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탕티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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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의 관찰 -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에 대하여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헤겔은 역사 자체를 사유하면서 인류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의 법칙과 원리를 내세웠다. 즉 인간의 이성이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며 이 법칙이 지향하는 바는 절대정신이 현실적으로 외화된 ‘자유(국가)’였다. 이러한 헤겔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역사도 당연히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는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며 과거를 줄 세워 현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헤겔과는 달리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관통하는 법칙이나 체계를 부정한다. 이것은 역사철학을 부정하는 것이고 헤겔을 부정하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철학을 ‘가장 훌륭하게 정리되었다고 하더라도 세계문화사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역사를 종속적 통합의 철학과 달리 대등한 것들의 통합으로 본 부르크하르트는 유럽지역을 중심으로 한 오천년 역사를 관찰하면서 ‘우연에 속하는 사유과정’을 결합시킨다. 또 역사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법칙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문화, 예술, 전쟁, 테러 등 여러 영역의 정신세계에서 역사적인 것을 탐구한다. 이렇게 세계역사를 탐구하면서 부르크하르트가 내세운 역사적 관점은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바라본 직선적 역사관과는 달리 저자가 주장하듯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적 역사관으로 보여 진다.
또 그는 ‘국가’와 ‘종교’, ‘문화’를 그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즉 문화가 국가, 종교에 제약받던 시기, 국가가 문화 종교에 제약 받던 시기, 종교가 문화 국가에 제약받던 시기 등 6가지 관점으로 고찰하고 있다. 문화가 국가와 종교를 위해 봉사한 시기도 있었고, 종교가 국가의 힘을 빌어서야 종교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종교개혁의 시기도 있었다. 종교와 국가는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가 어려울 만큼 밀착되어 있다.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위대한 개인’들이 출현한다. 국가와 종교는 각기 정치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구의 표현이며 문화란 물질적 삶을 후원하기 위해 또 정신적, 도덕적 삶의 표현으로서 임의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말한다. 문화는 항상 움직이는 것, 자유로운 것의 세계로서 억지로 타당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가, 종교와는 다른 점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잠재력들 중 어느 하나가 우선한다기보다 서로를 제약하고 영향을 주면서 뒤섞이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등장하는 ‘위대한 개인’은 당시의 시대와 환경에서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특정한 위업이 이루어졌고, ‘그’가 아니었다면 그런 위업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 ‘그’가 없이는 세계가 불완전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잠재력들이 천천히, 지속적으로, 차례로 또 한꺼번에 작용하는 것이라면 보다 빠르게 얽히는 침입, 전쟁, 테러 등 역사적 위기들도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러한 폭력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원시적인 위기로 분류한 곤궁에서 생겨난 이동이나 침입, 대규모 정복 여행 등에 대해 ‘문화능력이 있는 젊은 민족이 오래된 문화민족을 침입할 경우 젊어지는 과정이 되는 것’으로 이러한 침입은 낙관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그는 전쟁 역시 ‘더욱 높은 발전의 필연적인 계기’라고 전제한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나 ‘대립이 모든 생성의 원인’이라는 라자울크스의 말을 빌려 힘들의 대립에서 비로소 화합이 생기며 전쟁은 거룩한 것이라고, 자연전체에 존재하는 세계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 그는 전쟁은 모든 삶과 소유를 단 하나의 순간적인 목적 아래 종속시키며 개인의 단순하고 강력한 이기주의보다 도덕적으로 엄청나게 높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 전쟁만이 인간에게 보편성 아래 보편적으로 복종하는 위대한 모습을 허용한다는 저자의 말은 마치 전쟁예찬론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가 말하는 전쟁은 명예롭게, 존재 전체를 걸고 싸우는 진짜전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영국의 장미전쟁이나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가짜 위기였고 게르만의 민족이동은 진짜위기라고 한다. 새로운 물질적인 힘이 낡은 힘과 함께 녹아들어서 정신적 변태과정 곧 국가(로마제국)가 교회(카톨릭교회)로 되는 변태과정을 거쳐 계속 살아남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는 미리 잘라낼 수도 없는 것이고 엄청난 번식력을 가진 젊은 민족들이 사람이 적은 남쪽 나라들을 차지하려고 몰려든 일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생리적 평준화라고 한다.
대체할 수 없는 극소수의 사람인 위대한 사람은 모든 민족이나 문화 전체 심지어는 인류전체와 관계된 것을 지향하는 사람, 어마어마한 지적인 힘이나 도덕적인 힘을 가진 사람만이 유일하고도 대체할 수 없는 위대한 개인이다. 저자는 어떤 한 인물을 콕 집어내어 말하기보다 개인의 범주를 벗어나 인류의 보편성에 다가간 사람을 ‘위대한 개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위대한 개인'과 헤겔의 '세계사적 개인'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헤겔의 '세계사적 개인'은 보편적인 것들이 특이한 것을 향해 집결되는 것이고, 부르크하르트의 '위대한 개인'은 개별적인 것들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추출해낸 개념인듯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개념정의를 눈여겨보았다. 그의 정의 안에서 저자의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저자는 세계역사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것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전제하고 있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은 완벽한 세계사에 대한 기술이지만 전제를 떠올리면 또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역사를 기술하면서 어떤 역사방법론을 쓰더라도 세계의 모든 것을 기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기술하는 매체인 ‘언어’의 문제는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때때로 저자의 개념이 말하는 바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는 다른듯해서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진짜 전쟁이란 전 존재를 걸고 싸우는 것인데 테러와의 전쟁이니 범죄와의 전쟁이니 무형의 어떤 대상을 만들어서 전쟁을 벌이는 지금의 우리 모습들에서 과연 진짜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또 책의 제목이 『세계 역사의 관찰』이고 한두 번쯤 징키스칸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유럽의 역사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세계 역사의 관찰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런 의문과 회의 속에서도 저자가 역사와 함께 문학과 미술을 공부한 때문인지 시문학을 역사보다 우위에 둔 것이나, 1장과 6장의 내용들은 되새김질 하고 싶은 내용들이 많았다.
젊은 니체가 커다란 즐거움을 가지고 부르크하르트의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 내용이 옮긴이의 말에 나온다. 니체가 영향을 받았을 만한 부분들은 니체를 읽으면서 확인해봐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