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할 책은 많고 써야 할 글도 많은데 아직도 컨디션은 찌푸린 날씨를 닮았다. 게다가 책들은 또 왜 이리 더디 읽히는지. 투정삼아 어젯밤에 잠시 읽다 만 한 대목을 다시 들춰본다. 리처드 파이프스의 <소유와 자유>(나남, 2008)를 원서와 함께 읽는데, 서문의 끄트머리에서 파이프스는 야콥(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이 러시아사 전공자이고 근대유럽사에 관한 교재도 집필한 적이 있지만 이 책은 훨씬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기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런저런 사실이나 해석에 대해 비난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다(물론 홉스봄처럼 '세계사'를 다루는 역사가들도 있긴 하다!). 그런 비난에 대한 자기변호로 파이프스는 역시나 '아마추어 역사가'란 혹평을 듣기도 했던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인데, '딜레탕티슴'에 대해서 '자콥 부르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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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하는 그림은 예술계에서 크게 무시당하고 있다. 예술은 완벽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평생을 바치는 대가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의 경우 한정된 분야만을 숙달하더라도 이른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개요를 정리하고 이를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한 많은 분야를 어쨌든 개인적으로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 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대체적으로 야만인에 불과하다.(<소유와 자유>,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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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탕티슴'이란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을 가리킨다. 그런 딜레탕티슴이 예술분야에서는 보통 무시당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역사학에서만큼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프스는 이 대목을 부르크하르트의 독일어 원서에서 직접 번역하여 옮겨놓고 있는데, 그의 번역은 이렇다.
[Dilettantism] owes its bad reputation to the arts, where, of course, one is either nothing or a master who devotes his entire life to them, because the arts demand perfection. In learning, by contrast, one can attain mastery only of a limited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this mastery one should attain. But if one does not wish to forfeit the ability to form a general overview - indeed, to have respect for such an overview - then one should be a dilettante in as many fields as possible - at any rate, privately - in order to enhance one's own knowledge and enrichment of diverse historical viewpoints. Otherwise one remains an ignoramus in all that lies beyond one's specialty, and, under the circumstances, on the whole, a barbarous fellow.
<소유와 자유>에서는 'Dilettantism'을 역자가 '취미로 하는 그림'이라고 제한적 의미만 번역하는 바람에, 그리고 내가 강조한 대목에서는 '딜레탕트'란 말을 따로 옮기지 않는 바람에 '전문가'와 '딜레탕트'간의 대조가 희석됐다. 그래서 더 낫게 번역돼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찾았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지난달에 나온 <세계 역사의 관찰>(휴머니스트, 2008)과 예전에 나온 <세계사적 성찰>(신서원, 2001), 그리고 같은 책의 영역본 <역사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history)>(1943/1979)이다. 인용문과 같은 대목을 두 국역본과 영역본은 각각 이렇게 옮겨놓았다.
딜레탕티슴이란 말은 예술 분야에서 평판이 나빠진 말이다. 예술분야에서는 대가(大家)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고, 당연히 한 분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문에서는 제한된 분야의 대가가 될 수도 있다. 곧 전문가가 되는 것인데, 그것도 어느 영역이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 자신의 인식을 늘리고 관점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어쨌든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전문영역을 넘어서 있는 다른 모든 것에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조잡한 견습공 신세가 되고 만다."(<세계 역사의 관찰>, 51쪽)
'아마추어'란 말은 사람들이 대가(大家)나 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되어야만 하는, 또는 자신의 생을 온통 바쳐야만 하는 예술 때문에 평판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와 반대로 한 개인은 어떤 한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전문가로서 말이다. 그는 어디에서인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 그는 가능한 많은 다른 점에서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 이외에 있는 모든 것에 있어서는 하나의 무식꾼으로 남게 될 것이며 아마도 야민인과 같은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세계사적 성찰>, 35-36쪽)
The word "amateur" owes its evil reputation to the arts. An artist must be a master ot nothing, and must dedicate his life to his art, for the arts, of their very naturem demand perfection. In learnng, on the other hand, a man can only be a master in one particular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in some field he should be a specialist. But if he is not to foefeit his capacity for taking a genaral view, or even his respect for general views, he should be an amateur at as many points as possible, privately at any rate, for the increase of his owm knowledge and the enrichment of his possible standpoints. Ohterwise he will reman ignorant in any field lying outside his owm specialty and perhaps, as a man, a barbarian.(53-54쪽)
부르크하르트의 요지는 딜레탕트가 별로 좋은 평을 얻지 못하는 예술분야와는 달리 학문, 특히 역사학에서는 딜레탕티슴이 불가피하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문에서는 먼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요즘 '박사'는 말로만 '박사'다). 또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용인되어서도 곤란하다. 적어도 일반적인 관점, 전체적인 조망능력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다른 대목들은 차치하고, 이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도 두 국역본의 번역은 과녁에서 동떨어져 있다. 먼저,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는 딜레탕트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부여함으로써 부르크하르트의 취지에서 멀찍이 벗어난다(아예 정반대로 옮긴 것이 된다). 우리가 딜레탕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고 해서 절반은 맞게 옮겼지만 <세계사적 성찰>의 경우도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이라고 전제하여 나머지 절반은 잘못 옮겼다(앞부분에서 예술에서의 딜레탕티슴이 갖는 평판에 관한 부분도 상당히 어색한 번역이다). 독일어 구문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모르겠지만 전문번역자와 역사철학 전공자가 똑같이 실수를 범한 것은 의외다.
<소유와 자유>의 역자는 '경제/금융 전문기자'로 소개돼 있다. 다시 말해 역사쪽으로는 '딜레탕트'다. 그리고 그가 옮긴 것도 영역된 부르크하르트의 문장이므로 '중역'이다. 그런데, 적어도 이 인용문단의 경우에는 독어 원전을 번역한 두 '전문가'의 번역보다 원뜻에 그나마 가장 가깝다. 이건 좀 아이러니한 일 아닐까? 딜레탕트(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라 하더라도 주의하지 않는다면 '조잡한 견습공'과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08. 0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