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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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프랑스의 사회학자로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의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이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게. 몇 달 전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보고 읽어볼 만하다 생각해서 구입했단다. 지은이 디디에 에리봉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유명한 작가인 것 같은데,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고 그의 책도 이번이 처음이란다. 이 책은 책제목을 통해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려준단다. 지은이는 자신의 어머니의 경험을 통해서, 돈이 넉넉한 여성이 아닌, 보통 사람 서민의 여성의 노년이 어떻게 살아가다가 죽음에 이르는지 알려주고 있단다.

예상은 했지만 그리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년의 생활, 그것도 혼자 또는 부부 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단다. 노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복지를 제대로 갖춘 나라도 드물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미래보다 현재를 살아가기 급급하게 된다. 이 책의 이야기는 지은이의 어머니의 이야기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미래 이야기일 수도 있단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지은이 디디에 에리봉은 보통 아들과 다르단다. 지은이 디디에 에리봉은 동성연애자, 그러니까 게이다. 랭스에 혼자 사시는 늙은 어머니는 어느덧 87살이 되었어.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지내고 있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다정하신 분은 아니었어. 생전에 폭력 성향이 강해서 오랫동안 어머니를 학대해서 어머니가 이혼 결심을 여러 번 하셨지. 어쩌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으셨는지 몰라. 하지만 그런 자유도 오래 가지는 않았어. 혼자 지내시다 넘어져서 응급실을 여러 번 가시게 되었어.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뼈가 약하셔서 넘어지는 일만으로도 큰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거든넘어지는 것만으로 치명적인 부상으로 돌아가시기도 하거든

지은이는 더 이상 어머니가 혼자 지내시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요양원으로 모시려고 했단다. 어머니의 집 근처 핌이라는 곳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어. 남동생 투더와 함께  어머니의 짐들을 요양원으로 옮기고 정리했어. 요양원에 입원시킨 날 디디에는 늦게까지 어머니와 함께 있다가 돌아왔단다.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보상이 요양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요양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 그러면서도 몸이 좋아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다고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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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9)

어머니 자신도 틀림없이 이런 쇠락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내심 확신하고 인정했다. 해결되지고, 개선되지도 않을 문제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내가 나아지면…” 또는 내가 회복되면…”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마치 생물학적인 사태의 추이를 변화시킬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을 쫓아버리려는 듯 말이다. 어머니는 무력감에 굴복하기 힘들어했지만 건강 상태가 좀처럼 저항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뻔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 , 어머니가 괜찮아지시면…” 또는 그래요, 어머니가 다 나으시면…”하고 대답했다. 사실 어떻게 자기 어머니에게 아뇨. 어머니는 회복 못 하실 거예요. 낫지 못하실 거예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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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양원이라는 곳은 낯선 사람과 강제적으로 함께 지내야 한단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기 어려운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그곳 생활이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요양원에서는 죽음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 배우고 체험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어. 유치원과 비슷하지만 미래가 없다는 차이가 있지. 이런 요양원을 스스로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익숙하고 편안한 자신의 집을 떠나 낯선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하는 요양원을 누가 선택하겠어.

요양원에서 밖에 나가는 경우는 병원에 가는 일뿐 아닐까 싶다. 디디에의 어머니도 정맥염이 심해지셔서 걷는 것조차 힘들게 되어 병원에 가셨어. 하지만 병원도 노년들에게 그리 좋은 곳은 아니야. 디디에의 어머니도 병원에 갈 만큼 아프셨지만, 병원에 자리가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셨어. 이것은 프랑스 공공의료시절의 문제점이라고 지은이는 비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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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01)
우리는 공공서비스 관할의 모든 부문에서 그랬듯, 돌봄 인력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의해 프랑스의 병원에서 얼마나 많이 감축되었는지 안다. 그 정책들은 언제나 강력한 비용 절감 계획을 작동시켜왔고, 지금도 그렇다. 병원 근무자들이라면 직종에 관계없이 프랑스의 보건 공공서비스가 파산 상태(다른 나라들이라고 썩 사정이 낫진 않다)에 다다랐다고 자주 강력하게 규탄해왔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고-반대로 사정은 계속 악화해, 프랑스 정부는 심지어 코로나19 위기 동안 병상 폐쇄라는 살인적인 정책을 추진했다-우리는 그런 상태를 거의 정상으로 받아들이며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듯 보인다. 기필코 이런 유혹에 넘어가선 안 된다. 지치지 말고 계속 분노해야 하며, 이 분노를 소리 높여 강하게 외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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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고통은 육체 건강의 문제만이 아니야. 정신 건강도 쇠약해지게 된단다. 가끔 헛것을 보거나 헛소리를 듣는 증상도 보이곤 해. 정말 쉽지 않은 생활이구나.

요양원의 재정이 넉넉하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요양원의 재정은 부족하고, 인력은 늘 부족했단다. 자율성이 잃어버린 노인들의 경우 샤워나 용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도와주는 이들도 부족하다는구나. 그렇다고 더 좋은 요양원으로 모시기에는 돈이 너무 들어가니 그것도 어려워. 지은이 디디에도 자신의 어머니를 더 좋은 요양원으로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어. 결국 삶의 마지막은 행복이 아닌 힘들고 불행하고 자유를 잃은 생활을 하다가 마감하게 된단다.

 

2.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야.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가장 많이 기억하는 사람의 죽음이자, 친척들의 계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죽음이야. 어머니의 죽음은 자식들의 어린 시절의 죽음이고, 친척들과 관계의 죽음이란다. 그리고 엄마와 나만 주로 사용하던 언어들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언어의 죽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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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82)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암묵적이든 잠재적이든 어머니를 통해 유지되어온 내 과거와의 연속성이 이제 끊어져버렸다. 혹은 몹시 느슨해져버렸다.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 어떤 청소년으로 자라났는지에 얽힌 일화들을 앞으로 누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가족의 지형도, 조상의 계보도를 누가 내게 그려줄 수 있을까? (중략) 내 젊은 시절의 기록 보관자이자 역사가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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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노동자로, 평범한 어머니로 살아온 한 여성의 죽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이런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시게 된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도 당연히 먼저 너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생각하게 된단다. 아직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시지만, 역시 예년만 못한 건강으로 병원을 자주 가신다. 외출의 대부분이 병원이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단다. 인생의 황혼기라는 노년의 삶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아빠 또한 먼 미래 같지는 않구나. 삶의 의미를 찾기란 젊은 사람들도 찾기 어려운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이란 정말 어려운 것 같구나. 이 책을 통해 남아 있는 부모님의 삶, 아빠의 미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단다.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가는구나. 2026년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3분의 1을 거의 다 채우고 있구나. 식상한 이야기지만,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에 충실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며, 오늘 편지는 마친다.

 

PS,

책의 첫 문장: 그러니까 나는 핌(Fismes)에 두 번밖에 가지 못할 것이었다.

책의 끝 문장: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는 그들에게 이제는 없는, 아니면 의존적인 고령자들의 경우처럼, 그들이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수년 전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가 닥친 것, 그 때문에 아버지가 기약 없이 입원한 전문 클리닉에 매일 찾아가야 했던 것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끝나지 않는 기나긴 시련이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녀가 스무 살에 결혼한 이래 무언가 하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바라보는 것에 처음으로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홀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이 들어 신체가 쇠약해짐에 따라 거동의 자유를 새로 방해받기 전까지 얼마 동안 되찾은 자율성을 여유롭게 누렸다.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난 그 손님이 자기 남편의 요양원 입소를 유사한 감상으로 환영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마침내 자유다!’라는 감상 말이다. - P43

우리는 집으로 되돌아가길, 혹은 진짜 자기 집을 되찾길 기다리며 다소 긴 기간 동안 임시 체류하러 요양원에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영구히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죽을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서인지는 안다. 블라디미르 장켈베비치는 이 라틴어 격언을 즐겨 인용했다. ‘죽음은 확실하나, 시간은 불확실하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적시할 수 있다. 일단 그런 시설에 들어가면 ‘장소는 확실하다’고, 설령 시간이 아주 머지않은 듯 보인다 해도, 시간보다 훨씬 확실하다고. - P60

이 ‘전체주의적’ 성격은 매일매일 두드러져만 갔다. 어머니의 삶 전체가 구획되고 통제되었으며, 그녀를 대신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어머니는 자율성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 사람으로서의 지위까지 상실했다. 그렇다. 탈인간화로 인해 노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지경까지 다다른다. - P117

이 짧고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난 어머니의 이미지를 본다. 그녀는 버림받은 아이였고, 열네 살에 ‘무슨 일이든 하는 하녀’로, 가정부로, 공장노동자로 위치지어졌다… 그녀는 스무 살에 결혼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55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제 여든 살이 넘어서 자유를 발견했고, 모든 순간을 즐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녀를 책망할 권리를 가로챌 수 있겠는가? - P131

엘리아스가 쓴 이 말을 틀렸다고 하기란 불가능하다. "아직도 활기차고 가끔은 기분 좋은 느낌으로 가득한 자신의 몸이 느릿해지고 쉬 피로하며 어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다시 말해 노인들,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동일시는 다른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들은 자신이 늙고 죽을 것이라는 관념을 극구 부정하려 하며 그에 저항한다." - P263

결국 근본에 있는 정치적 문제는 이것이다. 누가 말하는가? 누가 발언할 수 있는가? 이 기본이 되는 정치적 행위가 가장 극심하게 지배받고 박탈당하고 취약한 사람 가운데 그렇게 많은 이에게 여전히 접근 불가능하다면 그들에 관해서, 그들을 위해서 말하고 그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에게, 예술가에게, 지식인에게 돌아오는 과제가 아닐까?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 또는 어쩌면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는 그들에게 이제는 없는, 아니면 의존적인 고령자들의 경우처럼, 그들이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말이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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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4-24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단순히 주거지나 환경의 변화가 아닌 과거와 현재의 나로부터 완전히 뿌리뽑힘을 당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깊더군요.
 















(141)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152-153)

꼭 연애 상대가 아니더라도 희주는 일단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뒤 찝찝한 후회나 반추를 안 하게 만드는 사람. 상대에게 자신이 판별당하거나 수집당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사람. 근본은 따뜻하되 태도는 직장에서 진심이니 우정이니 하는 걸 바라는 것 또한 천진한 태도임을 알았지만, 살면서 일단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은 뜻밖에 드물고, 있더라도 그 수가 점점 줄기 마련임을 깨달은 기태는 희주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겼다. 아니 사실 그거면 족하다 싶었다. “살맛난다 할 때 그 살맛이 이 살맛이구나장난치며 서로의 목이나 손등을 남발하고, 그러면서도 어느 땐 육체의 쇠락을 과장하며 서로를 늙은 배우자인 양 놀리고, 그러면 마치 노년의 남루와 공포가 줄기라도 할 것처럼 농담과 연민을 미리 당겨쓰고, 세상 무심하고 친밀하게 등과 두피에 난 여드름을 짜주고, 상처와 비밀을 나누고, 말을 아끼고, 오래 안고, 우리가 식물과 달리 똥도 싸고, 아름답지도 않고, 울기도 하는 존재임을 가여워하고 수긍해주는 정도라면, 그거면 충분하다고.


(163)

지수는 죽어도 좋은 칼에 죽고 싶었는데, 것도 환상이고 허영임을 알았다고 토로했다. ‘권력 투쟁의 장에서 좋은 죽음이 어디 있느냐, “그냥 죽음만 있는 거지하고 비장한 얼굴로 와인을 들이켰다.


(175-176)

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은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는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 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 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231)

나는 뭐라 더 말을 못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마나 한 말을 최대한 진심어리게 하는 것도 어른의 화법일 텐데, 누군가의 부고와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가진 표현의 한계와 상투성에 어쩔 줄 몰라했다. 상투성이 뭐 어때서,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이는 게 결국 예의 아닌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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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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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명인 이혁진 님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이라는 소설이란다.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 중에 한 권이란다. 위픽 시리즈가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위픽 시리즈는 이번이 처음이란다. 위픽 시리즈라서 산 것은 아니고 아빠가 이혁진 작가님을 좋아해서 산 거야. 위픽 시리즈가 무엇인가 알아봤더니, 위클리 픽션의 약자더구나. 일주일에 한편씩 소설을 출간하는 그런 시리즈인가? 아무튼 이번 이혁진 님의 소설은 기존에 읽은 이혁진 님의 소설과 좀 장르를 달리했단다. 기존 이혁진 님의 소설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었는데 이번에 읽은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는 지금보다 조금, 아주 조금 먼 미래 세계를 다루고 있단다.

이 책에서 다룬 것이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미 인공지능은 우리 생활이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아빠가 아주 조금 먼 미래 세계라고 이야기한 거야. 인공지능 세계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사회의 모습인데 분명 순기능이 있겠지만 그것만큼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큰 것이 사실이란다. 그런 것이 이 소설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단다. 인공지능 덕분에 우리 삶이 좀더 편해진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에 옳은 방향이냐고 물어보면 아빠는 선뜻 답을 못하겠구나. 앞으로 미래 사회는 어떻게 변하게 될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도 되는구나. 인공지능에 따른 직접적인 부작용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인공지능을 구현하기 위한 엄청난 수의 데이터센터와 그런 데이터센터를 구동하기 위한 전력 문제와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 문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구나.

...

 

1.

, 그럼 소설의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슈마허. 완전자율주행 인공지능 자동차 브랜드란다. 유명한 레이싱 선수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 같구나. 주인공 최재호는 슈마허를 개발한 수석개발자이자 CEO 세리와 더불어 공동창업자야. 10년 넘게 연구한 결과가 이제서야 서서히 빛을 보고 있단다. 그런 슈마허가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고양이를 피하다가 전봇대를 박은 사고였어. 이 사고로 회사 이미지는 안 좋아졌고 주가도 떨어지는 등 큰 위기를 맞이했어. 세리는 대책 회의를 소집했지. 세리는 고양이를 피해서 자가 망가지는 사고가 나는 알고리즘에 대해 비판했어. 재호는 생명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했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회사의 존재여부라는 세리의 말에 설득 당해 결국 최소비용을 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알고리즘으로 수정하기로 했어. 차가 망가지는 선택이 아닌 갑작스럽게 길에 뛰어난 동물들을 치는 선택을 하게 수정했어.

이후 다시 슈마허는 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점유율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어. 슈마허의 점유율이 50퍼센트가 넘어가면서 막히던 출근길도 개선되었어. 슈마허들이 서로 통신하면서 줄 맞춰 운전을 하자 차는 많은데 교통 체증이 없었어. 출근 시간에 평균시속 80km로 달리는 기적을 만들어냈어. 정치권에서도 슈마허의 성공을 축하하고 세리는 성공한 여성 CEO로 주목을 받게 되었어.

....

도로에는 슈마허가 있다면 집안에는 무버가 있었단다. 무버는 커다란 바퀴 달린 의자가 달린 교육용 머신으로 인공지능 가정교사라고 생각하면 돼. 역사적 유명한 학자들이 아이들을 가르쳐 준다? 아이들의 지식은 부모들을 놀랠 정도로 향상되었어. 무엇보다 무버는 부모들을 육아로부터 해방시켜 준 혁신제품으로 돈이 있는 집에서는 하나씩 장만하는 제품이었어. 무버를 타면 걸을 필요도 없었지. 처음에는 무버에 거부 반응을 보였던 아이들은 하루 종일 무버 위에서만 지내는 이들도 있었어.

그로 인한 무작용도 나타났지. 이미 스마트폰 중독을 경험했던 이들일 텐데 무버의 중독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하루 종일 무버 위에 있다 보니 신체적 발육이 저하되고 부모들이 걸으라고 잔소리하면 아이는 왜 걸어야 하냐는 철학적 질문으로 반문했어. 재호의 아들 건주도 그런 아이들 중에 한 명이었어. 무버는 스마트폰보다 더 중독성이 있는 제품으로 아빠 같으면 절대 이 제품은 사지 않을 것 같은데, 재호와 아내는 아들 건주를 어떻게 하면 무버에서 내려오게 할지 걱정이 심했어.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를 설득하지 못하고 병원에 가서 성장촉진제를 맞혀 저하된 발육을 치료하는 방법을 선택했어.

재호도 세리가 추천한 병원에 건우를 데리고 갔어. 함께 간 재호의 아내는 이건 아니다 싶어 병원에서 재호와 아들 건우를 데리고 나왔어. 주차장에서 건우에게 내려서 걸으라고 했고 건주는 울면서 싫다고 했어. 재호의 아내는 화를 내며 걸으라고 했고 건우는 울면서 끝내 무버에서 내려오지 않았어. 사실 무버를 처음 산 것은 재호 아내의 의견이었어. 힘든 육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처음에는 좋았지.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지만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은 거야.

....

 

2.

한영인이라는 사람은 어떤 학원 재단 이사장이었어. 남편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아들을 뺑소니로 잃고 지금은 혼자 지내고 있었어. 학교에 무버를 타고 오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있었단다. 한영인은 무버의 학교 반입을 반대하는 입장인데, 무버를 찬성하는 선생님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어. 소설이 설정이 다소 극단적인 것 같구나. 스마트폰도 학교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무버가 상용화되었다 해도 학교에서는 금지할 것 같다는 것이 아빠의 생각이란다. 소설에서는 모두 허용되는 것으로 설정했단다.

어느날 학교에 큰 배낭을 맨 아이가 경비원에 쫓겨 달려가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도로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위험해 보여서 그 아이를 보호해준다고 한영인이 막아주다가 둘 다 도로에 넘어졌어. 하필 그때 슈마허가 아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어. 그런데 마지막 순간 차가 방향을 틀어 영인을 치는 사고가 발생했어. 다행히 며칠 후 영인은 병실에서 깨어났지만, 중상을 입어 여기저기 깁스를 하고 있었어. 슈마허의 사고 처리팀은 영인에게 모든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영인은 그보다 슈마허가 마지막 순간 왜 자신에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한 알고리즘 처리기록을 요청했어.

보상협의가 제대로 되지 않아 CEO 세리는 회의를 소집했어. 다들 난감해하고 있는데 세리는 오히려 이 일이 좋은 기회라고 했어. 슈마허는 희망과 미래를 보호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아직 미래가 창창한 아이와 나이 드신 여자 중에 한 명을 칠 수밖에 없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 선택을 미래와 희망을 기준으로 슈마허가 선택했다는 거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생각나는구나. 슈마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세리의 이런 입장에 재호는 크게 반발했어. 재호는 66% 확률로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했어. 아빠 생각에 세리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재호의 논리도 빈약해 보였단다. 100퍼센트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니.

테드라는 관리임원은 원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회사를 대변했어. 그건 단순 교통사고다. 영인과 쓰러진 아이가 도로 안으로 들아 와서 발생한 사고다. 그런 상황에서 슈마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니 큰 문제될 것 없다고 말이야. 재호는 세리와 테드에 의견에 반박을 했지만 벽에 이야기하는 기분이었어. 슈마허 회사의 보상 처리반 임원인 매튜라는 사람이 있었어. 매튜는 미국계 한국인으로 보상 업무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임원까지 되었어. 그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딸 애나가 성대가 섬유화되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 증상이 다른 신체부위에도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해서 치료가 시급했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했지만 아직 고칠 수 있는 병원을 아직 찾지 못했어.

매튜가 일을 잘 하는 이유는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의 소유자였어. 한번도 보상협상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어. 영인 건도 매튜가 진행하게 되었지. 매튜는 영인을 만났어. 영인의 가족 잃은 사연을 들어주면서 공감을 하면서도 회사 입장에서 보상 협상을 했단다. 영인이 협상의 여지를 보이지 않자 은근히 협박도 했어. 영인도 물러서지 않았어. 자신은 가족도 없고 돈도 원하지 않는다며 그저 슈마허가 왜 그럼 행동을 했는지 궁금할 뿐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자신을 어느 늙고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라고 했어. 사실 아빠는 이 책의 제목이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인줄 알았단다. 왜냐하면 책 앞면지에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써 있거든... 책 제목인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보다도 큰 글씨로 말이야.

영인의 완강함으로 매튜는 다시 회사로 돌아왔어. 매튜의 진행사항을 들은 테드는 이상하고 악랄하지만 이상하게 수긍이 가는 논리로 폈어. 그러면서 영인이 잘못해서 사고가 난 것이라고 했어. 여론전도 펼쳤단다. 그 사고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이다. 슈마허의 자율주행이 아니고 차주가 운전했다면 차주는 처벌과 사고 후유증이 컸을 텐데, 그걸 슈마허가 대신 해준 것이라고 했고, 피해자 소녀의 가정사를 미화하는 다큐멘터리도 제작했어. 한편으로 영인의 재단에 대한 세무조사를 해서 영인을 궁지에 몰아넣게 하고 결국 영인은 이사장 자리에서 쫓겨났단다. 영인의 친척들도 소송 당하기 시작했어.

그렇게 되자 영인은 매튜에게 연락을 하고는 사고 당시 함께 있던 아이를 찾아달라고 했어. 매튜가 조사해 보니 그 아이는 부모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부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줍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사고 당일도 학교에서 물건을 줍다가 경비한테 걸려서 도망가다가 사고가 난 것이고사고가 나서 얼마 후 어떤 아이의 물건을 주웠다가 실랑이가 벌어졌고 두 아이 모두 도로로 넘어졌고 하필 또 슈마허가 그곳을 지나다가 그 아이를 치고 말았는데 그만 죽고 말았어. 이전 영인의 사고 이후 세리는 교통사고를 낼 수 밖에 없는 경우에 옷차림을 스캔해서 가난한 사람을 치는 알고리즘으로 업데이트했는데 그 영향인지 그 가난한 아이가 슈마허에 치어 죽고 말았단다. 재호는 이런 알고리즘에 반대했는데 세리는 재호를 제외하고 일을 진행했단다.

...

영인은 재호로부터 아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죽은 아들도 이야기했어. 아들의 이름은 선열. 응급실 의사로 일하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쇠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스테인리스 스틸로 직접 만든 반지를 영인에게 선물해주었다고. 스테인리스 스틸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단하고 녹슬지 않아서라고 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그러면서 영인은 그 반지를 매튜에게 전해주었단다.

매튜는 영인과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어 결국 사직서를 냈단다. 그리고 영인을 다시 찾아가 슈마허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데 도와주겠다고 했어. 슈마허의 점유율은 계속 늘어만 가고 세리는 유명한 기업인으로 젊은이들의 스타가 되었어. 재호는 회사에서 세리와 갈등을 빚는 것에 아내와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는 재호도 회사를 그만 두기로 하고 영인을 돕기로 했단다. 페이스북 연구원들이 자신들이 개발한 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중독에 빠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회사를 관둔 것이 연상이 되는구나.

아무튼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소설 속 설정이 다소 과한 부분도 있었지만, 서두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인공지능의 어두운 면에 대해 소설로 잘 쓰신 것 같구나. 그의 이전 작품처럼 술술 잘 읽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이혁진 님의 다음 작품도 기대되고, 위픽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도 어떤지 궁금하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슈마허는 재호가 개발한 완전자율주행 인공지능의 이름이었다.

책의 끝 문장: 긴 싸움이 될 뿐 지는 싸움이 될 순 없었으니까.


이걸로 슈마허에게 가르쳐줘. 전봇대를 받아 탑승자를 다치게 할 바에야 길고양이를 치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는 걸. 애들한테 걷어차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가르쳐주듯. 세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이미 다 있는 거, 우리 다 하고 있는 거야. 보험사에는 평가액, 은행에는 신용 점수가 있고, 결혼 정보 회사에도 입사 시험에도 학교 시험에도 다 있잖아. 등급, 석차, 점수, 우리 이마엔 이미 바코드가 찍혀 있어. 리더기만 들이대면 ‘삑’하고 얼마짜린지 다 나와.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 - P19

사랑만이 고통에도 의미를 주니까요. 그 고통엔 의미가 있어 더욱 고통스러워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견디는 것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무의미하기만 한 고통은 그걸 겪고 견디는 우리들끼리 무의미하게 만드니까요. 오로지 휘몰아치는 고통만이 있을 뿐이고 우리도, 다른 모든 것도 거기에 이리저리 휘날리기만 하는 티끌들인 거예요. 영인은 쓸쓸히 창밖을 봤다. 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다들 그러죠. 자기 인생을 쓰면 책 한 권은 너끈히 될 거라고 하지만 그 책의 대부분은 지루하고 하찮기만 할 거예요. - P164

어떤 것이 자율이라는 건 필연히 다른 것들이 타율이라는 뜻입니다. 간단한 논리의 문제죠. 무버에 적혀 있는 말처럼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필연히 움직이지 않는 단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기밭솥을 생각해보면 쉽죠. 인공지능이 알아서 밥을 짓는다고 우리가 자율밥솥이라고 하나요? 자동밥솥일 뿐이고 자율주행도 결국엔 자동주행일 뿐이죠. 그 반대라면 우린 밥솥이 무슨 밥을 짓든 먹을 수밖에 없고 차들이 어떻게 주행하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명백한 횡포고 억압이며 사실 별로 낯선 것도 아니죠. 늘 가장 강력하고 악독한 횡포와 억압은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져왔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얼마나 ‘자율적’으로 서로를 혐오하고 배척하는지 생각해보면 아실 겁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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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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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이언 매큐언의 <레슨>이라는 책을 이야기할게. 책표지에 한 소년이 피아노 치는 그림과 함께 책제목이 <레슨>이다 보니 피아노 레슨에 관한 소설인가 싶었는데, 책소개를 읽어보니, 이언 매큐언의 첫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더구나. 아빠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서너 편 읽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단다. 지난 번에 파리 리뷰의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그의 인터뷰를 한번 읽어보긴 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잘 몰라. 이언 매큐언의 소설들은 모두 좋았던 기억으로 있어서 이번 신간도 눈이 갔단다. 책도 어찌나 두꺼운지, 완독하고픈 도전 정신이 마구 솟아났단다.

이 책의 주인공 롤런드는 1948년생인데 지은이 이언 매큐언도 1948년생이란다. 그리고 이 소설이 이언 매큐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서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의 대부분이 이언 매큐언이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읽다 보니 놀람의 연속이었단다. 이런 삶을 살았단 말이야? 그리고 이런 삶은 공개해도 된단 말이야? 그런데 책 뒤편의 저자의 말을 읽고 그럼 그렇지했단다. ,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1.

소설은 1986년 서른일곱 살 때 이야기로 시작한단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전달해 주었어. 그가 지금의 삶을 만드는데 어린 시절의 일들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과거와 현실을 오가면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빠는 그냥 시간의 흐름대로 이야기할게.

….

1959년 롤런드 나이 11. 롤런드의 아버지 로버트 베일스는 군인으로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6년을 살다가 런던으로 이주했어. 그리고 롤런드의 어머니 로절린드는 아버지와 두 번째 결혼을 하신 거야. 첫 번째 남편 잭 테이트가 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하고 로버트 베일스와 재혼을 한 거란다. 첫 번째 남편 사이에서 헨리와 수전을 낳았고 로버트와 재혼하여 이 소설의 주인공 롤런드를 낳았지.

1959년 런던에 돌아온 롤런드는 자신이 아닌, 아버지의 의지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단다. 피아노를 가르쳐 준 선생님은 미리엄 코넬이라는 젊은 여자 선생님이야. 사춘기에 막 들어서려고 하는 소년에게 첫사랑에 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구나. 그런데 코넬 선생님은 롤런드를 아이 취급하면서 옷 매무새도 직접 정리해주시고 코 푸는 것도 도와주시곤 했어. 하지만 롤런드는 그런 애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지. 코넬 선생님을 사랑하는 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얼마 후에 선생님이 바뀌었어. 코넬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 시간... 선생님은 롤런드에게 입맞춤을 해주셨어. 롤런드에게는 황홀한 추억이겠구나. 롤런드의 십대 시절 머릿속에는 온통 코넬 선생님이 가득 자리잡고 있었어. 롤런드는 코넬 선생님을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3년이나 지난 다음인 14살이 되었을 때 선생님 댁을 무작정 찾아갔어. 다행히 코넬 선생님은 롤런드를 반갑게 맞이해주셨어. 롤런드는 그 동안 다른 선생님한테 피아노는 꾸준히 배워서 피아노 실력도 어느 정도 되었어. 그리고 롤런드가 피아노에 소질도 어느 정도 있었어. 코넬 선생님 집에서 코넬 선생님과 함께 모차르트도 연주했어. 그런데 롤런드는 더 색다르고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된단다. 코넬 선생님의 리드 속에 사랑을 나누게 된 거야. 열네 살 남학생과 이십 대 젊은 여자 선생님의 사랑. 논란이 되기 충분했지. 둘이 비밀만 잘 지키면 되겠지만 말이야.

롤런드는 코넬 선생님과 사랑을 나눈 후에는 함께 요리하고 당시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미국과 쿠바 사이 갈등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 그 이후 틈만 나면 코넬 선생님 댁에 들렀고, 사랑을 나누었어. 그리고 롤런드는 다시 코넬 선생님한테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되었단다. 지역 콘서트에서 코넬 선생님과 피아노 협주회 연주를 했는데 큰 호응을 받았고 지역 신문에서도 찬사가 이어졌단다.

코넬 선생님과 피아노 협주를 마치고, 진급 시험이 있었는데 낙제했단다. 사랑에 빠져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 없었겠지. 다행히 다른 선생님이 그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 구제해주어 진급할 수 있었어. 그러나 코넬 선생님은 자신의 집에서 지내자면서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어. 롤런드도 학교에 가고픈 마음이 별로 없어서 선생님 말대로 코넬 선생님 집에서 사랑만 계속 나누었단다. 롤런드가 16살이 되는 날, 코넬 선생님은 롤런드에게 스코틀랜드로 가자고 했어. 그곳에는 16살부터 결혼이 합법이라면서 그곳에서 결혼하자고 했단다. 롤런드는 당황했어. 코넬 선생님을 사랑하는 건 맞지만 이 나이에 결혼이라니... 롤런드는 안 된다고 하자 코넬 선생님은 화를 냈고 둘은 말다툼 끝에 롤런드는 코넬 선생님의 집에서 나왔어. 이후 학교도 그만 두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 그렇게 젊음을 불태웠어.

 

2.

시간이 흐르고 롤런드는 20대 후반이 되었어. 피아노에 재질이 있었지만 전공으로 살리지는 못했고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로 가끔 피아노 연주를 하는 수준이고 시를 쓰려고 했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어. 롤런드는 독문학 공부를 해보려고 괴테 문화원에 다녔는데, 그때 독문학 선생님으로 앨리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그냥 강사와 학생이었어. 독문학을 공부하는 친구 중에 외교관 아버지를 둔 프랑스인 친구 미레유가 있었는데 미레유와 함께 동베를린도 가 보았단다. 당시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져 있어 영국 사람이 동베를린에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거든. 그것도 동베를린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음악 앨범과 금서인 <동물농장>을 몰래 가져가서 미레유의 동독 친구들에게 건네주었어.

시간이 4년이 지나고 괴테문화원 강사였던 앨리사를 우연히 한번 만났는데 그때 앨리사는 남자 친구가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또 2년 뒤 이번에는 앨리사가 롤런드를 찾아왔어. 롤런드도 늘 앨리사를 마음 속에 두고 있었는데, 문을 열었더니 문 앞에 앨리사가 딱 서 있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니. 그들은 드디어 사귀게 되었어. 롤런드 나이 35살이었어. 그리고 얼마 후 결혼을 하고 로런스를 낳았단다.

….

그런데 있잖니, 그들의 아들 로런스가 7개월 되었을 때, 앨리사는 메모 한 장 남기고 집을 떠났어. 앨리사가 갑자기 떠날 만큼 부부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야. 어린 아기를 남겨두고 집을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 앨리사가 떠나고 네 번의 엽서가 도착했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어. 마지막 엽서는 뮌헨 남부 지역에서 온 거야. 그래도 걱정되어 롤런드는 경찰서에 아내 실종 신고를 했는데, 경찰은 오히려 롤런드를 용의자 취급을 하면서 필적조사를 하고 지문 조사 등을 했단다.

롤런드가 있는 곳은 영국인데도 당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방사능 수치가 상승했다는 소식에 영국도 소동이 일어났어. 다들 요오드화칼륨과 생수를 사재기하고 창문을 밀폐하는 작업을 하는 등 다들 불안해 했단다. 어린 아기가 있는 롤런드는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지..

....

얼마 후 앨리사의 다섯 번째 엽서가 도착했어. 앨리사는 미안하고 사랑한다면서도 자기 길을 찾아가겠다고 했어. 일단 독일에 계신 부모님 집에 갈 건데 전화하지 말라고 당부했단다. 앨리사의 아버지는 완강한 보수주의자이고, 어머니 제인 파커는 영국인 기자 출신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어. 앨리사도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것 같구나. 하지만 앨리사와 어머니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어. 제인 파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하던 백장미단을 취재하면서 백장미단의 뜻에 동조하며 저항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어. 스스로 백장미단의 명예회원이라고 생각하고 책도 준비하고 있었어. 취재 중 만난 백장미단 멤버 하인리히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앨리사의 아버지란다. 그들은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곧바로 결혼을 하고 아기도 낳았어. 이로 인해 제인 파커는 취재하던 것도 중단하고 기자 일도 그만두고 출간하려던 책도 그만두어야 했어.

이후에는 시골의 변호사의 아내 역할을 했단다. 앨리사의 어머니는 기자 일을 그만 두고 글쓰기를 그만 둔 것을 늘 후회하기도 했지. 그런데 앨리사는 자신이 어머니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한 거야. 그냥 있다가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한 사람의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갈 것이 눈에 뻔히 보인 거야. 그래서 집을 떠난 거지.

...

앨리사가 집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어. 앨리사가 갑자기 떠난 것처럼 갑자기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롤런드는 여자를 진지하게 사귀지도 못했지. 로런스는 어느덧 세 살이 되어 말을 하기 시작하였고 엄마에 대해 자주 물어봤어. 롤런드가 답하길 엄마는 긴 여행을 갔다고 했어. 독일에 계신 앨리사 부모님이 손주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롤런드는 로런스를 데리고 독일로 갔단다. 앨리사의 부모님께 앨리사의 소식을 물었더니 3년 전에 앨리사에 집에 들렀었는데 그 이후에는 소식이 끊겠다고 했어. 도대체 앨리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어. 롤런드는 독일에 다시 온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야. 동독 친구들이 혹시 오면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갔지만 사실은 혹시 앨리사를 만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기적같이 앨리사를 우연히 만났단다. 앨리사는 롤런드를 알아보고는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였어. 롤런드도 그 눈빛을 알아 봤어. 하지만 앨리사도 조금은 미안했는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자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그러니까 글쓰기를 위해 떠난 것이라고 이야기했어. 이제 막 첫번째 결과물이 나왔다면서 자신이 쓴 책을 건네주었단다.

앨리사도 엄마라는 죄책감이 있는지 로런스의 안부를 물었어. 롤런드가 직접 와서 보라고 하자 앨리사는 갈 수 없다고 했어. 그렇게 되면 자신의 꿈은 끝이 난다면서... 너무 이기주의적인 것 같구나. 얼마나 대단한 꿈이길래... 런던에 돌아와서 롤런드는 앨리사가 건네준 책을 읽었는데 그녀를 용서해줄 수 있는 만큼 걸작이라고 생각했어. 그녀가 떠나지 않고 자신의 아내로, 로런스의 엄마로 살았다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

 

3.

시간은 흘러 1995.. 앨리사는 결국 작가로 성공하였단다. 하지만 공개석상에 나오지 않고 어디에 사는지 알려지지 않아 은둔작가로도 유명해졌어. 롤런드는 어느덧 47살이 되었고 아들 로런스도 10살이 되었어. 친구와 이웃으로만 지내던 대프니와 사귀게 되었지. 대프니가 남편 피터와 헤어졌거든. 대프니의 아이들과 로런스도 함께 놀곤 했어. , 그 이전에도 계속 함께 놀긴 했지. 그렇게 함께 몇 년 생활하다가 대프니는 피터와 다시 합치기로 했대. 롤런드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시간은 또 흘러갔어.

2002년 로런스도 어느덧 10대 후반이 되었어. 독일로 혼자 배낭여행을 갔고 엄마의 출판사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엄마의 주소를 알아내게 되었어. 로런스는 그 주소를 찾아갔어. 아주 한적한 마을이었지. 드디어 엄마와 대면했어. 하지만 엄마는 반가워하기는커녕 로런스를 외면했단다. 로란스는 실망감만 가득 앉고 돌아왔어.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14살 때 선생님과 사랑을 나눈 것에 대해 물어봤어. 선생님이 미성년자를 꼬셔서 성행위를 한 것은 일종의 성폭력이었거든. 롤런드는 끝내 선생님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어. 롤런드는 코넬 선생님을 찾아보기로 헸어. 수소문 끝에 코넬 선생님을 찾아갔단다. 1964년에 헤어지고 2002년만에 만났으니 거의 40년 만이었어. 코넬 선생님은 그를 보더니 처음에는 쌀쌀맞게 대했어. 당시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앙금이 아직도 있는 것인가. 코넬 선생님은 당시 이야기를 해줬어.

남자친구가 있었고 뜻하지 않은 임신을 했다가 낙태를 했고 이 일로 힘들게 대학을 졸업하고 쫓기듯 시골 학교의 피아노 선생님으로 갔다고 했어. 그곳에서도 다른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으며 지내다가 피아노에 재능 있는 롤런드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 했어. 그런데 점점 롤런드에게 끌려 자신이 소아성애자인지도 모르겠다면서 괴로워하기도 했대. 그래서 작정하고 롤런드를 멀리하려고 그의 레슨을 다른 선생님한테 넘긴 거래. 하지만 롤런드를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고 계속 그를 피해 다녔지만 3년 뒤 자신의 집에 찾아온 롤런드를 보고 무너져 내렸다고 했어. 그 이후에는 롤런드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뿐이었다고.. 나중에 헤어지고 나서는 롤런드가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는지 계속 알아봤다고 했어.

뒤늦게 롤런드가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어.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롤런드를 상대로 한 사랑은 죄를 지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경찰 조사를 원한다면 조사를 받고 죗값을 치르겠다고 했어. 코넬 선생님은 결혼을 했었고 남편은 11년 전에 죽고 아이는 없다고 했어. 코넬 선생님도 참 불쌍한 삶을 산 것 같구나. 지금 다시 그들 사이에 사랑의 불을 지필 수는 없겠지? 그렇게 진심을 다해 이야기해주셔서 롤런드도 조금 있던 앙금마저 모두 씻겨 내려갔단다.

..

시간은 잘도 흘러 2010년이 되었어. 앨리사는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고 매년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언급되기도 했어. 어느 해는 롤런드도 도박사이트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앨리사에게 돈을 걸었다가 500달러를 잃기도 했어. 아들 로런스는 착실하게 잘 자라서 기후 관련된 연구를 하는 직업을 얻었어. 나이를 먹으면서 겪는 두려운 일이 롤런드에게도 일어났단다. 어머니 로절런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어.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숨겨둔 비밀을 이야기했어. 어머나와 아버지가 정식 결혼하기 전에 그러니까 불륜을 저지르던 시기에 아기를 낳았다가 입양을 보냈다고 했어.. 그러니까 롤런드에게 의붓형, 의붓누나가 아닌 친형이 있었다는 거야. (이 설정은 지은이의 실제 경험을 빌려온 것이라고 하더구나.)

롤런드는 수소문해서 자신의 친형 로버트를 만났어. 다행히 입양가족들이 잘 해주어서 잘 사신 것 같았어. 로버트는 벌써 육십 대 초반이 되었지. 가족 중에 로버트 형을 기억하는 이는 조이 이모 한 명 뿐이어서 롤런드는 형과 함께 조이 이모를 만났어. 그리고 로버트는 엄마의 장례식장에도 참석했단다.

또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롤런드도 어느덧 62살이 되었어. 그 사이에 대프니는 피터가 또 도망가 버려 혼자 지냈어. 롤런드는 그제서야 대프니에게 청혼을 했고 대프니도 받아들여 둘은 결혼했어.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어. 대프니가 암, 그것도 말기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리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단다. 다행인 것은 대프니가 죽기 전 롤런드와 대프니 단 둘이 여행을 다녀왔단다. 대프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유골을 간직하다가 7년이 흐르고서야 대프니가 이야기한 곳에 유골을 뿌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그곳에 어떻게 알고 대프니의 전남편 피터가 쫓아왔단다. 자신이 대프니와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서 유골을 달라고 했어. 롤런드도 안 된다고 해서 둘은 대판 싸우기까지 했는데, 결국 피터가 대프니의 유골을 빼앗아 자신이 뿌려주었단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

2020년이 되었어. 너희들도 아는 것처럼 코로나19가 전세계를 덮쳤지. 코로나 봉쇄로 롤런드는 집에서 혼자 지냈어. 혼자 하는 것이 모두 힘든 나이가 되었지. 아무것도 아닌 집안일 하다가 넘어져 다치기도 했어. 어느날 앨리사의 편집인 뤼디거로부터 전화가 왔어. 앨리사가 왼쪽다리를 절단했고 앨리사가 롤런드를 만나고 싶다고 했대. 알겠다고 했지. 그리고 앨리사의 신간이 나와서 보내준다고 했어. 알겠다고 했지.

책을 받아서 읽어보았는데 처음으로 롤런드와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폭력적인 남편으로 그려져 있고 아기를 못 만나게 한다는 내용도 있었어. 새빨간 거짓말이었지. 기분이 완전 잡쳤어. 심지어 그 책을 읽은 아들 로런스도 롤런드에게 소설의 내용이 맞냐고 물어왔어. 롤런드는 바로 편집자 뤼디거에게 전화를 해서 화를 냈어. 이런 책을 출간할 수 있냐면서... 롤런드는 이 문제를 따지기 위해 바로 앨리사를 만나려고 했어. 롤런드는 코로나 봉쇄를 뚫고 독일로 날아가 어느 시골 마을에 은둔해 살고 있는 앨리사를 찾아갔어. 앨리사는 예전과 달리 큰 소리로 반기면서 반갑게 맞이했어. 롤런드는 앨리사가 진통제를 많이 맞아서 그런가 싶었단다. 롤런드는 자신에 대해 악의적으로 쓴 것에 대해 따지자 소설일 뿐이라고 항변했어. 그러면서 자신이 사랑한 남자는 롤런드가 유일하다고 했어. 남자보다 글쓰기를 더, 훨씬 더 좋아하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들은 함께 술을 마시면서 그 동안 잔뜩 쌓인 앙금을 어느 정도 풀었어. 앨리사는 폐암에 걸렸고 그것 때문에 다리도 자른 것이라고 했어. 하루에 담배를 수십 개비씩 수십 년 동안 폈으니 폐가 남아나질 않았겠지. 이제 지금 쓰고 있는 마지막 작품을 쓰고 죽을 거라고 했어. 롤런드는 앨리사에게 로런스를 만날 것을 권유했어. 앨리사도 그제서야 알겠다고 했어. 앨리사는 로런스에게 메일을 보냈어. 로런스는 오랜 고민 끝에 거절했단다. 로런스가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싶구나. 앨리사는 로런스에게 선물을 보냈어. 로런스의 외할머니의 일기장들과 청기사 연감이었단다. .외할머니 제인은 결혼과 함께 경력이 단절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글을 쓰셨단다.

....

롤런드의 말년은 그래도 행복했어. 로런스의 식구들, 대프니의 아이들의 식구들과도 자주 만남을 가졌어. 롤런드는 때론 힘들게 때론 행복하게 걸어온 자신의 우여곡절 인생이라는 길을 뒤돌아보며 삶을 정리하며 보냈단다. 정말 너무 짧은 인생이구나.

소설이 제법 두꺼워 다 읽는데 며칠이 걸리긴 했지만 그 며칠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났다는 것에 인생무상이 느껴졌어. 읽는 동안 아빠도 아빠의 삶을 되돌아오게 되더구나. 아빠의 삶은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엮을 분량이 안 되지만 역시 세월은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서 어느덧 인생의 가을을 보내고 있구나. 앞으로 삶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갈까. 하루하루 시간이 소중함을 명심하고 살아야겠구나. 아빠가 오늘 독서 편지의 앞부분에 저자의 글을 읽고 다소 안심했다고 했는데, 그건 롤런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코넬 선생님은 허구의 인물이라고 하더구나. 지은이 이언 매큐언의 삶에는 없는 캐릭터였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그건 불면증에 동반된 기억이지 꿈이 아니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러곤 걱정이 되어 이마를 찌푸린 채 할아버지의 남은 손을 잡고 앞에서 이끌어주었다.

 


스스로 만든 지옥은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누구나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만들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의 삶은 그런 지옥일 뿐이다. 성격이 불행을 자초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롤런드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자기 손으로 고문 기계를 만들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특정한 작업 혹은 술이나 마약 중독 혹은 발각될 위험이 있는 범죄 등 각자에게 맞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금욕적인 종교도 선택지에 들어갈 수 있다. 전체적인 정치체제가 고통을 자초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그때 한때 동베를린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결혼은 이인용 고문 기계로 킹사이즈의 가능성, 공유 정신병의 모든 변종을 아우른다. - P35

유럽 전역에 자기기만의 구름이 드리웠다. 서독의 한 텔레비전 채널은 방사능의 독기가 복수라도 하듯 소비에트 제국만 오염시키고 서구는 안전할 거라고 확신했다. 동독의 한 정부 대변인은 인민의 발전소를 파괴하려는 미국의 음모에 대해 언급했다. 프랑스 정부는 방사능구름의 남서쪽 가장자리가 프랑스와 독일 사이 국경과 일치한다고, 그 구름은 국경을 넘을 권한이 없다고 믿는 듯했다. 영국 당국은 대중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사천 개의 농장을 폐쇄하고, 사백오십만 마리의 양을 판매 금지하고, 수천 톤의 치즈를 거둬들이고, 어마어마한 양의 우유를 배수로로 흘려보냈다. 모스크바에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아기들과 아이들이 방사능에 오염된 우유를 마시게 내버려뒀다. 하지만 곧 이기주의가 만연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상사태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고, 그런 일은 비밀리에 일어날 수 없었다. - P104

천재가 인생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 연주도 하고, 요트도 타고, 명성도 좋아하고, 자신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순수한 기쁨도 느끼며 충분히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지저분하게 이혼하고, 양육권 싸움을 하고, 여자 문제로 골치를 앓으며, 다비트 힐베트르가 자신의 업적을 가로챌 거라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양자역학을 비판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빚진 뛰어난 시달리고, 양자역학을 비판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빚진 뛰어난 젊은이들과 갈등을 빚었다. 차라리 멍청하거나 평범한 게 나을까?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멍청이도 불행에 이르는 자기만의 길이 있다. - P150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어쩌면 내가 틀렸는지도 몰라. 난 완전히, 그리고 빨리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잔인한 짓이었고, 미안하게 생각해. 정말 미안해…… 그게 늘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야. 당신이 매일 섹스를 요구하는 거. 하지만 아기는…… 아기의 요구는, 아기는 나를 소멸시켰지. 아기와 당신……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어. 생각도, 인격도, 바라는 것도, 바라는 건 잠뿐이었지. 난 침몰하고 있었어. 벗어나야만 했어. 집을 떠난 날 아침……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그게…… 그 이야긴 안 할래. 당신은 좋은 아빠고 래리는 어리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당신도 괜찮아질 거라고, 조만간. 난 괜찮지 않았지만 이미 선택을 했으니 내가 해야 하는 걸 했어. 이거."
그녀는 다시 토트백에 손을 넣어 그가 카페에서 본 책을 꺼냈다.
- P344

현대 가정의 중심은 더 이상 거실이나 응접실, 가장의 서재가 아니다. 이제 주방이 중심이며, 주방의 중심은 식탁이다. 아이들이 대화와 관련된 무언의 규칙, 타인과 어울리는 법 같은 기본적인 예의를 배우는 곳이니까. 아이들은 평생 습관이 될 규칙적인 식사의 중요한 리듬과 의식을 습득하고, 식사 후 정리를 도와주는 간단한 첫 의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식탁은 우편물을 뜯어보고, 주인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손님으로 온 친구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 P393

소중한 내 사랑,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나를 강에 뿌려줘. 이십 년이 걸린다 해도 상관없어. 당신 혼자 힘으로 다리까지 와서, 우리가 서 있었던 곳에 서서 우리에 대해, 그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만 하면 돼. 난 십대 때 불가리아인과 사랑에 빠졌지. 그는 언젠가 유명한 시인이 되겠다고 했어. 그 꿈을 이뤘는지 궁금하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으니까. 나는 사십 년 넘게 지난 뒤 같은 장소로 돌아가서 당신과 사랑에 빠졌지. 아니, 오래전까지 당신을 사랑했음을 깨달았지. 차를 몰고 당신과 함께 산길을 달리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옆에 앉아서 지도도 봐주고, 펜션의 조율도 안 된 피아노로 내가 신청한 감상적인 곡을 연주해준 당신, 정말 고마워. 다 고마워. 이 여행이 당신에겐 고통이리라는 거 나도 알아. 당신에게 고마워해야 할 또하나의 이유지. 이 아름다운 강을 당신 혼자 찾아오게 해서 정말 미안해. 내 사랑,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마! 대프니.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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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는 괴물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친족 성폭력, 부모의 방임, 심각한 폭행과 추행, 강간까지 온갖 종류의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10대가 되어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을 만나기 전부터 나는 다른 소아성애자들에게 성착취를 당했고, 두 사람은 내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은 부유하고 권력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빌려주었다. 나는 반복적으로 이용당하고 모욕당했으며, 목이 졸리거나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성노예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막 넘긴 무렵,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2002년에 탈출했다.


(123-124)

소원을 빈다고 다 이루어진다면, 거지도 말을 탈 수 있겠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고, 그를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그 생각이 좋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갈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애핑거에게 감금되어 있던 시절의 나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나를 구하려고 했다가는 붙잡혀 체벌을 당하거나 그보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믿게 되었다. 오칼라에서만큼은, 내 소원이 정말로 그 말들처럼 사는 것이었음을, 창밖에 있던 말들은 내가 갖지 못했던 자유, 내가 간절히 원하는 자유 그 자체를 상징했다. 느긋하게 풀을 씹으면서도 위험의 기척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세우고 있던 말들을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내 삶이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


(138-139)

알레시는 지시대로 차를 세웠고 차에서 내린 맥스웰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또다시 포식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이번 포식자는 이전에 만났던 누구와도 달랐다. 아버지와 포리스트, 론 에핑거, 혹은 에핑거가 떠넘긴 남자와도 달랐다. 맥스웰은 최상위 포식자였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침착하며 자신감이 넘쳐 보였지만, 속은 그만큼 탐욕스럽고 욕심도 많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맥스웰의 매혹스러운 외면을 꿰뚫어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말처럼 본능적으로, 내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인지 알아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맥스웰에 대한 첫인상은 마러라고에서 만났던 다른 부유한 손님들을 처음 맞이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나도 나중에 그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57-158)

세간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며 갈기갈기 파헤쳐진 내 삶의 한 대목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나온 세월을 되풀이해 말하는 일은 하나도 유쾌하지 않다. 내가 저지른 과오와 내게 가해진 폭력을 곱씹는 과정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벌어진 일들을 순서대로 낱낱이 기록하다 보면, 끔찍한 세부 사항들에 매몰되어 자칫 본질을 놓칠까 봐 두렵기도 하다. 분명 나는 성적으로 학대당했다. 내 육체는 나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이용당했다. 하지만 엡스타인과 맥스웰이 내게 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은 육체가 아닌 정신을 향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나를 교묘히 조종하여 나 자신을 갉아먹는 행위에 가담시켰고, 끝내 현실 감각을 마비시켜 최소한의 방어 기제조차 작동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애초에 나는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일에 공범이 되도록 철저히 길들여졌다. 두 사람이 내게 남긴 수많은 상처 중에서도, 강요된 공모야말로 가장 파괴적인 흉터였다.


(224)

마음속에는 또 다른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 일곱 살 때와 마찬가지로, 열일곱 살이 된 나도 윗사람들한테 칭찬받고 싶어 했고 실제로 칭찬도 자주 들었다. 다른 남자들을 상대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면 돈만 건네받는 게 아니었다. 당시 내게 돈보다 간절했던 말도 함께 들었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수치심과 창피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는데도 나는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만족이라고 여겼다. 이처럼 서로 어긋나는 감정이 한곳에 엉켜 새긴 매듭을 풀어내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254)

가혹 행위가 이어지던 와중에 엡스타인은 내게 브로드웨이 연극 <오페라의 유령> 관람권을 건넸다. 공연 관람은 생전 처음이었기에 화려한 무대 장치에 압도당하기도 했지만, 극중 유령의 모습에서 엡스타인이 겹쳐 보여 큰 충격을 받았다. 뛰어난 학자이나 마술사, 건축가, 발명가이면서 작곡가이기도 했던 유령은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유령이 납치한 소녀에게 억지로 웨딩드레스를 입히던 장면은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소녀는 유령의 흉측한 겉모습이 아니라 유령의 내면에 도사린 본성이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노래 싱크 오브 미(Think of ms)’를 들을 때면, 나를 사실상 납치해 가둔 비틀린 괴물 엡스타인이 떠오른다


(384-385)

네덜란드는 당초 계획했던 목적지가 아니라고, <세서미 스트리트>의 작가 킹슬리는 다운증후군 아들을 낳은 뒤 집필한 에세이에서 아이를 낳는 것을 그렇게 비유한다.

“’나는 이탈리아에 가야 해요라고 당신은 항변합니다. 평생 이탈리아에 가기만을 꿈꿨으니까요. 하지만 계획은 바뀌었고, 이제 네덜란드는 당신이 머물러야 할 터전이 됩니다. 그렇게 당신은 수긍합니다. 중요한 점은 누군가 당신을 끔찍하거나 혐오스럽고 지저분한 곳으로 끌고 간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저 다른 장소일 뿐이에요. 네덜란드는 이탈리아보다 삶의 호흡이 느리고 화려함도 덜하지만, 풍차와 튤립, 그리고 렘브란트라는 대가가 존재합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이탈리아를 드나들 것이고, 그곳에서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냈는지 자랑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남은 평생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맞아요, 원래 거기로 가려고 했어요. 내가 계획했던 건 바로 그 여행이었죠.’ 그 고통은 절대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품어온 꿈을 잃었다는 건 아주, 아주 중대한 상실이기 때문이요.

하지만 만일 이탈리아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남은 인생을 보낸다면, 네덜란드가 가진 아주 특별하고도 사랑스러운 것들을 결코 마음껏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400)

평범한 여자 한 명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하지만 요세프버그 부녀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남편과도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 앞에 나서는 일을 진지하게 상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딸들이 어떤 일을 견뎌야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딸을 키우는 부모로서 우리가 그 비극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멘토였던 루스 메노어가 말 한 마리로 비영리 단체 빈세례모 센터를 일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나 같은 이들을 위해 그런 터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잠든 뒤, 로비와 나는 잠들 때까지 서로의 두려움과 희망을 속삭이듯 주고받았다. 나를 짓밟은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이제는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확신이 뚜렷해졌다.


(403)

삶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이따금 뉴스나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이름이나 얼굴을 마주칠 때가 있었다. 엡스타인과 맥스웰이 성적인 행위를 하라고 강요했던 수많은 유명 남성이 그곳에 불쑥 나타났다. 나를 직접 학대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만났던 저명인사의 사진을 신문에서 볼 때도 그에 못지않게 혼란스러웠다. 가령 빌 클린턴이 조지 W. 부시와 함께 지진 피해를 입은 아이티의 복구 작업을 지원하러 갔다는 뉴스가 나오면, 아득히 전생 같은 과거에 미국의 국군통수권자였던 이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아 아찔해졌다.


(443-444)

그날 늦은 밤에 에드워즈와 나는 다시 포트로더데일로 날아갔고 나는 로비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왔다. 성공적인 여정이었지만, 나는 뼈마디가 저릴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로비는 내가 꼭 퇴행한 사람 같다고 말했다. 엡스타인과 맥스웰의 세계에 잠시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마치 그들의 노예였을 때 가졌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간 듯 보였다는 것이다. 타이터스빌의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잠만 잤다. 로비의 말에 따르면 나는 자기나 아이들과 대화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사과했지만, 사실 당시의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조차 자각조차 못했다. 강해지고 투사가 되고 싶었지만, 내 안의 일부는 그 과정에 들어가는 엄청난 노력에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은 상태였으니까. 실제로 나는 이전의 매복 공격에서 체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전쟁터로 끌려나간 병사처럼, 심각한 정신적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454)

서른한 살이 된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싸우며 살아왔다. 분명 큰 진전이 있었지만, 가끔은 그동안의 치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휘몰아치는 허리케인 속의 집이 된 기분이었다. 폭풍해일이 너무 깊게 밀려들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외벽이 떨어져 나가 떠내려가는 그런 집 전체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피해는 남는 법이고, 수리가 끝나기 전까지 집은 난장판일 수밖에 없다. 콜로라도로 향하는 길 위에서 한동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불행으로 점철된 난장판.


(469)

나는 정말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불과 13년 전만 해도, 나는 엡스타인과 맥스웰의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 채 낯선 타국으로 끌려다니던 처지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스스로 자유를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때보다 단단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저 세상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던 겁 많은 소녀는, 아제 가해자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신념의 상징으로 대중 앞에 선 강인한 여성이 되었다. 비방 세력이 부모의 자질을 운운하며 내 아이들까지 공격의 과녁으로 삼았을 때, 내 안의 분노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맹렬함으로 타올랐다.


(536)

그러던 중 트위터에서 누군가 미국 연방수사국이 초부유층과 권력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성 글을 올렸고, 나는 이에 응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만약 내가 갑작스럽게 죽는다면, 누구도 사고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의사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힙니다.”


(542-543)

실제로 엡스타인은 자해를 시도한 적이 있었음에도 자살 감시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한때는 수감실 동료가 있었지만, 사망 당일 밤에는 혼자 수감실을 쓰고 있었다. 엡스타인의 수감실에서 불과 15피트( 5미터) 떨어진 책상에 앉아 있던 간수 두 명은 밤 10 30분부터 아침 6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순찰하며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간수들은 잠을 자거나 인터넷 서핑을 했고, 나중에 순찰을 마친 것처럼 기록지를 조작했다. 엡스타인의 자해 행위나,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엡스타인을 살해한 누군가의 움직임을 포착했을 보안 카메라는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작동 중이었던 다른 카메라들을 확인해보니 엡스타인이 사망한 밤에 해당 구역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로써 자객이 몰래 침입했을 가능성은 배제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엡스타인의 동생이 고용한 법의학 전문의의 공식 부검 보고서로 상황은 반전됐다. 그는 엡스타인의 목 부위에서 발견된 골절과 연골 파손 흔적이 타살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587)

얼마 지나지 않아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는 CBS 게일 킹과의 인터뷰에서, 27년간 함께한 남편 빌 게이츠와 이혼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엡스타인과 남편의 관계였다고 밝혔다. 멜린다는 킹에게 빌이 제프리 엡스타인과 만나는 것이 싫었고, 그 점을 분명히 말했습니다라고 전하며, 본인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싶어서엡스타인을 딱 한 번만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느낀 소감은 이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후회했습니다. 그는 혐오스러운 자였어요. 악의 화신 그 자체였죠. 피해 여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621-622)

내가 사라지는 게 모두를 위하는 선택이야.’ 머릿속 목소리가 속삭였다. ‘로비와 아이들의 삶에 스트레스와 걱정거리만 안겨줄 뿐이잖아. 제프리와 길레인이 나에게 준 고통인데 왜 가족들까지 괴로워해야 해? 난 가족을 실망시켰어. 우리가족에겐 더 나은 엄마와 아내가 필요해. 내가 없어야 그들이 더 행복해질 거야.”


(635)

가슴 아픈 고백이지만,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훨씬 더 많은 행동이 필요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엡스타인 사건을 그저 운 나쁘게 불거진 유례없는 일로 치부하려 든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가 사냥한 피해자의 수가 워낙 막대해 독보적인 괴물처럼 보일 뿐, 그는 결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여성을 소모품처럼 여기고 함부로 다루는 그 오만한 시각은, 법망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흔하게 발견되는 현실이다. 그들 중 다수는 지금도 아무런 제약 없이 일상을 영위하며, 견고한 권력의 울타리 안에서 평온을 누리고 있다.


(641-642)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착한 소녀가 되라고 강요한다. 내가 이 책을 쓰며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은, 그 강요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특히 나와 같은 생존자들에게 덧씌우는 것이었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옳은 일을 택하는 이들을 경외하기에 그간 용기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해왔지만, 이제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가해자를 지목하는 용기만큼이나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다. 독자들은 내가 이 책에서 일부 가해자들의 실명을 언급하면서도, 나를 유린했던 남성들 모두를 밝히지는 않았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여전히 이름을 모르는 이들도 있지만,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엡스타인과 맥스웰 곁을 떠나기 직전 나를 무참히 짓밟았던 남자, 내가 진술서에서 전직 총리라 명명했던 그가 바로 그런 존재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그 또한 자신이 내게 저지른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세상 앞에서는 뻔뻔하게 모든 사실을 부인했을지라도 말이다. 나는 그가 두렵다. 이 책에 그의 이름을 올리는 순간,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해치려 들 거란 공포가 나를 짓누른다.


(645)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앤드루 왕자의 합의금이 지급됨에 따라, 나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나의 재단 소어를 전문적인 조직으로 키워나가기 위한 길고 신중한 과정을 시작했다. ‘소어의 목표는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호, 그리고 범죄 예방에 집중하는 단체들을 지원함으로써 인신매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나아가 대중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의 징후를 더 쉽게 포착할 수 있도록 돕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뒷받침하는 기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왕실에서 나온 그 돈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데 쓰일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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