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라딘에서 영화할인 카드를 구입했다. 영화비 50% 할인에다 일 년 내내 무제한이라고 해서 게으른 나도 최소한 1년에 두 번은 갈 수 있을 테니 밑져야 본전이다 싶었다. 카드는 사 두었는데 별로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한 달 가까이 책상서랍 속에 얌전히 모셔 두었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화제다. <하녀>, <시> 등. 본 사람들의 평도 모두 제각각이다. 특히 <시>에 대해서는 나도 한마디 보태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겨났다. 화요일엔 씨너스 강남에서 <하녀>를, 수요일엔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시>를 봤다. 내 평생 이틀 연속 영화를 보기는 처음이다. 씨너스 강남은 주차장을 못 찾아 헤매다가 상영시간이 임박해 근처 유료주차장에 차를 넣었더니 주차비가 영화비보다 더 나왔다. 할인카드 가 무슨 소용이람.
코엑스에 갈 때는 아예 차를 두고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일찌감치 정류장에 가서 버스노선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삼성동 가는 버스가 안 보인다. 옆 사람한테 물어보니 다른 정류장에 가서 타야한다며 버스 번호까지 가르쳐준다. 부지런히 가서 노선표를 확인했다. 안심하고 버스를 탔는데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기사한테 물어보니 1월부터 노선이 바뀌었단다. 일단 내렸는데 버스노선을 몰라 택시를 타고 그래도 20분전에 도착을 했다. 택시비로 2800원 지불했다. 무비바로로 예약한 예매권을 발권 받으려고 하니 무인발권기에서 전화번호나 생일을 입력하라고 한다. 내 전화번호 생일을 몇 번씩 집어넣어도 잘못된 예매번호라고 나온다. 무인 발권기를 포기하고 창구에 가서 일단 줄은 섰는데 평일 한낮인데도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도저히 시간 내에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할 수 없이 무비바로에 전화를 해서 예약한 사람의 전화번호 뒷자리나 생일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사생활보호 어쩌구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찌어찌 발권을 받았다.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열은 열대로 받고....... 영화마저 날 실망시키면 카드 잘라 버리려고 했다. <시>가 영화할인카드를 살렸다.
물 흐르는 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화면이 열리면 카메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기다란 다리가 화면을 가로지르며 가득 채우고 나면 카메라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거기 몇몇 사내아이들이 풀밭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 중의 한 아이는 뭔가를 찾지도 못하고 찾는 일에 그다지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풀숲을 뒤지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아이는 멀리 하늘, 산, 그리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거기 무언가 희끗한 것이 떠내려 오면서 점점 클로즈업된다. 점점 커져 종아리가 드러난 여자아이의 시체라는 것이 확인될 즈음, 시체의 머리 곁에 ‘시’라는 영화의 제목이 ‘뜬금없이’ 뜬다. 시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찾고 있는 것에서 한발 비껴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 하늘, 산, 강물 등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시다.
주인공 양미자씨는 66세의 알츠하이머(치매) 환자다. 처음에는 명사가 생각이 나지 않다가 차츰 동사까지 잊어버리게 된단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나이를 헛갈려 하고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지갑을 찾으며 지갑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린다. 시란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이 계량화 되어 숫자로 표기되는 과학화된 세계, 모든 것의 가치척도로 사용되는 돈. 명사로 표명되는 앎의 세계. 이 모든 것을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시다.
미자씨는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씻기고 집안청소를 한다. 그 대가로 받는 수고비(4만 원-시 한편의 고료와 같다)가 그녀의 생활비이고 용돈이다. 가끔 노인은 팁으로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미자씨는 말하지 말라는 말까지 다 옮긴다. 그리고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한다. 한 여학생이 강물에 뛰어들어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 이것이 시다. 말하지 말라는 말까지 다 옮길 만큼 거짓되지 않은 것. 돈벌이에 바빠 귀담아 듣는 사람 하나 없는 이야기를 혼자 떠드는 것. 이것이 시다.
죽은 여학생에 대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미자씨는 그 사건에 자기의 손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하고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가해자의 아버지들은 수시로 모이고 거기에 미자씨도 불려간다. 그들과 밥이나 술을 같이하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는 미자씨. 서둘러 밖으로 나와 맨드라미꽃에서 고통의 색을 본다. 이것이 시다.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자들과 말을 섞지 않는 것. 붉은 꽃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고통을 감지하는 것.
위로금으로 할당된 오백만원을 마련해야한다고 추궁당하고 피해자와의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직접 만나 실마리를 찾으라고 떠밀려 혼자서 피해자의 엄마를 찾아간다. 가는 도중에 세상의 풍경은 미자씨의 마음과는 달리 찬란하기만 하다. 햇빛은 눈부시고 그 햇살에 잘 익은 살구는 새로운 생명을 위해 떨어진다. 미자씨는 자신이 왜 이 길을 가는지 목적을 깜빡 잊는다. 그러고는 어김없이 수첩을 꺼내 글귀를 적는다. 밭일하는 여자를 만나서는 이런저런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기쁘기만 하다. 몇 마디 나누고 돌아서서는 자기가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 깨닫고 놀란다. 미자씨는 소나기에 흠뻑 젖어 돌아와서는 노래방으로 가 혼자 노래를 부른다. 무슨 일을 해서든 갚겠다고 돈을 빌리려하지만 거절당한다.
이것이 시다. 돈으로만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피해자의 고통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단지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반갑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고통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는 것.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피하지 않듯이 타인의 고통에 흠뻑 젖는 것.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부르는 노래. 이것이 시다.
미자씨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돌봐주던 노인의 욕망을 채워준다. 나중에 그를 찾아가 합의금으로 주어야할 오백만원을 빼앗아(?)온다. 그리고 피씨방에서 놀고 있는 손자를 데려다 피자를 사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손발톱을 깎아준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는 곳의 때도 깨끗이 닦으라고 도통 하지 않던 잔소리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배드민턴을 친다. 그때 시낭송회에서 늘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는 손자가 치던 배드민턴 라켓을 받아 누님과 배드민턴을 치고 함께 온 다른 형사는 손자를 데려간다. 미자씨는 울거나 소리치지 않는다. 시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움만을, 깨끗함을, 진실만을 추구하고 싶지만 욕망 혹은 자본주의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그런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프다고 혹은 상처받았다고 비명 지르지 않는 것. 담담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시다.
미자씨는 마침내 시 창작 수업의 마지막 날 완성된 시 한 편과 꽃다발을 탁자에 올려놓는다. 미자씨의 목소리로 시작된 시가 자살한 소녀의 목소리로 낭송되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물소리와 아무 것도 떠내려 오지 않는 강의 얼굴로 가득 찬다. 이것이 시다. 시가 있는 세상의 강물에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떠내려 오지 않는다. 영화의 화면 역시 꾸민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지저분하면 지저분한대로 복잡하면 복잡한대로 생긴 그대로를 다 드러내고 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시다.
강물로 시작되어 강물로 끝나는 영화는 영화를 보고 온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음속에 범람하고 있다. 영화감독이 쓰는 스크린 시론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