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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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관통하는 올곧은 사랑과 신념. 지금도 세상 어디엔가 고통받고 저항하고 투쟁하고 사랑하는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있다. 그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재회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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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블랙박스를 넘어 - 승객들의 시신이 추락사고의 진실을 말해주어야 할 때

샤나한이 800기 사고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신체의 대부분이 비교적 온전했다는 것이다.
"멀쩡한 신체는 그렇지 않은 신체보다 더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 대부분은 다루는 것은 고사하고 보는 것조차도 상상하기 힘든 잘린 손, 다리, 살점조각 등이 그로서는 대하기 더 편하다는 것 이다.
"그렇게 되면 그건 그냥 조직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제 할일을 하는 거죠."
처참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처참함에는 익숙해지지만 망가진 인생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샤나한은 병리학자들이 쓰는 방법을 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부분에 초점을 맞춥니다. 부검 동안 그들은 눈의 상태를 설명하고 그런 다음 입을 설명하죠. 뒤로 한 걸음 물 러서서 ‘이건 아이가 넷 있는 가장의 시체입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 거죠. 감정적으로 살아남으려면 그 길뿐입니다." - P134

나는 이 책을 읽은 다음, 비행기를 탈 때마다 비상구 앞에 쌓인 시체 가운데 하나로 최후를 맞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사람들에게 충고할 만한 게 있는지 샤나한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주로 상식적인 것들이다. 비상구 가까이에 앉아라. 열과 연기를 피해 몸을 낮춰라. 독한 연기에 허파가 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오래 숨 을 참아라. 또 그는 창가 좌석을 더 좋아하는데, 복도 쪽에 앉는 사람들은 비교적 가벼운 사고에도 머리 위 짐칸에서 떨어지는 옷가방 벼락을 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란다. - P147

식사가 끝나고 청구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샤나한에게 또 질문한다. 지난 20년 동안 그가 칵테일파티에 나갈 때마다 받은 질문이다. 추락할 때 살아날 확률이 비행기의 앞쪽에 앉아 있는 게 높은가, 아니면 뒤쪽인가? 그는 참을성 있게 대답한다.
"그건 어떤 식의 추락이 될지에 따라 다르죠."
나는 말을 바꿔 묻는다. 비행기 안 어디든 마음대로 골라 앉을 수 있다면 어디에 앉을 건데요?
"1등석이죠."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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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 동산

류보피 안드레예브나 그렇다면 나는 분명히 사랑보다 낮은 데 있겠군요. (몹시 초조해서) 왜 레오니드가 오지 않을까? 영지가 팔렸는지 아닌지,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면! 너무나도 있을 법하지 않은 불행이 닥쳐왔기 때문에 대체 그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넋이 빠져 있어요....... 당장 소리칠지도 모르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도 있어요. 나를 구해 주세요, 페챠. 뭐든 좋으니까 말해 봐요, 말을 해보세요.…………….
트로피모프 오늘 영지가 팔리든 아니든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영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겁니다. 돌이킬 방도가 없어요. 길은 잡초로 무성합니다. 진정하십시오, 부인.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류보피 안드레예브나 어떤 진실 말인가요? 당신은 진실이 어디 있고, 거짓이 어디 있는지 보이겠지만, 나는 시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당신은 모든 문제를 대담하게 결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이 젊고, 그래서 어떤 문제든지 많은 고생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요? 당신은 대담하게앞을 응시하지만, 그것은 인생이 아직 당신의 젊은 두 눈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도 보지 못하고 기다리지도 않아서 그런 게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보다 더 대담하고, 정 - P706

직하고 깊이가 있어요.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손끝만큼이라도관대해져서 나를 용서하세요.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에서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가 사셨어요. 나는 이 집을 사랑하고, 벚나무 동산이 없으면 내 인생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니 만일동산을 팔아야 한다면, 나도 동산과 함께 팔아주세요....... (트로피모프를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키스한다) 내 아들이 여기에서 익사했어요....... (운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줘요, 착하고 선량한 페챠.
트로피모프 아시다시피 저는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습니다. - P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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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두달째 그들이 편지를 압수하고 있다. 오늘 오후에 작업장에서 두리토가 자신의 감방 벽에 붙어 있던 복제화를 주었다. 그녀의 편지가 다시들어올 때까지 자네가 가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언젠가는 다시 들어오겠지. 오늘 밤 그 그림은 내 방의 거울과 오스트레일리아 지도 사이에 붙어 있다. 한밤에 감옥에 면회를 온 여인을 그린 조르주 드 라 투르 *의 그림. 죄수는자신의 감방 안에 앉아 있고 여인은 서 있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촛불의 빛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서로의 소식이 너무 궁금한 두사람은 미소를 지을 생각도 못 하고 있다. 여인은 왼손으로 막 자신의 머리를정리한 직후의 모습이다.

* Georges de La Tour (1593-1652). 프랑스의 화가. - P156

이런 텅 빈 밤에 ‘사랑해요‘ 라고 말하고 나면, 커다란 무언가가 내게 찾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침묵은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죠. 내가 받는 것은 당신의 응답이 아니에요. 있는 건항상 나의 말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채워져요. 무엇으로 채워지는 걸까요. 포기가 포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을 거예요, 야 누르, 사랑해요. - P183

우리는 절대 군인들에게 저항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랬더라면그들이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갔겠죠. 탱크는, 우리 주위를 돌면서, 의도적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어요. 서서히 올가미를 조여 온거죠.
고양이들이 뛰어오르기 전에 어떻게 거리를 재는지, 어떻게 자기가 계산했던 바로 그 자리에 네 발을 한데 모은 채 착지할 수 있는지알아요? 그게 그때 우리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계산 말이에요, 얼마나 뛰어야 할지를 계산하는 게 아니라, 정반대였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하지 않겠다는 무서운결심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의지력이 필요할지를 계산해야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 필요한 의지력을 과소평가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대열을 깨고 나가기 십상이죠. 두려움이 떠나지 않은 채 커졌다 작아졌다 했어요. 그 두려움을 과대평가하면 일찍 지치게 되고, 그러면 끝을 보기 전에 쓸모없는 존재가 돼 버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서로손을 잡고 있었던 게 도움이 됐어요. 계산된 에너지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 P194

당신의 편지를 자주 다시 읽어 봐요. 밤에는 안 읽죠. 밤에는 그편지들을 다시 읽는 게 위험할 수 있거든요.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일하러 가기 전에 그것들을 읽어 봐요. 밖으로 나가 하늘과 지평선을 바라보죠. 가끔은 지붕 위에 올라갈 때도 있어요. 어떤 때는 밖으로 나가 길 건너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기도 하고요. 거긴 개미들이 많아요. 그래요, 아직 많아요. 그렇게 자리를 잡고 얼룩진 봉투에서 당신의 편지를 꺼내 읽는 거죠. 그렇게 읽는 동안, 사이의 날들이 기차의 화물칸처럼 툭툭 끊어진 채 스쳐 가요! 사이의 날들이무슨 의미냐고요? 지금 읽고 있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와 - P207

지금 사이죠. 그리고 당신이 그 편지를 썼던 날과 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날 사이이기도 해요. 또 교도관들 중 누군가가 그걸 부쳤던 날과 내가 지붕 위에 앉아 그걸 읽고 있는 날 사이이고, 우리가 모든것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런 날과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 다음 그것들을 잊어버려도 되는 날 사이예요. 그날들이 바로, 내 사랑, 사이의 날들이고,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선로는 이백 킬로미터떨어져 있죠.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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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죽은 자의 운전 - 충돌실험용 인체모형 및 충돌한계라는 무섭고도 필요한 과학

아름답지는 않지만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사체연구의 결과가 가져온 변화 덕분에 지금은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벽에 정면으로 충돌해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1995년에 〈외상저널》에 실린 ‘부상방지에 대한 사체연구의 인도주의적 이익‘이라는 기사에서, 앨버트 킹은 사체연구를 통해 차량의 안전장치가 개선된 덕 분에 1987년 이후 매년 8,500명이 생명을 건지는 것으로 추산했다. ‘3점 지지‘ 안전띠를 시험하기 위해 충돌장치에 올랐던 사체 1구당 매년 61명이 생명을 건졌다. 얼굴에서 에어백이 터진 사체 1구당 매년 147명이 정면충돌에서 살아남았다. 에어백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사망했을 것이다. 또 앞유리에 머리를 부딪친 사체 1구당 매년 68명이 목숨을 구했다. - P106

어린이 자료를 제외하면 인체 주요부분의 충격 허용한도는 이미 오래 전에 파악되었다. 오늘날 사체들은 주로 신체의 주변부, 즉 발목, 무릎, 발, 어깨 등의 충격연구를 위해 이용된다. 킹은 내게 이렇 게 말해주었다.
"옛날에는 큰 충돌사고를 당하면 대부분 영안실 신세가 됐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발목이 으스러졌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사람들도 에어백 덕분에 살아남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거죠. 사고로 양쪽 발목과 무릎이 손상되어 다시는 똑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니까요. 그게 지금 중대한 장애원인이기도 하죠." - P110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사체 머리에 꼭 맞는 흰색 두건이 씌워져 있다. 은행을 털려는 사람 같다. 팬티스타킹을 머리 위에 쓸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운동선수용 양말을 쓰고 나온 사람 같다.
매트는 노트북 컴퓨터를 내려놓고 루한을 도와 사체를 옮겨 자동차 의자에 앉힌다. 의자는 충격기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루한의 말이 맞았다. 요양원과 같다. 옷을 입히고, 안아 올리고, 옮기고. 아주 늙고 병약한 사람과 죽은 사람 간의 거리는 짧은데다가 그 경계도 그리 분명하지 않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인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면(내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그랬다) 노년을 죽음에 점점 익숙해지는 과정으로 보게 된다. 늙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점점 더 잠이 많아지고, 어느 날부터는 내내 잠자는 상태로 들어간다. 점점 더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어느 날부터는 앉히면 앉히는 대로, 누이면 누이는 대로 있게 된다. 노인들은 여러분이나 나와 닮은 만큼 UM006과도 닮았다.
나는 죽은 자들이 죽어가는 자들보다 더 대하기가 편하다. 그들응 고통을 받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화제가 필연적인 부분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어색한 침묵과 대화도 없다. 사체들은 무섭지 않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보낸 한 시간이 고통 속에 죽어가던 어머니와 보낸 수많은 시간보다 단연코 쉬웠다. 어 머니가 죽기를 바랐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그게 쉬웠다는 말이다. 사체들은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그것도 상당히 빨리 익숙해지는데 -놀라우리만치 상대하기가 쉽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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