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가,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귀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32)

이 모든 것들이 당혹스럽고 언짢았다. 왜냐하면 그 무렵 나는 제국주의가 사악한 것이니 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론적으로는(물론 남몰래 그랬다) 전적으로 버마인들 편이었고, 그들의 압제자인 영국인들을 전적으로 적대시했다. 내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정도보다 지독하게 혐오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제국의 추악한 짓거리들을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악취 지독한 철창에 처박혀 있는 불쌍한 죄수들, 장기 재소자들의 겁먹은 얼굴, 대나무로 매질을 당한 사람들의 터진 엉덩이. 이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난 그럴싸한 내 나름의 관점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나는 아직 어린데다 부실한 교육을 받았고, 동양에 가 있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내 문제를 철저히 함구한 채 혼자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는 대영제국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것을 대체해가는 신생 제국들보다는 영국이 훨씬 낫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내가 알았던 것이라곤 섬기던 제국에 대한 나의 증오와, 도무지 일을 할 수 없게 만들려던 악독하고 자그만 인간들에 대한 나의 분노 사이에 내가 끼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64-65)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나 지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 살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버마에서 영국 제국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목격했고, 영국에 와서는 빈곤과 실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런 시스템에 맞서 싸운다는 게, 주로 독서 대중에서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책들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태의 진전이 점점 빨라지고 있으며, 한때는 한 세대 뒤의 위험 같아 보이던 것들이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적극적인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데 그쳐서도 안 되고, 언제나 활발한 적들의 술수에 놀아나서도 한 된다.


(88)

애국주의, 즉 국민적 충심이 갖는 압도적 힘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오늘의 세계를 제대로 볼 수는 없다. 애국주의는 상황에 따라 무력해질 수도 있고, 문명의 어느 단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힘으로서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기독교와 국제 사회주의는 애국주의에 비하면 지푸라기처럼 연약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들의 나라에서 권좌에 오른 가장 큰 비결은, 그들은 이 사실을 파악했고 그들의 적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데 있다.


(107)

영국은, 자주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처럼 보배 같은 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괴벨스 박사의 묘사처럼 지옥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집안을, 상당히 고루한 빅토리아 시대의 집안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골칫덩이가 많진 않아도 찬장마다 해골이 넘쳐나는 집안 말이다. 이 집안에는 비굴하게 아첨을 떨어야 하는 부자 친척도, 끔찍이 들러붙는 가난뱅이 친척도 있으며, 집안의 수입원에 대해 함구한다는 단단한 공모가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좌절을 겪고, 실권은 대부분 무책임한 삼촌들이나 몸져누운 숙모들 손에 있다. 그래도, 집안은 집안이다. 나름의 언어가 있고, 공통의 기억이 있으며, 적이 다가오면 단결한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영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게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134-135)

군대 생활의 본질적인 공포는(군인이 되어본 사람이라면 군대 생활의 본질적 공포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이다) 어떤 성격의 전쟁에서 싸우게 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군기 같은 것은 어떤 군대든 궁극적으로는 마찬가지다. 명령은 복종해야 하고 필요하면 처벌로써 강요되며, 장교와 사병의 관계는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책들에 나오는 전쟁 묘사는 대체로 정확하다. 총탄은 맞으면 아프고, 시체는 썩어 악취를 풍기고, 총격전이 벌어지면 너무 무서워 바지를 적시기도 한다. 어떤 군대가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배경이 그 군대의 훈련과 전술과 전반적인 능력에 영향을 끼치며, 정의 편이라는 의식이 사기를 북돋우는 것도 사실이다.


(137)

오늘날 일반 대중의 견해가 왔다갔다하는 묘한 현상은, 말하자면 수도꼭지 열리고 닫히듯 정서가 돌변하는 것은 신문과 라디오의 최면 탓이다. 한편 지식인들의 경우는 상당 부분 돈과 한낱 신체적 안전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주전(主戰)’ 쪽이 되기도 하고 반전쪽이 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그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에 대한 실제적인 그림이 없다. 물론 그들은 스페인내전에 대해 열광하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죽는다는 게 불쾌한 일이란 건 알았다. 하지만 스페인 공화국 장병의 전쟁 체험은 아무튼 품위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웬일진지 이 전쟁의 변소는 악취가 덜 나고, 군기는 덜 짜증스럽다고 본 것이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믿었는지는 <뉴 스테이츠먼>을 슬쩍 들여다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쏙 빼닮은 허튼소리가 작금의 붉은 군대에 대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문명화되어 명백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종종 싸워야만 하고, 싸우자면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전쟁은 악이며, 차악(遮惡)인 경우도 흔히 있다. 칼을 드는 자는 칼로 망하며, 칼을 들지 않는 자는 악취 진동하는 병으로 망하는 것이다. 이런 케케묵은 소리를 굳이 쓸 필요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간 임대소득이나 이자로 먹고사는 자본주의가 우릴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148)

기록된 역사 대부분은 어떤 식이든 거짓이라는 말이 유행인 건 나도 안다. 나는 역사가 대체로 부정확하고 편향된 것이라는 말을 기꺼이 믿는 쪽이다. 한데 우리 시대에 와서 특이한 점은, 역사가 진실하게 기록될 수도있다는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글을 무의식적으로 윤색하거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진실을 애써 추구했다. 단 어느 쪽이든 사실은 존재하며,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사실이 늘 상당 부분 있었다.


(194)

진실은 밝혀질 수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신문이 사실을 워낙 거짓으로 알리기 때문에, 거짓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어거나 나름을 견해를 갖추지 못한다 해서 일반 독자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가 전반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에 황당한 믿음을 고수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무엇 하나 입증되지도 반증되지도 않기에, 더없이 엄연한 사실도 뻔뻔히 부인해버리는 게 가능해진다. 더구나 민족주의자는 세력, 승리, 패배, 복수에 대해 끊임없이 골몰하면서도 실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선 다소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가 바라는 바는 자기편이 상대편보다 앞서고 있다고 느끼는것이며, 사실이 뒷받침되는지 확인하기보다는 상대편을 묵살해버림으로써 더 쉽게 그럴 수 있다. 모든 민족주의 논쟁은 토론반 학생들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어떤 논쟁 참가자든 자신이 이겼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어떤 논쟁 참가자든 자신이 이겼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결판이 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어떤 민족주의자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실제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세력과 정복을 꿈꾸며 제법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210)

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일반적인 사실로 판명될 것이라 생각한다. , 가장 강력한 무기가 싸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 복잡한 무기는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들고, 단순한 무기는(보복이 따르지 않는 한) 약자에게 갈고리발톱이 된다.


(218-219)

확실히 과학교육은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실험적인 사고의 습성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 즉 부닥치는 어떤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습득하는 것이어야지, 사실을 잔뜩 축적하는 것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과학교육 옹호론자에게 하면 대게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하면, 언제나 과학교육이란 정밀과학에, 달리 말해 더 많은 사실에 주목하는 일이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과학은 한 덩어리의 지식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은 현실에서 강한 반발에 부닥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순전히 직업적인 시기심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이 단순히 하나의 방식이나 태도라면, 그래서 사고방식이 충분히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 과학자라 할 수 있다면, 지금 화학자나 물리학자 등등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위세는 어찌 되며 아무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현명하다는 주장은 또 어찌 되겠는가?


(240)

하지만 자연과학이나 음식이나 미술이나 건축이 어떻게 되든 간에 사상의 자유가 말살된다면 문학의 운명은 (내가 지금까지 밝히려고 한 바와 같이) 암울할 게 확실하다.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전체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작가, 박해와 현실 조작에 대해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작가, 그럼으로써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이는 작가도 같은 운명인 것이다. 그 길로 접어들면 헤어날 방법이 없다. ‘개인주의상아탑을 비난하는 어떤 장광설도, ‘참된 개성은 공동체와 합일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식의 경건하고 상투적인 어떤 주장도, 매수된 정신은 망가진 정신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어느 순간에 자발성을 갖게 되지 않는 한, 문학 창작은 불가능하며 언어 자체가 굳어져버린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인간의 정신이 지금의 것과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된다면, 우리는 문학 창작과 지적 정직성을 분리하는 법을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가 아는 것은, 상상력이란 야생동물과 비슷한 것이어서 가둬두면 번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는(지금 소련에 대한 거의 모든 찬사에는 그런 부인이 내제되어 있다) 작가나 언론인은 실은 자신의 파멸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246-248)

이런 질문을 하루 수밖에 없는 건,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 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77)

제비보다 먼저, 수선화보다 먼저, 아네모네보다 조금 늦게, 두꺼비는 봄이 다시 찾아온 것에 대해 나름의 경의를 표한다. 지난 가을부터 들어가 누워 있던 땅속 구멍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적당한 물웅덩이 쪽으로 최대한 빨리 기어가는 것이다. 무언가가(땅속의 어떤 떨림인지 아니면 그냥 온도가 몇 도 올라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두꺼비에게 깨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몇 마리는 내내 잠만 자다 한 해를 아예 빼먹기도 하는 것 같다. 한여름에 땅을 파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두꺼비를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으니 말이다.


(300)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으로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 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이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다.


(329)

작가의 관점은 정신건강 차원의 온전함, 그리고 가지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능일 것이며, 그것은 확신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위프트는 정상적인 의미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비전은 확실히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숨겨진 진실 하나를 골라내어 확대하고 비틀어서 볼 줄 아는 능력이기도 했다. <걸리버 어행기>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이 온전함이라는 기준을 겨우 만족시키는 수준일지라도, 작가의 확신이 뒷받침해준다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충분히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419)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미덕은 이기는 데 있었다. , 미덕이란 남들보다 더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좋고, 세련되고, 거리낌 없는 데 있었다. 달리 말해 남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바보 같아 보이게 하며, 모든 면에서 남보다 앞서는 데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본래 위아래가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자체가 옳은 일이었다. 강자가 있어 그들은 이겨 마땅하고 언제나 이겼으며, 약자가 있어 그들은 져 마땅하고 언제나, 끝없이 지기만 했다.


(431)

아이는 일종의 이질적인 수중(水中) 세계에 살며,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하자면 기억이나 점술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단서는 우리도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점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거의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기 어린 시절의 분위기를 거의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신학기가 되어 학교로 아이를 돌려보낼 때 무늬가 영 이상한 옷을 입혀 보내면서 그게 문제가 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이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안겨주는 부모를 생각해보라! 그런 유의 문제에 대해 아이는 때때로 항의 표시를 하겠지만, 많은 경우 아이의 태도는 그저 감정을 숨기는 데 그치고 만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어른에게 노출하지 않는 것은 일고여덟 살 때부터 시작되는 본능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어른이 아이한테 느끼는 애정이나 아이를 보호하고 아끼고자 하는 욕구도 몰이해의 원인이 된다. 어른이 다른 성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이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보답으로 그 어른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한다면 경솔한 판단이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건대, 유아기가 끝난 뒤로는 어머니 말고는 어떤 어른에게도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어머니에 대해서도 신뢰가 없었는데, 쑥스러워서 진짜 감정은 대부분 숨겼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내 경우에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사랑의 감정은 어린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무엇이었다.


(434)

아이들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그렇게 잘 믿기 때문에 어른한테 영향받기 쉬우며, 그만큼 열등감에 물들거나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감에 휘둘리기 쉽다.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가장 계몽된 학교에서도(보다 미묘한 방식일진 몰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하는 기숙학교가 일반 통학학교보다 더 나쁘다는 것만은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집이 가까이 있으면 아이가 인식을 얻기가 더 쉬운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영국 상류층과 중산층 특유의 결함은 여덟아홉, 심지어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을 최근까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로 보내온 일반적인 관행에서 어느 정도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446)

정치에선 둘 중 어느 쪽이 덜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 이상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악마나 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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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8-28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책입니다.
뽑아주신 인용문장을 보니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ookholic 2022-08-28 23:21   좋아요 1 | URL
저는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좋은 글들이 많았어요...
소설을 통해 조지 오웰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의 에세이도 깊이 있고, 좋았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게르니카의 황소
한이리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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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아빠가 읽은 책은 한이리 님의 <게르니카의 황소>라는 소설이란다. 이 책은 독특한 소설 제목과 먼저 읽은 이들의 높은 평점으로 아빠의 눈길을 끈 책이란다. 그리고 대한민국콘텐츠대상 스토리부문 대상작이라고 하였어. 이 소설의 제목은 누가 봐도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에서 따 온 것을 알 수 있었단다. 아빠도 그 그림의 제목만 알았지, 자세한 내용은 몰라서 구글링을 좀 해봤더니 게르니카라는 그림은 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 지역을 독일군이 비행기로 폭격한 참상을 기리는 마음으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구나. 그 크기가 349.3 x 776.6 cm나 되는 엄청난 크기라고 하더구나.

그런데 왜 이 소설에 그 그림에서 따왔을까, 궁금했단다. 지은이는 한이리 님이라는 처음 알게 된 분이었어. 대한민국콘텐츠대상 스토리부문 대상작이고, 평점이 너무 좋아서 아빠가 너무 기대를 하고 책을 펴서 그런지, 그 기대에는 좀 못 미쳤단다. 아빠의 취향과 좀 안 맞는다고 할까?


1.

한국에서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은 온 소녀. 신경질환을 겪던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딸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 엄마는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혼자 남은 딸은 정신병원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그 딸은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엔 열 살 이전의 기억을 하나도 못하고, 심지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그 딸을 치료하던 의사 칼 벤헴은 그 소녀를 양녀로 입양하였고, 이름을 케이트라고 지어주었어. 케이트 벤헴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란다. 칼 벤헴에게는 친 딸 레이첼과 친아들 댄이 있었는데 레이첼과 댄은 케이트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단다. 케이트는 그 사건의 트라우마로 정신 질환을 겪고 약을 주기적으로 먹어야 했어.

그런 케이트가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을 보면 안정을 찾았어. 그래서 칼 벤헴은 케이트의 생일 선물로 게르니카그림을 주었어. 케이트 방의 한 쪽 면을 게르니카로 가득 채웠지. 그 이후 케이트는 게르니카 그림 속 황소가 뛰쳐나오는 환상을 겪곤 했어. 그러다가 그림을 그리면 안정을 찾곤 하는데, 케이트의 그림이 수준급이었단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버지 칼 벤헴의 소개로 그가 근무하는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상대로 그림 치료 강의를 하기도 했단다.

케이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약을 먹지 않기도 했는데 그 때면 아버지한테 혼나고 다시 약을 먹었단다. 심지어 어쩔 때는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어.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약을 먹지 않아서 다시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했어.


2.

그런 병원 생활이 싫어서 탈출을 하고 친구 니콜의 집에서 숨어 지냈어. 그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꿈을 너무 생생히 꾸었단다. 그리고 케이트 자신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어. 꿈속에서 알게 된 에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에린이 그린 그림이 엄청났고, 꿈속에 본 에린의 그림을 케이트가 다시 그렸어. 그런데 그 그림들이 그야말로 대박을 치게 된 거야. 꿈 속의 에린은 자신의 그림을 훔쳤다고 했어.

이 때부터 소설은 지금 이야기가 케이트의 꿈 속에서 일어나고 이야기인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인지 읽는 이들도 혼란스러웠단다. 에린이 정신병원 보일러실에 갇혀 있었는데, 케이트는 그 에린을 구출해 주고 시골의 한 별장에 지내게 하면서 그림만 그리게 했단다. 어찌 보면 케이트가 다시 에린을 가두었다고 생각할 수 있어. 아무튼 에린이 그린 그림들은 케이트의 이름이 붙인 채 고가에 팔리게 되었어. 사실 케이트가 현실에서 다시 그린 그림들이지만, 이미 케이트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어.

….

그런데 있잖니이런 이야기는 결말부에 가서 대 반전을 이루게 된단다. 지금부터는 아빠의 편지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나중에 이 소설을 읽을 마음이 있다면 아래 편지는 안 읽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아빠가 앞서 이야기한 케이트의 열 살 이전의 기억들 있잖니. 그게 모두 거짓이었어. 케이트는 열 살 이전의 기억을 모두 상실했고, 양아버지 칼 벤헴한테 들은 것들이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어.

모두 칼 벤헴의 짓이었어. 칼 벤헴은 아동성애자란다. 그가 납치 후 가둬서 죽인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었어. 그가 케이트에게 약을 먹인 것도 정신 질환 치료가 아닌, 옛 기억을 떠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이었어. 케이트의 부모님은 죽었냐고? 그렇지 않았어. 그들의 식구들은 여전히 코리아타운에 살고 있단다. 딸을 잃은 슬픔을 안은 채 말이야. 그리고 칼의 결말은 이 사실을 알게 된 케이트의 의해 끝나게 된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어. 마지막 예상치 못했던 반전은 괜찮았지만, 소설 중반부 꿈과 현실을 어지러움이 아빠에게는 다소 지루하고, 머릿속에서 그려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단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PS:

책의 첫 문장: 어머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샤넬 No.5의 향기를 맡았다고 한다.

책의 끝 문장: 다시는 그 어떤 환상에도 속지 않도록 두 눈을 똑바로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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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곡 소오강호 5
김용 지음, 박영창 옮김 / 중원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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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바로 소오강호 제 5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 4권에서는 일월신교 교주였던 임아행과 영호충이 인연은 맺게 되었고 임아행이 12년 동안 갇혔던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었잖아. 영호충도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했고, 다시 임아행을 구출하려고 다시 감옥으로 갔지만 이미 임아행은 영호충보다 먼저 탈출한 사실을 알게 되었잖아.

….

5권 첫 부분은 영호충이 임아행과 그의 심복 향문천과 다시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한단다. 영호충을 마음에 들어 했던 임아행은 영호충에게 일월신교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고, 영호충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단다. 영호충은 화산에 다시 가서 스승 악불군의 오해를 풀려야 한다면서 그들과 헤어져 길을 떠났단다.

영호충이 감옥에 머무는 동안 임아행이 벽에 새겨 놓은 흡성대법을 몸에 익혀서 몸이 많이 회복되었단다. 화산에 가는 길에 못된 군인을 혼내주기도 했는데, 그를 혼내주고 자신의 신분을 그 군인으로 위장하면 눈에 안 띄고 좋겠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영영이 자신을 죽이라는 소문을 강호에 널리 퍼뜨리게 했으니 말이야.

그가 화산에 가는 길에 마교 일당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산골짜기에서 몰래 숨어서 어떤 계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알고 보니 그들은 그 산길을 지나가는 항산파 일행을 공격하려는 것이었어. 그리고 그 항산파 일행에는 영호충과 친분이 있는 의림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영호충은 군인으로 변장한 모습으로 그들을 도와주어 안전하게 그곳을 지나갈 수 있게 했어. 하지만 항산파 일행을 노리는 이들은 또 있었어. 어떤 마을에서 항산파 일행은 정정사태를 제외하고 모두 잡혀가고 말았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호충도 항산파 일행을 찾으러 다녔어. 영호충은 정정사태와 함께 항산파 일행을 잡아간 의문의 무리들과 싸워서 모두 구출해 냈으나, 정정사태가 부상을 입고 그만 죽고 말았단다. 항산파를 안전하게 보내고 영호충은 다시 화산으로 길을 떠났단다.


1.

영호충이 복건성이란 곳에 도착을 했는데, 그곳에 우연히 악영산과 임평지의 밀애 장면을 보게 되고 가슴 아파했단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던 악영산인데, 이제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 곳에 두 명의 괴한이 잠입하여 악영산과 임평지의 혈도를 찍어 꼼짝 못하게 하고, 그곳에 숨겨져 있던 <벽사검보>를 훔쳐갔단다.

<벽사검보>는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임평지 집안 내내 내려오는 검술의 비법을 적은 책이었단다. 아니 책으로 알고들 있었지. 임평지 집안 아니면 본 적이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벽사검보>는 종이가 아닌 장삼가사라는 옷에 빽빽이 적혀 있었던 거야. 그것이 복건성에 숨겨져 있었는데, 그 괴한들이 그것을 알고 훔치러 온 거야. 영호충은 그 괴한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죽이고 <벽사검보>를 빼앗았는데, 너무 많은 기력을 써서 정신을 잃었단다. 영호충이 몸이 회복은 되었지만, 아직 정상은 아니었거든.

다시 정신이 들어 깨어나자, 그의 곁에는 악불군과 악부인이 있었어. 그리고 그가 빼앗은 <벽사검보>는 사라지고 없었단다. 영호충은 반가움에 인사를 했지만, 악불군은 영호충에게 화를 했단다. 영호충이 마교와 어울리고 규율을 어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얼마 뒤 숭산파 일행이 자신들 사람 두 명을 죽었다며 영호충을 찾아왔단다. 그럼 그 <벽사검보>를 훔치려고 있던 사람이 숭산파였던 거야. 그들이 왜 그런 나쁜 짓을 한 거지? 영호충을 찾으러 온 숭산파 사람들과 영호충이 싸웠는데, 영호충은 자신도 모르게 임아행에게 배운 흡성대법을 사용하였고, 이 흡성대법을 본 숭산파 무리들은 도망을 갔단다.

이를 지켜보던 악불군도 영호충이 흡성대법을 쓰는 것을 보고 마교 취급을 하고, 다음에 만나면 자신 손으로 죽일 테니 이번만은 그냥 사라지라고 했어. 오해를 풀고 다시 화산파 일원이 되려고 했던 영호충은 더 상태만 안 좋아진 상태로 화산을 떠났단다. 화산을 떠나 가고 있는데, 악영산이 찾아와 다짜고짜 <벽사검보>를 내놓으라며, 임평지를 왜 죽이려고 했냐고 했어. 영호충은 <벽사검보>는 없고, 임평지를 죽이려고 한 적 없다고 하자, 그 말을 믿지 않고 돌아가 버렸단다. 악영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영호충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니. 그리고 <벽사검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2.

위기에 빠져 있던 항산파의 정일사태와 정한사태를 도와 준 영호충. 그런데 마교의 적들인 줄 알았는데, 그 적은 같은 오악검파 연맹인 숭산파 사람들이었어. 이 숭산파 사람들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건가?

영호충은 영영이 소림파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영을 구하러 또는 소림파의 방증대사에게 잘 이야기해서 풀어달라고 이야기하려고 소림사로 향했단다. 그리고 영영에게 신세를 진 무리들 수천 명이 나타나서 함께 도와주겠다고 영호충을 뒤따랐어. 그들뿐만 아니라 정한사태와 정일사태도 영호충이 항산파를 위해 도와준 것에 대해 보답하겠다면서 영호충을 도와주겠다며 같이 소림사에 가겠다고 했어. 그런데 왜 영영이 소림파에 갇혀 있는 거지? 영호충은 가는 길에 형산파 막대 선생을 만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단다. 오래 전 영호충이 가망 없이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 영영은 영호충을 소림사까지 부축해서 데리고 왔고 영호충을 치료해 달라고 한 것이었어. 영영이 마교 교주의 딸이라서 선뜻 부탁을 들어주지 않자, 영영은 자신이 이곳 소림사에 스스로 갇혀서 3년을 지내겠다는 조건을 달고 영호충을 치료해 달라고 했고, 이 협상은 체결이 되었던 거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영호충은 영영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더 커졌어. 자신을 위해 자신을 그렇게 희생하다니, 감동도 먹었지. 그런데 소림사 가는 일이 순탄치가 않네. 가는 길에 무당파 무리들과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붙었어. 빨리 처치하고 가려고 했지만, 그들의 무공이 만만치가 않았단다. 영호충이 한참 만에 그들을 무찌르고 다시 소림사 길을 향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무리 중에는 무당파의 장문인 충허 대사도 있었더구나. 그만큼 영호충의 무공이 많이 늘긴 했나 보구나. 아님의 사랑의 힘이 그렇게 크던지

소림사에 도착한 영호충과 수천의 무리들. 소림사에는 아무도 없었고, 정일 사태는 죽어 있었고, 정한 사태는 죽어가고 있었어. 정한 사태는 죽기 전 유언으로 영호충에게 항산파를 맡아달라고 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정정 사태, 정일 사태, 정한 사태 등 항산파를 이끌던 큰 비구니 스님들이 모두 죽고 말았단다. 그런데 항산파는 비구들로 있는데, 남자, 그것도 스님도 아닌 영호충이 맡을 자격이 될까. 하지만 정한 사태의 진심 어린 유언이었는데 어길 수도 없고

일단, 그것보다 급한 일은 영영을 찾는 일이었어. 하지만 영영은 보이지 않았고, 소림파를 둘러싼 무리들이 영호충 일행을 압박해왔단다. 영호충을 따르던 무리들은 포위망을 뚫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포위망은 점점 좁혀왔단다. 다행히 영호충이 소림사 땅속에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그들은 그 비밀 통로를 통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어. 영호충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흩어져서 영영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신은 다시 소림사로 향했단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있었어. 모두 각 무림파의 리더들이 있었어. 방증 대사, 악불군, 숭산파 장문인 좌랭선, 무당파 장문인 충허대사, 청성파의 여창해 등이 모여 있었단다. 영호충은 예를 갖추고 영영을 찾으러 왔다고 하니, 방증 대사는 정일사태와 정한사태가 찾아와 간곡히 부탁을 해서 영영을 이미 풀어줬다고 했어. 그리고 무리들이 소림사에 몰려 오는 것을 알고 싸움이 붙을까 봐 잠시 소림사를 비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했어.

그 소림사에 반가운 얼굴 영영이 다시 왔단다. 이번에는 임아행과 향문청도 함께 했어. 그제서야 영호충은 영영이 임아행의 딸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

, 상상을 해보자. 소림사의 앞마당에 정교라 부르는 이들의 리더들이 한쪽에 서 있고, 반대쪽에는 죽은 줄만 알았던 마교의 교주였던 이가 12년 만에 다시 나타나 서 있고 그 사이 영호충은 어정쩡하게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스탠스. 영화의 한 장면이 머리에 그려지는구나. 소림사의 방증 대사가 제안을 했어. 강호의 평화를 위해 임아행, 향문천, 임영영에게 소림사에 10년간 머물러 달라고 했어. 자신들이 잘 보살펴주겠다면서 말이야. , 그래 봐야 시설 좋은 감옥이지… 12년만에 자유를 찾은 이에게 다시 갇혀 있으라고 하면 알겠다고 하겠는가. 당연히 거절을 하지..

, 여기까지가 소오강호 5권의 이야기란다. 싸움 장면을 굳이 그렇게 길게 갈 필요가 있나 싶게 길게 끌고 가서 살짝 지루함이 있는 부분과 우연이 다소 지나치기도 하지만, 역시 김용의 무협지는 재미있구나. 오래 전에 봤던 홍콩의 무협 영화의 장면들도 떠오르고이 책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영화 속 장면처럼 무림의 고수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구나.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책의 끝 문장: ,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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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바다 -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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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너희들이 역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괜찮은 콘텐츠가 없나 찾아보다가 유튜브에서 황현필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단다. 이 분은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분인데, 아빠랑 역사적 성향,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시고 말도 시원시원하면서 재미있게 해주신단다. 그래서 가끔 그의 영상들 찾아보곤 해. 그의 영상 중에 이순신 관련 강의를 하신 것이 있는데, 그 영상들을 모아 9시간 넘은 하나의 영상으로 올려주신 것이 있는데, 그야말로 명품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단다. 그리고 그 강의 영상과 연계하여 <이순신의 바다>라는 책을 냈는데, 아빠도 뒤늦게 알고 이제서야 읽었단다.

황현필 님의 동영상에서도 다루었던 내용을 활자로 다시 한번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단다. 이 책에는 이순신의 생애와 이순신이 참여해서 이겼던 스물세 번의 전투에 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아빠가 전에 다른 역사책을 읽으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으니, 오늘은 그의 생애를 따라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빠가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 등을 위주로 간단히 이야기를 해줄게. 그리고 시간이 되면 황현필 님이 설명해 주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강의를 같이 보자꾸나. 중간중간 욕을 하시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이제 너희들도 넘겨줄 만큼 컸으니 말이야.


1.

아빠는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이 한 번의 패배가 있다고 알고 있었어. 많은 역사가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런 줄 알았지. 그 한 번의 패배는 바다가 아닌, 함경도 녹둔도라는 곳에서 일어난 전투라고 알고 있었어. 하지만, 황현필 님은 그곳에서 전투가 결코 패배가 아니었다고 했어. 이순신도 다음과 항변했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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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8)

이순신은 항변했다.

병력이 부족하니 군사를 증원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음을 기억하오. 그 공문이 바로 나에게 있소이다. 조정에서 만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죄가 나에게 있다 하지 않을 것이오. 또 내가 힘껏 싸워서 녹둔도를 지켰고, 바로 추격하여 잡혀간 백성들을 여러 명 구출해 왔거늘, 이것을 패배로 치는 것이 옳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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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를 마치고 백의종군을 하던 이순신을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여 전라좌수사가 되었단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때 유성룡이 그를 천거하지 않았고, 천거를 하더라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완전히 점령당해서 나라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고, 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단다. 이순신이 역사에서 사라질뻔한 아찔한 일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일어나는데, 그가 있어서 우리나라의 백성으로 정말 다행인 일이란다.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그는 전쟁 준비에 돌입하게 된단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나중에 유명하게 되는 난중일기도 쓰게 된단다. 아마 그의 밑에 있는 병사들 중에는 불만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었을 거야. 전쟁 준비를 왜 하냐고 말이지. 그는 조선의 대표적인 배인 판옥선과 그것을 개량한 거북선을 만들었고, 거북선의 진수식까지 마친 것이 1592 4 12일이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온 것이 그 다음날인 1592 4 13일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이순신은 혹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닌가?

우리가 이 거북선의 위대함에 대해서 많이 듣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거북선 안에서 배를 조정하고 포를 쏘던 당시 우리 백성들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그곳에서는 온몸을 다해 전투에 참여했던 우리 조상들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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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10)

전투 시 거북선의 실내는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어두웠을 것이고 바닷물은 계속해서 새어 들어왔을 것이다. 실내에서 쏘는 포의 소리와 진동은 갑판 위에서 함포를 쏘는 판옥선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투원들의 귀는 먹먹함을 넘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적선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진동으로 몸이 붕 뜨고 온몸을 여기저기 찍혀가며 피를 흘린 채 노를 젓고 포를 쏘았을 것이다. 공포감이 치열함으로 바뀌고 노를 젓는 틈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바다에 떠다니는 일본군들의 시체와 먹먹해진 귓속을 뚫고 들려오는 살려 달라는 일본군의 아우성에,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무적의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거북선을 바라보며 외관의 멋스러움만 생각하지 말고 거북선에 탑승해서 전투를 치렀을 선조들의 처절함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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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그들의 작전대로, 어쩌면 작전보다 더 수월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했을 거야. 순식간에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고, 무능한 왕 선조는 나 몰라라 도망을 가버렸으니 말이야. 하지만 일본의 계획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이순신과 전투에서 지기 시작하면서였어. 첫 번째 출전인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에서 완패를 당한 일본, 특히 이번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대단했을 거야. 처음에는 방심해서 졌다고 위안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철저히 준비한 이후 전투에서도 일본은 계속 지고 말았지. 전반부 전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한산도대첩으로 일본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진 것을 깨달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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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그러나 한산도의 패전으로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서해 바다로 10만 병력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올려 보내지 못했다. 증원병과 군량미, 무기 등 보급이 완벽하게 끊긴 고니시는 평양에 발이 묶이며 의주를 공격할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산도대첩은 이순신이 조선의 임금 선조를 살려준 전투였고, 바다의 재해권을 완전히 조선이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였으며, 육지로 북상해 있던 일본군이 장기간 굶주리며 춥고 불안에 떠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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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이후에는 연전연승을 한 이순신은 전라도 바다뿐만 아니라 경상도 바다, 충청도 바다까지 모두 통솔하게 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단다. 일본은 연속된 해전에서 패배로 인해 휴전 이야기가 오가고 전쟁도 소강 상태가 되었단다. 그런데 그렇게 전쟁의 소강 상태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짜증나는 일들이 일어났어. 왜 당시 왕이 선조였으며, 왜 원군 같은 자가 있었는가. 선조는 바다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순신에게 무리한 공격 지시를 했고, 그것은 일본이 파 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선조의 공격지시에 따르지 않았단다. 바다는 그 누구보다 이순신 장군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속 좁은 선조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이순신을 파직하고, 서울로 압송하여 고문했단다. 심지어 이순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하기까지 했단다. 우의정 정탁을 비롯하여 몇몇 신하들이 선조를 극구 말려 사형은 면할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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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 모(이순신)은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하고, 큰 벌을 내기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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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 당하고 그 자리는 원균이 차지했어. 사실 원균도 그 전에 이순신과 함께 전투에 계속 참여를 했단다. 그렇게 옆에서 봐 온 것이 있어서 바보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지휘를 할 수 있을 텐데, 일본군의 첩자인가 싶을 정도로 무능함과 고집불통을 보였단다.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이 면담을 요청했지만 다 거절당하고 경상우수사였던 배설은 결국 진영까지 이탈했다고 하는구나. 그의 항명이 나중에 반전의 계기가 되었지만 말이야. 결국 무능의 대명사 원균은 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말았단다. 자신이 죽은 것은 물론, 이순신이 훈련시켜 레벨업한 유능한 부하들도 많이 죽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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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다른 지휘관들 역시 칠천량에서 머무르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원균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원균은 분노의 술만 들이킬 뿐 소통을 거부했다. 이 상황에 대해 원균에게 항명을 했던 이가 경상우수사 배설이었다. 배설은 칠천량에 진을 치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한산도로의 회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자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칠천량의 조선권 진영을 이탈했다. 배설의 행동은 분명한 항명이었고, 칠천량에 남은 조선 수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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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겁쟁이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판옥선 12. 앞서 이야기했던 배설이 원균의 진영에서 이탈해서 살아남은 12. 배설이라는 인물도 이순신에게 그리 호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니까 자신보다 상사이긴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대.

아무튼 남아 있는 12척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생각할 때, 이순신은 희망을 보았단다. 그 유명한 명량 해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단다. 12척의 배로 300여대에 맞서 싸우고 100여대의 일본군 배를 침몰시킨,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찾아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전투. 이순신은 천운으로 생각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아빠가 생각하기에 모두 다 이순신의 덕분이라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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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명량해전 이전에도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 승리 이후 이순신은 성웅이 되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명량해전 승리는 실로 천운이었다.”

칠천량의 대패를 보고받은 선조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패배는 하늘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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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량 해전 한 번의 전투로 재기를 노리던 일본군은 큰 좌절을 느꼈을 거야. 이런 일본군의 패배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도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이순신이라는 이름까지 외쳤다는 이야기도 있대. 아무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했다고 하는구나. 이로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단다. 그들을 곱게 보내준다면 그들은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단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 그 전투에서 조선은 마지막 대승을 하고,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을 오랫동안 침략할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어.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총탄에 맞고 돌아가신단다. 그렇게 길고 긴 전쟁이 끝이 났단다.

….

당시 명나라에서도 조선을 도와준다고 왔었는데, 그 중에 명나라 장군 진린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는데 나중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면서 진린의 자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터를 잡았다고 하더구나. 나중에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을 알게 되면 한번 물어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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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조선의 명나라 제독으로 참전하여 이순신과 깊은 전우애를 맺고 돌아간 진린의 자손들은 청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거 조선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이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 있었던 고금도까지 왔고, 그 옆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니 이들이 광동 진씨이다. 지금도 해남에는 광동 진씨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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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위인 중에 한 명만 고르라고 하면 세종대왕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현충사를 곳이 있단다. 하지만 그곳을 가는 이들은 극히 적다고 하는구나. 사실 아빠도…. 너희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 묘소와 현충사에 한번 꼭 가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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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369)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마다 항상 혼자였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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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는 정말 많단다. 이번 여름에도 한산도 대첩을 영화화한 <한산>이라는 영화가 개봉을 해서 상영 중이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객수를 모았던 <명량>이라는 영화의 후속작이기도 하지. 시간적으로 보면 <한산>이 먼저란다. 이번에 <이순신의 바다>라는 책을 읽고 났더니 이 영화도 보고 싶더구나. 기회가 되면 너희들도 함께 같이 보자꾸나.


PS:

책의 첫 문장: 이순신은 덕수 이씨이다.

책의 끝 문장: 이순신은 지금 우리들의 이순신이고, 우리 후손들의 이순신일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인 병조판서 유전이 우연히 활터에서 이순신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순신의 활 실력을 구경하던 유전에게 이순신이 차고 있던 화살통이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 화살통 참 찾아 보이는구만. 나한테 선물로 줄 수 없겠는가?"
그러자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께 이깟 화살통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화살통 하나 때문에 대감이 부하의 화살통이나 바쳐서 출세하려는 인물로 오해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병조판서 유전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P30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원균의 수급 베는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순신은 적의 수급을 베는 것에 대해 이런 지시를 내렸다.
"적의 수급을 베는 데 매진하지 마라. 너희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내가 다 보고 있노라."
"너희들의 공을 내 직접 장계를 써서 낱낱이 밝힐 테니, 너희는 다만 전투에 이기는 데 집념하라."
- P132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했던 날은 1592년 9월 1일이었다. 이를 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 5일이다. 그래서 오늘날 ‘부산 시민의 날’이 10월 5일이다. 이순신이 부산포를 공격해서 대승을 거둔 날이 바로 부산 시민의 날이 된 것이다. - P181

이순신이 재해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 바다를 돌아서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예성강을 타고 개성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의 군대 충원과 보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압록강을 타고 들어가 의주에 있는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가는 길을 막았을 것이고 조선의 임금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해전에서 조선군의 승리가 일본 육군의 발을 묶었고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 P187

전쟁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적을 막아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진린도 잘 알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려는 자들의 발악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러나 적이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면 끝날 전쟁을 기어이 막아선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너무 훌륭한 신념이었다. 나라와 강토를 짓밟은 외적이 살아서 돌아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국가의 자존심을 건 큰 신념이었다.
전린 입장에서 이순신의 이러한 신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전투에서 이순신이 단독으로 공을 세운다면, 진린 자신은 명나라 본국에 돌아가서도 입장이 난처해질 터였다. 울면서 겨자 먹듯, 진린의 명나라 수군은 이순인의 함대와 함께 참전을 결심하였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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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2-08-22 0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생각해 보았지만,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말 제목 그대로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한것 같습니다! 즐거운 한주되십시요!

bookholic 2022-08-23 00:1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이순신 장군님이 하늘에서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고 흐뭇하게 웃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막시무스 님도 즐겁고 시원한 한 주 되십시오~~

바람돌이 2022-08-22 0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아이들은 행복한 아이들.
이렇게 다양한 컨텐츠를 찾아 얘기해주잖아요.

bookholic 2022-08-23 00:12   좋아요 0 | URL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아이들 덕분에 저도 행복하답니다...
즐거운 8월 되시길 바랍니다...

레삭매냐 2022-08-22 0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센고쿠 시대 우두머리가 전투에
지면 바로 항복해 버리는 그네
들의 전투 방식과 달리 멍청이
임금 선조가 튀었어도, 임금도
버린 의병들이 자신들에 대항하
는 장면에 왜군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개인적으로 육전에서 울산왜성에
포위된 왜군들을 섬멸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bookholic 2022-08-23 00:14   좋아요 0 | URL
일본 사람들이 많이 당황했겠네요...
우리 선조들(선조 왕 빼고..)이 자랑스럽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시고요~~

mini74 2022-08-22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순신 그래픽 노블도 있던데요. 저희 아인 재미있게 보더라고요.~

bookholic 2022-08-23 00:15   좋아요 0 | URL
그래픽 노블도 권해 봐야겠네요...^^
우리집 아이들도 역사에 좀더 흥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ㅎㅎ
남은 8월 늘 행복하시길...
 















(133)

어느 정도 규모의 회사에 정규직으로 일하는 직장인.’

이 평범함은 준이 오랫동안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게 숨 쉬듯이 당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생활을 쟁취하는 것, 유지하는 것 모두 준에겐 숨이 차오르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살고 있을까, 어떻게 자기를 꾸준히 먹여 살리고 있을까. 이력서를 수정하던 준은 마음이 아득해져서 모니터 앞에 얼굴을 묻었다.


(147-148)

그렇죠. 결국 세상에서 비싼 값을 쳐주는 재능을 타고나는 건 운의 영향이 큽니다. 시대도 마찬가지죠. 아마 저 같은 사람은 80년대에 태어났으면 틀림없이 실패자가 됐을 거예요. 몸이 허약하고, 술은 못 먹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웬만한 회사는 일 년도 못 버티고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 제 성공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게임 산업이 막 성장하고 있을 때에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진 한국에서 살았다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남자는 잠시 멈추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는 미친 듯이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대부분 운이었던 겁니다.”


(153)

어쩌면 준이 그동안 뽑기에서 실패했다고 투덜거린 재능들이 언젠가 행운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태수처럼 말이다. 준은 이제 고작 서른두 살이었다.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의 기준을 성인 평균 수명의 3분의 1로 잡았다고 했으니, 백 세 시대에서는 어린이가 서른세 살까지인 셈이다. 무엇을 새로 발견해도, 새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다.

준은 아직 불시착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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