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말 건네기 울력의 시 3
박현수 지음 / 울력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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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온갖 사물들이 널려있다. 당장 내 책상 위에만 해도 커피잔, 마우스, 키보드, 모니터 두 대, 펜, 책 몇 권, 탁상달력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물건들은 책상이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면서 각자의 쓸모를 다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쓸모에 국한하지 않고 일일이 이것들에게 말을 건네고 쓸모의 뒷편까지 헤아린 시들을 만났다.

마스크

사람들은 낡은 풍금처럼 앓는다

먼 곳에서 흘러온 바람이

계절의 등뼈를

밟고 지나는 사이

새된 소리만 새어나오는

이비인후를 잠그고

저마다 제 안의 열을 짚어본다

지난 계절은 견디기 어려웠고

삶은 증상도 없이

다음 계절로 미루어졌다

묵독(默讀)의

환절기가 일상이 된다 한들

마스크의

표정은 끝내 읽을 수 없다

낯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아니 코로나가 이렇게 장기화 되지 않았다면 마스크는 잠시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되었다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삶은 증상도 없이/다음 계절로 미루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가. 그 오랜 기간동안 나는 마스크착용의 효과와 불편함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시인처럼 그런 쓸모의 영역을 벗어나 마스크에서 '낯선 시간이 다가오고'있다는 걸 예감하지 못했다.

이 예언자를 보라-내비게이션 찬가

참된 예언자가 나타났다

목소리는 들리나

그의 형상을 본 자는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없다고 한다

막막한 길이 어디로 향할지,

여정이 언제 끝날지 그는 알고 있다

앞길에 시련이 있다고 할 때면

반드시 시련이 있었고

여정의 끝을 말할 때

언제나 여정의 끝이 와 있었다

그의 예언이

자주 바뀌다는 비난은

참된 예언자라는 징표일 뿐

그에게 미래는 굳은 돌덩이가 아니라

말랑말랑한 찰흙덩이

지금 빚는 이 손길에

나중의 형상이 들어있으니

지금 여기가

미래의 막다른 길이다

이전에 왔던

가짜 선시자들과 같지 아니 하니

그는 미래를 팔아

지금을 가난하게 하지 않으며

내일의 채찍으로

오늘을 후려치지도 않는다

하나의 길만을 옳다고 하여

다른 길을 악으로 만들지 않으며

에둘러 말하여

지상의 귀를 어지럽히지도 않는다

목소리는 있으나

형상은 없는,

참된 예언자가 이제야 왔다

내비게이션은 뱃사람들의 항해술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나침반, 지도, 해도, 별자리 등을 이용해 물길을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바다에서 사용되던 것이 요즈음은 땅을 점령했다. 내비게이션 없는 자동차를 보지 못했다. 내비게이션은 우주공간에 떠있는 무수한 인공위성을 이용한다. 지구 밖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공위성을 이용하는 내비게이션은 어쩌면 진정한 신의 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내비가 안내해주는 대로 간다. 핸드폰을 사용하게 되자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잊었다. 내비를 사용하면서 나는 길을 잃었다.

잃은 길을 알려주는 자, 종말을 예언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가짜 선지자로 판명되었으나 내비게이션은 절대 틀리지 않는 예언가다. '목소리는 있으나/형상은 없는,/참된 예언자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가짜 선지자들처럼 내일을 빌미로 오늘을 재물로 바치지 않아도 된다. 내비게이션을 참된 예언자에 빗대어 전자기기가 이끄는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비판하고 있는 이 시를 읽자 섬뜩해졌다.

빛나는 책 - 스마트 폰

빛나는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

무기질 질료로부터 태어나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책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

옛 관리의 홀(笏)처럼 하나씩 들고 읽는다

거룩한 이론에서부터

가벼운 하소연까지

노랫가락에서 움직이는 그림까지

온갖 유희와 소문들이 화수분처럼 가득한 책

사고전서의 서적을 다 넣어도

오히려 자리가 남은 얇은 책

단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당신들은

어른에서부터 아이까지

수불석권(手不釋券), 한시도 놓지 않는다

스스로 빛나지 않는,

그래서 읽는 이의 내면에서

빛을 낼 수밖에 없는,

어두운 책을 들고 나는 흔들린다

황혼을 가로질러 지하철은 터널로 들어선다

이 시인을 처음 접한 건 시집 <위험한 독서>를 통해서였다. 진솔한 언어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가족관계를 드러내는 시들에서는 애써 자신을 꾸미거나 숨지 않는 용기를 보았다. 책, 언어, 시 등에 관해 깊이 천착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책에 관한 시인의 생각은 이번 시집 역시 다르지 않다. '스마트 폰 = 빛나는 책 = 당신들 / 스스로 빛나지 않는 = 어두운 책 = 나'의 구도를 보며 쓸쓸했다. 터널로 들어서는 지하철에 서 있는 작고 단아한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래도 '읽는 이의 내면에서/빛을 낼' 책을 들고 있는 시인이, 시인의 시가 좋다.

시집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시집 속에는 온갖 사물들이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호치키스, 우산, 탁상시계, 리모콘, 주전자, 옷걸이 등등. 바로 내 곁에 있는 이런 이름을 가진 사물이 가장 기본적인 쓸모를 벗어나 시인의 시집에서 시로 자리매김할 때는 어떤 모습을 갖추는지 살펴보는 것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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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1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 님 안녕하세요. 스마트한 현대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들이 담겨 있는 시집 같군요. 담아갑니다. ^^

반딧불이 2021-10-15 15:31   좋아요 1 | URL
네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여전하시지요?
시집에는 비판하는 시도 많답니다.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