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류시화 님의 신간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책 이야기를 해줄게. 류시화 님은 시인이지만, 시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수필도 많이 쓰신단다. 아빠도 류시화 님의 산문집을 여러 권 읽었는데, 새로 산문집이 나와서 무척 반가웠단다.

아빠가 책을 읽을 때 좋은 구절이 나오면 해당 페이지를 책 앞면지에 적어두고 그것을 타자기로 다시 한번 두들기면서 마음에 새기는 독서습관이 있어. 나중에 이 책을 다시 펼 때도 앞면지에 적혀 있는 페이지만 간단히 읽어볼 수도 있고그런데 지금껏 류시화 님의 책의 앞면지에는 늘 많은 페이지가 적혀 있었단다. 이번 책은 어땠냐고? 이번 책도 시작부터 계속 페이지 적느라고 앞면지와 읽고 있는 페이지를 오갔단다. 시작부터 마음에 새겨야 할 글을 던져주었는데, 공부하기 힘들어 하는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겠구나.

===================

(12)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

책 제목이 책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책도 책 제목만 읽어도 힘을 얻게 되더구나. 책 제목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는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수필의 제목과 같은데, 실패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었을 때 지은이가 건네주고 싶은 말인듯했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

아빠도 젊었을 때는 왜 인생이 이렇게 안 풀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많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공자가 왜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을 이야기했는지 조금씩 이해가 가더구나. 인생은 내가 생각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진리. 문득 이 글을 읽다가 작년에 너희들과 많이 들었던 아이브의 <I AM>이라는 노래 가사도 생각나는구나.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어도 차라리 날아올라 그럼 네가 지나가는 대로 길이거든.’

===================

(19)

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기 삶의 심리학자가 되지 못할까?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


1.

아빠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좀 예민한 사람들이잖니. 예전에 읽은 책 일레인 N. 아론의 <타인보다 더 민감한 사람>이라는 책을 비롯하여 민감하고 예민한 성격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내용에 힘을 얻기도 했는데, 류시화 님의 글에서도 앙리 마티스의 말을 빌어 예민한 사람이 더 세상을 심층적으로 보고 감응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예민한 성격으로 인해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기를

===================

(31)

예민한 영혼으로 태어난 것은 신의 실수가 아니라 축복이다. 관계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예민함은 바로잡아야 할 심리 상태가 아니라 특별한 재능이다. 섬세한 감각으로 다른 이들의 놓치는 현상의 이면을 보고, 울림 있는 내면세계를 가지며, 문학과 예술에 감동받는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뛰어난 감응력을 갖는다. 예민한 사람은 그 예민함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지만 그 예민함 덕분에 세상을 더 심층적으로 바라본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 꽃이 보인다. 화가 앙리 마티스의 명언이다.

===================

사람은 후회의 동물인 것 같구나. 결혼을 고민하는 이에게 결혼을 해도 후회이고 안 해도 후회이니 하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있단다. 이렇듯 어떤 것을 함에 있어 해도 후회할 것 같고, 안 해도 후회할 것 같은 경우가 있을 때 너희들은 어떻게 할 것 같니? 류시화 님께서는 해 버리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특히 너희들처럼 청소년들은 처음 해보는 것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류시화 님은 해 버린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고,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고 말씀하시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빠 경험상 정말 그랬던 것 같구나.

===================

(122-123)

해 버린 일에 대한 후회는 날마다 작아지지만, 하지 않은 일의 후회는 날마다 커진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생의 저녁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하지 않은 일이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시키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한 삶인데도.

===================

너희들은 자라면서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 중에는 너희들의 직업과 관련 있는 일도 있겠지. 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그것들을 모두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란다. 평행우주가 있고, 그 우주에 있는 나와 소통을 할 수 있다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다른 길을 간 나를 볼 수 있겠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지가 않네. 많은 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가끔은 잘못된 길인가, 하면서 다른 길을 선택을 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그 잘못된 길에 나를 맞추면서 가는 경우가 있단다.

나에게 맞지 않는 상자에 나를 맞추고, 나에게 맞지 않는 길에 나를 맞추는 일이 책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단다. 상자 안이 맞지 않으면 상자 밖으로 나오라고, 죽지 않는다이 충고는 아빠가 생각하기에 이삼십 대 젊은이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빠의 경우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 지금 하는 일들이 맞지 않는 옷을 입을 기분이 많이 들었어. 결국 아빠는 그 옷들을 벗지 못했지만 말이야. 이제는 그 옷이 편안해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 옷에 아빠를 맞춘 것 같구나.,

===================

(186-187)

사람들은 상자 안에 살면서 그 상자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문제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수성이 날카롭고 낯가림이 심해 사회 적응자처럼 살아갈 수 없을 때, 아무리 해도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에 접근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상자 안에 맞지 않으면 상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나간다고 죽지 않는다. 강물은 강폭이 좁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넘쳐 자신의 길을 만들 뿐이다.

세상의 기분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한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자신을 그 사람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 미움받는 것이 덜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실 적응자가 되지 말고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


2.

아빠는 계획하지 않고 무작정 떠난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민한 성격이라서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은데, 그렇다 보면 실패를 맛보는 경우도 있단다. 하지만 그 여행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여행을 간 것을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 실패를 통해서 얻은 값진 경험들이 있으니계획을 잘 짜고 그것에 맞춰 떠난 여행도 아빠는 참 좋더구나.  그런 여행도 계획과 틀어지면서 실패를 겪기도 하지만, 아빠의 계획 속에서도 그런 실패도 고려되어 있기 때문에 플랜 B를 향해 나아간단다. 여행은 무엇이든 옳다..

===================

(240)

나는 곳 그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그 후 두 사람이 어떤 여행을 펼쳐 나갔는지 알지 못한다. 낯선 여행을 주저하던 여성도 잘못된 여행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배낭끈을 단단히 여미고 떠났을 것이다. 훗날 자신의 여행을 뒤돌아 볼 때, 망설이며 시간을 보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여행이 불완전한 자유라 불리는 이유는 여행은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길들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실패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여행이 아니다.

===================

류시화 님은 재미있는 우화도 많이 알고 계시는데, 이 책에서 소개해준 우화 중에 기억하는 우화가 하나 있어. 속 좁은 아빠가 귀담아 들으면 좋을 것 같았어. 어떤 힘든 일이나 불행한 일이 생겨도 그것을 담는 그릇이 크다면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가르침. 아빠도 그릇을 키워야겠구나. 주식이 폭락해도 의연할 수 있는 큰 그릇^^

===================

(247-248)

어느 날 스승이 그를 불러 물 한 잔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그 물에 소금 한 줌을 타서 마시게 하고는 물었다.

물 맛이 어떤가?”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근처 호숫가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맑은 호수에 똑 같은 소금 한 줌을 뿌리고는 호수의 물을 한 모금 맛보게 했다. 물맛이 어떠냐고 묻자, 제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원합니다.”

짜지 않느냐?”라는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전혀 짜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차이를 알겠는가? 불행의 양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어디에 담는가에 따라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되지 말고 호수라 되라.”

===================

이상으로 아빠가 발췌한 글들 중에서 특히 좋았던 글들을 소개해 주는 것으로 독서편지를 마쳐야겠구나. 이 책에는 아빠가 소개해준 글들 이외에 대부분의 글들이 너무 좋았단다. 이 책은 이삼십 대 때 읽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너희들도 굳이 이 책을 읽을 거면, 좀더 기다렸다가 이십 대 되어서 읽어보면 좋겠구나.

그나저나 류시화 님은 어떻게 끊이지 않고 좋은 문구들을 생각해 내시는 걸까. 보물단지라도 갖고 계신가. , 오늘은 여가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J.D.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책의 끝 문장: 저의 인생 영화에 독자로 등장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저 역시 한 번쯤은 당신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아픔이 너무 크다). 신도 내가 생각한 신이 아니다(때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 P18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친절은 상담료를 받지 않는 심리치료이다. 칼 융이 말했듯이, 모든 이론을 알고 심리 기법에 통달한다 해도 한 인간 영혼을 대할 때는 단지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했다. 상실의 깊이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상실감은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 P44

때로는 온 존재가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라는 굳센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불행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우는 인간이 아니다. 단지 우는 순간, 웃는 순간이 교차할 뿐이다. ‘불행한 사람, 화난 사람, 과거의 어떤 사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 P103

반복해서 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특출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의 결과이다. 창조적이 되는 비밀은 ‘창조적이 될수록 더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미국 팝아트 선구자 앤드 워홀은 말했다.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완성하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게 두라. 그들이 결정하는 동안 더 많은 작품을 만들라."
- P130

그렇다. 한 가지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길을 ‘가지 않은 길’로 남겨 두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선택인 동시에 포기의 길이다. 나는 결국 시인의 무화과를 선택했고, 특파원이나 사진작가나 다른 멋진 미래들은 신문지처럼 접어 안쪽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은 단지 열 편이나 스무 편의 시를 쓰고 나서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글을 써야 함을 의미했으며, 정오부터 저녁까지 다음 글에 대해 고민해야 함을 의미했고, 병원 신세를 지든 자신의 예민함에 질리든 단어들을 수정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 P191

‘사람들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죽으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긍정적인 감정이 좌뇌에서 간단히 처리되는 반면에 부정적인 감정은 우뇌에서 훨씬 많은 분석과 사고 과정을 거친다고 뇌신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감정보다 불쾌한 감정과 사건을 묘사할 때 더 논리적이고 강한 말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달한 우뇌는 부정적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 그것이 인간 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동화가 필요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 - P218

통증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증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고, 그 통증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일이다. 트워스키 박사는 말한다.
"불편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시간들은 당신이 성장할 시기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신호이다. 이 역경을 제대로 활용하면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 P23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4-05-10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민하다는 것은 더 많은것을 느끼고 볼 줄 안다는 것에 강력 공감합니다. ^^

bookholic 2024-05-10 23:1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그 말에 공감도 되고, 위안도 되고 그랬답니다~~^^
바람돌이 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23)

세상에서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성교육 전문가가 누굴까? 바로 양육자.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내 아이에게만큼은 꼭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해주고 싶을 것이다. 양육자는 자녀에게 올바른 성 개념과 가치관을 심어줄 의무가 있다. 가치관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삶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 무엇이 좋고, 옳고, 바람직한지를 판단하는 관점이다. 양육자는 자녀가 성을 바라보는 판단의 기준을 잘 세우도록 가르쳐주어야 한다.


(55)

양육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울지 마. 남자는 씩씩해야 해.”

착하기만 한 남자는 매력 없어.”

너는 꼭 여자처럼 행동하는구나.”

남자인 네가 참아야지.”

남자가 그렇게 힘이 약해서 어떡하니.”

남자는 돈을 벌어 가정을 책임져야 해.”

남자가 비겁하게.”

남자애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야.”


(62)

자기 몸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신을 바로 알고 사랑할 수 있을까? 성교육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이다. 성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바로 그 출발점이 내 몸과 소중한 곳에 대해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따라서 양육자가 아이에게 소중한 곳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이제부터 양육자가 아이에게 음경이라는 성기의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자.


(79-80)

성기가 커지고 꼿꼿해지는 것을 발기라고 한다. 발기는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경험한다. 남자의 성기인 음경 속에는 뼈가 없다. 대신 스펀지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해면체라고 부르는 조직이 요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평소에 보고, 느끼고, 냄새 맡거나 상상하면서 뇌가 자극될 때 뇌에서 명령을 내리면 음경에 피가 모여든다. 해면체에 피가 가득 차서 혈관이 확장되면 발기가 일어난다. 음경 주변의 근육이 긴장하게 되고 음경이 딱딱해지는 것이다. 고무장갑에 물을 넣으면 크기가 커지고 단단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보면 된다.


(98)

이렇듯 잠자리 분리는 너무 성급하게 하지 말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따뜻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 아이와 따로 잔다는 것은 단순히 잠자는 공간을 분리하는 것을 너머 아이만의 독립된 공간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아이가 개인적이고 독립된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리랑 8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조금만 방심하면 밀린 독서편지가 쌓이게 되는구나. 연휴 후 첫날이라서 좀 피곤하지만, 밀린 독서편지를 생각하니 컴퓨터를 켜야겠더구나..^^ 빨리 오늘 하나를 끝내야겠다. 오늘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8권을 이야기해줄 차례구나. 바로 시작할게.

8권의 이야기는 합방된 지 15년이 지난 후부터, 그러니까 1925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의열단에 가입한 방대근은 상하이로 왔단다. 다른 의열단 단원인 윤주협, 이상태와 함께 작전 수행을 위해 국내진입 작전을 지시 받았어. 의열단원들은 자신의 임무가 곧 삶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을 벌이기 전에 멋진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곤 하는데, 방대근, 윤주협, 이상태도 함께 사진을 찍었단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다들 멋진 젊은이로 사랑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에 열정을 쏟을 텐데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을 하고 있단다.

방대근이 걱정하는 것은 국내 잠입 임무를 하다가 죽으면 양치성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되는 것이었어. 그만큼 방대근에게 양치성은 철천지 원수였던 거야. 국내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방대근은 국내에서 비밀 활동중인 김철호와 접선을 한 후, 군산으로 가서 손판석 아저씨를 만났단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에 보름이 누나를 만나게 되었어.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에 만남인가. 대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만주에 수국이 누나가 있다는 이야기도 전하며 정말 오랜만에 회포도 풀었단다.

이렇게 방대근의 이야기로 8권은 시작했단다.


1.

군산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어. 외눈박이 백남일 생각나지? 백남일은 정미소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삭감해 버렸단다. 그러자 정미소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어. 그러자 백남일은 다른 사람들을 채용했단다. 그러자 노동자 연합 조합에서 채로 채용한 사람들을 몰아내고, 백남일의 정미소 노동자와 함께 농성을 했단다. 백남일이 경찰에 신고하여 농성하던 노동자들은 경찰서에 갇히게 되었어. 노동자들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것은 다 노동자들 뒤에서 고서완, 정도규, 유승현 등이 알려준 대로 한 거야.

다음날, 백남일의 정미소에 또다른 노동자들이 와서 농성을 하고 또 경찰은 농성한 노동자들을 경찰서에 가두었어. 그렇게 되자, 일본 사람들이 경찰서에 와서, 자신들의 노동자들을 경찰서에 가두어 자신들 정미소가 제대로 안 돌아간다고 항의를 했단다. 일본인들 사장들이 와서 그렇게 항의를 하니 경찰들도 노동자들을 어쩔 수 없이 풀어주었어. 백남일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정미소의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고 눈물을 머금고 임금 삭감은 없던 일로 했단다. 고서완, 정도규, 유승현의 작전 승리로구나. 노동자들도 이번 동정파업의 성공을 겪고 고서완, 정도규, 유승현 등의 공산주의 사상을 더 따르게 되었어.

한편 박건식은 3.1운동 후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고향을 떠나 목포까지 내려와 힘들게 지냈단다. 건식의 어머니 대목댁은 손주의 학비를 조금이라도 보태겠다고 행상을 했는데, 그만 일본 순사들이 강압적인 폭행에 허리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단다. 방에서 꼼짝 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 효자인 건식은 어머니 병을 치료하기 위해 빚까지 써가면서 약을 쓰고 치료했지만 대목댁의 상태는 더욱 안 좋아졌단다. 집안 사정이 안 좋은데 자신 때문에 더 안 좋아지게 되자 대목은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마지막으로 아들의 출근길, 손주의 등굣길을 배웅해주고, 며느리가 집을 사이 한 많은 삶을 스스로 끊고 말았단다.

7권의 마지막에서 차득보는 동생 옥녀를 다시 만났잖아. 이제 차득보는 옥녀와 함께 지냈단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동생을 만나 다시 지내고 있지만, 차득보의 마음 한 켠에는 늘 찬 바람이 불었단다. 자신이 사랑했던 월엽이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았기 때문이야. 아직도 월엽을 잊지 못하는 차득보는 시간만 되면 월엽이 사는 마을에 가서 멀리서나마 몰래 월엽을 보고오곤 했단다. 차득보의 심정은 이해가 가긴 했지만, 이젠 깨끗하게 잊을 때도 되었고, 그의 행동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되었던 거야. 보다 못한 공허 스님은 차득보의 행동에 대해 차득보에게 크게 혼을 냈단다. 그제서야 차득보도 정신을 차린 듯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어. 공허 스님은 그렇게 혼을 내면서도 차득보와 어울리는 짝을 찾아 주기로 했단다.

옥녀는 돈을 벌기 위해 남원에서 열린 소리대회에 참가하여 일등을 했단다. 그렇게 번 돈은 오빠에게 주고 논을 사라고 주었어. 차득보는 동생의 그런 마음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느끼며 논을 사서 생활 형편이 나아졌단다. 아무래도 자작농보다 자립농이 훨씬 나았지.


2.

동경에서 유학중인 송중원은 친구인 허탁과 함께 공산주의 모임을 참가했어. 당시 일본에서는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선언하고 엄중한 감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임은 늘 비밀리에 이루어졌단다. 동경 유학생 중에 이경욱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도 공산주의 모임 멤버였어. 이경욱을 전에도 한번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이경욱은 악질 친일파 이동만의 아들인데 이경욱은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친일파 아들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던 사람이야. 그래서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더욱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했단다.

어느날 허탁이 실수로 일본인 아이를 자전거로 쳐서 다치는 일이 일어났어. 일본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친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력해서 경찰서에 갇힌 채 며칠 동안 나오질 못했단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의 동료 유학생 박영애는 자신이 해결하갰다고 큰소리를 쳤고, 정말 며칠 뒤 허탁이 풀려나게 되었단다. 철없는 유학생 캐릭터인 박영애의 집안은 엄청난 배경이 있는 것 같더구나.

하와이 상황도 이야기해줄게. 하와이 노동자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소식이었단다. 교포들이 모은 독립자금을 자신이 착복했다는 것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유로 탄핵되었다는 소식이었어.

=====================

(126)

임시대통령 <리승만>의 범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4장 제21조 제14항에 의하여서 탄핵 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함.

<리승만> 범과의 사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지 7년에 임시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정부의 행정을 집정하지 않었고 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하고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포하여서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반항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은 그 직임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갖이고 임시 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간주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 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하였아.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미주에 앉어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 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단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제출하지 않어서 재정 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아지 못하게 하였다.

.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 정부의 고립상태를 주출하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서 파쟁을 계속 하므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

이 소식은 하와이 노동자들을 분노케 했단다. 그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나라를 위해 모은 성금을 자신이 꿀꺽 했으니 그 심정들이 이야기가 갔단다. 그들의 울분을 누가 달래줄 것인가. 이승만에 대한 그들의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단다.

=====================

(132)

최고로 많이 배워 박사라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아니,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이란 자기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 아닌가? 그 일이 어렵고 장해서 뼈빠지게 번 돈을 아낌없이 내놓지 않았던가? 우리같이 무식한 것들도 다 아는 그 일을 이승만이란 사람은 몰랐는가? 그 유식하고 유식한 사람이 몰랐을 리가 있는가? 그런데 왜 독립자금을 제멋대로 범포해 버린 것일까? 그게 도대체 어찌 된 맘보일까? 그 사람은 독립운동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것인가? 어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많이 배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이승만 같은 사람은 또 없을까? 개는 믿어도 사람은 못 믿을 짐승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 아닌가?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

그런 이승만으로 추종하던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있었지. 남용석의 아내였던 말녀. 말녀는 이름도 선미로 바꾸었단다.. 선미의 불성실한 태도와 남편을 무시하는 행동은 방영근의 따끔한 훈시에도 먹혀 들지 않았어. 결국 남용석과 선미는 이혼을 했어.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선미는 남용석으로부터 계속 위자료를 받아내고, 혹시 한 달 위자료를 보내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여 남용석은 경찰서에도 여러 번 갔었단다. 그들이 이런 결말에 방영근도 남용석에게 무척 미안해했단다. 이 결혼이 성사되는데 방영근이 큰 역할을 했으니 말이야. 남용석은 계속된 선미의 괴롭힘에 결국 선미를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비극이 되었단다.


3.

다시 독립운동이 활발한 만주 이야기를 해줄게. 송수익과 지삼출은 대종교 모임에 참가했어. 대종교 모임은 겉으로는 종교 활동인 것처럼 보였지만,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었어. 당시 만주에도 젊은 층 중심으로 공산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이전에도 공화주의 노선과 복벽주의 노선으로 대립이 있기도 했단다. 거기에 공산주의까지 또 생긴 격이니 독립운동 노선 갈등은 더 심해졌단다. 송수익은 왕을 다시 세우자고 하는 복벽주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어.

=====================

(149-150)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가 끝내 합일체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걸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이라거나 독립운동 세력의 파쟁이라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들을 내걸고 나라를 되찾자는 것은 나라를 탈취한 자들만 원수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자들의 잘못까지도 단죄하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목숨 바쳐 되찾은 새 나라의 국체는 마땅히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주의가 아니고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복벽주의자들은 또 나라 빼앗긴 죄인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망동이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한 절대적 의미는 국체를 공화주의로 세운 것이었다.

=====================

양치성으로 도망친 수국이는 서간도에서 다시 생활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양치성의 수하가 와서 수국이와 함께 있던 솜리댁(천수동의 아내)를 납치해 갔단다. 양치성의 목표는 오직 수국이었기 때문에 솜리댁은 중간에 그들에 의해 죽고 말았어. 수국은 기회를 보고 있다가 자신을 데리고 가던 놈을 죽이고 다시 탈출해서 돌아왔단다. 양치성이란 놈은 천벌을 받아야 할 텐데.. 그때 양치성은 군산에 와서 송수익 가족을 들쑤셨단다. 만주에서 송수익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양치성은 송수익 가족들을 하나둘 경찰서에 잡아서 고문을 했단다. 송수익의 장남 송중원은 모진 고문에도 끝내 송수익에 대해 불지 않아 1 6개월형을 받아 감옥에 투옥되었단다. 송수익의 아내 안씨는 모진 고문으로 중풍에 걸리게 되었고, 정신도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었어. 송수익의 차남인 송가원과 중원의 아내인 하엽이 안씨를 보살펴드렸지만, 안씨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단다. 송수익의 친구이자 사돈인 신세호도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나와 몇 달 동안 꼼짝달싹하지 못하다가 몇 달 만에 겨우 거동을 할 수 있었단다.

삼형제의 이야기도 해주어야겠구나. 정재규는 여전히 도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땅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정상규는 소작인들을 쥐어짜면서 논을 점점 불려가고 있었고, 특히 형 정재규가 내놓은 땅을 몰래 사고 있었단다. 정도규는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소작인들과 노동자들 배후에서 소작쟁의와 파업을 일으키고 있었단다.

한편 악덕 친일파 이동만은 55세 생일 잔치를 크게 벌였단다. 아들 이경욱은 아버지의 이런 행동을 크게 불만을 갖고 있었지. 이동만은 일본의 주요 인사들도 초대하고 노래패들도 불러서 공연을 했는데, 이때 옥녀가 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자리에 있던 경욱은 옥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단다. 하지만 옥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은 경욱뿐만 아니라, 이동만도 반하고 일본인 사찰과장 고마다도 반했단다. 고마다는 어떻게든 옥녀를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마음먹었어. 돈을 계속 올려 불렀는데 옥녀는 한결같이 거절을 했는데, 결국 득보를 감옥에 처넣고 옥녀를 협박했단다. 결국 득보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옥녀는 자신의 정절을 고마다에게 빼앗기고 말았단다.

이경욱은 대학 졸업 후 판검사 되기 위한 고시 준비를 했어. 그런데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껄끄럽게 생각했는데 스승 고서완의 조언, 그러니까 판검사가 되어 조선 백성들을 위해 힘을 써 달라는 말에 이경욱은 고시 준비를 하게 돼. 하지만 이경욱의 머릿속에는 온통 옥녀가 가득 찼단다. 사라진 옥녀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독공하러 지리산에 들어갔다는 소식뿐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몰랐어.


4.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나타났으니, 바로 중국 내부 사정이란다. 중국은 공산주의 바람이 크게 불어 광동에서 중국공산당 혁명이 일어났고, 이는 중국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공산주의자들도 많이 참가했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참가를 했는데,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광민과 윤철훈도 참가를 했단다. 그런데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은 이 중국공산당 혁명을 쿠데타로 선언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게 되었어. 이렇게 되자 이에 참가했던 조선공산당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어. 윤철훈은 다시 연해주로 가기로 했고, 이광민은 상해에서 남기로 했단다. 그리고 방대근을 소개로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기로 했어.

송중원은 친구인 허탁도 중국공산당 혁명 운동에 참가했었는데 국내로 돌아가기 전 만주에 들러 송중원의 아버지 송수익을 만나게 되었단다. 송수익에 어쩔 수 없이 식구들의 안 좋은 소식을 전했는데, 아무 표정 변화 없던 송수익은 밤에 혼자 만주 벌판에서 몰래 흐느껴 울었단다. 독립운동가 이전에 평범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거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점점 어려워졌단다. 특히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이 조선총독부와 손을 잡고 조선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점점 독립의 길이 험난해주고 있구나.

=====================

(292-293)

만주를 지배하는 봉건군벌 장작림은 조선총독부와 2년 전에 삼시협정을 체결하고 만주의 조선사람들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4월에는 혼란한 정국을 틈타 중앙권력을 장악하려고 대병력을 이끌고 북경을 치고 들어갔다. 뒤이어 국공합작으로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장작림은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의 세력권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없애라는 소탕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만주에서는 폭력과 체포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사람들은 그 거친 바람에 심하게 휘말렸다. 조선사람들 중에 공산주의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중국경찰들은 조선사람들을 걸핏하면 잡아가고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조선독립을 놓고 한동안 우호적이었던 관계가 깨져나가고 있었다. 특히 부패한 중국관헌들은 공산당 일소를 빌미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며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 돈을 받아먹고는 풀어주었다. 타락한 관헌들에게 공산주의자 소탕령은 더없이 좋은 치부의 기회였다. 그런데 중국관헌들의 그런 횡포에 대해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독립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땅에 머무는 처지에서 총질을 했다간 그나마 발붙일 곳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신속하게 뒷손을 써서 잡혀간 사람들을 빼내는 정도였다.

=====================

여기까지가 대충 <아리랑> 8권의 이야기란다. 아빠가 피곤해서 짧게 하려고 했으나, 하다 보니 오타 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에 힘이 생기는구나.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는 늘 이렇게 가슴 아프고, 화가 나는 일들만 있구나.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라를 위해 애쓰시던 분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고 생각한단다. 유명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와 독립의 밑거름이 된 분들께 늘 고마움을 잊지 말자꾸나..

,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상해는 분명 중국땅이었다.

책의 끝 문장: 그에 맞서기라도 하듯 조선총독부에서는 사상운동의 단속을 더욱 강화하는 내용으로 치안유지법을 개정했다.


"예, 이제 하는 말이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취조와 재판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그때 많은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33인 중에서 고문을 끝까지 꿋꿋하게 이겨내고, 재판정에서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내세운 사람은 한용운 선생 한 분뿐이었다는 게 참 충격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꺾였다는 것에 놀랐고, 만약 내가 그 처지였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나도 두려움에 떨며 꺾였을 것인가, 아니면 한용운 선생처럼 꿋꿋했을 것인가, 많이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용운 선생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꺾이고 말 것 같기도 했고, 영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보다는 꽤 강해진 것 같습니다만, 변절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를 살펴보곤 하게 됩니다." - P57

"보시오 지 동지, 어디 독립운동을 독립군만 하는 것이오? 이 만주땅에 조선농부들이 없고서야 독립군들이 어찌 있을 수 있소. 농부들이 피땀 흘려 뒷바라지하니까 독립군들이 앞으로 나서서 싸울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내가 늘상 하는 말이지만, 농부들도 독립운동을 하는 거란 말이오. 다람 앞으로 나선 것하고 뒤에 있는 것하고 차이가 있을 뿐이오. 또 독립운동이 어디 한두 가지요? 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소학교 선생을 하겠소? 우리 대종교 활동은 또 뭐요? 친일모리배들을 빼놓고는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만복이도 제 능력에 맞춰 일을 고르면 될 것 아니겠소. 공부에 더 열중하게 해서 소학교 선생을 시켜도 좋고, 대종교 일을 보게 해도 좋지 않겠오?" - P144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그런데 왜 중국의 싸움에 나섰겠는가. 그건 전체 아시아사람들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다. 전 아시아사람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차별없이 잘살려면 중국에서는 군벌들을 타도해야 하고,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무찔러야 한다. 지금 2천만 조선사람들은 우리가 중국군벌을 타도하고 조선으로 오기를 기다리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자아, 당신들은 어째야 하겠는가. 군벌들은 당신들의 재산과 곡식을 빼앗아갔고, 탄압하고 괴롭혔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의 원수인 군벌들을 없애려고 총을 들고 나섰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를 도와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당신들의 편이다." - P2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2)

고고학은 쉽게 설명하면, 유물을 연구해서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지식, 문화 등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렇게 과거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을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건 바로 과거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인류의 진화하는 숙명에 기인한다.


(44)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고학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보물찾기의 실상은 사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넣어놓은 마지막 선물이다. 죽은 자를 위한 선물 그리고 영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를 무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사약, 나아가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는 인간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모두 영생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대신 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삶에 대해 더 배우게 된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바람과 체념이 녹아 있는 기념물이 바로 무덤이다.


(66)

5000년 전 중국에서 새로운 술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술, 맥주다. 스탠포드대학교 고고학자 류리는 20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최신의 분석방법으로 중국 최초의 맥주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섬서성 웨이허강 유역의 5000년 전 양사오 문화에 속하는, 실크로드가 중국으로 오는 끝자락인 미자야 유적에서 밑이 뾰족하고 주둥이도 좁은, 양조를 하기에 적당한 토기를 발견했고, 그 바닥에 남은 곡물의 찌꺼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양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수, 율무, 식물의 구근 덩어리 그리고 보리가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단순하게 곡물을 담는 항아리였다면 이들 재료들을 같이 넣을 리가 없다. 맥주와 같은 술을 빚지 않고는 이 곡물들이 같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중국에서 가장 최종의 맥주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보리는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 이는 바로 5000년 전에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86-87)

즐겁게 살아간다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이든 육체적인 즐거움이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다. 각자에서는 각자의 가치관이 있기 대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즐거움을 추구할 때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가 없는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쾌락만을 좇는 대가는 늘 생각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우리를 향한다.


(95-96)

과거의 예술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물관이다. 원래 박물관을 뜻하는 ‘museum’은 음악의 여신 ‘Muse’를 모시는 신전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뮤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기원전 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9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뿐 아니라 문예, 미술, 철학 등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 뮤즈를 위한 신전은 음악을 비롯하여 당시의 다양한 예술과 학문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공간이었다. 즉 뮤즈를 위한 의식에는 음악과 함께 당시에 제작된 최고의 예술품인 회화, 조각 등이 선보여지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가 봉헌되었다. 이 뮤즈의 신전은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106-107)

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공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 1세기 때 채옹의 <금조>, 4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125)

고고학의 원칙 중 하나가 발굴하지 않고 땅속에 두는 것이 가장 큰 보존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최신 기술로 유물을 발굴한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과학과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어떤 유물이든 지금보다 먼 훗날에 발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고고학적 원칙에 맞지 않는 사례가 바로 고분벽화이다.


(193)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197-198)

생각해보자. 왜 레고랜드를 유적지가 많아서 사적지로 등록된 중도 위에 세우려고 했을까. 그곳은 춘천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경치도 수려하고 접근성도 좋은, 아직까지도 개발이 안 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이 개발이 되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에 이미 이곳에 엄청난 유적이 존재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적의 규모와 그 의의로 볼 때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대대손손 보존하기 위해 사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적이 있다면 빨리 발굴해서 그 위에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세우고자 결의했다. 이렇듯 춘천 중도의 문제는 경제논리를 앞세운 현대 자본주의에 있었다.


(204)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세계 각국은 전쟁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취지에서 헤이그 문화재보조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그 나라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없애거나 약탈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상대국의 문화재를 폭격하고 약탈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재 약탈의 한쪽 측면만 본 것이다. 서구 열강은 그때까지 전쟁과 침략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게 약탈한 문화재에 대해 어떠한 보상이나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유물을 빼앗긴 나라들은 상대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유물을 반환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집트가 영국을 침략해서 승리했더라도 영국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피라미드 유물이나 미라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226)

일본의 이 식민 패러다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층을 달리해서 존재했음을 밝히면 된다. 하지만 층을 구분해서 발굴하는 방법이 한국에 널리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반면에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도유호(1935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 최초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세대 고고학자. 1946년에 월북하여 북한 고고학의 기초를 수립했다.)가 이끄는 북한의 발굴단은 1953~1954년도에 회령 오동의 수혈주거지를 발굴하고, 그 주거지들에 중첩이 있음도 함께 발견했다. 또한 1957년에는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층과 청종기시대 문화층을 분리시켜서 그 지긋지긋하던 금석병용기설을 폐기하고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국사시간 첫머리에 빗살무늬토기=신석기토기’, ‘민무늬토기=청동시시대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배운다. 그런데 이것을 발굴로 증명한 것이 바로 도유호가 발굴한 지탑리 유적이었다.


(245-247)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제까지 한국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는 소모적인 귀속 논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홍산문화의 숨겨진 또 다른 가치는 바로 그 소멸과 정에 있다.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작게 쪼개진 마을들로 흩어졌고, 그 결과 홍산문화의 옥을 만드는 기술과 제사의 풍습은 이후 시대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버려진 홍산문화의 제사유적은 고대인들의 현명한 삶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254)

후지무라의 조작은 단순히 한 고고학자의 공명심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의 역사를 무조건 올리려고 하는 일본의 쇼비니즘적 시각과 야합한 결과이다. 후지무라가 유물을 파묻다 발각된 카미타카모리 유적은 사실 후지무라가 구덩이에 자기가 만든 석기 몇 개를 파묻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지무라에 의해 이 석기는 70만 년 전의 구석기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유물로 변했다. 이 말이 맞다면 세계 최초의 제사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세계 문명의 기원이 일본이며,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신토이즘)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종교라는, 극우 세력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얘기였다. 후지무라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는 곧 바로 극우 성향의 교과서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니시오 간지 회장이 쓴 교과서 <국민의 역사>의 첫머리에 내세우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라는 여러 황당한 망언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극우세력의 준동에 후지무라의 위조가 동원되었지만 일본의 고고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암묵적인 동조를 했다. 극우 사관이라는 독버섯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후지무라의 위조는 더욱 활개를 칠 수밖에 없었다.


(269-271)

그렇게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분 발굴지에서는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왔다. 이에 청동그릇이라는 뜻의 호우를 따서 이 이 고분을 호우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명문에 따르면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2년인 을묘년(415)에 만든 기념 그릇 중 10번째에 해당한다. 당시 신라를 밀려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구원을 요청했다. 이 호우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의 고구려의 관계가 유물로 증명된 것이다. 사실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나온 예는 그때가 유일했으니, 이 호우총은 비록 일본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호우총에서는 호우 말고도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단장 김재원 박사는 한 유물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무에 옻칠을 한 물건인데 두 눈을 부라리듯 험상궂은 도깨비의 형상을 한 유물이었다.


(282-283)

(슐리만)가 발굴한 유물은 실제 트로이 왕국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지적을 무시하고 이 황금을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전쟁을 벌인 프라이모스의 이름을 따서 프라이모스의 황금이라고 명명해버렸다. 그러나 그가 발굴한 황금은 3200년 전에 살았던 프라이모스 왕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4400년 전의 황금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아리러니하게도 슐리만은 이 프라이모스의 황금을 파기 위하여 그 위에 쌓여 있었던 트로이의 문화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인물이자 트로이 유적을 없애버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최은영 님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었단다. 최은영 님의 책은 그 전에 <쇼코의 미소> <밝은 밤>을 읽었는데, 둘 다 좋았지만 아빠는 특히 장편인 <밝은 밤>이 아주 좋았단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아빠는 단편보다는 장편 체질은 것 같아. 이번에 읽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지은이가 최은영 님이라고 고른 책인데, 책 앞 표지에 최은영 소설집이 아니고 최은영 소설이라고 써 있어서 아빠는 장편 소설인줄 알았단다. 하지만 이 책은 중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더구나. 이 경우 보통 소설집이라는 적는데, 그냥 소설로만 적혀 있네. 비록 장편은 아니었지만, 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단다.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2020년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품이었다고 해서, 아빠 독서이력을 찾아보니 2020년에 읽었던 작품이더구나. 당시 써 놓은 독서편지를 보니 내용도 생생히 기억나더구나. 그런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던 거구나. 저질 기억력이구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다시 읽어봤는데, 2009년 용산 사건과 그 시대를 살았던 두 젊은이의 우정을 잘 접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 같구나. 이 소설의 이야기는 2020년에 이야기했으니 패스할게.


1.

<>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도 나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짧은 소설이라서 그런지 이번 소설집에도 포함을 시켰구나. 해진과 정윤은 같은 학교 대학신문사 선후배 사이였단다. 정윤이 선배이고, 해진이 후배였어. 해진이 졸업한 지도 오래되었는데 오랜만에 모교에 갔다가 오랜만에 정윤을 우연히 만났어. 정윤과 대학신문사 편집부 선배 용욱의 결혼식 때 보고 처음이었어. 그러면서 해진은 옛 생각이 떠올랐단다. 대학교 일학년이었던 해진은 무턱대고 대학신문사에 지원해서 최종 합격 두 명에 포함되었어. 나머지 한 명은 글쓰기를 무척 잘하는 희영이었어.

희영이는 여성 문제를 주로 기사로 썼단다. 그것 때문에 남자 선배들이 싫어하기도 했어. 해진과 희영은 함께 주제 조사도 했는데, 희영이 고른 여성 문제로 가정 폭력에 대해 조사를 했단다.  그러면서 직접 여성 인권 집회에도 참가했어. 희영이 계속된 여성 문제를 기사를 쓰다 보니, 정윤 선배도 희영 의견에 반대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단다. 3학년이 되어서 희영은 대학신문사를 그만 두었고, 졸업 후 여성인권 사회운동가가 되어 활동을 했단다.

희영은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단다. 생각해 보면 대학교 일학년이면 이제 고등학교 갓 졸업했을 때인데 그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바를 알았던 것 같아. 반면, 해진은 대학 신입생 때 글쓰기도 서툴러서 대학신문사 편집부 일을 힘들어 있는데, 해가 거듭되어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졸업하고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정식 기자까지 되었단다. 안타깝게도 사회운동가를 하던 희영은 병에 걸려 39살 짧은 삶을 마감한단다.

이 소설의 제목을 왜 <>으로 했을까? 사람마다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있다는 것을 지은이는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이 소설은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어서 그런지 읽을 때 아빠의 그 시절 친구들이 생각나더구나.


2.

<일년>

세 번째 작품은 <일년>이라는 작품이란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지수는 8년만에 다희를 우연히 만났단다. 8년 전, 27살인 지수는 한 회사의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고, 다희는 인턴으로 그 회사에 들어왔단다. 사는 곳에 같은 근방이고 해서 같이 카풀을 하게 되었는데 지방출장도 같이 가곤 했어. 둘이 친해지긴 했는데, 성격은 전혀 다른 성격이었어. 지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다희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활발해 보였어.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있다 보니 지수도 어느 날은 자신의 속마음도 이야기를 했어. 그렇게 성격이 물과 기름처럼 다르지만 서로 섞여서 또 다른 좋은 물질을 만들 수 있었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희는 인턴 이후 정규직에서 떨어졌단다.

보통 그렇게 친하게 되었다면 회사에 떨어져도 가끔 연락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아빠도 퇴사한 사람들과 거의 연락을 안 하는 것을 보니, 연락이 끊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8년 만에 병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안부를 전하고, 그 이후로도 병원에서 몇 번 만났지만 지수가 퇴원하면서 또 연락은 끊기게 되었단다. 지수 성격에 굳이 연락처를 물어볼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아빠와 참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를 소설 속에 만난 것 같더구나…^^


3.

<답신>

이 소설도 참 좋고도 안타깝더구나. ‘가 언니의 딸 조카에서 보내는 편지 형식이란다. 그런데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더구나. ‘ 4살 때,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때문에 엄마는 도망을 하고, 3살 많은 언니와 는 고모할머니 집에서 지내게 되었단다. 언니는 고등학생 때 못된 학교 교련 선생님을 만나 추행을 당하면서도 계속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되고, 졸업 후까지 그 선생님을 만나 21살에 그만 임신을 하게 되었어. 교련 선생님은 마지못해 결혼한다는 식으로 티를 내면서 언니와 결혼했어.

형부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단다. 언니를 종처럼 부려먹었어. ‘가 언니 집에 몇 번 놀러 가서도 그런 모습을 보게 되어 는 언니에게 뭐라 했더니 언니는 형부를 감싸는데 급급했어. 형부 때문에 언니 집에 가지 않았는데, 사랑스러운 조카가 태어나고는 안 갈 수가 없었단다. 너무 사랑스러운 조카를 보기 위해서

는 호텔 식당에 취직을 했는데, 그 호텔에서 우연히 형부를 보았어. 어떤 여고생과 함께 있는 형부를 말이야. 화가 난 는 형부에게 가서 따지듯 이야기하고 여고생과 따로 둘이 만나 공감해주면서도 충고도 해주었단다. 얼마 후 형부의 학교에서는 형부와 그 학생에 대한 조사를 했대. 형부는 당연히 가 신고했다고 생각을 했어. 화가 난 형부는 를 찾아와 폭력을 휘둘렀어. 언니에게 이야기했지만 언니도 를 믿지 않았어. 언니는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는 것 같았어. 어느날 언니가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형부는 언니가 대준 대학교 학비를 왜 주었냐고 언니를 폭행했단다.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는 형부를 폭행했는데 형부가 크게 다치게 되었어. 재판에서 끝까지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언니가 형부 편을 드는 바람에, ‘는 실형을 받고 감옥까지 가게 되었어. 몇 년 뒤 출소를 했지만 언니의 연락은 없었어. 8년 뒤에 고모할머니의 장례식 때 언니를 잠깐 보고 또 연락이 끊겼어. 이젠 언니가 어디서 사는지도 모르고, 조카가 얼마나 컸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도 몰랐단다. 어느덧 23살이 된 조카. 조카의 23살 생일 날, ‘가 조카에서 편지를 썼단다. 그 편지 전문이 이 소설이란다. 보낼 수 없는 편지, 받을 수 없는 편지.. 어린 시절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조카를 생각하면서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는데, 언젠가는 다시 꼭 만났으면 좋겠구나.


4.

<파종>

민주가 8살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15살 많은 오빠 민혁이 민주를 키웠단다. 오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자란 민주는 결혼까지 했지만 딸 소리가 5다섯살 때 이혼을 하고 말았어. 실패한 결혼이라고 할 수 있지. 이혼을 한 민주는 딸 소리를 데리고 여전히 혼자 살고 있는 오빠의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단다. 소리는 삼촌을 잘 따르고 텃밭도 함께 가꾸며 나름 행복하게 지냈단다. 그런데 민혁은 소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만 병으로 죽고 말았어. 민혁이 죽고 시점이 소리가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시점이라서 더 충격이 컸을 것 같구나.

중학생 이후 소리와 민주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어. 고등학생이 된 소리를 자주 자퇴하고 싶다는 말을 했단다. 민주와 딸 소리의 갈등의 원인은 민혁의 부재로부터 시작되었던 거야. 둘은 처음으로 둘이 텃밭에 가서 밭을 일구고 파종을 하면서 다시 예전처럼 친해졌단다. 민혁이 죽은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았었거든. 파종이 또 하나의 생명을 싹 틔우는 시작이듯이 민주와 소리의 관계가 새롭게 싹을 틔어 값진 열매를 맺기를하늘에 있는 민혁 삼촌이 크게 미소 지을 수 있게


5.

<이모에게>

희진은 엄마가 23살 때 태어났단다. 희진의 엄마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가 있었어. 22살 차이였어. 희진이 태어났을 때 이모는 혼자 살고 계셨는데, 희진의 엄마와 아빠가 맞벌이라서 이모는 희진의 집에 들어와 살면서 희진을 보살펴주었단다. 그러니까 희진은 엄마 아빠보다 이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 밖에 이모와 함께 나가면 할머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그런데 엄마가 희진을 낳은 후 유산을 여섯 번이나 했단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임신을 하면 위험하니 임신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희진의 아빠는 계속 둘째를 원했어.

희진의 아빠는 권위주의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어. 서울대까지 나와서 지 잘난 줄만 알았지, 집안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어. 사업을 하다고 계속 망해서 집안 사정도 안 좋아졌어. 그러자 처형, 그러니까 희진의 이모와도 갈등이 쌓였어. 결국 희진이 고등학생 때 이모는 집을 나가 독립하셨단다. 희진이 그렇게 반대를 했지만 아빠와 이모의 골은 너무 깊었어. 이때 이모는 마음을 굳혔는지 희진이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냉정하게 집을 나갔단다.

희진의 아빠도 사업이 망해서 열세 평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단다. 희진은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소위로 임관하고 나서 25살에 7년만에 이모를 만났단다. 이모가 냉정하게 집을 떠나서 한동안 희진도 이모에게 삐쳐 있었거든. 다시 이모를 만나고 나서 그 이후에는 일년에 한두 번씩 이모를 만났어. 그리고 79살이 된 이모는 뇌졸중에 걸리셨고, 엄마가 이모 집에 들어가서 보살펴주셨지만 결국 이모는 그렇게 돌아가셨단다. 희진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채워주셨던 이모. 이모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이 소설 또한 가슴 먹먹해짐이 느껴졌단다.


6.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마지막 소설은 기남이 딸 우경의 가족을 만나러 홍콩으로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단다. 기남의 가족 구성원을 먼저 이야기를 해주어야겠구나. 우경은 기남의 둘째 딸이고, 첫째 딸은 진경이었단다. 진경은 박사까지 땄지만 알코올 중독이 있었어. 동생 우경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 진경은 기남의 친딸이 아니었단다. 기남은 진경의 계모였단다. 기남은 어렸을 때 버림을 받고 이집 저집에서 식모로 일하면서 자랐는데, 남편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애가 있는 유부남이었어. 기남이 남편과 살기 시작했을 때 진경은 다섯 살이었단다. 그리고 우경이 태어났는데 진경보다 여덟 살이 어리단다.

진경은 커서 미국 교포인 제임스와 결혼하여 미국에 살다가 이번에 회사 때문에 홍콩으로 이사를 와서 기남이 우경 식구를 만나러 가게 된 거야. 그런데 기남은 진경보다 오히려 친딸인 우경의 눈치를 더 보는 것 같았어. 홍콩에서 지내는 것도 불편했고, 자신의 실수로 인해 우경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싫었어. 그런 모습이 손자 마이클에게도 보였는지, 마이클이 기남에게 와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를 했단다. 소설 속에서는 기남의 노년 생활만 짧게 그려졌지만, 기남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훤히 보이는 듯 하구나. 진경이 비록 친딸이 아니지만, 사랑을 다 주면서 키웠을 것 같구나. 진경이 기남에게 자신의 엄마여서 좋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둘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알기에 코끝을 찡하게 하더구나.

….

이렇게 이 책에 나온 소설들을 급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모든 소설들이 따뜻함으로 덮여 있고 그 안에 사랑과 정()이 있는 것 같았단다. 바쁘게 돌아가는 이 세상, 스마트폰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드라운 이불 같은 소설들아주 좋았단다. 최은영 님의 다음 작품들도 기대해봐야겠구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녀의 수업은 금요일 오후 세시 삼십분에 시작했다.

책의 끝 문장: 그 작고 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 P43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썹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게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말라고 싶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녀는 그중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 P120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 P3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