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 소생의 관심사인 ‘이스탄불’ 즉 ‘콘스탄티노플’의 설계자이자 건설자는 바로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콘스탄티누스 대제다. 얼마전에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소설 두 권을 읽었다. 한 권은 류상태가 지은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이 된 사나이>다. 이 소설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죄없는 처자식을 죽인 냉혹한 인간 아니 괴물로 묘사된다. 류상태는 대광고의 교목이었는데 2004년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으로 목사증을 반납하고 학교를 떠났던 인물이다. 소설가가 아니어서 소설은 상당히 거칠고 내용 전개에도 무리가 많다. 지금의 기독교가 예수의 종교가 아닌 바울의 종교라고 한다. 주장은 강하고 논리는 빈약하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다른 한 권은 막스 갈로의 <콘스탄티누스의 선택>이다. 막스 갈로는 역사학자이며 소설가이자 유럽의회 의원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불리는 프랑스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한다. 역시 콘스탄티누스가 유일한 권력을 위해 유일신 신앙인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이용했다고 이야기한다. 갈로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손에 묻은 골육의 피로 괴로워하고 또자신의 권력 유지와 제국의 안녕을 위해 끊임없이 고심하는 고독한 한 인간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고독한 법이고 절대 고독자의 속 마음을 알기는 또 절대적으로 어렵다. 소설은 재미있다.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연대기 1>.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2>,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13, 14> 등을 두루 살펴본 바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대충 이렇다
그리스도교와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빛나는 업적을 쌓은 대제의 가족사는 근친의 피로 더럽혀졌다. 콘스탄티누스는 310년 아내 파우스타의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를 죽였다. 312년에는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325년에는 누이동생 콘스탄티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매제인 리키니우스를 사형에 처했다. 어린 조카도 죽였다. 유혈의 절정은 326년 아들 크리스푸스와 아내 파우스타의 처형이다. 물론 이런 저런 이유는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권력 투쟁의 전장에서 어슬프게 인정을 베풀다 보면 그 인정에 자기 목숨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그 유혈이 처자에 이르고 보면 느낌이 또 다르다. 어쨌든 자신의 손에 골육의 피를 묻힌 영혼이 온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두 번 결혼했다. 미천한 출신의 정실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는 크리스푸스라는 아들을 남기고 죽었다. 뒤이어 막시미나우스 황제의 딸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라는 세아들과 두딸을 두었다. 크리스푸스는 17살에 부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교양과 덕성을 겸비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신민들로부터 대중적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 되었다. 324년 리키니우스와 비잔티움에서 벌인 결전에서 해군의 지휘를 맡아 27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승리하여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의 경쟁자를 소탕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바도 있다. 젊은 황태자에게 쏟아진 대중적인 인기와 전국민적인 존경과 애정은 즉각적으로 아버지 황제의 주목을 끌었다. 아비는 아들의 충성심을 재확인하는 대신 잘못된 야심에서 비롯될지도 모를 해악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다.
크리스푸스는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 20주년 경축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는 와중에 황제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었다. 황태자는 엄중한 감시하에 폴라 요새로 압송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29세였다. 계모인 황후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패륜 혐의였다. 크리스푸스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도 끝내 혐의를 부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 파우스타도 마구간 소속 노예와 간통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황후는 즉각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온도를 엄청나게 높인 목욕탕에서 증기에 의해 질식사했다고 한다. 이 존속 살해의 비극은 사건의 진상과 재판 과정, 처형 상황 등이 모두 깊은 어둠 속에 묻혀있다. 이 사건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태도는 침묵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이러 해서 도저히 도리없었다는 둥의 합리화를 위한 시나리오 같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후세의 사가들과 호사가들은 온갖 구구한 억측과 망측한 상상을 하고 있다.
파우스타의 아들들이 점점 커가고 있고 아버지가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크리스푸스가 반란을 꾀하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미래 권력 주위에 응겨붙기 마련인 파리떼와도 같은 경솔하고 아첨을 일삼는 추종자들이 크리스푸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다가 밀고자에게 고발되었을 수도 있다. 파우스타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사이에 3남 2녀을 두고 있으나 전처의 소생인 크리스푸스가 너무 훌륭하게 장성하여 신민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자 자신과 자식들의 미래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크리스푸스를 중상 모략해서 죽게하고 결국 자신도 음모가 들통나서 죽게 되었을 수도 있다.
전해지는 바와 같이 불륜을 포함한 남녀간의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당시 40전후의 나이로 추정되는 파우스타와 29세의 크리스푸스가 어쩌면 정말 그렇고 그런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파우스타가 젊고 아름다운 크리스푸스를 유혹하려다가 일이 여의치않게 되자 거꾸로 크리스푸스가 아버지의 아내인 자신을 범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질투심에 불타는 황제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가장 무서운 경쟁자인 황태자를 제거할 수 있도록 명분을 제공해 줬을 수도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추측한 것처럼 에우리피데스의 고대 비극 <히폴리토스>가 로마 황실에 재현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히폴리토스>의 내용을 소개해 본다. 히폴리토스는 아테네왕 테세우스와 아마존족 히폴리테의 아들이다. 테세우스는 말년에 아리아드네의 동생인 파이드라와 결혼하게 된다. 히폴리투스는 아마존의 아들답게 남녀사이의 사랑이라든지 결혼 같은 것을 하찮게 여기고 사냥을 즐기며 순결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를 신봉하고 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예쁘게 볼리 만무하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히폴리토스를 저주한다. 파이드라는 의붓아들인 히폴리투스를 보자 첫눈에 반해버린다. 파이드라의 유모는 파이드라의 가슴속에 숨겨진 사랑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여 자살하려는 마음을 알고 히폴리토스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순결의 여신을 숭상하는 히폴리투스는 당연히 역겨움을 나타내며 천박하다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파이드라는 히폴리투스가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는 거짓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히폴리투스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아버지 테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아들에게 저주를 내려줄 것을 간청하면서 아들을 추방한다. 히폴리토스는 해안을 따라 전차를 몰고 가다가 바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에 놀란 말들이 마차를 부수고 주인을 이리저리 끌고 다녀 죽게한다. 테세우스는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고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는 이야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이 허위 고발을 믿고 경솔하게 아들을 죽인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여 40일동안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상의 안락을 멀리하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크리스푸스의 황금조각상을 세우고 “내가 부당하게 처형한 나의 아들을 위하여”라는 비문을 새겨넣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파우스타가 어떤 식으로든 의붓아들인 크리스푸스의 죽음과 연관되었으리라는 추측에 관해서는 적어도 네 명의 고대 역사가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노리치는 말하고 있다. 전처 소생과 후처 사이의 싸움은 왕권쟁탈전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망자들의 혼령을 불러낸다고 하더라도 비극의 원인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기는 어려울는지도 모른다. 자식의 장래에 대한 파우스타의 불안감과 크리스푸스 주위의 파리떼들과 황태자에 대한 황제의 질투심, 누구의 범접도 허용하지 않은 황제의 권력의지 뭐 이런 것들이 뒤엉켜 상호 복잡하고 오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년간 제국을 통치한 뒤 337년 5월 22일 성령 강림절 정오에 니코메디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죽기직전에 대제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동안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악행을 거듭했다고 하더라도 세례를 통해 순식간에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볼때는 참 편한 방법이다. 나쁜 짓을 많이 해도 회계하면 끝. 그 죄는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아비의 손에 묻은 아들의 피가 과연 세례의 물로 씻길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누스를 언급할 때마다 12사도에 준하는 분이라는 명칭을 받드시 붙였다. 불경한 점이 없지 않으나 복음을 전파한 범위와 수로 본다면 12사도에 필적할 것이다. 더구나 황제는 수많은 교인들을 그 참혹한 고문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었다.
대제의 죽음으로 골육상쟁도 종지부를 찍었으면 좋으련만 권력이 있는 곳에는 유혈도 대를 이어 계승되기 마련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자 가장 먼저 궁정을 장악한 대제의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두명의 숙부 율리우스 콘스탄티누스와 달마티우스, 일곱 명의 사촌, 부황의 매제 2명 등의 황족들을 학살했다. 남자 황족 중 살아남은 사람은 콘스탄티우스를 포함한 파우스타의 세 아들을 제외하고는 율리우스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동생)의 어린 두 아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 뿐이었다. 337년. 콘스탄티우스 19세였다. 학살이 있은 후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삼형제가 삼등분 했지만 영토 분할에 불만을 품은 맏이 콘스탄티누스가 막내 콘스탄스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패배해 살해되었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23세였다. 그로부터 10여년후 제국의 서방을 담당하고 있던 콘스탄스는 부하 장수의 반란으로 살해당한다. 350년. 콘스탄스 30세.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제국을 일통하고 일인자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제국의 방위를 위해 어쩔수 없이 자신이 죽인 숙부의 아들 갈루스를 부황제로 임명한다. 갈루스는 실정을 거듭하다가 결국 얼마전에 크리스푸스가 처형되어 유명해진 폴라 요새로 호송되어 극심한 고문 끝에 황제 살해 음모를 자백하고 참수된다. 354년. 갈루스 29세였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355년 황제는 고심 끝에 갈루스의 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황제로 임명한다. 361년 콘스탄티우스가 병사하자 율리아누스는 로마제국 유일의 최고권력자가 된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가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자 혈육이자 후세에 배교자로 불리게 되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배교였지만 율리아누스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오랜 전통으로의 복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