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컨대, 소생은 운동을 못하고 가무도 형편없다. 잡기에 무능하다. 뭐하나 똑 부러지게 잘하는 것이 없다. 술은 겨우 조금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운동은 보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이래 야구장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놀랍죠? 딸을 낳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노래방도 안간다. 어쩔 수없이 가게 되더라도 노래는 절대 안부른다. 마이크 잡을 사람은 많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보니 하루키도 노래방가는 것은 질색이라고 한다. 정말 적지않은 위안을 얻었다. ‘그럼, 당신은 도대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사세요?’ 하고 궁금해 하시는 분은 없겠지만 그렇건 말건 답은 대충 이렇다. 소생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이런저런 잡동사니 모으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각종 라벨(맥주가 메인이고 기타 와인, 양주, 사케, 소주 등 세상의 모든 주류를 취급합니다.), 맥주 병뚜껑, 프라모델, 영화전단지, 스노우볼 등등을 모은다. 아내는 쓸데없는 짓도 되우한다고 흥흥흥 콧방귀를 뀌며 소생의 취미를 비웃지만 그래도 소생에게는 보물같은 것들이다. 라벨 수집을 위해 가끔 아파트 단지내 쓰레기장의 공병 수집함을 뒤지기도 한다. 좀 부끄럽네요 호호호...

 

 

 

 

 

 

 

 

 

 

 

 

 

이런 꼴로 사십 년 넘게 살다보니 뭐 좀 못하는 것이 있어도 별로 답답한 것은 없다. 하지만 한번씩 아쉽고 또 부러울 때가 있긴 하다. 축구를 보면 골을 넣은 선수가 느끼는 그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기쁨, 그 터져나오는 환희의 감정을 나도 한번 느껴보고 싶다. 가요방에서 친구나 직장동료들이 시원하게 내지르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볼 때면 ‘아! 나도 저렇게 한번 불러봤으면’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소생이 죽었다가 다시 깨어날 수는 있어도 축구를 잘하거나 노래를 잘 부를 일은 결코 없다. 몸치에 음치, 양치는 나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소생은 그 대신에 다른 소소한 즐거움을 택했다. 비록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독서의 즐거움은 운동의 그것에 못지않다.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수집하는 즐거움도 가무의 즐거움에 결고 뒤지지 않는다. 내 새끼들이 하나하나 늘어갈 때의 그 기쁨, 내 새끼들을 한 곳에 불러모아 놓고 바라보는 그 흐뭇함. 뭐 내 뜻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한번 기어나온 세상, 살기는 살아야겠기에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부러워하면서 한숨만 쉬다가 한 세상 허송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렴!

 

각설하고, 이스탄불에 대하여 이것저것 시시콜콜 조사하다 보니 “이스탄불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신화나 전설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다름아니옵고 바로 축구 이야기였다. 모세의 짝대기질 한방에 홍해의 바닷물이 둘로 똑 따갈라지는 그런 기적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적이 일어난 때는 2005년 5월 25일. 장소는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 AC밀란 대 리버풀의 2004/2005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유럽챔피언스리그의 공식 명칭은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로 유럽축구연맹이 주관하는 클럽축구 대항전이다. 클럽축구라고 뭐 동네 축구가 아니고 이른바 별들의 전쟁이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클럽들과 기라성같은 선수들, 놀랍고 경이로운 이야기들이 무수하고 수다한 꿈의 리그다.

 

 

 

 

 

 

 

 

 

 

 

 

 

이스탄불에 있는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은 터키의 하계올림픽 개최를 대비해서 지어졌는데 2002년도에 개장했다. 2004년도에 UEFA 5성급 경기장으로 선정되어 UEFA 주요대회의 결승전을 치를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터키는 2000년부터 5번에 걸쳐 올림픽 개최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올림픽위원회야 나름의 규정과 절차에 따라 개최지를 선정했겠지만 이스탄불같은 도시를 한번도 선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뭐가 좀 잘못된 일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2013년도에도 IOC는 2020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동경을 선정했다. 동경은 1964년 대회 이후 두 번째다. 이로써 일본은 동계 2번 하계 2번 총 4번의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가 될 전망이다. 1896년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이슬람국가에서 올림픽이 열린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도 문제다. 국제평화의 증진이라는 올림픽 정신이 무색하다.

 

그럼 다시 기적이야기로 돌아가서, 당시 AC밀란은 최고의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선수들의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반면 리버풀은 일부 주전들의 부상으로 약체로 평가받고 있었다. 경기는 예상대로 진행되어 전반 1분만에 피를로의 프리킥을 말디니가 헤딩슛으로 연결했다. 전반전에 리버풀은 3골을 허용했다. AC밀란 3-0 리버풀.

 

전반전이 끝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라커룸으로 들어온 리버풀 선수들에게 감독 베니테즈는 대충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머리를 떨구지 마라. 머리를 높게 들어라. 우리는 리버풀이고 우리는 리버풀을 위해서 뛴다. 만약 우리가 찬스를 만든다면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영웅이 될 기회를 잡아라.”

 

감독의 격려 덕분인지 리버풀은 후반 8분에 제라드가, 10분에는 스미체르가, 15분에는 알론소가 각각 골을 넣었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후 양팀은 연장전으로 갔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결국 승부차기에 돌입. AC밀란은 피를로 등 3명의 키커가 승부차기에 실패. 게임은 3-2로 리버풀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승부란 냉혹한 것이어서 한쪽에게 기적은 다른 쪽에게는 악몽이 된다. 당시 AC밀란의 미드필더였던 안드레아 피를로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스탄불 경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고문같은 경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드레싱룸에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우리는 말도 할 수 없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파괴해버렸다. 그 상처는 처음부터 명백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냉혹해지고 심각해 졌다. 불면증, 분노, 우울증, 공허함. 우리는 여러 가지 증상을 가진 새로운 질병을 발명해낸 것이다. 바로 이스탄불 신드롬이라는.”

 

승부란 한편으론 돌고 도는 것이기도 해서 그로부터 2년후인 2006/2007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 AC밀란과 리버풀은 아테네에서 다시 붙었다. 이번에는 피를로의 AC밀란이 리버풀에 2-1로 승리했다. 하지만 피를로에게 이스탄불의 얼룩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피를로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도 이스탄불의 경험으로부터 뭔가 교훈적이고 우아한 문장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으나 이 말 이외에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씨발“

 

소생이 축구에 대해 이만큼이나 알게되고 이렇게나 많이 지껄이게 된 것은 예전같으면 꿈에서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대사건이고 죽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도 소생에게는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모두가 이스탄불 덕분이다. 땡큐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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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8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북플 기능이 페이스북처럼 거의 완벽하게 구현되었다면 댓글에 ‘이스탄불의 기적’ 동영상을 띄워 주고 싶어요. 리버풀의 패색이 짙을 때 리버풀 공식 응원가 ‘You will never walk alone’를 부르는 팬들을 촬영한 건데 정말 소름 돋습니다. 후반전에 리버풀이 골을 몰아서 넣는 모습을 보면 이때가 리버풀에게 최고의 경기였고, 챔스 우승이 최고의 시절이였죠.

붉은돼지 2015-06-19 10:02   좋아요 0 | URL
맞아요..동영상으로 봐야 실감이 나는데요....동영상도 여러가지가 있더군요...한편의 드라마로 짧게 특별히 편집한 것도 있고, 레고로 만든 이스탄불의 기적도 있더라구요..ㅎㅎㅎㅎ

만병통치약 2015-06-18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TRL C ->CTRL V 앞 부분을 보고 제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ㅋㅋㅋㅋ 그래도 전 초등학교때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야구대회에 한번 데려가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프로야구는 가본적이 없군요. ㅠㅠ

붉은돼지 2015-06-19 10:05   좋아요 0 | URL
동지가 계셨군요..ㅎㅎㅎㅎ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축구하기 싫어 거의 탈영할 뻔 했는데....

헛발질 몇 번 하니 그후론 빼주더라구요...완전 열외,,,,축구 고문관으로 낙인 ㅠㅠ
물론 헛발질로 골대 근처에서 거의 30분정도 원산폭격하고 있었음다. ㅠㅠ

느린산책 2015-06-19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젤로 좋아라하는 선수가 피를로 제라드인지라 재밌게 읽었네요. 요즘 유명 축구선수의 자서전 출간이 붐인거 같아요. 얼마전 나온 리오 퍼디난드 자서전도 엄청 재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당~

붉은돼지 2015-06-19 10:08   좋아요 0 | URL
저는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피를로 자서전을 읽어보니 나름 재미있더라구요^^
거기에 또 새로운 세상이 있더군요....
앞으로 축구에 관심을 좀 가져볼까 합니다.~~

붉은돼지 2015-06-19 10:22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피를로 자서전은 이탈리어판을 번역한 것이 아니고 영어번역본을 번역한 것이어서 그런지 약간 거시기한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