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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이 책에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29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글은 주제별로 묶인 것이 아니라 발표한 시기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배열되었다. 발표순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재구성해보면 오줌을 지리던 여덟 살의 유년시절부터 장학금을 위해 공부해야했던 학생, 제국경찰, 전쟁에 참가한 군인, 폐렴환자, 서평자, 작가 등 다양한 모습의 오웰이 그려진다. 한편으론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오웰의 자서전을 보는 듯하다. 총 29편의 에세이 중 여섯 편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마라케시, 두꺼비 단상, 나는 왜 쓰는가,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는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수필집 『코끼리를 쏘다』에도 실려 있다.
나는 오웰의 글을 『동물농장』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러니까 에세이보다 소설로 먼저 접했었는데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소설에 대한 내 느낌이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이러한 느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오웰에게 있어서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문학론에 대한 변이다. 오웰은 글쓰기의 동기를 네 가지, 즉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답 '정치적 목적'은 당연히 다른 답보다 가장 우선한다. 이러한 것이 어디에서부터,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여섯 살 때부터 그는 커서 작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려 한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고 한다. 그는 쓰기도 전에 이미 작가로서의 자질은 다 갖추었던 셈이다.
오웰은 글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고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다는 것을 우선시한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감추어진 진실을 들춰내서 그것을 추문으로 만드는 일에 가치를 두었다는 것이다. 누차 써먹게 되는 얘기지만 김현의 책『한국문학의 위상』에 실린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실려 있는 글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이런 오웰이 추구한 것은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인 책을 쓰는 일을 계속해왔다. 그는 자신의 작업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글을 쓸 때마다 또 자주 글이 막히게 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아니 오웰의 모든 작품을 읽을 때 하나의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민족주의나 파시즘, 권위에 대한 반감, 제국주의의 본질 등 정치적 글은 이런 그의 목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를 비판하는 톨스토이에 대한 오웰의 비판을 읽을 때는 그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우리의 속담을 떠올렸다. 논리적이고 정신분석적이고 설득력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거리두기를 잘하던 오웰의 인간미까지 보여지기도 하는 글인 듯해서 혼자 웃었다.
밑줄긋기
우선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63
영국에 대한 일반화 중에 거의 모든 평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 몇 가지.
- 영국인들이 예술적인 재능은 별로 없다는 점
- 영국인은 추상적인 사고에 공푸를 느끼며 철학이나 체계적인 '세계관'의 필요성을 못느낌.
- 생각 없이 행동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영국인의 위선은 (이를테면 제국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가 그렇다) 그런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히틀러가 독일인데 대하여 만들어낸 '몽유병 민족'이라는 말은 영국인에게 칭했으면 더 어울렸을 표현이다. -91
지식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사람들이지만, 상황이 절박해지면 상당수가 좌절하여 패배주의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다는 걸 알만큼 멀리 내다볼 줄 알며, 매수당하기도 쉽다. -152
근대에 와서 시가 음악이나 구어와 갖는 연관성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시는 존재라도 하기 위해 종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시인이란 사람에게 노래나 낭송을 기대한다는 건 건축가에게 천장에 회반죽 바르는 기술을 기대하는 것보다 곤란한 일이 되어버렸다. -166
내가 말하는 ‘애국주의’란 특정 지역과 특정 생활양식에 대한 애착이며,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라 믿되 남들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는 것이다. 애국주의는 속성상 군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방어적이다. 그에 비해 민족주의는 힘에 대한 욕구와 분리할 수 없다. 모든 민족주의자의 변치 않는 목적은 더 많은 세력과 위신을 확보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억누르고서 섬기기로 한 나라 또는 다른 어떤 집단을 위한 일이다. -180
우리의 생각이 어리석어 영어가 고약하고 부정확해지지만, 언어가 단정하지 못해 생각이 더 어리석어지기 쉬운 것이다. -256
책을 무차별적으로 평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건 유난히 달갑지 않고 짜증스럽고 피곤한 노릇이다. 그것은 쓰레기를 칭찬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286
궁극적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 생존이야말로 그 자체로 다수 의견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인 것이다. -352
역사상 1914년 이전 시절만큼 기름기 절절한 부의 천박함이 보완이 될만한 어떠한 귀족적 고상함도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대는 없었던 듯하다. -415
나는 시절이 아무리 좋을 때라도 문학평론은 사기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왜냐하면 공인되다시피 한 기준 같은 게 없는 한 모든 문학적 판단은 본능적인 선호를 정당화하기 위한 규칙을 꾸며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책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 (반응이란게 있기나 하다면) 주로 '나는 이 책이 좋다'거나 '나는 이 책이 싫다'는 것이며, 그 뒤에 따라 붙는 것은 합리화일 뿐이다. ...... 정치적인 정기간행물에 서평을 써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대체로 봐서, 동조하는 매체에 글을 쓸 때는 위반죄를 저지르고, 반대하는 매체에 글을 쓸 때는 태만죄를 저지르게 된다. 438-439
지금같은 시대에는 생각이 있는 사람치고 진정으로 정치와 거리를 둘 수 있거나 실제로 그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다만 지금 우리가 정치적 충심과 문학적 충심 사이에 그어 둔 선을 보다 선명하게 긋자는 것이다. ..... 작가가 정치에 관여할 때는 일반 시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관여해야지 '작가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 -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