 조심을 하게 된단다. 스티브와 게릿과 단 둘이 있을 때 자신의 임용 결과에 폴이 반대를 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자, 게릿은 폴이 스티브를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면서 스티브가 임용이 안 된 것은 폴 때문이 아니라 논문이 부족했기 때문일 거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렇지.. 교수 임용이 안되었다고 하면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야지.. 남을 탓하고 있는 수준이니 교수 임용이 안 되었을 수밖에...

...

<>. 이 소설은 주인공과 별거 중인 아내 알렉시스의 이야기란다. 딸 리아는 주인공과 함께 지내는데, ‘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라 그런지 아내 알렉시스가 참 못 되게 나오는구나. 알렉시스가 우울증을 겪고 있긴 하지만, 딸의 행사에는 참석해 주었으면 했는데, 약속하고 오지도 않고, 여러 번 딸 리아에게 상처를 주더구나이 소설은 남편 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인데, 아내 알렉시스 관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쌍방의 문제, 특히 남녀의 문제는 둘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봐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야.

<히메나>. 이 소설은 주인공 와 아내 칼리의 이야기란다. ‘는 현재 무직이고 상속으로 받은, 많지는 않은 돈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준비하고 있고, 아내 칼리는 직장에 다니고 있단다. 그들이 살고 있는 건물에 히메나라는 예술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살고 있었는데, ‘는 히메나와 안면을 튼 이후 많은 시간 히메나와 노가리나 풀고 있었어. 그런 시간들이 쌓여 둘 사이는 애매한 사이가 되었어. 히메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는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는 스스로 선을 넘지 않았다고 위안을 삼는 듯 했어. 그러면서도 찔렸는지 아내에게는 히메나의 일을 비밀로 했단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내 칼리도 히메나와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거야.. 이런 관계의 끝도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지만, 선을 넘지 않고 비밀을 지켰다는 이유로

마지막으로 실린 작품이 소설집의 제목으로도 쓰인 <사라진 것들>이란다. 이 소설도 유부남으로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다가 결국은 선을 넘지 않는 그런 소설이었어. 주인공 와 타냐는 부부 사이이고, 그들에게는 친구 대니얼이 있었어. 그런데 대니얼이 트레일 도중 실종되고 말았단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도 찾질 못해서 장례식도 했단다. ‘는 장례식을 마치고 집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대니얼이 살던 집에 갔어. 대니얼에게는 여친 앙투아네트가 있었는데, 앙투아네트가 홀로 집정리를 하고 있었어. ‘는 대니얼의 집에 이틀간 머물면서 앙투아네트와 집정리를 하면서 대니얼을 추모했는데, ‘와 앙투아네트는 서로 이상한 감정이 생겼어. 어쩌면 그들은 그 동안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나타난 일탈인가 싶기도 하고하지만 앞서 이야기했지만 선은 넘지 않았단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40대 유부남인데 이삼십 대의 뜨거웠던 열정이 조금은 식은 시기불 같은 사랑보다는 안정적인 가정을 추구하라는 시기그래도 내적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주인공들을 느낄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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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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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앤드루 포터는 사십 대 유부남의 심리를 잘 파악한 것 같았어. 앤드루 포터의 약력을 보니 1972년생으로 이제는 오십 대가 되었구나. 이젠 오십 대 남자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으려나?^^ 다음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오십 대 남자들이 차지하려는지 지켜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며칠 전 밤에 오스틴 인근 웨스트레이크힐스에서 열린 파트에서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뒷마당 야외 화로 주위에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는 옛친구들을 발견했다.

책의 끝 문장: 이 순간이 계속되는 척할 반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히, 하지만 둘이서 함께 물에 뜬 채로 누워 있을 반시간,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이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며 깨닫기 전까지의 반시간.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나는 늦은 밤이 의자에 앉아 나 자신에게 종종 그런 질문을 하고 술을 홀짝이며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벽 바로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더욱 거대한 부재의 울림이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이런 기분을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쇼팽 음악에 집중했다. 이제는 다른 곡이었다. 녹턴,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 - P21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 P92

모두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입김을 불고 있고, 우리의 숨결은 안개처럼 공기 중에 서린 채 멈춰 있다.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그날이 언제였는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 P126

"아까 애들 얘기할 때 말이에요. 내가 하지 않은 말이 있는데, 아이들이 있으면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잡다한 데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나요?" 개릿이 나를 보았다. "애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경력에 온 신경을 쏟았는데-정말로 그 생각밖에 안 했는데-그러면 너무 비참해졌죠. 그런데 지금은 전혀 신경 안 써요. 그 사소한 문제들, 알잖아요, 그 자잘한 문제들-학과 내 정치라든가 그런 것-그건 그냥 잊게 돼요." - P187

이 식당 밖의 세상에서 내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 집에 어린아이가 둘 있어서 아내와 나는 잠을 거의 못 자고 심지어 대화도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이 식당에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사십오 분 동안 수프를 먹고 신문을 읽고 가끔은 와인을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식당은 어둡지만 편안했고, 배경음악은 주로 경쾌한 어쿠스틱 멕시코 음악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온 오래된 곡들이었다. 손님들도 대체로 나이가 많거나 그렇게 보이는 이들, 모르긴 해도 이십 년, 삼십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들었을 사람들이었다. - P232

그해 봄에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한층 실감했다. 물론 거울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느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젊은이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의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가장 큰 슬픔은 바로 그런 인정의 부재에서 왔던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현실,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실이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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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한편 나는, 특이나 당시의 나는 구식이든지 신식이든지의 형식을 떠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도 비관적인 인식을 품고 있었다. 작품으로는 모든 장면과 대사에서 열렬한 사랑을 웅변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사랑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이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돈을 훔친 자도 사랑 때문, 사람을 납치하여 죽인 자도 사랑 때문, 사기 치고 배신하고 강제로 간음하고 교묘히 미치게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이 모두 사랑을 근거로 할 수 있는데, 한때는 인륜을 저버리게 할 만큼 막강하였던 동기가 별안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조화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102)

옛말에 초상난 절에 중은 많다고 하였던가.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후일 이 망국의 수도에 이렇게도 많은 예술가가 날 줄을 미리 내다보았을까. 수도라고 해도 기껏해야 인구 20만 안팎에다 토지 대부분이 날것으로 남아 있는 열악하고 초라한 도시. 그러한 경성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예술가연하고 있었다. 그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몇몇은 필연 거짓되이 예술가 시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란 의심을 해봄 직했다. 때로 내게는 경성 전체가, 나아가 조선 전체가 거짓의 전당처럼 느껴졌다. 가엾게도 스스로가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예술가가 아닌 자신을 예술가라 믿으며 살아가는 어릿광대의 노릇.

 

(215)

탈이란 즉 가면, 마스크, 얼굴 위에 얼굴. 그것의 사용은 본디부터 극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중세까지는 배우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지 않는가. 가면이 역할의 은유가 아니라 역할 그 자체였던 시대를 지나, 인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배우들은 가면을 벗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것이 극의 혁명이었을 것이다. 구극이 기껏 벗어던진 가면을 신극이 다시 한번 집어 들게 된 것은 그것을 언제든 벗을 수 있게 되어서다. 과거에는 가면을 벗는 것이 금기였으나 오늘날 가면을 쓰는 것은 금기가 아니며, 한때의 금기마저 연출의 한 소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신극. 또한, 이러한 예술적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나 정도밖에는 없지 않나 하는 자부에 나는 심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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