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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외롭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34
김승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시집
한 권을 묶으려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시가
몇 편이나 실려 있는지 배열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졌는지 가독성은 얼마나 되는지 해설은 누가 썼으며 어떻게 접근했는지 등등. 시집
한 권에 최소 50편
이상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편들은 1부, 2부, 3부
로 나뉘어 실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부’ 단위로
나누었을 때 그 기준이 뭘까 궁리하며 읽게 된다. 어떤
시집은 명확하게 그 구분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시집들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시인만이
아는 어떤 분류의 기준이 있는 것인지 단지 가독성을 위주로 배열을 한 것인지 모호하다. 각
‘부’별
시들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 때도 있고,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 기울기가 심하거나 용두사미 격인 시집도 보인다.
『희망이
외롭다』는
김승희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유난히 그 변별성이 눈에 띄는 시집이다. 시각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그 특징이 한눈에 드러난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으면 더욱 의미가 살아나는 우리말의 부사어를 소재로 한 1부,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생각나게 하는 ‘서울의
우울’ 연작이
실린 2부, ‘모짜르트의
엉~덩이’ 연작을
실은 3부, 단
세 편의 시를 실었을 뿐이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 시집을 다시 보게 만드는 4부로
나뉘어져있다. 각
부에서 표제작을 꼽으라면 1부에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2부
<서울의
우울 4>, 3부
<모짜르트의
엉~덩이
1>, 4부
<너, 정저(井底), 덕혜옹주를
고르겠다. 2부와
3부의
두 편만을 옮겨놓는다.
서울의
우울 4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없으면 자살로 본다.
법의
말씀이다
어느
자살도 깊이 들여다보면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너무
많다
심지어는
내가 죽인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밧줄을 목에 걸었다 할지라도
모든
죽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자살도
타살도
금환일식이다
모차르트의
엉~덩이
1
모차르트의
손가락
신의
물방울을 우리 가슴에 떨어뜨려주는
손가락,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열리는 연주회 직전
콘스탄체와
음란한 농담을 하느라고
연주회에
늦은 모차르트,
내가
고용한 하인 때문에 내가 왜 망신을 당해야 하냐고
대주교로부터
야단을 맞고 나가다
문
앞에
자기
음악을 듣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대주교에게
엉덩이를 흔들며
엉덩이로
인사를 하고 나가는 모차르트,
게임에
진 벌칙으로
엎드려서
혹은
뒤로 눕혀져서
두
눈을 가리고 피아노를 치는 모차르트의 손가락,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는 손가락,
파파게노
파파게나를 부르는 손가락,
한없는
기쁨에 가득 차서
무엇인지도
모를
신의
즐거움에 항상 참여하며
들떠서
피아노를 치다가
일어나
엉덩이를 들썩 보여주는 모차르트,
황제의
조카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를 구한다며
작품
악보를 가져와보라는 시종장의 말에
내가
최고인데
왜
음악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심사할
음악을
제출해야 하냐고 항의하는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엉덩이는 바로 그 항의다,
눈물이다,
떠들썩한
웃음이다,
가발
사회에 던지는 천진의 폭탄이다
코앞에서
빵~ 터지는
찬란한 방구다
‘빙하에
내리는 비’라는
허윤진 평론가의 글 또한 이 시집의 무게를 더하는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와
해설이, 시인과
평론가가 이렇듯 서로를 마주보고 서로를 견제하며 상생하고 있는 시집을 이전에 내가 보기나 했던가. 몇
번씩 통독하게 하는 시집이다. 내가
무언가를 덧붙인다는 건 사족에 불과하므로 해설을 옮겨놓는다.
『희망이
외롭다』의
1부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에서 시인은 한국어의 이삭을 줍는다. 그녀가
주운 이삭들은 ‘비로소’ ‘이미’ ‘아랑곳없이’ ‘그래도’ ‘부디’ ‘하물며’와
같은 부사들이다. 문법에
맞는 문장을 만드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문장에
적절한 활기를 부여하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말들이다. 특히나
명사와 형용사보다는 동사와 부사가 언어의 정취를 결정하는 한국어의 세계에서 부사는 동사를 단장하는 마지막 손길 같은 것이다. 시작(詩作)에
있어서 한 번도 탐미주의자가 아닌 적 없었던 김승희에게 부사는 헤어짐의 순간까지 손을 놓고 싶지 않은 연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삭을
줍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여야 한다. 국어사전의
한 귀퉁이에서, 소박하게
낡아가는 단어들 앞에서 기꺼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이 시인의 자세에서 나는 윤리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긴
시간 동안 한국어를 갱신해 온 이 놀라운 시인이 한낱 단어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풍경. 자기
몫의 아우슈비츠를 버텨내는 행상 여인처럼 이 시인은 이렇게 자기 몫의 자세를 감당해왔을 것이다. 시인이
언어의 재벌이 아니라 언어의 빈자(貧者)라는
겸허한 인식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도저하다
시인은
자신을 구원할 한 줌의 언어를 온몸으로 갈구하는 사람이다. 언어의
섬광이 자신의 골수와 영혼을 꿰뚫고 뒤흔들어 영혼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때까지, 도래할
말을 기다리며 눈물 젖은 얼굴로 온밤을 새우는 사람이다. 수혈되지
않는 언어를 기다리며 매일의 빈혈을 가까스로 버티는 사람이다. 그녀는
상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 같은 말들을 제발, 부디, 달라고, 부끄러움
없이 손을 내밀고 신에게 언어를 구걸한다. 부지불식간에
언어의 아사(餓死) 를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리하여, 이
비참한 북극으로, 37.5도의
말이 오리라. 우리에게는
충분히 이른 비다. 해설136-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