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 이옥전집 2 : 그물을 찢어버린 어부 완역 이옥 전집 2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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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 전집 2, 『그물을 찢어버린 어부』에는 문여, 전, 이언, 희곡과 함께 부록으로 이옥의 친구 김려의 제후 11편이 실려 있다. 카프카의 글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 친구 브로트 때문이었다면 김려는 이옥의 브로트다. 김려는 이옥이 짧았던 성균관 시절 만났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김려는 당시의 문학동인집이라 할 수 있는 <담정총서>에 이옥의 글 11편을 모아 두었다. 이옥의 글은 그가 죽은 지 2백여 년 동안 한 번도 인쇄된 적이 없었는데 <담정총서>의 글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들을 모아 이 전집이 묶인 것이다.

이옥은 북학파이자 사검서의 한사람이었던 유득공과는 이종사촌이고 충군의 명을 받고 경상도 삼가로 내려가는 길에 당시 안의현감이었던 박지원과도 만난 적이 있는 듯하다. 박지원이 중국에서 보고 온 벽돌을 재현하여 비난을 받았는데 안의 관아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이옥은 신축한 하풍죽로당을 구경하고 <집에 대한 변>을 지었다. 그러나 박지원과 이옥이 신문체를 유행시킨 인물로 정조에게 지목당한 것은 같지만 빼어난 가문 출신이고 본령을 고문에 두었던 박지원과는 달리 한미한 가문 출신의 이옥은 고문을 배우면 허위에 빠진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으니 각자의 환경이나 추구한 미의식은 판이하게 달랐던 셈이다.

김려가 <담정총서>에 ‘봉성필’이라는 이름으로 이옥의 글을 모으면서 그것의 형식을 ‘문여(文餘)’라 불렀다. ‘문의 정체(正體)는 아니지만 기실 문의 나머지(文餘)이다’라는 것이 김려의 변이다. 이옥은 기이한 이야기를 즐겼던 듯 싶다. <봉성문여> 67편과 잡제(雜題)에 실린 17편은 도둑, 아홉 명의 지아비 무덤을 쓴 과부, 간통의 누명을 쓴 여자의 진술서 등 기이하면서도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는 글들이 많다.

전(傳)의 형식으로는 25편이 실렸는데 충, 효, 열을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과거를 대신 봐주는 사람, 의협심이 강한 창기, 호랑이를 잡은 아낙, 고양이를 탄핵하는 글 등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도 있고 보고들은 기인에 관한 글도 있다.

내가 재미를 느꼈던 글은 이언(俚諺)이다. 이언은 민간에서 쓰는 속된 말 또는 속담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속된 말도 속담도 아니다. 이것은 이옥이 한대의 악부나 송대의 사곡에 빗대어 자신을 글을 낮춰 부른 것 같은데 민중언어를 구사해서 글을 지어야한다는 강경한 이옥의 문학론이다. 글짓기의 어려움에 대해 세 가지를 일난, 이난, 삼난이라 이름 하여 밝히고 그 이론에 따라 직접 글을 지어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뒷받침하는 글은 아조(雅調), 염조(艶調), 탕조(宕調), 비조(悱調) 등의 제목을 붙였는데 사람의 정리(情理)의 상태를 사설시조 같은 형식으로 드러내었다.

전집2권에는 희곡도 한편 실려 있는데 나이 삼십이 가까워오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노총각이 노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관청에서는 이렇게 나이가 먹어서도 혼자 있는 처녀 총각을 모아 짝을 지어준 모양인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혼례 풍습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랑신부가 입은 옷과 음식 주변의 분위기 등이 마치 전통혼례식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특히 빨래방망이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며 주워섬기는 사설들이 입담 좋은 판소리 한마당을 듣는 기분이다.

부록으로 실려 있는 김려의 제후들은 책의 앞 혹은 뒤에 붙여 쓴 글들을 모았다. 이 많은 글들이 지칭하는 이옥의 글이 다 전해지는 것은 아니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글쓰기에 전념했기 때문에 이같이 많은 글을 남길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한 이옥의 글을 읽으면서는 지금의 우리는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세분화 되어 있어 오히려 글쓰기의 장벽이 되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소설가는 소설만을, 시인은 시만을 써야지 그 장르를 넘나들면 오히려 홀대받은 지금의 문화와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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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3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권을 읽으면서 희곡이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이언 역시
재미있었고요. 반딧불이님 덕분에 이옥이란 사람의 글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글들에서
인상 깊은 구절들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반딧불이 2010-12-04 15:51   좋아요 0 | URL
꾸준히 읽고 계시는군요. 이 책의 리뷰도 좀 올려주시잖구요? 저는 이제 3권을 절반쯤 남겨두었어요.

cyrus 2010-12-0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이 먼저 읽고 리뷰를 쓰고 계신 것도 있고, 저는 반딧불이님이 소개하신
좋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습니다. 읽다가 좋은 구절을 따로
노트에 적곤 했었는데, 페이퍼 형식으로 올릴까 생각중입니다.

반딧불이 2010-12-05 23:40   좋아요 0 | URL
네에..아직 이옥의 글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싸이러스님께서 리뷰를 올려주시면 더 많은 분들이 보시게 되지 않을까요. 기대할께요.
 
허공에 지은 집 애지시선 33
권정우 지음 / 애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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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료나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의 양념만으로 식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음식을 먹은 뒷맛은 담백하다. 인스턴트식품이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탓에 이런 음식을 처음 대하면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없는 듯하면서도 없지 않은 음식의 맛을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 맛들이고 나면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 이런 음식이기도 하다.

글맛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화려한 수사로 잘 꾸며놓은 글은 처음 읽을 때는 멋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세련된 언어구사능력에 감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어 번 반복해서 읽고 나면 그것이 곧 치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깊은 맛을 느끼지 못하면 다시는 찾지 않게 된다. 시가 아름다운 언어와 깊은 맛까지 곁들이게 되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글맛을 언제부터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입맛이 변하듯 좋아하는 글맛도 달라지는 것 같다. 최근에는 담백한 음식을 먹듯 꾸미지 않은 단정한 시에 더 마음이 끌린다. 아름다운 형용사에 현혹당할 나이는 아니라는 것일까? 글맛을 다 잊은 탓일까?

최근에 몇 권의 시집을 들추다가 말을 최대한 아끼고 화려한 수사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시인을 만났다. 충북대학교 국문과 교수라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이분, 자전거를 타고 무심천을 따라 출퇴근을 하는 모양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고마워한 것들1

 

자전거로 출퇴근할 직장이 있는 것
한 시간 거리에 집을 얻은 것

나만을 위한 길
그 길에서 풀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
향기가 어릴 적 등굣길로 이끄는 것

계절이 있는 것
아침과 저녁이 있는 것
계절과 시간이 차려놓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것
아! 하는 감탄사

풍경을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
고마워하는 마음이 우물처럼 자리 잡은 것

아침, 저녁으로
고마운 마음을 길어 올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것

내게 출퇴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이라면 그걸 고마워했을까? ‘계절과 시간이 차려놓은 풍경을’보고 ‘아! 하는 감탄사’를 낼 수 있었을까? ‘고마운 마음이 우물처럼 자리 잡’았을까? 나는 어느 것 하나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시인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먼 길

 

논물에 떠다니는
개구리밥아 

그 옆에서 미끄러지는

소금쟁이야

그 밑에 웅크린
개구리 알들아

그 위를 나는
제비야,
두루미야,
비오리야

논두렁에서
얼굴을 비춰보는
유채꽃들아

너희들을 보려고
서른 해를 돌아왔구나

이렇게 지척에
있는 줄도 모르고

 

‘서른 해를 돌아’와서야 비로소 시인이 만나게 된 것들이다.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그것이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무심해지기 쉽고, 그 원래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기 쉽다. 시인이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한 시간 씩 걸려서 오랜 시간을 지나다니면서야 비로소 발견한 것들일 것이다. 단순한 발견에 그치지 않고 시인은 이러한 것들에서 ‘자연에 대한 예의’를 배운다.

  자연에 대한 예의

 

발이 만든 길로 다니기

신을 벗고 개울 건너기

강을 만나면 뒤돌아가거나, 머물거나, 배로 지나기

높은 산이 보이면 돌아가거나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넘기

계절을 거스르지 않기

생이 다한 뒤에도 자연에 남는 거니까
 
사는 날에 집착하지 않기

예의라는 것이 ‘누가’ ‘누군가’에게 갖춰야할 형식이라면 ‘누구’는 시인이고 ‘누군가’는 자연이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예의를 다 갖추고 난 후 그 스스로 자연이 된다. ‘생이 다한 뒤에도 자연에 남는 거니까/사는 날에 집착하지 않기’라니! 시가 배설이 아닌 다음에야 머리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이런 말이 쉽게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의 죽음조차도 객관화 한 뒤에야 나올 수 있는 말이니 이미 자연이 되어버린 시인에게 내가 예의를 갖춰야 할 차례다. ‘사는 것이 이미 세상에 세든 것이’(<집안에 지은 집>)라고 말하는 시인이니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까닭인지 시인이 바라보는 주검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풍경

 
대웅전 뒷마당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에게

거미가 고운 수의를 한 벌 해 입혔다

허공에 새로 생긴 봉분 앞을 지날 때마다

바람이 경을 읽는다.

 
거미가 시에 등장하는 경우는 많이 보았다. 김수영, 이면우, 박성우 등의 거미는 시인과 거미가 동일시되거나 관찰자로 등장한다. 권정우의 시에 등장하는 거미와 잠자리의 먹고 먹히는 이 관계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고 풍경이다. 그는 훗날 그 스스로 자연이 될테지만 자연이 되기까지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름답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두기는 물리적 거리이거나 비겁한 거리는 아닌 듯싶다. 그는 기쁨에 들뜨지 않고 슬픔에도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슬픔의 격랑을 빠져나와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더 강하다.

가르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르치는 대상이 자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가르치기1

 

 

내가 알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해서
학생들이 알아야할 할 것을 가르치다가
그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지만
작은 마루에 올라섰을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치다가
지혜롭게 되도록 가르치다가
이제는 가르치려 하지 않고 수업을 즐기려 하지만
말하지 않고도 깨닫게 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언제쯤
능숙하게 나를
가르치게 되려나

Teaching is Learning이라는 말을 또 쓰지 않을 수 없는데 시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 역시 ‘능숙하게 나를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배우는 것조차도 배운다고 말하지 않고 가르친다고 말한다.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쓸 수 있는 말이 아닐까. 나는 그가 ‘한번 놓이면/생이 다할 때까지/자기 자리에서/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바둑돌’에게‘한 수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오래 간직하기를, ‘악착같이 살지 않기로 한’마음이 변치 않기를, ‘아픈 곳으로 자꾸만 손이 가기를’‘사는 날에 집착하지 않기를’감히 바래본다. 첫 시집의 깔끔하고 단정한 시 속에 감추어둔 시인의 고요한 성정을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여전히 느낄 수 있기를 또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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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에 대한 예의' 라는 시가 무척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보기에는 자연을 위한
좋은 일지만, 정작 실천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죠. 반딧불이님이 소개하신 5편의 시를
통해서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시인의 마음 역시 읽을 수 있네요.

반딧불이 2010-12-01 17:44   좋아요 0 | URL
그야말로 담백한 시를 쓰시는 분이더라구요. 시인들은 그래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봐야겠죠.
 
딜레탕티슴에 대하여
세계 역사의 관찰 -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에 대하여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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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역사 자체를 사유하면서 인류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의 법칙과 원리를 내세웠다. 즉 인간의 이성이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며 이 법칙이 지향하는 바는 절대정신이 현실적으로 외화된 ‘자유(국가)’였다. 이러한 헤겔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역사도 당연히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는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며 과거를 줄 세워 현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헤겔과는 달리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관통하는 법칙이나 체계를 부정한다. 이것은 역사철학을 부정하는 것이고 헤겔을 부정하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철학을 ‘가장 훌륭하게 정리되었다고 하더라도 세계문화사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역사를 종속적 통합의 철학과 달리 대등한 것들의 통합으로 본 부르크하르트는 유럽지역을 중심으로 한 오천년 역사를 관찰하면서 ‘우연에 속하는 사유과정’을 결합시킨다. 또 역사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법칙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문화, 예술, 전쟁, 테러 등 여러 영역의 정신세계에서 역사적인 것을 탐구한다. 이렇게 세계역사를 탐구하면서 부르크하르트가 내세운 역사적 관점은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바라본 직선적 역사관과는 달리 저자가 주장하듯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적 역사관으로 보여 진다.

또 그는 ‘국가’와 ‘종교’, ‘문화’를 그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즉 문화가 국가, 종교에 제약받던 시기, 국가가 문화 종교에 제약 받던 시기, 종교가 문화 국가에 제약받던 시기 등 6가지 관점으로 고찰하고 있다. 문화가 국가와 종교를 위해 봉사한 시기도 있었고, 종교가 국가의 힘을 빌어서야 종교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종교개혁의 시기도 있었다. 종교와 국가는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가 어려울 만큼 밀착되어 있다.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위대한 개인’들이 출현한다. 국가와 종교는 각기 정치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구의 표현이며 문화란 물질적 삶을 후원하기 위해 또 정신적, 도덕적 삶의 표현으로서 임의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말한다. 문화는 항상 움직이는 것, 자유로운 것의 세계로서 억지로 타당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가, 종교와는 다른 점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잠재력들 중 어느 하나가 우선한다기보다 서로를 제약하고 영향을 주면서 뒤섞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등장하는 ‘위대한 개인’은 당시의 시대와 환경에서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특정한 위업이 이루어졌고, ‘그’가 아니었다면 그런 위업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 ‘그’가 없이는 세계가 불완전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잠재력들이 천천히, 지속적으로, 차례로 또 한꺼번에 작용하는 것이라면 보다 빠르게 얽히는 침입, 전쟁, 테러 등 역사적 위기들도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러한 폭력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원시적인 위기로 분류한 곤궁에서 생겨난 이동이나 침입, 대규모 정복 여행 등에 대해 ‘문화능력이 있는 젊은 민족이 오래된 문화민족을 침입할 경우 젊어지는 과정이 되는 것’으로 이러한 침입은 낙관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그는 전쟁 역시 ‘더욱 높은 발전의 필연적인 계기’라고 전제한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나 ‘대립이 모든 생성의 원인’이라는 라자울크스의 말을 빌려 힘들의 대립에서 비로소 화합이 생기며 전쟁은 거룩한 것이라고, 자연전체에 존재하는 세계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 그는 전쟁은 모든 삶과 소유를 단 하나의 순간적인 목적 아래 종속시키며 개인의 단순하고 강력한 이기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엄청나게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 전쟁만이 인간에게 보편성 아래 보편적으로 복종하는 위대한 모습을 허용한다는 저자의 말은 마치 전쟁예찬론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가 말하는 전쟁은 명예롭게, 존재 전체를 걸고 싸우는 진짜전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영국의 장미전쟁이나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가짜 위기였고 게르만의 민족이동은 진짜위기라고 한다. 새로운 물질적인 힘이 낡은 힘과 함께 녹아들어서 정신적 변태과정 곧 국가(로마제국)가 교회(카톨릭교회)로 되는 변태과정을 거쳐 계속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는 미리 잘라낼 수도 없는 것이고 엄청난 번식력을 가진 젊은 민족들이 사람이 적은 남쪽 나라들을 차지하려고 몰려든 일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생리적 평준화라고 한다.

대체할 수 없는 극소수의 사람인 위대한 사람은 모든 민족이나 문화 전체 심지어는 인류전체와 관계된 것을 지향하는 사람, 어마어마한 지적인 힘이나 도덕적인 힘을 가진 사람만이 유일하고도 대체할 수 없는 위대한 개인이다. 저자는 어떤 한 인물을 콕 집어내어 말하기보다 개인의 범주를 벗어나 인류의 보편성에 다가간 사람을 ‘위대한 개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위대한 개인'과 헤겔의 '세계사적 개인'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헤겔의 '세계사적 개인'은 보편적인 것들이 특이한 것을 향해 집결되는 것이고, 부르크하르트의 '위대한 개인'은 개별적인 것들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추출해낸 개념인듯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개념정의를 눈여겨보았다. 그의 정의 안에서 저자의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저자는 세계역사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것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전제하고 있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은 완벽한 세계사에 대한 기술이지만 전제를 떠올리면 또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역사를 기술하면서 어떤 역사방법론을 쓰더라도 세계의 모든 것을 기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기술하는 매체인 ‘언어’의 문제는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때때로 저자의 개념이 말하는 바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다른듯해서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진짜 전쟁이란 전 존재를 걸고 싸우는 것인데 테러와의 전쟁이니 범죄와의 전쟁이니 무형의 어떤 대상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이는 지금의 우리 모습들에서 과연 진짜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또 책의 제목이 『세계 역사의 관찰』이고 한두 번쯤 징키스칸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유럽의 역사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세계 역사의 관찰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런 의문과 회의 속에서도 저자가 역사와 함께 문학과 미술을 공부한 때문인지 시문학을 역사보다 우위에 둔 것이나, 1장과 6장의 내용들은 되새김질 하고 싶은 내용들이 많았다.   

젊은 니체가 커다란 즐거움을 가지고 부르크하르트의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 내용이 옮긴이의 말에 나온다. 니체가 영향을 받았을 만한 부분들은 니체를 읽으면서 확인해봐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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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크하르트가 쓴 책이 그 유명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이외에도
역사와 관련된 책이 있었네요. 니체와 무척 친했다고하던데 니체의 글을 읽게 되면
부르크하르트와 함께 읽어보면 좋을거 같습니다. 반딧불이님의 글 덕분에
좋은 책 정보를 얻게 되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0-12-01 17:42   좋아요 0 | URL
알고 계셨군요. 저는 이 책을 읽고나서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알게되었어요. 니체가 부르크하르트의 강의를 들었는데 크게 즐거워했다는 말이 니체의 글에 나와요. 영향도 많이 받은듯 하구요.

릴케 현상 2010-12-17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좀 공부를 해 봐야겠네요^^ 예전에 김지하시인이 굉장히 강조하시는 건 들었는데... 게을러서 당장 급하지 않은 공부는 미루게 되네요

반딧불이 2010-12-18 00:23   좋아요 0 | URL
저도 미루다가 미루다가 우연히 기회가 되었어요.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비교하면서 읽으니까 좋은 것 같아요. 언제 읽으시게되면 함께 말씀 나누시죠.
 
<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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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였던 듯싶다. 시, 소설, 수필, 계간지, 월간지, 이론서등 장르를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화책까지도 그의 독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더욱 내가 놀랐던 건 책과 사람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할 때였다. 그는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않고 아픈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설사 아픈 소리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애정이 담겨있어서 작가로서 새겨들어야할 말들임을 나 같은 문외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계속해서 출간되었고, 다양한 분야에서 책에 관한 책이 나온 것 같다. 내가 읽은 공식적인 서평집이라고 해봐야 장정일의 독서일기 몇 권, 강유원의 서평집 두 권 그리고 알라딘에서 만난 윤미화와 이현우가 고작이다. 책은 갈수록 두꺼워졌고 물론 값도 비싸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장정일의 책은 날짜순서대로 되어있었지 싶다. 나는 장정일의 책을 읽으면서 김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참 많은 책들을 소개받았다. 물론 그것들을 다 읽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강유원의 서평집 두 권은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그냥 ‘책’이었다. 재생지를 사용한 두툼한 책은 두께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돈 주고 사서 읽은 책에 대해서만 서평을 쓴다는 그는 책의 문제를 바로 돈 문제로 연결 지으면서 돈에 관한한 칼같이 깔끔을 떨어야한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이말은 할말은 하겠다는 얘기였다. 그의 이런 까칠함에 반했지만 정작 목차를 보고 내가 읽을 책을 표시해보니 열권도 안 되었던 참담한 기억이 있다. 두 번째 책의 제목은 ‘주제’였다. 제목 그대로 책의 내용은 굵직한 몇 가지 주제로 묶고 자신이 읽은 관련 도서들에 대한 서평을 넉넉하게 모아두었다. 그는 세상에 책은 ‘다섯 권’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에 대해 정의한 다음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라고 밝혀두었다. 그에게는 하찮은 푸념이고 비웃음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전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파시즘에 관한 글을 읽을 때 관련서적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았고 최근 역사서들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도움을 받았다. 그의 첫 서평집은 한 글자 제목이고 두 번째 서평집의 제목은 두 글자다. 세 번째 서평집은 세 글자일까 하고 기대하고 있다.

윤미화의 책은 내가 읽은 유일한 여성 서평집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성별로 그녀의 독서영역을 제한 할 수는 없다. 책을 내기 전부터 나는 그녀의 글쓰기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녀의 글은 톡톡 튀고 거침없고 단도직입적이다. 가끔 내 관심분야를 벗어나기도 했지만 박력과 매력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분서』와 『부생육기』를 소개받았고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인 환경 생태분야에 대해 공부했다. 나는 아직 소설로는 친해지지 못한 마르께스와 그녀가 친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을 종잡을 수 없는 독서가’라 칭하고 ‘발만 넓고 깊이는 없는 이상한 모양새’라고 말한다. 그러나 깊이는 그냥 깊어지는 게 아니잖은가. 바늘로 아무리 파도 삽으로 판 것처럼 깊어지지는 않는다. 넓이가 있어야 깊이도 깊어지는 법이다. 널찍하게 터를 잡았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깊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깊어지기를 원하는 만큼 넓게 소통하기를 바란다.

이현우의 책의 두 권 째다. 어쩐 일인지 나는 『책을 읽을 자유』가 『로쟈의 인문학 서재』보다 잘 읽힌다. 이 책을 받고 가장 먼저 본 것은 프롤로그와 발문이었다. “인간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는다.”는 프롤로그의 첫 문장에 공감했다. 그리고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지만 독서 경험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 ‘우리’로 확장 되어야 하며 ‘사회역사적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읽었다. 책의 끄트머리에 실린 발문을 본문보다 먼저 보게 된 것은 그것이 신형철의 글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본문보다 발문을 먼저 읽는 습관이 있는 독자 여러분께 인사를, 좋은 시간 되세요!” 신형철은 마치 내가 발문을 먼저 읽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인사까지 해준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유쾌한 센스라니!

서두가 너무 길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는 『책을 읽을 자유』를 통해 책이 어떻게 짝지어지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식으로 정리하면 그는 가르기와 모으기에 능수능란하다.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로서는 이 부분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책을 읽을 자유』는 짝짓기를 통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변별한다. 또 『책을 읽을 자유』는 읽지 않아도 좋을 책에 대해 말해준다. 『책을 읽을 자유』는 영화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책을 읽을 자유』는 저자에 대한 사적인 정보도 조금씩 흘려준다. 모국어로 된 책이 고팠던 시절에 쓴 저자의 시는 절절했다. 관심 있는 책이 출간되었지만 책을 살 돈도 시간도 없다든가, 돈과의 싸움에서마저 지는 일은 좀 이미지가 구겨지는 일인데......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책을 읽을 자유』에는 오자도 더러 보인다. 나는 늘 나보코프를 나코보프로 헷갈리는데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지 단순한 실수 인지 모르겠지만 나보코프를 나코보프(199쪽 첫줄)라 표기한 부분을 보니 오자를 보고도 유쾌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총 서른 개의 소제목 아래 많은 서평들이 묶여있다. 그의 알라딘 서재를 수시로 드나들었던 탓인지 낯익은 글들도 더러 보였다. 특히 내가 관심 있게 본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푸쉬킨과 고골의 나라> <한국 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사이>, <지젝이 어쨌다구?> 등이다. 쿤데라는 내가 좋아하니까, <푸쉬킨과 고골의 나라>는 저자의 전공이기 때문이다. 고골의 <외투>에 대한 그의 글은 욕망을 주제로 살펴보고 있었는데 주인공의 외투에 대한 집착은 욕망보다는 결여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문학에 대한 믿음과 불신사이>는 우리 문학뿐만 아니라 문단의 동향과도 맞물려 있고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작가들에게 지원하는 창작지원금과 관련된 조영일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글과 조영일의 글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짚어놓았다. <지젝이 어쨌다구?>는 요즈음 지젝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그가 자음과 모음 출판사 블로그를 통해 알라딘에서 매주 진행하고 있는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를 함께 읽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내용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 관련이나 지젝 등 몇 가지를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저자의 목적대로 독서경험이 ‘우리’로 확장되는 데에도 더 요긴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활자의 색깔을 검은 색을 주로 쓰면서 군데군데 회색톤의 글이 몇 줄씩 나오는데 이건 마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교차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이다. 처음엔 강조를 위해 이런 식으로 편집을 했나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딱히 도드라지는 특징을 모르겠다. 이러한 편집으로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편집자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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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22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에 대한 내용만은 정말 상세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 그래도 로쟈의 지젝 연재글도 이해도 잘 안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책에 어느 정도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더군요.
그리고 책에 오자가 있었군요. 저도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반딧불이 2010-11-23 11:18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욕심안부리고 로쟈님의 글과 지젝의 책 몇권, 영화 등을 짬짬히 보고 있어요. 프로이트나 라캉 등을 먼저 보시면 지젝이 훨씬 이해하기도 쉽고 재미있을것 같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1-2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인문학 서재>보다 잘 읽히셨다니, 저도 읽어 볼 맘이 생기는 걸요. 한 편으로 두 책이 나온 사이에 로쟈의 블로그를 드나들며 저자의 글과 친해진 탓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네요^^
리뷰 잘 봤습니다!

반딧불이 2010-11-23 11:27   좋아요 0 | URL
로쟈의 블로그에서는 기사 스크랩을 많이 봤어요. 그리고 블로그에서 본 로쟈님 글은 본문의 앞뒤에 몇줄 안되죠. 저는 로쟈님의 글이 궁금해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샀었거든요. 궁금증은 해결이 되었고, 이번 책은 신간평가단이라는 책임때문에 나름 목적을 가지고 읽었던 셈이죠.

양철나무꾼 2010-11-23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에게서 우리로...독서경험의 확장,,,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예요.
리뷰도 여러번 다시 읽었고요,
책도 다시 읽어봐야 겠어요~^^

올들어 젤 추운거 같아요,옷 뜨뜻하게 입으시구요~!!!

반딧불이 2010-11-23 11:30   좋아요 0 | URL
저같은 경우는 저자가 책을 쓰는 목적을 가장 먼저 살펴봐요. 그리고 그 목적에 맞게 읽으려고 노력하기도 하구요. 그 목적 이외의 것은 그야말로 저에게는 덤으로 주어지는 거죠.

제가 추위를 제일 무서워 한다는 걸 잘 아시는듯한 말씀....고맙습니다.

라로 2010-11-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의 인문학 서재>보다는 잘 읽히고 있지만,,,뭐~~^^;
이번 책은 로쟈님의 알라딘 페이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편집이었어요.
지적하신건 저도 좀 그랬지만 그래도 인용하는 책의 이미지를 올려준건 맘에 들더라구요, 전.
암튼,,,어떻게 지내세요??
이젠 절 잊으신건가요??흙

반딧불이 2010-11-23 15:09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 있겠습니까..저는 나름 일편단심 족인걸요. 사람을 사귀는데 시간이 올래걸리지만 한번 마음주면 잘 안변합니다~ 저야 뭐 맨날 종이에 코박고 지냅니다만,나비님 직장생활때문에 바쁘신걸로 아는데..어찌 이리 귀한 시간을??

blanca 2010-11-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의 독서를 보면 저는 정신이 번쩍 나요. 그 어떤 긴장감과 체계가 느껴져서 참 좋아요. 갑자기 파란여우님도 그리워지네요....저는 이상하게 해가 갈수록 리뷰는 많이 쓴 것 같은데 모으기와 가르기가 도통 안됩니다. 큰 그림을 그려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게으름과 타성에 젖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독서도 그 사람의 성향을 그대로 따라 가는 것 같아요.

반딧불이 2010-11-26 00:09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아직 유치원에도 가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그만한 독서를 하실 능력이면 반딧불이의 긴장감쯤이야~하고 생각하셔도되요. 저는 거의 학습지진아에 다름 아니니까요. 머지않아 반드시 저와 나눈 이런 대화를 되뇌이시면서 나도 그런 긴장감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지...하실 날이 오실거에요.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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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29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글은 주제별로 묶인 것이 아니라 발표한 시기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배열되었다. 발표순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재구성해보면 오줌을 지리던 여덟 살의 유년시절부터 장학금을 위해 공부해야했던 학생, 제국경찰, 전쟁에 참가한 군인, 폐렴환자, 서평자, 작가 등 다양한 모습의 오웰이 그려진다. 한편으론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오웰의 자서전을 보는 듯하다. 총 29편의 에세이 중 여섯 편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마라케시, 두꺼비 단상, 나는 왜 쓰는가,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는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수필집 『코끼리를 쏘다』에도 실려 있다.

 

나는 오웰의 글을 『동물농장』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러니까 에세이보다 소설로 먼저 접했었는데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소설에 대한 내 느낌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이러한 느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오웰에게 있어서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문학론에 대한 변이다. 오웰은 글쓰기의 동기를 네 가지, 즉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답 '정치적 목적'은 당연히 다른 답보다 가장 우선한다. 이러한 것이 어디에서부터,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여섯 살 때부터 그는 커서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려 한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쓰기도 전에 이미 작가로서의 자질은 다 갖추었던 셈이다.

 

오웰은 글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고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다는 것을 우선시한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감추어진 진실을 들춰내서 그것을 추문으로 만드는 일에 가치를 두었다는 것이다. 누차 써먹게 되는 얘기지만 김현의 책『한국문학의 위상』에 실린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실려 있는 글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이런 오웰이 추구한 것은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인 책을 쓰는 일을 계속해왔다. 그는 자신의 작업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글을 쓸 때마다 또 자주 글이 막히게 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아니 오웰의 모든 작품을 읽을 때 하나의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민족주의나 파시즘, 권위에 대한 반감, 제국주의의 본질 등 정치적 글은 이런 그의 목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를 비판하는 톨스토이에 대한 오웰의 비판을 읽을 때는 그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우리의 속담을 떠올렸다. 논리적이고 정신분석적이고 설득력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거리두기를 잘하던 오웰의 인간미까지 보여지기도 하는 글인 듯해서 혼자 웃었다.

    

밑줄긋기 

우선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63

 영국에 대한 일반화 중에 거의 모든 평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 몇 가지.
- 영국인들이 예술적인 재능은 별로 없다는 점
- 영국인은 추상적인 사고에 공푸를 느끼며 철학이나 체계적인 '세계관'의 필요성을 못느낌.
- 생각 없이 행동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영국인의 위선은 (이를테면 제국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가 그렇다) 그런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히틀러가 독일인데 대하여 만들어낸 '몽유병 민족'이라는 말은 영국인에게 칭했으면 더 어울렸을 표현이다. -91

지식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사람들이지만, 상황이 절박해지면 상당수가 좌절하여 패배주의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알만큼 멀리 내다볼 줄 알며, 매수당하기도 쉽다. -152 

근대에 와서 시가 음악이나 구어와 갖는 연관성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시는 존재라도 하기 위해 종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시인이란 사람에게 노래나 낭송을 기대한다는 건 건축가에게 천장에 회반죽 바르는 기술을 기대하는 것보다 곤란한 일이 되어버렸다. -166


내가 말하는 ‘애국주의’란 특정 지역과 특정 생활양식에 대한 애착이며,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 믿되 남들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는 것이다. 애국주의는 속성상 군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방어적이다. 그에 비해 민족주의는 힘에 대한 욕구와 분리할 수 없다. 모든 민족주의자의 변치 않는 목적은 더 많은 세력과 위신을 확보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억누르고서 섬기기로 한 나라 또는 다른 어떤 집단을 위한 일이다. -180

우리의 생각이 어리석어 영어가 고약하고 부정확해지지만, 언어가 단정하지 못해 생각이 더 어리석어지기 쉬운 것이다. -256

 책을 무차별적으로 평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건 유난히 달갑지 않고 짜증스럽고 피곤한 노릇이다. 그것은 쓰레기를 칭찬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286

궁극적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 생존이야말로 그 자체로 다수 의견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인 것이다. -352

역사상 1914년 이전 시절만큼 기름기 절절한 부의 천박함이 보완이 될만한 어떠한 귀족적 고상함도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대는 없었던 듯하다. -415

나는 시절이 아무리 좋을 때라도 문학평론은 사기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왜냐하면 공인되다시피 한 기준 같은 게 없는 한 모든 문학적 판단은 본능적인 선호를 정당화하기 위한 규칙을 꾸며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책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 (반응이란게 있기나 하다면) 주로 '나는 이 책이 좋다'거나 '나는 이 책이 싫다'는 것이며, 그 뒤에 따라 붙는 것은 합리화일 뿐이다. ...... 정치적인 정기간행물에 서평을 써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대체로 봐서, 동조하는 매체에 글을 쓸 때는 위반죄를 저지르고, 반대하는 매체에 글을 쓸 때는 태만죄를 저지르게 된다. 438-439

지금같은 시대에는 생각이 있는 사람치고 진정으로 정치와 거리를 둘 수 있거나 실제로 그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다만 지금 우리가 정치적 충심과 문학적 충심 사이에 그어 둔 선을 보다 선명하게 긋자는 것이다. ..... 작가가 정치에 관여할 때는 일반 시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관여해야지 '작가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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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2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꽤 오랫동안 들고다니며 읽었습니다. 전철로 오갈 때마다 짬짬이 읽느라 그랬겠지 싶었는데 반딧님의 리뷰를 읽고보니 저자의 진지함에 비해 제 자세가 턱없이 가벼웠던 거로군요. 반성해야겠네요^^

반딧불이 2010-11-22 12:06   좋아요 0 | URL
제가 지나치게 무거웠던건 아니었을까...저도 반성하겠습니다.~

cyrus 2010-11-2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이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오웰 신간 리뷰 중에서
반딧불이님과 같은 신간평가단원이신 굿바이님의 글이 정말 좋았고,
새로운 관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딧불이 2010-11-23 11:11   좋아요 0 | URL
싸이러스님의 글을 제외하곤 저는 아직 신간 평가단원분들의 글을 읽어보질 못했어요. 각자의 관점들을 가진 글들일텐데 날잡아서 읽어봐야죠.

양철나무꾼 2010-11-2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쓰기도 전에 이미 작가로서의 자질은 다 갖추었던 셈이다.
이런 그가 왕부럽지만,그의 글쓰기 동기는 한번쯤 곱씹어 봐야 겠는걸요~^^

반딧불이 2010-11-23 11:14   좋아요 0 | URL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그에게는 '정치적 목적'으로서의 글쓰기가 필연적이었을거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 관점으로 그의 작품을 보니까 의도가 분명히 보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