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지은 집 애지시선 33
권정우 지음 / 애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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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료나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의 양념만으로 식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음식을 먹은 뒷맛은 담백하다. 인스턴트식품이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탓에 이런 음식을 처음 대하면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없는 듯하면서도 없지 않은 음식의 맛을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 맛들이고 나면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또 이런 음식이기도 하다.

글맛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화려한 수사로 잘 꾸며놓은 글은 처음 읽을 때는 멋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세련된 언어구사능력에 감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어 번 반복해서 읽고 나면 그것이 곧 치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깊은 맛을 느끼지 못하면 다시는 찾지 않게 된다. 시가 아름다운 언어와 깊은 맛까지 곁들이게 되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글맛을 언제부터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입맛이 변하듯 좋아하는 글맛도 달라지는 것 같다. 최근에는 담백한 음식을 먹듯 꾸미지 않은 단정한 시에 더 마음이 끌린다. 아름다운 형용사에 현혹당할 나이는 아니라는 것일까? 글맛을 다 잊은 탓일까?

최근에 몇 권의 시집을 들추다가 말을 최대한 아끼고 화려한 수사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시인을 만났다. 충북대학교 국문과 교수라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이분, 자전거를 타고 무심천을 따라 출퇴근을 하는 모양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고마워한 것들1

 

자전거로 출퇴근할 직장이 있는 것
한 시간 거리에 집을 얻은 것

나만을 위한 길
그 길에서 풀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
향기가 어릴 적 등굣길로 이끄는 것

계절이 있는 것
아침과 저녁이 있는 것
계절과 시간이 차려놓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것
아! 하는 감탄사

풍경을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
고마워하는 마음이 우물처럼 자리 잡은 것

아침, 저녁으로
고마운 마음을 길어 올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것

내게 출퇴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이라면 그걸 고마워했을까? ‘계절과 시간이 차려놓은 풍경을’보고 ‘아! 하는 감탄사’를 낼 수 있었을까? ‘고마운 마음이 우물처럼 자리 잡’았을까? 나는 어느 것 하나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시인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먼 길

 

논물에 떠다니는
개구리밥아 

그 옆에서 미끄러지는

소금쟁이야

그 밑에 웅크린
개구리 알들아

그 위를 나는
제비야,
두루미야,
비오리야

논두렁에서
얼굴을 비춰보는
유채꽃들아

너희들을 보려고
서른 해를 돌아왔구나

이렇게 지척에
있는 줄도 모르고

 

‘서른 해를 돌아’와서야 비로소 시인이 만나게 된 것들이다. 가까이에 있는 것들은 그것이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무심해지기 쉽고, 그 원래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기 쉽다. 시인이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한 시간 씩 걸려서 오랜 시간을 지나다니면서야 비로소 발견한 것들일 것이다. 단순한 발견에 그치지 않고 시인은 이러한 것들에서 ‘자연에 대한 예의’를 배운다.

  자연에 대한 예의

 

발이 만든 길로 다니기

신을 벗고 개울 건너기

강을 만나면 뒤돌아가거나, 머물거나, 배로 지나기

높은 산이 보이면 돌아가거나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넘기

계절을 거스르지 않기

생이 다한 뒤에도 자연에 남는 거니까
 
사는 날에 집착하지 않기

예의라는 것이 ‘누가’ ‘누군가’에게 갖춰야할 형식이라면 ‘누구’는 시인이고 ‘누군가’는 자연이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예의를 다 갖추고 난 후 그 스스로 자연이 된다. ‘생이 다한 뒤에도 자연에 남는 거니까/사는 날에 집착하지 않기’라니! 시가 배설이 아닌 다음에야 머리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이런 말이 쉽게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의 죽음조차도 객관화 한 뒤에야 나올 수 있는 말이니 이미 자연이 되어버린 시인에게 내가 예의를 갖춰야 할 차례다. ‘사는 것이 이미 세상에 세든 것이’(<집안에 지은 집>)라고 말하는 시인이니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까닭인지 시인이 바라보는 주검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풍경

 
대웅전 뒷마당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에게

거미가 고운 수의를 한 벌 해 입혔다

허공에 새로 생긴 봉분 앞을 지날 때마다

바람이 경을 읽는다.

 
거미가 시에 등장하는 경우는 많이 보았다. 김수영, 이면우, 박성우 등의 거미는 시인과 거미가 동일시되거나 관찰자로 등장한다. 권정우의 시에 등장하는 거미와 잠자리의 먹고 먹히는 이 관계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고 풍경이다. 그는 훗날 그 스스로 자연이 될테지만 자연이 되기까지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름답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두기는 물리적 거리이거나 비겁한 거리는 아닌 듯싶다. 그는 기쁨에 들뜨지 않고 슬픔에도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슬픔의 격랑을 빠져나와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더 강하다.

가르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르치는 대상이 자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가르치기1

 

 

내가 알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에서 시작해서
학생들이 알아야할 할 것을 가르치다가
그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지만
작은 마루에 올라섰을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치다가
지혜롭게 되도록 가르치다가
이제는 가르치려 하지 않고 수업을 즐기려 하지만
말하지 않고도 깨닫게 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언제쯤
능숙하게 나를
가르치게 되려나

Teaching is Learning이라는 말을 또 쓰지 않을 수 없는데 시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 역시 ‘능숙하게 나를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배우는 것조차도 배운다고 말하지 않고 가르친다고 말한다.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쓸 수 있는 말이 아닐까. 나는 그가 ‘한번 놓이면/생이 다할 때까지/자기 자리에서/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바둑돌’에게‘한 수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오래 간직하기를, ‘악착같이 살지 않기로 한’마음이 변치 않기를, ‘아픈 곳으로 자꾸만 손이 가기를’‘사는 날에 집착하지 않기를’감히 바래본다. 첫 시집의 깔끔하고 단정한 시 속에 감추어둔 시인의 고요한 성정을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여전히 느낄 수 있기를 또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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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에 대한 예의' 라는 시가 무척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보기에는 자연을 위한
좋은 일지만, 정작 실천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죠. 반딧불이님이 소개하신 5편의 시를
통해서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시인의 마음 역시 읽을 수 있네요.

반딧불이 2010-12-01 17:44   좋아요 0 | URL
그야말로 담백한 시를 쓰시는 분이더라구요. 시인들은 그래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