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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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20일 아침, 일본에서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났다. 12명이 사망하고 60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가벼운 기침, 울렁증, 구토 등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에서부터 시야협착증, 마비, 기억상실 등 장기간 치료를 요하는 중환자들도 있다.

 

이 사건은 옴진리교 교주였던 아사하라 쇼코의 명령에 따라 옴진리교 간부들에 의해 행해졌다. 다섯 개 노선의 지하철 칸에 묘한 액체가 든 비닐봉지를 놓고 뾰족하게 간 우산 끝으로 봉지를 터뜨려 달리는 지하철 안에 사린가스가 유포되게 만들었다.

 

옴은 ‘우주의 창조유지 파괴’를 뜻하는 힌두교의 주술어로 주신은 파괴의 신인 힌두교의 시바라고 한다. 아사하라 쇼쿄 교주는 자신을 시바로 믿었던 것 같다. 옴진리교 교단을 만들고 조직을 갖추었고 인류의 종말을 예언하며 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옴진리교 간부들은 심장혈관 외과 전문의, 응용물리학과 수석 졸업자 등 슈퍼 엘리트급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별다른 존재감이 없거나 일용노동을 하다가 출가한 사람, 또 인생의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한 사람 등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었다. 그들에게서 어떤 일관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격리된 범죄자도 적의에 가득 차 세상을 비난하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명령을 하달 받았을 때 그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하고 윤리적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언더그라운드』는 이 사건의 경험자들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터뷰하고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하루키는 봄방학을 이용해 잠시 귀국해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5년 3월 20일 아침에, 도쿄의 지하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하는데 의문을 품었다. 그가 품었던 의문은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에 대한 논리와 시스템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똑같은 작업을 사건의 직간접적 피해자들에게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하루키는 아사하라가 그렇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얻기 위해서는 그가 격렬한 내적 지옥을 통과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반면 “옴 진리교에 귀의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아사하라가 수여한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를 얻기 위해 자아라는 귀중한 재산을 아사하라 쇼코라는 ‘정신은행’의 대여금고에 열쇠 째 맡겨버린 듯하다”고 한다. “아사하라 쇼코가 소유하는 ‘보다 거대하고 보다 깊고 균형이 깨진’ 개인적 자아에 자신의 자아를 고스란히 동화시키고 연동시킴으로써 그들은 의사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거칠게 얘기하면 옴진리교 신자들이 심적 편안함을 위해 생각을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러나 만일 종교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할까?” 이것은 하루키가 인터뷰를 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구원은 차치하고 나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 또 그를 추종하는 맹목의 신도들, 대체 이들에게 믿음이, 이 맹신이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궁금증은 에릭 호퍼에게서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길위의 철학자라 불리는 호퍼는 모든 광신적 신자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광신적 성향은 같다고 분석한다. 그것이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대의와 교조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 속에는 이런 획일적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중운동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 열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편이 가능한 것을 시도할 때보다 신뢰를 잃을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이들이 믿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고가 아니라 경전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맹신은 자기 불신에서 나온다는 얘기. ‘광신’에 대해 호퍼는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해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자신과의 조화가 깨지고, 자기로부터 거부당하고 자포자기하고 자기를 불신하거나 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고반응성 물질이 된다. 불안정한 화학원소 모양으로 손에 잡히는 아무것하고라도 결합하려 드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거부당한 자신만으로는 자신감을 일으키지 못하며 무엇이 되었건 오로지 자신이 신봉하게 된 그 무언가, 그 기둥에 열정적으로 매달릴 때만 자신감을 얻는다....... 그의 자신감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행위에서 나온다. 광신자는 사실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가 어떤 대의를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하며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자기가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조화’ 이 말은 자기를 긍정하라는 말일 터인데 달리 말하면 내가 찌질한 것을 인정하자는 얘기다. 어렵게 얘기하면 ‘자기 배려’가 필요하다는 얘기. 무언가 모자라는 내가 바로 나이고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곳이 출발점이 될 때 구원은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외부의 어딘가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은 '나'에게서- 그 '나'가 아무리 찌질하다고 하더라도- 시작되며 나에게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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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목적 지지와 마비된 이성
    from 파란여우의 뻥 Magazine 2012-05-17 10:05 
    5월 12일 오후 두시,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 제1차 중앙위원회가 개최됐다. 10시간 30분 동안 진행한 결과는 참담했다. 욕설과 고함으로 시작된 회의는 당권파의 일사불란한 복창과 단상점거 폭력으로 막을 내렸다. 회의가 시작된 후 중간에 질문과 의견을 받은 짧은 시간을 빼곤 10시간 내내 당권파의 복창은 뽕주사를 맞은 것처럼 계속됐다. 통진당이 어제 중앙위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19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부정경선 문제때문이다. 토론을 통해 해법을..
 
 
비로그인 2012-05-17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텔레비전에서 당시 사건 보도를 접했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어쨌든 저는 비교에 빠져들거나 맹신자가 될 염려는 없겠네요. 제가 얼마나 찌질한 인간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ㅎㅎ

반딧불이 2012-05-17 10:34   좋아요 0 | URL
참내..그게 왜 그렇게 가는지...
아무튼 구원받으실 거에요. 아니 스스로, 자신을, 이미, 구원하셨지요?

맥거핀 2012-05-18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 읽었었는데, (저는 처음에 소설인줄 알고 집어들었어요^^)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 사건의 원인과 결과 뭐 이런걸 잡아내는 게 아니라, 집단기억으로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당시의 어떤 시대상을 잡아내려는 시도가 대단해보였어요. (최근에 <한겨레21>에서 대구지하철 사건에 대해 이 책과 비슷하게 서술한 내용들도 인상적이었구요.) 에릭호퍼가 한 이야기와도 연관지어서 보시는 반딧불이님의 의견도 흥미롭습니다.

반딧불이 2012-05-18 09:4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이거 뭐야?...하는 느낌이었어요. 하루키가 왜 이런식의 작업을 했는지도 궁금해졌구요. 하루키가 내 안에 있는 어떤 맹목을 보여주었다면, 이 맹목이 폭력 혹은 파시즘과 상통하고 있다는걸 호퍼가 확인해준셈이지요.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 지질학적 시간의 발견에서 신화와 은유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6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이철우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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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을 인간의 정신 안에 위치시킨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폴 리쾨르는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줄거리 구성을 연결시켜 시간은 이야기를 통해 형상화 된다고 했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이론을 Ⅰ,Ⅱ,Ⅲ으로 나누어 꼼꼼하게 설명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메시스Ⅲ이다. 이야기로 형상화된 시간은 독자가 이야기(시간)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의미 있는 이야기(시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질학자들은 시간을 어떻게 보았을까?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은 시간에 대한 지질학자들의 은유다. 말 그대로 '시간의 화살'은 직선적 시간관으로 절대적인 유일성을 가지고 반복되지 않는 시간을 의미한다. 필연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균질화된 근대적 시간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반면 '시간의 순환'은 내재적 법칙성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을 말한다. 물론 이때의 순환은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다. 시간의 본질을 상반되게 표현한 이 이분법적인 은유 중 어느 쪽이 옳은가? 시간은 화살처럼 방향성도 목적성도 없이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가, 혹은 순환하는가?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스티븐 제이굴드가 말하듯이 ‘이분법은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유용하거나 오도하거나의 문제이다.’ 우리는 늘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하는 입장에 놓이지만 세상 만물을 모두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눌 수 없듯이 시간 역시 직선이냐 원이냐 선택적으로 말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즉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도 내 경험세계에서의 생물학적 시간과 근대적 시간관에 너무나 익숙한 탓에 거의 직선적 시간만을 인식하고 살고 있다.

 

시간의 본질을 묻는 이런 이분법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간은 화살만도 아니고 순환만도 아니다. 또 시간은 화살이고 순환이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하체는 하나고 상체가 둘인 샴쌍둥이를 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두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1.5인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쩌면 시간은 이렇게 ‘아니다’라는 부정의 형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 있는 것은 분명한데 말 할 수 없는 것, 다른 것들을 측정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측정되어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이런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해 스티븐 제이굴드는 영국 지질학계에서 유명한 한 명의 악당과 두 명의 영웅을 불러온다. 악당의 이름은 토머스 버넷이고 영웅의 이름은 제임스 허튼과 찰스 라이엘이다. 이들은 차례대로 17, 18, 19세기 인물로 지질학이라는 학문이 나오기도 전에 지질학적 시간인 ‘심원한 시간(deep time)’을 발견한 이들이다. ‘심원한 시간’은 인간의 역사에 비해 장구한 지구의 나이를 표현한 말이다. 책에 있는 말을 그대로 옮겨 온다면 ‘지구의 나이를 1야드(91.44cm)의 길이로 간주했을 때 손톱 다듬는 줄로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한 번만 밀어버리면 인간의 역사는 모두 지워진다.’

 

지질학도들은 어떻게 지구의 나이를 수십억 년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심원한 시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제이굴드는 한 명의 악당 그리고 두 명의 영웅이 쓴 책과 표지로 사용된 그림 등을 분석하는데 해석학자에 맞먹는 텍스트 해독능력을 보여준다. 직선적 시간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순환적 시간을 읽어내는가 하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기도 하고, 우습고도 멋진 문장으로 문외한들을 사로잡기도 하면서 자연은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 둘 다에게 호의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즉 자연은 역사적 고유성이라는 시간의 화살과 항구적인 내재성이라는 시간의 순환을 모두 요구한다는 것이다.

 

제이굴드의 책을 끝으로 ‘시간과 역사’에 대해 참고해야할 책읽기를 마쳤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 등은 절반도 이해를 못한 듯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따로국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깨우친 듯하다. 자끄 모노의 <우연과 필연>을 읽으면서 인간은 단백질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보르헤스의 <픽션들>과 <러브크래프트 전집> 2권에서는 과학적 시간관이 문학작품 속에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과학과 불교>에서 나는 본문과는 무관하게 달라이 라마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는가 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고 부럽기까지 했다. 가장 쉽고 편하고 읽은 것은 'E=MC2' 과 <시간의 화살>이었고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였으며,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은 가장 신선했고 제이굴드의 학자적 태도에 탄복했지만 화살도 순환도 아닌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비론자 같아 뒷맛이 개운찮다.

 

부수적으로 성경의 전도서를 읽으며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신다는 말을 읽으며 크게 웃었다.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보르헤스의 시간관을 엿본듯해서 나름 뿌듯했다. 2년여에 걸쳐 읽은 역사와 관련된 책들. 결국 모든 책의 종착은 나, 즉 사람이었고 사람의 살아있음, 삶이었다. 시간을 사는 나는 내 삶의 저자이며 동시에 유일한 독자라는 것. 이제 어떻게 내 삶을 쓸 것인가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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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이야기 1 -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현대의 문학 이론 33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 이경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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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시간이 길다고 혹은 짧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측정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측정할 수도 없으니 분명 시간은 존재하긴 한다.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그는 말한다. “아무도 나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때에는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있기는 있는데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이 존재론적 역설을 그는 어떻게 해결하려는 걸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질문을 바꾼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에게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따로 따로 존재한다고 보면 크나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어디서부터 현재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과거이며 또 미래인가? 어떻게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과거와 현재를 측정할 수 있는가 등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우리의 정신에 위치시킨다. “어쩌면 우리는 그 본래의 의미로 세 개의 시간, 즉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러한 세 가지 시간 양태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 속에 존재하며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는 기억이라는 이미지로, 미래는 기다림(기대)으로, 현재는 직관으로 세 겹의 시간을 설정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의 정신이 과거의 이미지를 불러오는 것이고 기대한다는 것은 미래의 이미지를 미리 예측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현재’에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현재는 언제나 세 겹의 중첩된 시간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 겹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정신’을 준거점으로 측정 가능하다. 시간은 기억이나 기다림(기대)의 방식으로 확장(이완)되며 집중 혹은 긴장하는 ‘현재’의 활동을 통해 연장된다. 이런 작용으로 우리의 정신 속에서 파편화된 시간은 연속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기다림과 기억은 바로 정신 안에, 인상의 자격으로 연장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인상은 정신이 행동하는 한에서, 다시 말해서 기다리고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는 한에서만 정신 안에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은 헤아릴 수 있는 영혼들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던 시간을 정신에 위치시킴으로서 존재를 결여한 존재로서의 시간의 역설은 해결되었다. 한없이 단자화 되고 파편화된 시간들도 세 겹의 현재로 인해 연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인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인 제약이기도 하다. 이 제약은 어떻게 극복 가능한 것인가? 시간의 연장은 언어를 통해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줄거리 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좀 더 극단으로 밀고 가면 이런 말이 가능할 것이다. 이야기가 아니면 어떻게 이 세계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폴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을 바늘 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분석하고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줄거리 구성을 연결시킨다. 줄거리 구성은 시간적 경험을 언어로 형상화하고 재형상화한다. 시간성이 언어로 옮겨지는 것이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를 분석하면서 역사와 허구에 대해 분석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역사적 시간과 허구적 시간에 대한 분석이다. 역사적 시간은 연대기에 따른다. 그러나 연대기만으로는 안 되고 필연적으로 허구의 시간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역사와 허구는 교차하면서 바로 이 교차의 지점에 ‘인간의 시간’이 있다.

 

객관적 시간 즉 우주적 시간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개인이 경험하는 시간 즉 사적인 시간과 늘 불협화음을 이룬다. 개인적 시간을 어떻게 객관적 시간에 안착시킬 것인가가 역사적 시간인 셈이다. 책을 읽다보니 지구상에 살고 있는 63억 인구 개개인은 모두 다 다른 시간을 사는 셈이다. 역사적 시간은 제쳐두고 내게 남은 사적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가슴을 짓눌러 온다. “내가 아프다. 시간이 아프다.”라고 했던 폴 발레리의 말이 남의 말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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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4-03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섬이다."라는 공간으로서 인간을 분리시킨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인간을 또 '개인의 시간', 정신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분리시켜 시간에서마저 각 인간을 떨어뜨려 놓는군요. 공간으로서의 지도와 시간으로서의 연대기와 분리되어 버린 각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반딧불이 2012-04-03 12:28   좋아요 0 | URL
음..시간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제가 다다른 결론은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空이었어요. 기독교에서는 영원을 말하지만요. 그래서 맥거핀님과 같은 질문에 닿았지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책을 좀 읽어보려고 해요. 어? 그런데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네요. 봄단장 하셨나봐요?

우리는 시공간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만, 아인슈타인 이후 시공간은 더이상 별개가 아니었어요. 날이 궂어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결국 내가 누워 있던 곳은 방바닥이며 동시에 시간을 깔고 누워 있었던 거였더라구요. 벌떡 일어나 답글 달고 있습니다.^.^

맥거핀 2012-04-03 22:07   좋아요 0 | URL
봄단장이라기에는 너무 칙칙한 사진입니다.ㅋ 날씨가 진짜 좀 궂네요. 내일은 맑았으면 좋겠어요.

비로그인 2012-04-0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도서관에 가면 1권이 빠진 채 2권부터 진열돼 있어서 늘 다음으로 미루곤 했는데 구입해서라도 읽어봐야겠네요. 잘 봤습니다ㅎㅎ

반딧불이 2012-04-04 11:43   좋아요 0 | URL
이미 살펴보셨겠지만 2,3권에서는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시간이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실 예를 들고 있었어요. 그러니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는 1권에 모두 있는 셈이지요? 소설쓰시는 분들의 필독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답니다.

프레이야 2012-04-04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가 아니면 어떻게 이 세계를 만날 수 있을까..
소설 쓰는 사람의 필독서로 생각하셨다니 리뷰만으로도 어느 정도 와닿습니다.
감사해요. 담아갈게요^^

반딧불이 2012-04-06 00:19   좋아요 0 | URL
재미도 없는 글을 꾸준히 읽어주시네요. 고맙습니다.

maruko 2012-04-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관한 자료를 찾다가 들어와 왔어요.
왠지 자주 찾아질 것 같아요..^^

반딧불이 2012-04-27 11:3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별내용 없지만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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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당혹감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그의 작품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늘 강연록이나 평전, 에세이 등 그의 주변을 맴돌아야 했다. 대체 이런 당혹감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어쩌면 나의 이런 당혹감은 일반적 소설, 그러니까 문학은 세계의 반영이라는 논리에 충실한 작품들에 너무 길들여졌기 때문은 아닐까. 이 말은 예술에 대한 감각이 개방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 코드에 익숙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달리 말하면 완고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달리 말하면 고지식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달리 말하면 진부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음... 끝이 없군. 그렇다면 일반적 소설 읽기의 방식을 깨트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새해 첫 책으로 망구엘의 보르헤스에 관한 책을 만났다. 유감스럽게도『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내게 보르헤스에게로 가는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는 못한 채로 『픽션들』을 읽었다.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이곳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글에 대한 글(text에 대한 text)’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는 것들과 뒤섞어 놓았다.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 놀랄 능력이 없어서 인지 그의 독서량이나 저주받은 기억력이 더 놀라웠다. 또 도무지 언표가 불가능할 것만 같은 세계를 언표화 하는 것에 놀라자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언제나 감탄과 놀람만이 내 몫일 뿐 창작의 능력에 있어서는 빈곤하기 그지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어쨌거나 능력 있는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문학은 ‘언어의 직조물’이며,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세계 옆에 놓이는 또 하나의 세계’다. 이런 보르헤스 소설의 키워드를 골라낸다면 백과사전, 시간, 세계, 분신, 지식, 미로 등이 될 것이다.

 

보르헤스는 가장 좋아하는 문학 장르가 백과사전이라고 말했다. 장님이 되어버린 그가 만약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면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글을 한 줄도 쓰지 않게 되더라도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이참에 나도 백과사전과 좀 친해져 보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 세상을 하나의 미로로 보고 있는 보르헤스는 미로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그의 미로는 시간이 복수적으로 공존하는 곳이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보르헤스의 이런 생각이 전형적으로 드러나 있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린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시간이 그려진다. 현실화된, 경험적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계적 시간이 그 하나이고, 시작과 끝이 없는 불멸의 시간 즉 미로의 시간이 다른 하나다. 이탈로 칼비노에 의하면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현재’와 ‘한 사람의 의지에 의하여 이미 결정된 시간’이다. 이 소설 속에서 시간은 복수로 갈라진다. 주인공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의 앞에 놓여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함으로써 시간이 계속해서 두 개로 갈라진다. 이것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무한한 우주의 개념과 같다.

 

시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불멸과 영원이 있다. 보르헤스의 또 다른 관심사이기도 한 불멸이나 영원은 생명을 가진 개체의 차원에서는 존재 할 수 없다. 불멸은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데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보르헤스는 갔지만 여전히 보르헤스는 우리 곁에 있다. 한참 적다보니 보르헤스가 흘려놓은 머리카락 한 올을 주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올해는 보르헤스에게 한 발짝 쯤 성큼 다가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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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3-04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르헤스에게 가졌던 느낌도 그래요. 저도 계속 그 주변만 맴돌다 개정판 <픽션들>을 만났는데 아주 놀라우면서도 완전한 접근과 이해가 불가능하더라고요. 리뷰도 못쓰고 책꽂이에 꽂아 놓지도 못할 만큼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언제쯤 저도 보르헤스에게 제대로 갈 수 있을까요?

반딧불이 2012-03-05 13:52   좋아요 0 | URL
하하. 블랑카님. 지금 하신 질문은 장님에게 길을 묻는 것과 같아요. 블랑카님과 같은 동지가 있다는 것이 제게는 위로가 되는데요. 이렇게 한발짝씩 떼다보면 어느 순간 보르헤스의 중심에 닿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같이 가보기로 해요.

맥거핀 2012-03-0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를 한참 동안 읽고나면, 어느순간 이상한 각성, 혹은 멈춤이 와요. 지금까지 내가 읽은 이야기가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지만, 뭐라고 도저히 잘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때. 그런데 시간은 어느덧 이만큼 지나있고..대학 도서관에서 보르헤스를 읽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반딧불이 2012-03-05 13:56   좋아요 0 | URL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해요.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요. 보르헤스 작품의 키워드를 골라내고 나니까 작품을 읽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낯선 접근방식이지만 자꾸 읽다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cyrus 2012-03-0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성일의 책에서 보르헤스를 소개한 글을 읽어봤는데요, 그 글에서도 보르헤스를
독서하기가 까다로운 작가로 분류하더군요. 한 번도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어렵다라고 하는 규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도전 정신(?)으로
미로와 같은 보르헤스의 글을 읽는거 같아요. ^^

반딧불이 2012-03-06 18:16   좋아요 0 | URL
호기심과 도전정신. 이거 사이러스님하고 잘 어울리는 단어죠? 도전을 적극 권장합니다.

제게 보르헤스가 어렵다면 그 어려운 이유는 명백해요. 보르헤스의 글이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이기 때문에 전자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제가 모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저의 무지와 무식을 탓할 수 밖에요.^.^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 열여섯 소년, 거장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산책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첫 책으로 읽었다. 읽기 위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보르헤스가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 『픽션들』을 찾다가 보르헤스에 관한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보니 이 책이 있었다. 찾아야할 책은 찾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새로 주문을 하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어쩌다 손에 잡혔는데 읽다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리뷰를 써야한다는 부담감이 없으니 완독에 대한 부담도 없다. 그러다보니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들여다본다. 쫓기지 않아 좋긴 한데 집구석이 엉망이다. 언제는 엉망이 아니었느냐마는 며칠 게으름을 피우다보면 책 폭탄을 맞은 집 같다. 소파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까놓은 귤껍질처럼 소파위에 책이 쌓여있다. 꺼내온 곳에 다시 꽂아 넣는 일은 만만찮은 일이다. 해결방법은 하나. 그냥 마구잡이로 쌓아놓는다.

 

보르헤스는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왜 저런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우연과 무질서의 법칙에 대한 믿음’이 보르헤스의 서재에는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내게도 저런 믿음이 있을까? 글쎄다. 읽었던 책을 다시 찾을 때 어디쯤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질서의 법칙이 내게도 있기는 한건가? 되는대로 책을 쌓아놓는 데서 생기는 가장 창조적인 기능은 계통도 맥락도 없이 쌓아 놓은 책의 제목을 훑으면서 책제목만으로 시를 한 편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온통 책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적인 독서가로 알려진 알베르토 망구엘이 움직이는 도서관으로 알려진 보르헤스에 관해 쓴 글이니 오죽하랴.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보르헤스가 서점에서 일하던 망구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 것은 망구엘의 나이 열여섯 살 때이다. 보르헤스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고 망구엘은 학교에서 보르헤스의 시와 문장으로 공부를 하는 나이였다.

 

“문장을 해체해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동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명사와 어우러지고 구문과 구문이 맞아 떨어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빈도가 떨어진 형용사와 부사의 사용은 일상적인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 해냈지만, 새로움보다 더 놀라운 건 정확함이었다.”

 

나도 이런 공부 해보고 싶다. 그래서 놀라고 감탄하고 싶다. 최근 영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부럽기 짝이 없다.

 

보르헤스가 폭력배나 불한당을 높이 평가한 것은 그의 책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보르헤스는 워낙 책을 좋아해서 책의 표지를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책을 골라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알았고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책을 읽듯 독자의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지난한해를 돌이켜보면서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이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해로 귀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영역에 종교와 철학과 고등수학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나는 그와 친해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찾다가 찾다가 결국 못 찾아 새로 주문한 책 『픽션들』에서 이것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나는 정말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는 분야다. 아무래도 올해는 환상문학이나 SF 소설 등에 관심을 두어야 할 듯싶다. 일 때문이었지만 지난해 후반기 로맨스소설을 읽어야 했다. 도무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로맨스소설이 내게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세 번을 읽어야 했던 책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을 읽는 일이 내게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과 맞물려 삶이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결국 ‘일이니까’라는 말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섣달그믐에 하는 일이 향후 몇 달 동안의 활동이 된다고 하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보르헤스는 이 충고를 충실하게 지켰다고 한다. 섣달그믐날 나는 산에 다녀왔고 공들여 메일을 한통 썼고 시집을 읽었다. 그리고 ‘성전’이니 ‘대행자’니 ‘소드 마스터’니 하는 이상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판타지 소설을 읽어야했다. 이쯤 되면 새해 몇 달 동안의 내 앞날은 이미 정해 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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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04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모양이죠? 원하시는 결과를 얻기 바랍니다. 망구엘의 책에는 보르헤스의 그림자가 어려 있어서 그가 희대의 행운아인 듯싶다가고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반딧불이 2012-01-04 17:34   좋아요 0 | URL
네 후와님. 어쩌다보니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장르소설 검토하는 일을 하게되었어요. 팔자에 없는 로맨스소설들을 원도 한도 없이 읽게 되네요.

저는 망구엘의 글을 처음 읽는데 글을 참 잘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얼핏보면 쉬운것 같은데 씹을수록 맛이 나는 글이네요.

쉽싸리 2012-01-04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는 놓여난 덕분?인지는 몰라도 중간에 흥미가 반감되거나, 번역이 어렵거나 하면 읽다가 마는 경우가 부쩍 늘은것 같아요. 물론 보르헤스 같은 믿음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구요. ^^

새해 좋은일 많이 만드시길 바랄께요...

반딧불이 2012-01-04 17:38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뵈요. 쉽싸리님. 새해 내내 평안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저는 이제 흥미없는 글, 번역이 어려워 이해 안되는 글. 이런책 이제 그만 보려고해요. 이런책보다 흥미있는글 재미있는 글, 쉬운 글을 읽는 것이 훨씬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새해에도 좋은 글 보여주세요.

맥거핀 2012-01-0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는 어떤 느낌이셨는지 모르지만) 산에 다녀오고, 메일을 공들여 쓰고, 시집을 읽고,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도 꽤 괜찮아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주일의 거의 대부분은 하루에 반을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나머지 시간들에는 영화관 스크린 앞에 앉아있었던 듯 합니다. 저보다는 그래도 나아 보이지 않나요..그래서 가끔 눈을 너무 혹사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저도 책을 좀 보고 그래야 하는데, 못보고 쌓아둔 책이 너무 많아요. 한두챕터 읽고 던져둔 책도 많구요. 보르헤스처럼 저나 반딧불이님이나 좋은 책을 많이 만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반딧불이 2012-01-04 20:22   좋아요 0 | URL
하하..맥거핀님. 이거 뭐 도토리 키재기 하시는것도 아니구...
저도 컴퓨터 앞에 있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컴으로 메일쓰고 파일로 된 판타지 소설 읽고...저도 하루중 컴퓨터앞에 매달려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요. 급격히 시력이 떨어진 이유가 바로 컴퓨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누가 더 나은 시간을 보내는지 맥거핀님과 경쟁하고 싶지 않아요. ㅋㅋ 좋은 책 읽으시고 좋은 영화 보시고 같이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