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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창비시선 40
곽재구 지음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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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뻐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시를 쓰는 꿈을 꾼 적이 있는가? 그것도 최소 3회를 연작으로 시쓰는 꿈을 꾼 적 있는가? 솔직히 말하자. 나는 없다. 몇 번 꿈 속에서 시를 받아 적은 적은 있다. 그러나 세 번을 연이어 같은 내용의 꿈을 꾼 적은 맹세코 없다. 꿈속의 시는 얼마나 아름답고 힘이 있고 절절하던가? 그러나 깨고나면 시는 '나 잡아봐라~' 는 슬로우 비디오처럼 생각 속을 날아다닐 뿐 단 한 줄도 잡히지 않는다.
꿈 속에서 시인을 만난 적도 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계신 분도 있다. 전날 그분들의 시를 읽었던 것도 아니어서 깨고나면 꿈을 더듬으며 의미를 생각해보곤 한다. 시에 끄달리면서도 엉뚱한 데 한눈 팔고 있는 무의식의 발로려니 여긴다.
곽재구 시인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이며 시적 자질에 대해 물을 때 저 질문을 한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큰 시인이 될거라고 열심히 쓰라고 한단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라는 얘기겠지. 저 기준이라면 난 시인이 되기는 글렀다.
​그런데 연작 꿈이 가능한가? 결정적인 순간에 꿈에서 깨면 아쉬움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계속 꿈을 꾸어보려고 애쓴 적도 있다. 한두번 잘렸던 꿈이 연결되기도 했던 것 같다. 매순간, 그러니까 하루 86400초를 온통 시 생각에 젖어있기를 10년쯤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루 열편씩 천일 동안 천편의 시를 쓴다면 그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86400초니 1000편이니 하는 양적이 문제는 아니니라.
곽재구 시인은 1981년, 전남대 4학년 재학중일때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1980년대를 흔히들 '전두환과 노태우의 시대', '시의 시대'라고 부른다. 백골단이 군화발로 우루루 달려 들어와 강의실에 사과탄을 던지던 시대, 눈물 콧물 기침으로 범벅이 되어 뛰쳐나오는 학생들을 운동장에 꿇어 앉히고 막무가내로 후려치며 지명수배자를 찾아내던 시대. 당시 '오월'은 금기어였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 시인은 이창동, 김진경, 고광헌, 이영진 등과 함께 '오월시 동인'이었다. 금기어를 동인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내 건 것도, 당시의 동인들이 모두 문화 각 영역에서 자기몫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조차 하다. 김춘수, 강은교 등이 모더니즘의 시를 쓰던 시대에 이들은 리얼리즘의 시를 썼다. 특히 곽재구 시인의 시 <박득세>, <김득구>, <조경님> 등은 청소부, 권투선수, 버스 안내양의 실명이고, 유곽촌이었던 '대인동'이라는 지명을 제목으로한 연작 <대인동> 시리즈에는 시인에 의해 비로소 빛나는 하층민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1983년 초판본이 인쇄된 80년대의 시 『사평역에서』가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시대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나 또 같은 상황이라는 맥락 때문일 것이다. 3,40년 전의 시에서 한 시인이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시대를 얼마나 넓고 깊게 사랑했는가, 셀로판지 처럼 얇고 투명한 서정으로 폭압의 시대를 어떻게 건너왔는가를 살피는 기회였다.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또 얼마나 멀리있는가.
지옥여행으로 바뀌어버린 수학여행, 바늘구멍도 아닌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총리 후보들, 말년 병장의 총기난사, 일본 자위대의 활동폭 확대 등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다. 어느 시인은 사람이 희망이라고 했지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람이 사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시대는 여전하다.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광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송이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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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유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89
이재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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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는 그만이 쓸 수 있는 시가 있는 듯하다. 랜드 마크처럼 시인을 대표하는 시가 시인마다 있다. 정지용 하면 ‘향수’가 떠오르고, 김소월의 이름은 자동적으로 ‘진달래꽃’을 불러오고 서정주 하면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구절이 저절로 시작되면서 ‘자화상’이라는 제목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시인은 이상하다. 이재무 하고 부르면 나는 가장 먼저 ‘밥’ 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위대한 식사’라는 시 때문일까? 얼마 전 펴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이라는 산문집 제목 때문일까?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부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 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는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카맣게 몰려 오늘 풀벌레 울음

베어 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뜨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 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시골의 저녁식사 풍경이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깃불을 곁에 두고 멍석 위의 두리반에 모여 앉은 가족들. 반찬은 우렁된장찌게, 풋고추, 물김치가 전부다. 기름기 없는 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트림 몇 번으로 꺼지는 것으로 보아 밥은 보리밥이었을 게다. 물김치는 열무김치가 어울리겠다. 냇가에서 하루 종일 물장난 치며 놀다 잡아온 우렁으로 막 된장찌개를 끓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장이 반찬이라 모두들 말없는 가운데 수저질만 분주하다. 고기냄새는 명절 때나 간신히 맡을 수 있을 뿐 푸성귀뿐인 풍경을 그려내며 시인은 ‘위대한 식사’라 부르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에 온 가족의 노동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일까? 사발의 이가 빠지듯 그 때의 가족들이 듬성듬성 사라진 지금 온가족이 모여 앉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물김치에 뜨는 별, 풀벌레 울음소리가 맛을 더해주던 그 정경 때문일까? 지금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기 때문일까? 허청, 모깃불, 멍석, 사립 같은 어휘들이 잘 버무려져 투박한 듯 하면서도 정겹고, 사람냄새 가족냄새가 나는 시다. 그의 시어들은 도회적이고 세련된 시어들보다 이렇게 사투리와 투박한 단어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이 시에서 힘을 얻는다.  


장갑들



벙어리장갑으로 하늘의 눈 자주 불러 내렸지
하루가 노루 꼬리만큼 짧았지

털장갑 때문에 외출할 일 많았지
읍내 빵집과 만두집이 깻잎 머리와 상고머리로 붐볐지

가죽장갑만 끼면 까닭 없이 배짱 두둑해져
차부 앞이나 극장 뒷골목 단물 빠진 껌 질겅질겅 씹다가
잇새로 찍, 침 뱉고 휘파람 불어대며 뜨거운 피 식히곤 했지

오늘은 빨간색 페인트로 코팅된 목장갑 끼고
입술 담배 연기 내뿜으며 일터에 가고 있지
콜타르처럼 끈적끈적, 목에 잠긴 가래 긁어 뱉으며
 


가죽장갑하나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우쭐대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차부 앞이나 극장 뒷골목 단물 빠진 껌 질겅질겅 씹다가/잇새로 찍, 침 뱉고 휘파람 불어대’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시인과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어떤 영화배우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다. 배우에게 그것은 연기이지만 시인에겐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이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땡깡을 부리거나 깡짜를 놓거나 어깃장을 놓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야단치거나 때려주거나 하지 못하고 왠지 다 받아주어야만 할 것 같다. 
 


술이나 빚어볼거나




올가을엔 만사 제치고

내 고향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 가서

철없던 유년 소풍 갔다가 보물찾기로 받은

호루라기 종일 불다가 잃은 뒤로

빛과 색 더욱 무성해진 풀밭에 빈 항아리로 누워

산그늘 덮고 한 달포 자다 깨다 하면서

저 잘난 세월에 농이나 걸까

그러다 여우비 내리걸랑 고스란히 아껴두었다

한량 같은 구름 몇 살 오른 별 몇

동동, 동치미처럼 띄워놓고

산달 앞둔 여자 둥근 배 같은 달도 푹 담가 띄우고

떼로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삼태기로 쓸어 담아

꾹꾹 눌러 쟁이고

오명가명 수박씨인 양 툭툭,

내뱉는 누룩 내 나는 사투리도 몇

함께 절여서 도수 높은 술이나 빚어볼거나

명리에 밝은 샌님들 불러들여

인사불성 될 때까지 대작할거나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볼만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김사인의 시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남자가 되어>는 그 질탕함에서 이보다는 한 수 위다. 김사인의 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나도 그 앞에 퍼질러 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러나 이재무의 시는 잘 다독거려 달래면 곧 착한 사내로 다시 돌아올 것 같다. 그래서인지 미워 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가끔 땡깡을 부리던 시인이 정색하고 이런 시도 쓴다.



펜에 대하여



마른 땅 파 들어가는 삽이여,

묵은 논 갈아엎는 쟁기여,

고랑 타고 앉아 풀매는 호미여,

돌멩이에 날(刀) 찍혀 우는 쇠스랑이여,

이마에 한 톨 두 톨 돋는 땀이여,

경작의 노고보다 헐한 소출이여,
 


시력 30년이다. 30년 동안 시집, 수필집, 시평집, 공저 등을 모두 합쳐 15권 남짓이다. 쉬지 않고 시를 써온 세월과 노고에 비하면 결코 넉넉한 작황이라 할 수 없다. 그의 말대로 ‘경작의 노고보다’ 턱도 없이 헐한 소출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땅을 일구지 않고 언어의 밭을 가꾸었으니.



불의 지청구



배화교도 되어 타오르는 불 숭배한 적 있다

주황빛 속에 청색의 손 적시며 축축한 생각

꼬들꼬들 말리다 보면 영혼의 동굴 안쪽에까지

비단실 같은 빛 새어 들어오곤 하였다

온갖 잡념의 비린 생선 던질 때마다

불은 고양이의 혀 되어 날름 삼키곤 했다

생의 궁극은 완전한 소진에 있는 것

화구 앞에서 생의 완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씨름 기술이 부족한 사람

번번이 샅바 놓쳐 허둥지둥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지만

아직 시간의 끈 놓아서는 안 된다

타다 만 흔적처럼 추한 것 어디 있으랴

불 속에 덜 마른 아집의 생목 한 짐 던져 넣으니

검붉은 손톱 불쑥 나타나 눈 찌르고 얼굴 할퀸다

불의 지청구 달게 받은 뒤

자세를 고쳐 앉아 젖은 신발 벗어 말린다
 


아무리 소출이 적어도 또 돈이 되지 않아도 그만 둘 수 없다. 어차피 시인은 경작의 기술도, 씨름 기술도 없다. ‘시간의 끈’ 놓을 수 없다. ‘타다 만 흔적’보다 추한 것 없으니 ‘불의 지청구’들으면서 신발 말리는 동안 잠시 쉬어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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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06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간에 밥과 술 얘기라니... 늘어가는 살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요ㅋㅋ^^

반딧불이 2011-04-06 11:15   좋아요 0 | URL
괜히 엄살 부리시는거죠? 후와님은 이런 글을 읽었다고 해서 밥이나 술이 당기지도 않을 뿐더러 살집이 넉넉한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건가요?

비로그인 2011-04-06 12:55   좋아요 0 | URL
음, 최소한 마른 체형은 아닙니다. 그 이상은.... 비밀임닷!ㅋㅋ^^

양철나무꾼 2011-04-07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재무의 시는 잘 다독거려 달래면 곧 착한 사내로 다시 돌아올 것 같군요...
전 김사인의 시들이 너무 단정해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말이죠~^^


반딧불이 2011-04-07 23:46   좋아요 0 | URL
단정하기로 말하면 덜 단정한 까닭에 사람냄새가 나는거 아닐까해요. 때묻지 않은 시골총각같다고 해야할까요. 김사인의 시는 모두지 빈틈이 없잖습니까.

루쉰P 2011-04-0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쪽은 워낙 읽는 것도 잼병이고, 잘 보지를 않아서요. 이렇게 반딧불이님이 올려주신 시를 감상하고 가요. '펜에 대하여'란 시는 참 너무 좋네요. ^^ 단어를 맛깔나게 저렇게 쓰는 힘들은 어디서 나오시는 건지 감탄만 하고 가요.

반딧불이 2011-04-07 23:4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마음에 와 닿는 시 위주로 봐요. 안읽히는 시들도 많고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시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오가며 귀동냥 눈동냥 한 것들에 기대어 시집을 더러 찾아보기도 하고 그러는거죠. 뭐.

릴케 현상 2011-04-18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랜만에 들어왔네요^^ 마감이라 밤새는 중 ㅜㅜ

반딧불이 2011-04-18 10:5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어디 멀리 가신줄 알았습니다. 별일 없으시죠? 밤새워 쓰시는 원고가 궁금해지는데요. 곧 볼 수 있겠죠.
 
고요로의 초대 민음의 시 171
조정권 지음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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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獨樂堂)


독락당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시집 『산정묘지』에 실려 있는 시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참으로 독한 시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시인이 깊이 은거할 것 같은 예감과 시집에 실려 있는 ‘산정묘지’ 연작들이 마치 그 은거에 필요한 주문처럼 느껴졌었다.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리고, 맑은 달빛을 마주 하며 홀로 즐기는 집에 거한 이. 그것은 이름처럼 즐거운 집이 아니라 외롭고 쓸쓸한 고행을 달게 견디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시인의 새 시집 『 고요로의 초대』를 읽으면서 그 때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은둔지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독락당’이 ‘은든지’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그곳은 ‘외로움의 성전’이 되었다. 시인은 그곳에서 스스로 교주이면서 스스로 신도이다. 그가 교주로서, 신도로서 읽고 쓰는 것은 오로지 詩라는 성전. 그는 쓸수록 허기지는 말=시를 새겼고, 새기고, 새길 것이다. ‘독락당’이면서 ‘은둔지’이고 또한 ‘외로움의 성전’이기도한 이곳에서 시인은 교주이면서 신도이듯이, 실체이면서 그림자이고, 초대하는 자이면서 초대받는 자다. 아무도 없는, 시인이 혼자 거하는 이곳은 고요한 장소다. 아니 고요 그 자체다.



고요로의 초대



잔디는 그냥 밝고 마당으로 들어오세요 열쇠는 현관문 손잡이 위쪽
담쟁이넝쿨로 덮인 돌벽 틈새를 더듬어 보시구요 키를 꽂기 전 조그맣게 노크하셔야합니다 적막이 옷매무새라도 고치고 마중 나올 수 있게
대접할 만한 건 없지만 벽난로 옆을 보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작이 보일 거예요 그 옆에는
낡았지만 아주 오래된 흔들의자
찬장에는 옛 그리스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
달빛과 모기와 먼지들이 소찬을 벌인 지도 오래 되었답니다
방마다 문을, 커튼을,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쉬세요 쉬세요 쉬세요 이 집에서는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도 손님이랍니다
많은 집에 초대를 해봤지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나를
하인처럼 정중하게 마중 나가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무거운 머리는 이리 주시고요
그 헐벗은 두 손도



시를 가만히 읽고 있으면 화자는 고요 자체이다가 ‘초대하는 나’로 바뀌고 ‘무거운 머리’와 ‘헐벗은’두 손을 가진 ‘초대받는 나’로 등장한다. 중복되는 화자들, 그러나 그들은 각각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이다. 내게는 외롭고 쓸쓸한 고행을 달게 견디겠다는 뜻으로 읽히던 ‘독락당’이 비로소 홀로 즐기는 ‘독락당’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곳은 시인이 ‘대지가 갓 발행한 파릇한 풀잎을 붙이고/나도 모르는 곳으로 나를 발송해 버’(<우표에 대한 상처>)린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집 전체에 분열된 자아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 ‘왕벚꽃 온 사방에서 몰려와 내 눈을 염해 버린다.’(<벚꽃 하품>)에서 처럼 ‘염’한다는 단어들도 자주 등장한다. 시집을 덮고 나서도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시인의 각각의 모습들과 ‘염’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혀있다.  시집 곳곳을 배회하는 분열된 자아들이 다만 시적 전략이기를, '염'이라는 단어 역시 시인과 아직은 멀리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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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05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열된 자아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표현... 정말 시적이로군요.
'고요로의 초대'란 시집을 소개하는 문장으로는 딱이다 싶습니다^^

반딧불이 2011-03-05 13:05   좋아요 0 | URL
시를 너무 오랜만에 읽었더니 생면부지의 남의 집에 들거간것 같습디다. 제가 쓰고나서도 제가 쓴것 같지가 않아요. 후와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게도 분열된 자아가 있어 저도 모르게 그것이 쓴게 아닌가 싶어지네요.

양철나무꾼 2011-03-0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정묘지' 읽었던 것 같아요, '독락당'이 기억나는 걸 보면...
'고요로의 초대', 찾아 보겠어요~

자아를 관조하는 느낌의 페이퍼라 저도 수선 떨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요~^^

반딧불이 2011-03-05 18:36   좋아요 0 | URL
관조는요. 무슨...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인걸요.
나무꾼님 시도 많이 읽으시던데요. 새해엔 시를 좀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저는 잘 안되네요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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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가진 가족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지난여름 맨 처음 남동생을 시작으로 여동생과 그 남편에 이어 이제는 딸아이와 아들까지 모두 스마트폰 일색이다. 남편과 나만 그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내게는 전자제품 공해에 다름 아니다. 동영상을 찍어와 보라면 봐야하고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으면 그 설명을 들어줘야하고 불면증에 좋다는 어플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기도 했다. 최근 딸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 스머프가 나온다고 내게 양배추 키우는 게임을 시킨다. 내가 스머프를 좋아하는 건 거기 가가멜이 있기 때문이다. 스머프를 잡기위해 갖은 수를 다 쓰지만 똑똑한 스머프들 때문에 항상 골탕만 먹는 가가멜 말이다. 나는 가가멜을 보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양배추를 키우고 있다. 스머프들이 부지런한 것인지 속성양배추를 재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시 한 편 읽는 사이에 양배추는 이미 다 자라서 녹아내렸다. 그동안 내가 읽은 시는 표제작 <공양> 한 편 뿐인데 말이다. 
 


공양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소리, 향기, 슬픈 미동, 소낙비, 매미울음 등을 그 속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게, 넓이, 길이, 양으로 환산하고 있다. 그것도 미터법 사용의 의무화로 사용 금지된 재래식 계량 단위로. 이질적인 것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의미가 확장되는 것에 놀라워하다가, 시인의 천연덕스러운 솜씨에 감탄하다가 대체 누구를 위한 ‘공양’일까? 생각을 키워본다. 나는 기계문명에 몸과 영혼을 팔아버린 독자들을 위한 시인의 자연공양으로 읽기로 한다.

독자에게 이런 공양을 올린 시인에게 소원이 있다. 귀한 공양을 받았으니 무엇인들 아까울까. 그러나 <가을의 소원>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인의 소원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자연의 매트릭스’ 시대에 시인의 소원은 차라리 사치다.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봄도 아닌 여름도 아닌 겨울도 아닌 가을의 소원이라는 것에 곰곰 생각이 맴돈다. 빛 고운 단풍과 달고 향기로운 열매들로 넉넉한 계절이다. 내가 자동차 소리, 전화벨 소리, 전자제품 모터 돌아가는 소리 등등 모든 소리의 포로가 되어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수시로 시각을 확인하며 바쁘게 달렸던 건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내가 가을 논두렁에서 맡는 벼 익는 냄새가 세상 어떤 향수보다도 향기롭고 배부르다는 걸 안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시인은 ‘혼자 우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혼자 훌쩍이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이 방긋방긋 웃는 것이라도 되는 냥 남들 앞에서는 웃고 돌아서서는 뜨거운 것을 삼키며 살아왔다. 열네 살 때부터 시작된 내 소원은 목젖이 보일만큼 자지러지게 웃어보는 것이었다. 생의 가을이 된 지금도 그 소원은 여전하다. 그 배경이 햇빛 찬란한 가을날이면 더욱 좋겠다. 시인의 아름다운 소원과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나는 아프다. 왜 아름다운 것은 아픈 걸까? 왜 아픔은 아름답지 못할까?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지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몸이 아프면 가장 먼저 입맛이 달아난다. 먹어야 병이 도망간다고 하는데 밥알이 모래알처럼 깔끄럽다. 언젠가 몸살을 되게 앓고 있을 때, 완도가 고향인 시 쓰는 친구가 푸르스름한 전복죽과 간장게장을 먹였다. 끼적거리고 있는 내게 게의 등껍질을 벗겨 거기다 밥을 비벼 주었다. 짭쪼롬한 그 밥 몇 술을 뜨고 입맛이 돌아왔었다. 그때 내 입맛을 돌려준 것이 알을 가득 품고 있었던 어미의 마음이었을까. 간장이 서서히 몸을 적셔올 때 짜고 매운 맛은 모두 자기 몸으로 받으며 어둠만을 알에게 전해주면서 하는 말 ‘저녁이야/불 끄고 잘 시간이야’ 이런 어미의 마음이 내 위장으로 스며들었던 걸까? 입맛은 되찾았지만 다시 게장을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시집의 2부에 언어로 차려놓은 음식상은 맛깔스럽다. ‘펌프 주둥이로 빠져나오는/통통한 물줄기를 잘라서/양동이에 띄워놓은 것 같’은 오이로 만든 물외냉국, ‘여인의 속곳 헹군 강물을 동이로 퍼’낸 것 같다는 안동식혜,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같은 매생이국.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시집을 펼칠 때마다 먹는다. 내 생애 없는 호사다. 안방까지 배달되는 전 지구적 먹거리는 잠시 밀어놓는다.

그러다가 문득 눈보라를 헤치며 오는 백석을 본다. 아마도 시인은 백석이 차려 준 북방의 음식에 대한 답례로 이 음식을 차렸는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군불로 따끈해진 아랫목에 두 시인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서로 권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창호지 문살에 비치는 두 그림자가 정겹고 아름답다. 나는 이 아름다운 정경 앞에서 다시 아프다. 모든 그리운 것은 멀리 있나니 내 소원이 멀고 백석은 더 멀다. 왜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픈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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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1-0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마트폰을 잘 다루는 능력보다 시를 읽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욕심나는 걸 보면 저도 스마트하긴 다 그른 모양입니다 ㅎㅎ
새해에도 늘 건강하고 평안한 하루하루 보내시고, 좋은 글을 통해 제게도 공감의 능력을 나누어주시길... 늘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1-01-01 23:23   좋아요 0 | URL
새해 첫 댓글이 후와님이시군요. 이거 아주 좋은 느낌인걸요.

모두가 다 스마트한 세상에서는 저희같은(공감하실지 모르겠지만)이가 있는게 세상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만약 스마트폰에서 후와님 글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면 당장 바꾸겠습니다. 저도 늘 고맙습니다.

cyrus 2011-01-02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곧 스마트폰을 사려고 하고 있는데,, 과연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도 약간 기계치가 있거든요. 마지막에 간장게장에 대한 시를 보면서
방금 살짝 허기가 느껴졌네요, 그러고보니 재미있게도 반딧불이님이 읽으신
안도현 시인의 시집이 백석문학상 수상작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11-01-03 01:29   좋아요 0 | URL
한두달 적응하시면 되겠죠. 저도 일부러 버티고 있는건 아니구요. 핸드폰 수명이 다하면 바꾸려고해요.

이 시집이 백석문학상 수상작이던가요? 저는 몰랐네요. 고맙습니다. 늘.
 
죽편
서정춘 지음 / 동학사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추석 나흘 전이 시아버님 제사다. 음식을 한꺼번에 할 수가 없어서 늘 두 번씩 장을 보고 상을 차리곤 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사 때는 5800원하던 파 한 단 값이 추석이 가까워오자 6900원으로 올랐다. 하늘은 땅을 파버리려는 듯 비를 퍼부었고 추석은 다가왔다. 마트의 야채담당 아저씨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농작물이 다 녹아내린 탓이라고, 파는 사람도 괴롭다고 투덜거린다. 농사는 참혹하고 소비자는 울상이다.

내 한해 글 농사도 형편없다. 누군가 가끔씩이나마 따뜻한 햇볕 같은 눈길을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글 농사의 흉내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보다 더 흉악한 작황을 거둔 시인을 만났다. 시집은 오랜 가뭄에 들었든 듯 얄팍하고 시는 햇빛을 못 본 실과처럼 살이 없다. 평소에 6,70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들을 읽다가 그것의 절반 분량의 시가 실려 있는 딱딱한 하드커버의 이 시집을 보니 뭔가 밑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시인의 말을 대하니 가슴이 탁 막힌다.  


 아 나의 농사는 참혹 하구나
 

흑!
흑!

1968년에 데뷔하여 28년만인 1996년 첫 시집을 냈다. 시집의 이름은 『죽편』이다. 울음소리인 듯한 ‘흑’이 내 눈에는 ‘흙’으로 읽히고 옆에 붙어있는 느낌표가 빗줄기처럼 느껴진다. 올해 농사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망쳤지만 시인의 시 농사에는 촉촉한 비와 따가운 햇살이 함께해서 향기로운 시의 열매를 맺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나의 이런 바람과는 별개로 시집에 실린 시들은 호두알처럼 단단하다.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표제작인 「죽편」역시 5행에 불과한 짧은 시다. 



竹篇 1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대나무의 마디마디를 ‘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로 형상화한 이 짧은 시를 소리 내어 읽다보면 대나무 숲이 보이고 오죽을 만지는 듯 단단함과 매끄러움이 느껴진다. 그리곤 남은 여백을 읽어야할 것만 같아 다음페이지로 시선이 옮겨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참혹한 농사가 가슴 아프지 않다. 그동안 읽었던 시집들의 시가 너무 많았다는 생각도 설핏 든다.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시, 열 여자를 만나면

시, 아홉 여자가 나를 버렸다

시, 한 여자도 곧 나를 버릴 것이다

 

충족감보다는 결핍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하지만 버린 사람은 오히려 시인이 아닐까. 한 가마니 모래알을 쏟아놓고 사금 알갱이 하나를 골라내는 듯 언어를 고르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시집 『귀』에도 역시 35편의 시가 실렸다. 책은 첫 번째 시집보다 가로의 길이가 3cm쯤 넓어졌다. 이 말은 그만큼 독자가 채워야할 여백이 많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표제작인 「귀」는 하이쿠보다 조금 더 길 뿐이다.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네 번째 시집 역시 단 한 편의 덤도 없이(덤이라는 말이 너무 경박하지만) 딱 서른다섯 편의 시가 실렸다. 아니 서른다섯 편을 실었다. 내게는 없는 두 번째 시집 역시 같은 분량의 시가 실렸을 것이다.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짓거리 마다가 짜고 짧다

아서라

마서라에

쩔쩔 맺으므로

 

가장 적은 언어로 가장 많은 말을 하고자 한 시인의 의지 혹은 언어의 경제학이 읽히는 말이다. 시인이 시집을 낼 때마다 일반 시집 분량의 딱 절반 분량만을 실었다면 어떤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시인은 그의 시집을 통해 요즈음 나오는 한 권의 시집에 실린 시가 너무 많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가 필요 이상으로 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네 번째 시집의 제목인 '물방울은 즐겁다'는 '빨랫줄'이라는 시의 한 행이다.  그나마 좀 긴 시다.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바람 맑고 햇빛 찬란한 날은 기다란 빨랫줄에 풀먹인 이불 호청이나 널어 마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할줄 모르는  나같은 범부는 바람이 옷벗는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김광균이었던가, 겨울밤 눈내리는 소리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었던 시인이?   바람이 옷 벗는 소리를 빨랫줄에 걸어놓은 시인 때문에 이불 호청 타령은 접어두고  바람의 옷이나 걷어야할 듯 싶다. 
 

 
몰두


 
몰두를 보았어요

음머 하고 소가 울어서

소가죽을 뚫느라

피눈물을 흘리는

진드기 보았어요

보다가 보았을 땐

진드기 모가지가 떨어졌어요

참으로 끔찍한 시다. 집중이니 몰두니 하는 단어들을 종종 쓰는 나는 갑자기 몰두라는 단어가 무서워졌다. 몰두를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구나 싶어서. 나는 진드기만도 못했구나 싶어서. 시인의 시들을 읽노라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 시라고 했던 공자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시인이 금싸라기같은 낱말만을 골라 쓰고 넉넉하게 남겨둔 여백은 사특함을 씻어내기 위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말'이 시집의 내용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시집을 만나고 나서 야문  호두알 두어 개를 가슴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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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9-2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문호두알처럼 야문 글이에요~.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걸까요????
점점 뭔가를 해야 하는데,,,하는 악박감을 느끼지만 정작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게,,,

반딧불이님 맏며느리세요???
명절 근처에 제사가 있는 심정 저 알아요.
저희가 종가집이라 제 친정어머니도 매달 제사상을 차리셨는데 명절이 있는 달은 두세번은 되었던듯요.
철부지라 엄마 도와드리는건 부침개가 고작이었지만 것도 생색을 내면서요,,ㅎㅎ

참! 이번주에 서울가서 영화를 보려고 하는데 혹시 님 시간 되시면 같이 볼까요???

반딧불이 2010-09-28 12:30   좋아요 0 | URL
ㅎㅎ 점점점님. 저 지금 데이트 신청받은거 맞죠? 마음 주고 있던 남자한테서 데이트 신청받은것처럼 즐거워요.~

입큰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보실거죠? 30일날 개봉하는...
근데 어쩌죠. 지난주에 동생이 '시라노'어쩌구하는 영화를 보여줬는데 제가 시간만 낭비했다고 투덜거렸더니 일요일에 또 예매를 해놨다네요.

라로 2010-09-29 10:51   좋아요 0 | URL
글쿠나,,,,그럼 다음 기회에~~(눈물을 머금으면서,,,땅을치며 돌아간다..뚜벅뚜벅,,쳐진 어깨를 하고서,,,ㅜㅜ)

반딧불이 2010-09-29 12:10   좋아요 0 | URL
ㅎㅎ 참 어울리지 않는 자세에요. 나비처럼 가비얍게 돌아가시와요~

비로그인 2010-09-2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혹한 농사라는 시편들이 이 정도고, 참혹한 글쓰기라는 시평이 이 정도라면...
감히 겁나서 풍작을 기원하지 못하겠네요 ㅋㅋ
시와 시평이 서로 잘 어울립니다^^

반딧불이 2010-09-28 21:01   좋아요 0 | URL
겁내지 마시고 기원해 주세요. 꿍쳐둔 농사가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ㅋㅋ


양철나무꾼 2010-09-28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추석 끝무렵 대파 한단을 8900원 주고 샀어요.
파를 뺄까 하다가 요리도 못하는데,
파마저 빼면 정말 못 먹어줄 것 같아서,꾸역꾸역 사들고 왔어요.

전 이런 시를 쓰는 사람으로 김사인이랑,누구더라 '작침'을 쓴 그 사람만 생각했었거든요.
시도,님의 리뷰도 참 좋네요~^^

반딧불이 2010-09-28 21:02   좋아요 0 | URL
아이고 나무꾼님 계시는 곳이 어디시길래..?
근데 파가 물을 하도 먹어서 넣어도 맛이 안나던걸요.

이대흠 시인 말씀이시군요. 고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9-2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을 맞아 시를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는데, 가열찬 읾을 더하시는군요^^
정현종 시인의 시집을 꺼내봅니다. <갈증이며 샘물인>. '너'만이 갈증이며 샘물은 아니겠죠? 우선 '너'의 정체라도 알아야 해서 꺼내 읽어 봅니다.
가열참을 더해주는 리뷰 고맙습니다.

반딧불이 2010-09-28 21:04   좋아요 0 | URL
닥나무님 시 리뷰도 가끔 올려주셔요. 제에게는 닥나무님 리뷰가 갈증이며 샘물인 '너'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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